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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서울 운현궁 雲峴宮
- 운현궁은 고종의 잠저潛邸이자,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한국 근대사 유적 중 유서 깊은 곳이다. 이하응이 왕실 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 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 정치로의 개혁 의지를 단행한 곳이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던 잠저이기에 역사적 상징성이 크다. 글 최성호<산솔도시건축연구소 소장/전주대 겸임 교수>사진 윤홍로 기자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운현궁(사적 제257 호)은 흥선대원군이 살던 집으로 고종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나고 자란 곳이다. 1910년 운현궁 뒤에 서양식 건물(현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을 짓기 위해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과 영화루, 은신군 · 남연군의 사당을 모두 헐었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오늘날 기상청과 천문대 격인 관상감(서운관書雲觀은 관상감 별칭)이 있던 고개 이름으로, 그것을 궁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다. 운현궁은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10여 년 섭정攝政하며 세도정치勢道政治를 행한 곳이다. 흥선대원군이 섭정하던 1863∼1873년 사이 대폭 확장했다. 운현궁이란 이름은 흥선군이 대원군, 부인 민 씨가 부대부인이란 작호를 받은 1863년 12월 9일에 붙여졌다. 예전엔 궁궐과 운현궁이 하나로 이어졌다고 한다. 운현궁 구조는 서양식 건물 앞쪽에 남향한 일렬 배치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과 안채인 노락당老갪堂, 이로당二老堂, 영로당이 자리한다. 현재 영로당은 주인이 달라 운현궁과 담으로 막혔다. 운현궁 행랑마당 쪽은 훼손이 심해 최근에 다시 지었다. 운현궁은 서쪽에서 진입해 경비대인 수직사(현유물전시관)를 거쳐 안채와 사랑채로 들어간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은 남쪽을,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은 서쪽을 바라본다. 본래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 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자리에 해당한다. 정원 곳곳에 문인화에 자주 등장하는 괴석怪石이 많다. 개혁 정치를 논한 노안당사랑채인 노안당은 몸채가 정면 6칸에 측면 3칸이고 남쪽으로 4칸 누마루인 영화루迎和樓가, 북쪽으로 2칸 온 돌방과 1칸 누마루가 붙은 T자 형태다. 몸채는 서쪽 사랑채 중문부터 전면 2칸 대청과 전면 2칸 온돌방을, 그리고 돌출한 몸채 전면과 좌우에 퇴칸을 두었다. 잘 다듬은 장대석 3벌 기단 위에 앉히고 누마루쪽 하부는 전돌로 예쁘게 장식했다. 홑처마로 동서 양쪽 면과 남쪽 일부에 차양遮陽을 달았다. 일반집에서 보기 힘든 차양으로 집이 높다 보니 비가 들이치지 않게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차양은 각재로 틀을 짜고, 그 위에 판재를 깐 다음 함석을 덮었는데 버팀목을 설치한 방법이 흥미롭다. 서까래 5∼6개 간격으로 버팀목을 놓고 평고대를 설치하고 철물을 걸쳐놓았다. 이렇게 하면 앞으로 쳐지면서 뒷부분이 처마 상부에 걸린다. 또한 흘러내리는 것을 막고자 평고대 쪽에 별도의 걸고리를 달았다. 별 어려움 없이 간단하게 차양을 설치하도록 한 훌륭한 고안물이다. 노안당은 대원군의 사랑채이자 정사를 논하던 곳으로, 그에 걸맞게 당당함이 느껴진다. 기단은 3벌대지만 중문에서 보면 기가 질릴 정도로 높다. 기둥도 일반적으로 커야 8치 정도를 사용하는 데 비해 10치 정도로 굵다. 홑처마지만 서까래 부재도 매우 크다. 대원군의 집답게 권위를 한껏 높인 것이다. 노안당이란 현판은 공자가‘노자老子를 안지安之하며’라고 한《논어》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일상 시 거처하며 주요개혁 정책을 논의한 곳이다. 4다. 노안당 4칸 누마루인 영화루와 퇴칸. 5 하인방 하부 초석 사이에 전돌로 고막이를 설치했다. 명성황후가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자 고종과 명성황후가 가례를 올린 노락당.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인 되는 건물이다. 명성황후가 왕비 수업을 받은 노락당노안당 뒤쪽 협문으로 들어가면 안채인 노락당에 이른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쪽 중문칸과 남쪽 행랑채, 동쪽 누마루를 연결한 口자 형태다. 후원도 건물에 싸여 전체적으로 日 자를 옆으로 뉘인 형태다. 정면 10칸에 측면 3칸 규모고 동쪽 양측 1칸과 서쪽 2칸을 남쪽으로 내밀어 남행각과 연결했다. 3칸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2칸 온돌방과 1칸 부엌을 대칭으로 배치했다. 온돌방과 대청 앞은 퇴칸이다. 동쪽과 서쪽 방 구성은 조금 다른데 동쪽 방은 안주인이 거처하던 방으로 북쪽으로 1칸을 더 내밀고 반 칸짜리 퇴칸을 뽑았다. 서쪽 방은 4개로 구획해 필요에 따라 트도록 했다. 운현궁의 정침으로 겹처마인 데다 대청도 매우 크다. 육간대청六間大廳으로 칸살이 16척(약 5m, 운현궁 사이트 참조)으로 마치 대궐이란 느낌이 들 정도다. 규모가 크다 보니 지붕도 높아져 운현궁에서 가장 큰 집이 됐다. 후원 굴뚝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재밌는 형태다. 연가煙家를 구성하는 장식들이 눈길을 끈다. 벽돌이 끝나는 지점 둥그런 부재는 도리처럼 사괘마춤을 한 모습이고, 그 위에 부재는 공포貢包(처마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들)처럼 까치발 모양이다. 다시 그 위에 전돌 1장과 기와, 연가를 올렸다. 그 가운데 하나는 태극문양을 새겨 한껏 멋을 냈다. 이것은 경복궁 아미산 굴뚝의 구성 방식과 같아 궁의 품격에 맞춘 것으로 보인다. 전면 전체와 배면 일부에 설치한 차양遮陽. 연가로 구성한 후원 굴뚝 장식들. 노락당은 대청을 중심으로 동서쪽 모두 2칸 온돌방과 1칸 부엌(상부 다락)을 대칭으로 배치했다. 동쪽 이로당과 노락당, 노안당 옆으로 길이 나있다. 이로당 초석은 정방형인데 상부를 하부보다 약간 줄여서 다듬었다. 기둥은 평주와 고주 모두 네모기둥이고 약간의 민흘림이 있다. 남성이 범접치 못한 이로당이로당은 앞의 두 건물과 달리 평면이 ㅁ자 형태다. 애초 정면 7칸에 측면 7칸이던 것을 서쪽 면 전체를 덧달아 정면 8칸이 됐다. 남쪽은 서쪽부터 온돌방과 3칸 대청 · 온돌방이고 동쪽 끝이 통로인 퇴칸이다. 이 퇴칸은 남측 복도각과 북행각을 거쳐 노락당으로 이어진다. 대청과 동쪽 온돌방 전면에 퇴칸을 뒀다. 동쪽은 온돌방과 부엌을 거쳐 북쪽으로 이어지고, 북쪽은 온돌방과 마루방이고, 안쪽 마당 쪽에 장마루를 깐 툇마루를 만들어 실 간 연결에 편리성을 도모했다. 이로당 남쪽 중앙 3칸 대청과 서쪽 온돌방. 이로당과 노락당을 잇는 복도각. 이로당에서 본 서양식 건물은 현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으로 쓰인다. 현재 서울에 한옥은 몇 채 안 남았지만 옛날엔 건물 대부분이 기와집이었다. 그중에는 잘 살던 큰 집도 한두 채가 아니었다. 현존하는 그런 집은 운현궁과 윤보선 전 대통령 집이던 공덕귀 가옥 정도다. 서울은 예나 지금이나 잘 사는 사람이 모여 산다. 권력 주변엔 늘 부자들이 모여 살기 마련이다. 지금은 대갓집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런 집들이 제대로 남았다면 과거 조선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로당 북쪽과 동쪽, 이로당 북쪽 영로당은 담으로 막혔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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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서울 운현궁 雲峴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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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풍수와 지형을 잘 펴 지은 논산 이삼 장군 고택
- 이삼 장군 고택은 윤증 고택에서 승용차로 2∼3분 떨어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에 있다. 이처럼 가까운 거리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윤증 고택의 명성에 눌려서인지 답사자 조차 근처에 이삼 장군 고택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삼 장군 고택은 남다른 특징이 있어 한 번쯤 찾아볼 만하다. 글 최성호<산솔도시건축연구소 소장>사진 윤홍로 기자 이인좌의 난 때 세운 공으로 영조에게 하사받은 이삼 장군 고택 이삼 장군(1677∼1735)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서 감역을 지낸 이사길李師吉의 아들이다. 윤증(1629∼1714)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지근거리至近距離에 유명한 선생이 있으니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는 병조판서 김구의 천거로 1705년(숙종 31년) 무과에 급제한 후 1713년 정주목사로 임명됐다. 그 후 1717년 평안도병마절도사와 함경남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내면서 봉수제도의 개선을 건의하는 등 군제 개혁에 관심을 기울였다. 경종의 신임을 받아 수원부사, 우포도대장, 충청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724년 어영대장 등을 지냈다. 1727년(영조 3) 훈련대장이 되어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을 때 관문을 잘 지킨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함은군咸恩君에 봉해졌다. 1729년 병조판서에 올랐으며 기계의 제조 및 여러 무술에 두루 능통했다고 한다. 이삼 장군 고택은 이인좌의 난 때 세운 공으로 영조에게 하사받았다고 한다. 주변 집들을 압도할 만큼 완연히 구별되는 높은 곳에 자리한다. 집은 풍수를 고려한 듯하다. 산줄기의 흐름이 끝나는 곳에 앞의 나지막한 봉우리를 안산案山으로 삼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솟을대문은 다른 집하고 완연한 차이를 보인다. 대개 솟을대문과 행랑채는 사랑채 정면에 배치하는데 이 집은 사랑채 측면에 위치한다. 이러한 배치는 대지의 조건과 사랑채에서 바라본 풍광을 고려한 듯하다. 이 집은 경사가 급한 대지 앞자락에 위치하기에 사랑채 앞의 대지는 좁은 마당을 두고 바로 급경사를 이루며 내려간다. 이러한 대지 조건에서 앞에 행랑채를 두었다면 사랑마당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사랑채 앞에 행랑채를 두는 일반적인 배치에서 벗어나 솟을대문을 옆으로 돌린 것이다. 대문채를 옆으로 돌렸지만 지형의 흐름에 맞추어 사선으로 배치하고 보니 전체적으로 정연한 맛은 사라지고 말았다. 사랑채 앞에 행랑채를 두는 일반적인 배치에서 벗어나 솟을대문을 옆으로 돌렸다. 지형을 살려 안채의 권위를 높인 집이삼 장군 고택은 고방 4칸과 사랑채 3칸이 한 몸을 이루는 ㅡ자형 사랑채에 ㄷ자형 안채가 붙어 튼 ㅁ자형으로 구성하려고 했지만, 좌우 튼 부분에 문간을 만들고 지붕을 사랑채와 연결함으로써 외견상 ㅁ자 형태로 집 전체가 한 몸을 이룬다. 따라서 집 전체가 매우 폐쇄적인 구성이라 마치 경상북도 ㅁ자형 양반가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안채는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배치했다. 안방 쪽 몸체의 폭은 2칸 간살로, 건넌방 쪽 몸체의 폭은 1칸 간살로 하여 두 몸체 사이의 격을 달리했다. 안방은 제일 위쪽에 윗방을, 그 아래에 2칸 안방과 2칸 부엌을 배치했다. 일반적인 배치이나 폭을 2칸 간살로 했기에 다른 집보다 안방과 부엌의 규모가 커졌다. 이러한 계획은 안방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안채 마당은 3칸×5칸으로 일반적인 규모다. 그러나 ㅁ자형 집에서는 조금 답답해 보일 듯도 한데 대청에서 보면 이러한 느낌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대지의 경사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경사지에 집을 짓다 보니 안채도 높이에 차이가 난다. 특히 중문과 대청 간의 고저 차는 거의 반 층 높이에 달한다. 이렇다 보니 평지에 지은 집에 비하여 대청이 높다. 대청에서 바라보면 하늘만 보이기에 공간적으로 개방감이 강하다. ㅁ자형 집임에도 그리 폐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또한 안채의 고저 차는 안채를 매우 권위적으로 보이게 한다. 중문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안채는 높게 우뚝 선 것처럼 느껴져 사람을 위압한다. 예전 안주인이 대청에 있었다면 아랫사람들은 감히 얼굴을 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안채의 목재는 넉넉하게 사용했다. 기둥 높이에 비해 그 크기가 커서 오히려 둔중하게 느껴질 정도다. 안채만 본다면 영조가 하사해 지은 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채는 부재가 매우 부실하다. 선자扇子를 짠 목수의 솜씨도 안채의 치목治木 솜씨와 차이가 많이 난다. 같은 집에서 치목 솜씨나 목재를 쓴 정도가 너무도 대조적이어서 같은 시대에 지은 집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다. 안채와 사랑채의 공사 시점에 대한 보다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안채는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배치했다. 솟을대문과 사랑채 옆 안채로 들어서는 중문을 비스듬하게 냈다. 중문과 대청 간의 고저 차는 거의 반 층 높이에 달해 ㅁ자형 집임에도 폐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안방은 제일 위쪽에 윗방을, 그 아래에 2칸 안방으로 짜여져 있다. 사당에서 내려다본 건넌방 툇마루. 시집살이의 답답함을 배려해 나지막한 담을 쌓아 안팎에서 서로 잘 보이도록 했다. 사대부가에서 보기 드문 며느리에 대한 배려이 집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 중에 하나는 건넌방이다. 그 주변 환경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매우 개방적이다. 2칸 규모인데 모두 툇마루를 놓았다. 그것도 쪽마루 규모가 아닌 정식으로 기둥으로 반칸을 구획해 툇간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구성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앞에 담도 나지막하게 쌓아 안팎에서 서로 잘 보이도록 했다. 원래부터 그러한 것인지, 최근 개보수하면서 바뀐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의 사진을 보면 원래부터 그러했을 가성이 높다. 이러한 모습은 분명 며느리에 대한 배려로, 답답할 수 있는 시집살이를 조금이라도 해소해 주고자 건넌방 앞으로 넓은 시야를 확보해 준 것이다. 이러한 건물 구성은 내외를 엄격히 했던 조선 후기의 사대부가에서는 보기 드문 파격이다. 사랑채는 중문을 중심으로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로 나뉜다. 이러한 구성은 출입자에 대한 감시를 고려한 것 같다. 일반적인 구성이라면 현재 안채 앞쪽에 있는 곳간을 방으로 꾸며 사랑채를 ㅡ자형으로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만일 대문간채가 사랑채 앞으로 왔다면 당연히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문간채를 옆으로 돌아서도록 배치하고 보니 사랑채 모두를 한 몸으로 구성하면 문간채의 통제가 어려워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윗사랑채를 문간채에서 바로 바라다보고 중문의 출입자를 통제하는 위치에 배치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삼 장군 고택은 시도민속자료 제7호(논산시)로 지정돼 있다. 현재 집의 규모나 내용으로 보면 지금보다 상위 수준의 국가지정문화재로도 지정될 수 있는 건물이다. 그러나 문화재 지정 당시의 모습은 지금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또한 건물이 원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됐기에 보존 가치가 낮다고 판단돼 시도민속자료로 지정된 것이다. 지정 당시 사진과 현재를 비교하면 건물의 구조나 주변 상황 등 여러 곳에서 변형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삼 장군 고택의 현 모습이 과거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가 옛집을 볼 때는 과연 얼마나 많이 변형됐는가에 늘 주의해야 한다. 옛집의 본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이 옛집을 보는 눈을 한 단계 더 높이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이삼 장군 고택은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출입자에 대한 감시를 고려해 사랑채는 중문을 중심으로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로 구분했다. 안채 뒤에서 바라본 전경. 산줄기의 흐름이 끝나는 곳에 앞의 나지막한 봉우리를 안산案山으로 삼아 집을 배치했다. 안채에서 좌측 마당으로는 툇마루로 이어진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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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풍수와 지형을 잘 펴 지은 논산 이삼 장군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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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개방감과 폐쇄감을 한눈에 함양 정병호 가옥
- 정여창鄭汝昌 고택으로 더 유명한 정병호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86호)은 하동 정씨 가문의 종택이다. 정병호(일두, 1450`~1504 / 세종 32~연산군 10) 선생은 문묘에 배향된 동국 18현 중 한 분으로 함양에서 태어났다.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에게 배웠고, 1483년(성종 14)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이 됐다. 1490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돼 소격서 참봉이 됐으나 사양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해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검열을 거쳐 시강원설서로 연산군을 가르쳤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종성에 유배됐고, 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됐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됐고, 광해군 때 문묘文廟에 배향됐다. 글 최성호사진 윤홍로 기자 정병호 가옥은 정여창 선생 사후 약 200년이 지난 1690년에 지어졌다. 그때 안채를 짓고, 그로부터 150여 년 뒤인 1843년 사랑채를 지었다. 솟을대문에는 충신 한 분, 효자 네 분의 정려旌閭가 있다. 하나만 받아도 가문의 영광인데 다섯 개나 걸려 있느니 하동 정씨 가문의 내력을 알 만하다. 네 개의 효자 정려나 사랑채에 걸린 ‘충효절의忠孝節義’라는 글에서 ‘효’를 가문의 정신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님에게 효도하고자 출사出仕를 사양한 정여창 선생의 효 정신이 후손에게도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정병호 가옥에서 처음 느끼는 즐거움은 솟을대문에 이르기까지 고샅의 은근한 정취다. 고샅은 마을 큰길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을 가리킨다. 대부분의 고샅 입구에서는 대문이 직접 보이지 않으며 은근히 길고 깊다. 그러한 이유는 방어적 의미, 즉 집을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고 들어오는 사람을 감시하기 위함이다. 그러한 고샅 가운데 제대로 된 정취를 느끼게 하는 곳은 대전의 동춘고택, 예전 ‘왕초’라는 드라마에도 소개된 창평 고씨 마을 고샅 그리고 남사마을 최씨 댁의 고샅 정도다. 동춘고택의 고샅은 밋밋하고, 창평의 고샅은 다소 좁고 지루한 느낌이 들며, 남사마을 최씨 댁의 고샅은 높은 담으로 답답하다. 그렇기에 정병호 가옥의 고샅만큼 정취가 아늑하지는 않다. 지금은 담이 예전보다 높아져 인간적인 맛은 감소했지만 집까지 가는 길은 쉬 보여 주지 않는 여인의 수줍음과 고즈넉하면서도 그 은근한 맛이 그대로 살아 있다. 조선 오현 정여창 태생지 함양 고택과 솟을대문에 걸린 5개의 충신·효자 정려패. 풍수상 좌향을 바꿔 앉힌 사랑채정병호 가옥의 배치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안채는 남향으로, 사랑채는 동향으로 배치했다. 원래의 사랑채는, 현재 사랑채 남쪽 광이 있는 자리에 안채와 같은 향이었다. 1843년 사랑채를 새로 지으면서 풍수의 영향으로 좌향坐向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좌향까지 바꾸면서 변화를 준 배치 때문에 사당의 위치가 일반 배치와 전혀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이전 배치보다 안채를 훨씬 더 폐쇄적으로 만들었다. 옛날의 배치는 사랑채를 밖으로 내세우고 좌측에 중문을 두고, 그 뒤에 안채를 둔 일반적인 형식이었을 것이다. 사랑채를 새로 지으면서 안채로 들어가려면 길옆의 중문 안 사랑채와 광채 사이의 좁은 골목을 지나 들어가야 한다. 새로운 배치는 결국 내외 규범을 더욱 심화시켰다. 새 사랑채는 합천 묘산의 묵와고가默窩古家 누마루 형식을 차용하면서 이전 사랑채보다는 더욱 권위적인 모습으로 지어졌을 것이다. 안채 안마당과 높이를 맞추기 위해 기단을 높여 지은 사랑채는 그 이상 권위적일 수 없다. 사랑채의 기둥 또한 원기둥을 사용해 격식을 한 단계 높여 권위를 더했다. 사랑채 높이를 안채 마당에 맞추어 짓다 보니 기단이 높아지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사랑채를 새로 지은 도편수도 그것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사랑채 기단을 2단으로 조성했다. 첫 번째 기단을 적당한 높이로 낮추고, 그 위에 다시 단을 높여 사랑채를 구성했다. 그럼에도 솟을대문으로 들어서 사랑채를 볼 때 주눅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사랑채 벽면에 커다랗게 써 놓은 ‘충효절의忠孝節義’라는 글은 보는 이로 하여금 몸을 더욱 움츠리게 만든다. 사랑채는 앞뒤에 퇴를 둔 전후퇴집이다. 쓰임새가 가장 많은 가운데 칸은 칸살을 넓혀 활용성을 높였다. 사랑채 우측 누마루 앞쪽에는 자그마한 정원을 구성했는데 삼봉형三峰形으로 주산主山을 높게 만들고, 그 좌우에 주봉主峰보다 낮은 봉우리를 만들어 주변에 나무를 심었다. 이처럼 사랑채 정원을 적극적으로 만든 예는 다른 곳에선 찾기 힘들다. 대지도 넓어 사랑마당도 만만치 않다. 아마 정원이 없었다면 작은 사랑채까지 휑하게 뚫려서 삭막했을 것이다. 정원의 위치가 적절하여 넓은 마당에 적당한 차폐감을 만들어서 작은 사랑채의 시각적 안정감을 주기에 삭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기타 주변의 나무는 근대에 이르러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은근한 정취를 느끼게 하는 고샅. 사랑채 우측 누마루 앞쪽에 삼봉형三峰形으로 구성한 정원. 높이 앉힌 사랑채와 이를 떠받치는 원기둥에서 권위와 격식이 느껴진다. 집의 넉넉함이 적선으로 나타나 안채는 민도리 3평주 오량집이다. 바깥사랑채가 권위를 갖추었다면 안채는 실용성을 적극 반영해 지은 집이다. 안채의 기단은 밖에서 움직이기 편하게 낮은 외벌대로 돌렸다. 이 낮은 기단이 사랑채와 대비되는 부분으로 안채 전체 분위기에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좌측에 부엌을 둔 안채는 안방 두 칸, 대청 두 칸, 건넌방 칸 반 규모다. 옆으로 길게 지어 규모가 상당히 커 보인다.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주 칸을 넓게 잡고 전후에 퇴를 놓아 방 간 이동이 편리하도록 했다. 안채를 길게 짓다 보니 마당이 매우 넓어져 시원스럽다. 좁은 골목과 같은 중문 마당을 지날 때의 답답함이 안채에 들어서면 일거에 사라져 버린다. 넓은 마당 서쪽 편에 우물이 있고 동쪽 편에 사랑채를 대한다. 안채 대청은 네 칸 규모지만 칸살이 넓어 시원하다. 이렇듯 넉넉한 집에서 살면 사람의 마음도 저절로 넓어진다. 그러한 마음은 주변에 대한 적선積善으로 나타났다. 그 덕분에 해방 후 지리산에서 벌어졌던 좌·우 간의 이념 대립이나 한국전쟁의 와중에서도 가세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다고 종부는 증언한다. 이 집의 배치를 보면 독특한 점이 있다. 집을 편하게 돌다 보면 미로 같은 느낌이 들면서 어느덧 집을 한 바퀴 돌게 된다. 집의 구조가 내부로 개방돼 있기 때문이다. 외부로는 시각적으로 완벽한 폐쇄 구조지만 내부로는 내외의 정도가 매우 약하다. 사랑채도 안채 쪽으로 어느 정도 개방된 구조를 하고 있다. 이것은 광의 배치 때문이다. 광을 사랑채와 안채에서 같이 사용하도록 배치하다 보니 안채를 완벽하게 구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안채 뒤에 자리한 사당. 곳간. 사랑채에서 안채로 향하는 중문. 중문 마당. 안채 대문. 함양 개평리개평리는 민속마을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다른 어느 민속마을 못지않은 옛 마을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으므로 천천히 둘러보는 것도 좋다. 이곳에는 정병호가옥 외에도 함양오담고택(咸陽梧潭古宅/경남유형문화재 제407호), 함양개평리노참판댁고가(咸陽介坪里盧參判宅古家/경남 문화재자료 제360호), 함양개평리하동정씨고가(咸陽介坪里河東鄭氏古家/경남 문화재자료 제361호) 등이 있다. 또한 함양개평리소나무군락지(咸陽介坪里 소나무群落地/경남기념물 제254호), 함양개평리소나무(咸陽介坪里소나무/경남기념물 제211호) 등이 있다. 특히 함양개평리소나무는 이곳에 살고 있는 하동 정씨의 소유가 아니고 거창의 정온 선생 댁인 초계 정씨의 소유이다. 하동 정씨 집성촌에 초계 정씨가 관리하는 대지가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민도리 3평주 오량집인 안채. 안채 대청에서 바라본 마당은 안온한 느낌을 준다. 안채의 툇마루. 뜰아래채 내부.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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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가주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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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개방감과 폐쇄감을 한눈에 함양 정병호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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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시대가 불안하면 닫힌 집 지어, 부안 김상만 가옥
- 사람은 보다 좋은 환경에서 살기 위해 집을 짓는다. 그러나 집 역시 사람이 짓기에 사회적 상황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는다. 집을 짓는 사람의 경제적 형편과 신분에 따라 집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또한 사회적 상황에 따라 집의 구조가 변화한다. 사회가 불안정하면 집의 구조는 매우 폐쇄적으로 변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고 노력한다. 부안 김상만 가옥(중요민속자료 150호)은 시대 상황에 따라 집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글 최성호 사진 윤홍로 기자 김상만 가옥은 1907년부터 인촌 김성수(1895∼1955)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초가다. 원래 초가였는지 또는 억새를 이은 집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와집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 가옥은 1895년 안채와 사랑채 헛간채를 짓고 1903년 안사랑채와 곳간채를 추가했다. 문간채는 1984년에 중건했다. 1895년 안채를 지은 해 이미 김씨 집안은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다. 인촌이 태어난 고창의 생가는 기와집이고, 또한 인촌의 부친 대에 수만 석을 한 거부 집안에서 초가를 지었다는 사실이 가세와 어울리지 않는다. 처음부터 이곳에 살림집을 짓지 않은 것 같다. 초기에 줄포에서 새로운 사업을 하며 임시 거처 겸 사무실 용도로 지은 것이 아닌가 한다. 중문과 대문에서 본 바깥사랑채. 사무실로 사용했다고 한다. 바깥사랑채 뒤로 인촌이 주로 기거하던 안사랑채가 보인다. 육영사업에 대한 뜻을 관철시키고자 단식했던 곳이다. 배산하는 형국을 좇아 북서향한 안채. 6칸 반 一 자형 집으로 남쪽에서 흔히 보는 형태다. 가세를 숨기려 초가 지어김씨 집안은 1907년 이 집으로 이사했다. 고창 집에서 자꾸 도깨비불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연 집을 옮긴 이유가 도깨비불 때문일까. 당시 조선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일제에 반 예속된 상태에 있던 터라 치안이 매우 불안했다. 신분 질서의 급속한 와해와 민심 이반離反 그리고 가난으로 화적들이 들끓었다. 부자들이 보다 치안이 안정된 곳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당연한 사회적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인촌 가문이 줄포로 이사할 때 먼저 사람만 빠져나오고 가산을 후에 옮겼다고 하니 상황이 매우 급박했던 것 같다. 줄포는 당시 영광의 법성포와 함께 서남해안에서 손꼽히는 항구였다. 일본인이 일찍부터 거주했으며 일본 헌병대도 주둔했다. 줄포의 사회 경제적 가치 때문에 일제는 적극적으로 치안을 유지했다. 결국 안정된 치안 때문에 이곳으로 살림을 이전했다고 본다. 어쨌든 1895년에도 사회 분위기 때문에 가세를 고려해 집을 짓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부자라지만 누가 대놓고 기와집을 지어 사회적으로 지탄받거나 도적의 표적이 되기를 바라겠는가.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이 집은 기와집을 사서 해체하여지었다고 한다. 당시 집을 짓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고. 집을 헐고 한꺼번에 부재를 옮겨 지으면 남의 눈에 띄기에 사람이 다니지 않는 밤에 인력人力으로 부재를 하나하나 옮기다 보니 늦어졌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그만큼 당시의 사회상이 집을 짓는 것도 남의 눈을 의식해야 할 정도로 불안했음을 보여준다. 김상만 가옥은 초가이긴 하지만 집의 부재는 매우 고급스럽다. 안채와 사랑채는 요새 시쳇말로 무늬만 초가다. 지붕에 기와만 올리면 품격을 갖춘 기와집이 된다. 김상만 가옥의 지붕은 현재 볏짚으로 이어져 있다. 그러나 문화재청의 사진을 보면 예전엔 억새로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 재료는 어떤 분이 일본집 같다고 지적해 고쳤다고 한다. 억새로 지은 집이 우리나라에 없는 것이 아닌데 어떤 근거로 일본 집 같다고 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지붕의 볏짚은 매년 갈아야 하지만 억새는 내구성이 좋아 10년 정도는 갈지 않아도 되는 재료다. 관리인의 말로는 지붕의 볏짚을 매년 갈지 않고 삼 년마다 한 번 갈이 주기에 곳곳에서 비가 샌다고 한다. 전면 한 칸의 규모인 안채 대청. 위패를 모시기 위한 벽장을 짜서 걸었다. 안채 안방. 다양한 수장 공간을 갖추고 있다. 안채 툇마루. 전면 3칸의 규모의 안사랑채. 전후퇴집으로 좌측 끝 방은 마루로 꾸며져 있다. 바깥사랑채 뒤뜰. 바깥사랑채에서 안사랑채로 통한다. 복잡한 평면 구조를 한 전후퇴집김상만 가옥의 안채는 배산背山하는 형국을 좇아 북서향했다. 안채는 6칸 반 一 자형 집으로 남쪽에서 흔히 보는 형태다. 방은 우측에서부터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 순서로 배치했다. 안채는 ‘전후퇴집’이다. 이러한 형식은 단칸방이 일렬로 배열된 홑집이 조선 후기 들어 사회·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다양한 기능을 수용하기 위해 새로 등장한 구조다. 외견상으로 단순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면 그 구조가 매우 복잡하다. 전후퇴집과 양통집은 측면이 같은 두 칸 규모다. 방이 단순히 두 줄로 배열된 양통집과 달리 전후퇴집은 방의 앞뒤에 반 칸씩 마련된 전·후퇴를 이용해 다양하고 복잡한 기능을 지닌 평면을 만들어 낸다. 이 가옥 역시 전퇴와 후퇴를 이용해 다양한 평면을 만들어 내면서 또한 다른 집과 달리 다양한 수장 공간을 갖추고 있다. 수장 공간을 안채, 사랑채 할 것 없이 구석구석 공간이 나오는 모든 곳에 만들어 놓았다. 안에 들어가 보면 아기자기하다고 할 만큼 수장 공간이 다양하다. 안사랑채의 전면에도 조그맣고 다양한 수장 공간을 위아래에 설치했다. 이렇게 수장 공간이 다양한 것은 이곳에서 새롭게 시작한 경제활동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안채 대청은 전면 한 칸 규모로, 다른 부잣집의 대청에 비해 형편없이 작다. 처음부터 살림집으로 계획하지 않았기에 대청의 규모가 작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한 흔적은 위패를 모시기 위한 대청의 벽장에서도 볼 수 있다. 살림집으로 지었다면 사당을 만들거나 또는 대청의 벽에 벽감壁龕을 만들어 위패를 모셨을 것이다. 나중에 살림집으로 바뀌면서 위패를 모실 자리를 마련하기 어렵자 벽장을 짜 걸어 놓았을 것이다. 사랑채는 안사랑채와 바깥사랑채로 나뉜다. 먼저 바깥사랑채를 짓고 안사랑채를 나중에 지었다. 관리인의 말로는 바깥사랑채는 사무실로 사용했다고 한다. 바깥사랑채도 전후퇴집의 특징을 잘 활용해 구조가 매우 복잡하다. 바깥사랑채에도 안채와 같이 머릿방을 드렸다. 조용하게 쉬거나 은밀한 이야기가 필요할 때 이용했을 것이다. 안사랑채는 인촌이 주로 기거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육영사업에 대한 뜻을 세웠고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단식했던 곳이라고 한다. 안사랑채는 전면 3칸의 크지 않은 규모다.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전후퇴집으로 좌측 끝 방은 마루로 꾸며져 있다. 현재 이 집은 다른 집과 달리 관리인을 두고 있다. 집안이 집안인지라 자신의 근거를 보존하려는 의지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주인이 살지 않을 경우 관리인을 두는 예는 그리 흔하지 않다. 그렇기에 그나마 나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마침 장마철이라 아궁이에 불을 땠는가 물어보았다. 관리비가 너무 적어 불을 땔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했다. 관리비만으로는 자신의 생활비는커녕 가끔 불을 때는 비용조차 대기도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궁이를 막아 버렸다고 한다. 인촌 가문의 재력에 비하여 자신의 터전을 보전하고 가꾸려는 노력이 너무 미약해 보인다.관리인을 두었지만 관리하려는 개념이 잘못됐다. 도둑을 지키는 것만이 문화유산을 보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의 경우 일차적으로 국가가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해 결국 집주인에게 관리 책임이 남는 것이다. 그나마 집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다 적극적으로 관리할 수 없는 것일까. 마당에 덩그렇게 놓여있는 자신 집안사람의 동상을 만들어 놓은 정성에 1/10이라도 집에 관심을 가진다면 이렇게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안채 전경. 우측에서부터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 순서로 배치했다. 안채 뒤뜰. 김상만 가옥의 담 역할을 하는 대문 옆 문간채.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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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시대가 불안하면 닫힌 집 지어, 부안 김상만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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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북으로 창을 낸 까닭은, 아산 성준경 가옥
- ‘집이 고즈넉하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그러나 실제로 고즈넉한 집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충남 아산시 도고면 시전리에 자리한 성준경 가옥(중요민속자료 194호)은 고즈넉하다는 표현이 잘 들어맞는 집이다. 완만한 경사지에 깊은 숲을 배경으로 사뿐히 앉은 아담한 한옥이다. 글 최성호<산솔도시건축연구소 소장/전주대 겸임 교수>사진 윤홍로 기자 성준경 가옥은 안내판이 없다면 마을 어귀에서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옛 마을에서 지배 계층 가문의 집은 대부분 멀리서도 눈에 띄는데 그 까닭은 권위를 마음껏 드러내는 위치에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가옥은 마치 산속에 있는 별장을 찾아가는 기분이다. 예전에 주로 드나들던 입구에서 사랑채에 이르는 길은 숲이 우거져 좀처럼 집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집을 지을 때부터 숲이 어느 정도 형성됐던 것 같다. 입구 좌우에 나란히 서서 대문 역할을 하는 은행나무 두 그루 중 하나는 수령이 400년이 넘어 예산시 보호수로 지정받았고 주변의 소나무들도 꽤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풍광이 집터를 잡게 된 연유가 아닌가 한다. 이 가옥은 현 주인의 8대조가 부친을 모시고자 지은 집이라고 한다. 1989년 보수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에는 1825년에 건립했다고 적혀 있다. 풍광과 풍수를 따져 북향으로 앉혀진 아담한 고택. ㄷ자형 안채와 一 자형 고방채, ㄴ자형 사랑채로 배치돼 있다. 서쪽 바깥채에서 바라본 전경(右)과 안채 뒤뜰의 장독대(上). 사랑채. 一 자형으로 배치한 사랑채는 전면 4칸 규모의 전퇴집이다. 풍수를 살펴 지은 북향집성준경 가옥은 일반적으로 꺼리는 북향을 하고 있다. 지형을 따르다 보면 집을 북향으로 앉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배치에 대해 창령 성씨 27대 손인 종손은 임금이 사는 쪽을 향함으로써 임금을 생각한다는 마음을 바탕으로 풍수를 고려해 집을 배치한 듯하다고 한다. 어쨌든 풍수의 영향은 확실한 것 같다. 뒤의 도고산을 배산하고 앞에 조그마한 동산을 안산으로 삼아 집터를 잡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과정에서 앞에서 언급한 은행나무를 고려한 듯하다. 이 집에 솟을대문이 없는 것은 집을 지을 당시 가문의 위세가 그리 크지 않아 자제한 듯하다. 이는 다른 대가에 비해 아담한 집의 규모와도 상관이 있다. 사랑채는 4칸 규모고 안채도 마당이 3칸 규모여서 좁게 느껴진다. 여기에 대해 종손은 중시조인 우계 성혼으로부터 내려오는 이 집안의 가훈인 ‘근검소이’의 이행과 집 지을 당시 8대조가 높은 직책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재산이 많아도 마음대로 큰 집을 지을 수 없는 사회 여건상 자신의 분수에 맞는 소박한 집을 지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샛마당과 중문. 안채로 들어가려면 두 개의 문을 통과해야 하는 폐쇄적인 구조다. 一 자로 길게 놓인 사랑채 툇마루. 사랑채 대청에서 바라본 모습. 남녀유별에 따른 폐쇄적인 구조성준경 가옥은 전면에 사랑채를 일자형으로 배치하고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샛마당을 설치한 후, 그 뒤에 안채를 두었다. 사랑채는 전면 4칸 규모로 좌측에서부터 방 2칸, 대청 1칸, 방으로 구성돼 있다. 사랑채는 전퇴집으로 맨 왼쪽 방은 뒤로 1칸을 더 늘여 2칸 규모로 꾸몄는데 이러한 구성 때문에 사랑채는 ㄴ자 형태다. 안채는 중부지방에서 보기 드문 폐쇄형 구조다.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은 사랑채 우측에 숨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중문을 지나서 안채로 들어가려면 사랑채와 안채 사이 샛마당에 있는 또 하나의 문을 지나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다시 사랑채의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안채로 가는 문조차 2중이고 집 전체가 담으로 둘려 있어 쉽게 안채로 드나들 수 없다. 폐쇄형의 집은 충청도 지역에서 몇 곳 찾아볼 수 있으나 이처럼 사랑채를 독립시키면서 안채를 ㅁ자 형으로 만든 경우는 이곳이 유일하다. 이러한 형태로 집을 지은 것은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이 집을 지은 8대 조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내외법이 더 심화돼 집의 폐쇄성을 예전보다 강하게 요구했는데, 마침 9대 조부와 집을 지은 8대 조부는 모두 경상도 지방에서 현감을 지냈기에 폐쇄성이 강조된 경상도의 집을 참고했을 것이다. 안채는 ㄷ자형 몸체에 일자형 문간채를 붙인 ㅁ자 형태다. 경상북도 지방에서 주로 보이는 전체가 한 몸체인 ㅁ자형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튼 ㅁ자 집인데 건물 간의 간격을 좁게 만들고 담으로 막아 ㅁ자 형태로 느껴지는 것뿐이다. 안채는 가운데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건물을 붙여 ㄷ자형으로 구성했다. 아쉬운 점은 대지가 매우 넓은 편이므로 1칸만 더 양옆으로 넓혔더라면 안채가 넓고 시원하게 구성됐을 터인데 마당을 3칸 폭으로 한정해 안마당을 좁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안채는 중문에서 바라보았을 때 좌측 즉, 동쪽은 아래로부터 부엌 2칸, 안방 2칸, 머릿방 2칸으로 구성돼 있다. 윗방의 1칸은 마루 쪽으로 돌출돼 있다. 따라서 마루는 6칸 통이 아닌 5칸으로 되어 있고 대청의 측면 간살이 안방이나 건넌방의 측면 간살보다 작게 잡혀 대청이 조금 협소해 보인다. 서쪽 부분은 조금 더 길어서 방과 부엌 1칸 그리고 건넌방 2칸 마지막으로 사당으로 쓰던 마루 2칸이 배치돼 있다. 이 집도 별도로 사당을 두지 않고 안채 대청을 확장시켜 사당으로 사용했다. 사당은 남쪽 즉, 뒷마당 쪽이 아닌 서쪽 방향 벽에 나란히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현재 복원해 놓은 바깥채와 같이 하인이 거처하거나 곳간으로 쓰이던 초가가 주변에 6~7채 더 있었다고 한다. 건물이 많았던 것은 이 집안의 재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현 종손의 부친 때 이르러서는 5000석의 큰 부를 쌓았다고 한다. 그렇기에 주변에 많은 가랍집(외거 노비가 살던 집)이 있었을 것이다. 큰 부를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준경 선생의 생활은 매우 검박했다고 한다. 이렇듯 검박함이 몸에 뱄기에 5000석의 큰 부를 이루었으면서도 집을 새로 늘려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안채 대청. 측면 간살이 안방이나 건넌방의 측면 간살보다 작게 잡혀 대청이 조금 협소해 보인다. 안채. 가운데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건물을 붙여 ㄷ자형으로 구성했다. 안채 대청에서 바라본 뒤뜰. 굴뚝 밑을 터서 물이 흐르도록 했다. 고택,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현 바깥채는 예전 집의 모습을 따라 원형기둥으로 복원했다. 그러나 복원 상태를 보면 아쉽기만 하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예전 바깥채는 현재와 같이 완전한 원형이 아닌 자연 상태의 나무를 적당히 다듬어 기둥으로 사용했다. 또한 가공한 원형기둥이 건물의 규모에 비해 너무 가늘고 길게 느껴진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지금의 집은 매우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복원의 핵심은 옛 모습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이므로 바깥채는 엄밀히 말해 복원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집주인과의 대화에서 고택의 관리가 만만치 않음을 새삼 느꼈다. 집주인은 대기업의 임원이기에 다른 고택을 관리하는 사람에 비해 여건이 상대적으로 좋은 편이다. 또한 고택을 남다른 애착으로 관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가장 큰 불만은 자신의 소유임에도 개보수할 때 어느 정도 재량권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고, 또한 국가에서 해주는 것은 건물을 최소한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보수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수준의 지원으로는 건물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과거 최소한 대여섯 명이 관리하던 집을 한 사람에게 그 의무를 지운다는 것은 집의 관리를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집이란 사람이 살면서 생활해야 제대로 관리가 된다. 그러한 수준의 관리가 되도록 문화재청은 적극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간 문화재청이 집을 현 수준에서 유지만 하는 정도로 관리했다면 이제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을 만든다는 차원에서 문화재를 관리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화재청은 적극적인 발상의 전환으로 문화재 관리에 나서야 할 것이다. 동쪽에서 본 사랑채. 집 전체가 담으로 둘려 있어 안채는 사랑채를 거쳐야만 드나들 수 있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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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가주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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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북으로 창을 낸 까닭은, 아산 성준경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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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지네 형국의 명당에 지은 정읍 김동수 가옥
- 전북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 김동수 가옥(중요민속자료 26호)은 ‘지네 형국’의 명당에 앉혀졌다. 김씨 집안은 이 집을 짓고 거부가 됐다고 한다. 이 가옥에선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문간 마당과 ‘ㄷ’자 형태인 안채의 완벽한 대칭, 안채 대청 전면 퇴칸 양 끝에 설치한 판장벽이 눈길을 끈다. 또한 이 가옥에는 다른 곳에선 별당으로 불리는 웬만한 집의 안채만한 안사랑채가 있다. 간결하면서도 단아한 사랑채도 빼놓을 수 없다. 글 최성호 사진 윤홍로 기자 김동수 가옥은 1784년 김명관이 지었는데 풍수적으로 이야깃거리가 많다. 전라도 지방은 풍수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실학자 박제가는 저서 《북학의(北學議)》에서 “전라도 일대가 우심하게 나쁜 버릇이 물들어서 열 집이면 아홉 사람이 지관(地官) 노릇을 한다.”고 했을 정도다. 이 집의 옛 주인 김동수도 풍수상 길지(吉地)라는 믿음이 강했다. 이 집의 터는 ‘지네 형국’의 명당이다. 뒷산인 창하산은 지네를 닮았다고 하여 지네산이라 불리며, 오공리(五公里)라는 지명도 원래 지네를 일컫는 오공(蜈蚣)이었으나, 일제 때 현재와 같은 한자 표기로 바뀌었다. 풍수상의 이야기는 이 가옥 앞 동서로 긴 장방형 연못에도 전한다. 이 형태는 지네의 먹이인 지렁이를 상징해 만들었다는 설과 건너 조산인 화견산(火見山)의 화기를 막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집 건너편에는 안산인 독계봉(獨鷄峰)과 화견산이 나란히 있는데 이 산으로부터 집의 풍수 형국을 보호하고자 전면에 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김광언 선생은 나무를 많이 심은 것은 지네가 습한 곳에서 사는 동물이기에 그늘을 만들어 주기 위한 풍수적 관념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나무는 대문을 중심으로 왼편에 40그루, 오른편에 26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는데 왼편 나무는 지네산까지 연결되게 하여 지네산의 맥이 이어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김동수 가옥은 창하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동진강 상류인 맑은 하천이 흘러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전에 세워졌다. 색다른 맛을 안겨 주는 공간 배치김동수 가옥은 넓은 대지에 지어져 전체적으로 시원하고 밝다. 이 가옥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가 대문 앞 문간 마당으로, 대문을 지나면 사랑마당으로 직접 진입하는 대부분의 집과는 다르다. 이곳은 대문을 들어서면 담으로 둘러싸인 문간 마당이 나오고 다시 중문을 지나 사랑마당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배치는 대문의 위치 때문이다. 집의 배치를 보면 문에서 동쪽에 사랑채가, 바로 앞쪽에 안채가 위치한다. 집터가 워낙 넓다 보니 안채와 대문 사이에 공간이 너무 휑하고 대문이 거의 안채의 중문과 일직선으로 배치돼 있어 안채가 쉽게 들여다보이기에 완충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문간 마당은 출입자를 자연스럽게 제어할 뿐만 아니라 안채가 곧바로 들여다보이는 문제도 해결했다. 또한 사랑채를 지나 안채로 들어가는 과정이 복잡해 안채에 대한 내외의 형식이 한층 강화됐다. 두 번째 특징은 안채에 있다. 안채는 보기 드문 ‘ㄷ’자 형태일 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대칭을 이룬다. 이 가옥의 안채는 외관뿐만 아니라 방의 배치와 형태까지도 철저하게 대칭을 이룬다. 이 형태는 터를 잡을 때 도와주었던 승려가 잡았다고 한다. ‘ㄷ’자 형태의 집은 가끔 볼 수 있는 형태지만 이처럼 완벽한 대칭을 이룬 경우는 거의 없다. 대칭 형태는 다분히 권위적인 행태에서 출발한다. 승려가 잡아 주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지만 결국 가문의 권위를 내세우고자 함이 아닌가 생각한다. 안채도 ‘ㄷ’자지만 안행랑채도 큰 ‘ㄷ’자 형태로 안채를 감싸고 있다. 얼마 전까지도 안행랑채는 ‘ㄴ’자 형태였다. 안사랑채 쪽의 날개는 최근에 다시 지은 것이다. 아마도 집주인의 고증으로 다시 고쳐 지은 것 같다. 원래의 모습이 이러했다면 안채를 계획한 사람은 어떤 의도를 가졌던 것이 분명하다. 안채가 ‘ㄷ’자 모양인 경우에는 행랑채는 대개 ‘一’자형이라 대부분 튼 ‘ㅁ’자 형태를 하지, 이처럼 안채를 다시 크게 감싸는 형상을 하지 않는다. 넓은 ‘ㄷ’자 형태로 행랑채를 만든 것은 안채를 넓게 감쌈으로써 넓고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려던 것 같다. ‘ㄷ’자 형태의 안채 앞에 바로 행랑채를 붙이면 안채마당이 좁아 답답하다. 대부분의 집이 이러한 형태의 마당을 가진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행랑채를 앞으로 물려 지음으로써 넓은 마당을 갖도록 했다. 그리고 개방이 된 부분은 양날개를 꺾어 감쌈으로써 내외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한 것이다. 안채의 또 다른 특징은 대청 전면 퇴칸 양 끝에 설치한 판장벽 부분이다. 마당에 면한 부분은 판장벽에 창이 설치돼 있고 퇴칸 부분에는 문이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형식의 문을 설치한 경우는 김동수 가옥 외에는 본 적이 없다. 이 문은 안방이나 건넌방에서 바로 퇴칸으로 나오게끔 설치했다. 이러한 시설은 겨울철을 위해 설치한 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겨울철 대청의 모든 문을 닫아 놓았을 때 대청 전면의 문을 사용하지 않고 이 쪽문으로 드나들도록 함으로써 열 손실을 줄였던 것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는 안채. 중문에서 바라본 안채. 안채 대청과 그 양 끝에 설치한 판장벽과 퇴칸. 안채 뒤 쪽마루. 여느 집의 안채만한 안사랑채. 중문 헛간에서 본 안채. 안채 양 끝의 부엌. 안채 뒷마당에서 보면 대청과 중문, 대문이 일직선이다. 단아함과 시원함을 더하는 사랑채김동수 가옥에는 안사랑채가 있다. 다른 곳에서는 별당으로 불린다. 안사랑채는 안손님의 거처나 출가하기 전 딸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원래 이 집을 짓기 전 주인이 기거하고자 지은 집이라고 한다. 따라서 웬만한 집의 안채 규모다. 전면 6칸 반 규모로 가운데 2칸이 대청이고 좌우에 방을 배치했다. 왼쪽의 칸 반은 부엌이다. 대청의 칸이 다른 방의 칸살보다 작기에 대청이 4칸 규모임에도 조금 좁아 보인다. 아마 임시 거처로 계획했기에 대청을 크게 만들지 않은 것 같다. 김동수 가옥의 사랑채는 간결하면서도 단아하다. 사랑채는 전면 5칸 측면 3칸 집이다. 중문 쪽의 두 칸은 대청으로 안쪽의 2칸은 방으로 꾸몄다. 방은 ‘ㄴ’자 형태로 3칸 규모인데 전면 2칸을 어른이 사용했고 뒤쪽 1칸을 아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뒤쪽 방을 아들이 사용하게 한 것은 며느리가 기거하는 안채 건넌방과의 연계 때문이다. 사랑채와 안채의 연결은 사당 쪽 좁은 골목을 따라 이루어진다. 이 골목을 지나면 바로 건넌방 뒤쪽에 이른다. 집 안의 다른 사람 눈을 피해서 드나들도록 배려한 것이다. 건넌방 뒤쪽에도 새신랑이 드나들 때 편리하도록 툇마루를 설치했다. 사랑채 대청은 집 규모에 비해 매우 넓다. 이곳을 드나드는 손님이 꽤 많았기에 손님치레를 위해 대청을 넓게 마련한 것 같다. 사랑채 방에서 모든 문을 들어 열면 한눈에 드나드는 사람뿐만 아니라 바깥사랑마당 모든 곳을 살펴볼 수 있어 시원함을 더한다. 사랑채에는 조그마한 청지기 방이 있다. 우측 끝의 한 칸이 그 방이다. 방의 규모는 반 칸 크기로 어린 하인이 기거한다. 어린 하인이 몸종으로서 주인의 수족 역할, 즉 아침 세숫물로부터 시작해 옷을 챙긴다든지 하는 자잘한 심부름을 담당했다. 김씨 집안은 이 집을 짓고 한 해 추수로 1200석을 하는 거부가 됐다고 한다. 김명관은 집터가 명당자리이고 12대까지 그 기운이 미칠 것이라는 풍수 해석을 굳게 믿었다. 그래서 후손에게 이곳을 절대 떠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집이 화를 당해 무너지더라도 정확한 위치에 다시 지을 수 있게 안채의 땅속에 표적을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 땅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 그러나 그 후로 7대를 넘지 못하고 빈집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집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 앞의 안산 쪽을 바라보니 그 일부가 잘려나가 있었다. 풍수의 근간이 흩어진 것이다. 이제 이곳에서 풍수의 덕을 보기는 글러진 것 같다. 전면 5칸 측면 3칸인 사랑채. 사랑채에서는 사랑마당과 문간 마당이 보인다. 새신랑을 위해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길을 냈다. 문간채와 외양간. 내노비가 머물던 초가. 외노비가 머물던 초가.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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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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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지네 형국의 명당에 지은 정읍 김동수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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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을 즐길 수 있는 고급빌라 블루버드 이태원
- 핵가족을 넘어 가구는 1인 단위로 쪼개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일컫는 ‘싱글라이제이션 ’Singlization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그리 낯설지 않다. 2020년 조사에 따르면, 세 집 걸러 한 집이 1인 가구라고 한다. 해를 거듭해 증가하는 1인 가구는 새로운 소비주체로 부상하면서 ‘솔로이코노미 ’Solo Economy라는 경제용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앞으로는 이러한 변화에 맞춰 주택정책이나 주거문화도 바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투룸 빌라 ‘블루버드 이태원’은 그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사례다. 글 강창대 기자취재협조 및 사진 리얼피에셋컨설팅 (http://realp.kr), 블루버드건설 (02-888-8885)※ 기사 하단에 이 주택과 관련된 인터뷰와 영상을 링크시켰습니다. 자세한 사항이 알고 싶으시면 영상을 클릭해 주세요. 혈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의미도 점점 퇴색하고 있다. 혼인보다는 동거 혹은 사실혼이 늘고 있고, 이혼이 증가하면서 재혼가족도 늘고 있다. 또한, 평균 초혼 연령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고, 자녀가 없는 기혼자인 소위 딩크족 DINK 族도 늘고 있다. 2020년 인구주택 총 조사에 따르면 여성 인구는 증가했음에도 결혼한 여성과 출생아 수는 크게 줄어든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한 가족의 평균 자녀수가 감소하면서 자녀들이 성장해 분가한 뒤 노부부만 사는 가구도 늘고 있다. 이처럼 가족의 형태와 개념이 달라지고 있지만, 자산 가치에 기반을 둔 한국의 주택정책은 이러한 변화를 좇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주택은 4인 가족을 전제한 85㎡의 평면이 표준적인 모델로 제시된다. 이뿐만 아니라, 돌봄과 편의시설이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조성되거나 입주민만 이용할 수 있도록 폐쇄적으로 운영돼 지역의 공동체 문화를 저해하기도 한다. 블루버드 이태원은 2인 가구를 위한 소형의 투룸 빌라지만, 넓은 주차장과 보안이 잘 갖춰진 공동 현관을 구비하고 있다. 블루버드 이태원의 백미는 무엇보다 남산과 용산공원이 훤히 보이는 전망이다. 현관. 서민주택의 고정관념을 깨다이제 주택과 주거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달라질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리얼티에셋컨설팅 RealP Asset이 시행하고 자회사인 블루버드건설이 시공한 ‘블루버드 이태원’은 여러 면에서 파격적인 시도로 평가된다. 우선, 구옥舊屋이 빽빽하게 들어선 서울 용산구 한남동 고급 주택가에서나 봄직한 고급 마감재를 적용하고 루프탑 테라스를 배치했다는 점이 그렇다. 이런 점은 빌라가 단지 저렴한 주거 형태라는 일반 선입관을 흔든다. 또한, 입지 등을 선정하며 자산 가치 못지않게 지역성과 어우러지는 주거 양식을 고려했다는 점도 신선한 시도로 볼 수 있다. 이윤을 기업의 자연스러운 생리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같은 블루버드 이태원의 파격은 당장의 수익보다는 장기적인 전략이 깔린 포석으로 해석할 만하다. 블루버드 이태원을 추진하게 된 동기와 시공에 얽힌 구체적인 이야기를 리얼피에셋컨설팅 박병찬 대표로부터 들어보았다. Q 빌라(Villa)는 영어권에서 교외에 지은 고급 주택이나 그런 주택 단지를 일컫지만, 국내에서는 비용 효율에 더 치중한 서민주택의 이미지가 강하다. 여러 주택 유형이 있지만, 투룸 다세대주택을 개발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 A (한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양극화의 골이 깊어졌다. 그렇다면 계층별로 균형이 있는 주택정책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공약을 내세우는 정치인은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여전히 재개발의 주된 이슈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다. 무엇보다, 부동산 통합 솔루션 전문 기업으로서 이 사업을 통해 정책적 공백을 메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또한, 틈새 전략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플래그십 Flagship으로서 블루버드 이태원이 자리를 잡는다면 브랜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빌라가 값싸게 지은 집이라는 선입견도 깨고 싶었다. Q 용산구 이태원동은 노후한 건축물이 많은 구도심이다. 집은 일상을 영위하는 주거공간이지만, 한국에서는 중요한 자산 가운데 하나다. 분양을 받거나 입주하는 사람들이 환금성이나 투자 이익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A 이번 프로젝트에서 부지가 가진 매력도 있지만, 장기적인 전망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원하는 사업을 실현하고 싶은 마음 못지않게 희소성과 환금성을 모두 생각했다. 고급 주거지역에서 빌라는 아파트보다 대형 위주의 분포가 높은 편이다. 이 지역도 소규모 다세대는 신축이 희소하다. 그만큼 환금성도 높다. 또한, 앞으로 있을 구도심 정비나 재개발도 생각했다. 실제 블루버드 이태원 건축이 완공되자 이 사업을 계획할 때와 달리 지역 사회에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역을 새롭게 정비해 보자는 여론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자리가 모든 면에서 딱 들어맞는 곳이라 판단했다. 블루버드 이태원 사업은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과 같았다. 예를 들어, 화가가 어떤 그림을 그릴 때,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예술가는 자기가 그리고 싶은 것, 듣고 싶은 음악을 만들 뿐이다. 이처럼 짓고 싶은 건물을 짓겠다는 생각도 컸다. 자산으로서 부동산의 의미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사업성을 치밀하게 따져야 했지만,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주거 문화를 창조한다는 생각을 갖고 임했다. 블루버드 이태원에 사용한 자재 하나, 루프탑 테라스에 심은 식물 한 포기까지 우리의 혼과 같다. (웃음) Q 내외부 마감재를 비롯해, 창호, 루프탑 테라스 등에 고급 소재를 사용했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입장에서 건축비나 집값을 낮추기 위해 ‘적당한 선’을 고민하거나 대개 그런 유혹이 있을 수밖에 없다. 최고급 가구와 부자재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인가? A 잠깐 예쁜 공간이 아니라, 신축 당시의 그 느낌이 최대한 세월을 버틸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결국, 고급 자재의 선택이었다. 화려하게 피었다 금세 시들해지는 게 아니라, 계절과 세월을 넘으면서 더 빛을 발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단독주택은 건축주의 생활양식이나 취향이 중요하지만, 공동주택은 수익성을 고려하는 사업인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일반적인 수준 이상의 스펙을 적용했다는 점은 주변을 둘러보아도 확실히 파격적이다. 사업성 못지않게 남들과는 다른 집을 짓겠다는 마음이 앞섰고, 이것을 표현하려다 보니 고급 자재를 선택하게 됐다. 디자인팀과 사업팀이 이를 위해 많은 논의를 거쳤고, 결국 이런 스펙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지금도 차별화된 빌라를 짓기 위한 연구는 지속되고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잘 꾸며서 좋은 값에 팔려고 하느냐고. 하지만 착공하기 전에 이미 분양은 모두 마친 상태였다. 아무런 실체가 없는데도 구입한 사람들은 오직 우리의 계획만 믿고 결정한 것이다. 우리를 믿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당초 계획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블루버드 이태원은 실제 규모에 비해 넓어 보이면서도 쾌적한 공간으로 설계됐다. 건물 주변이 탁 트여 경관이 좋은 만큼 특히 창문의 위치와 크기는 세심하게 계획됐다. 세대의 위치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주방. 리얼피에셋컨설팅과 블루버드건설은 최적의 공간을 찾기 위해 일곱 번 넘게 평면을 변경해야 했다. 화장실. 입주자와 지역성을 고려한 계획블루버드 이태원이 들어선 부지에는 이전까지 여러 세대가 거주하는 연립주택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업을 위해 부지를 알아보러 다니던 박병찬 대표는 연립주택의 옥상에 올라가 전망을 보는 순간 결심을 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 것은 사람의 노력이지만, 경관 등 환경 여건은 그 장소가 가진 고유한 매력이기 때문이다. 부지가 경사지에 위치한 만큼 난공사가 예상됐지만, 박 대표는 결심을 굳히고 연립주택 소유자 및 세입자들과 1년여의 지난한 협의를 진행했다. Q 지역이나 입주민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설계 과정이나 콘셉트에서 주안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A 이태원은 지역 문화 자체가 독특하다. 외국인이 많고,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풍경이 있어 젊은이들이 선호한다. 루프탑 문화도 이태원에서는 흔하다. 이곳 젊은이들은 옥상에서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경치를 바라보며 여가를 즐긴다. 블루버드 이태원에 루프탑을 만들겠다는 계획은 이렇게 시작됐다. 실제 입주자들은 20, 30대이고, 임차인 중에 모델이나 피아니스트 등 문화 예술계 종사자 비중이 높다. 그뿐만 아니라, 스타트업 CEO처럼 창의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일상적인 주거 공간이라 하더라도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즉, 틀에 박힌 주거 형태보다 색다른 공간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이태원에 많고, 그런 사람들이 블루버드 이태원에 주로 입주해 있다. Q 교외나 전원의 단독주택은 쾌적한 환경과 호젓한 생활을 누린다는 장점이 있지만, 도심이나 근린생활시설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이런 주택과 비교했을 때, 도심에 위치한 고급 빌라가 가진 두드러진 장점은 무엇인가? A 세입자 즉, 실사용자 계층은 주로 젊은 세대들이다. 소유주들은 주택 임대 사업이나 자녀들을 위해 구입한 경우가 있지만, 큰 재력을 가진 계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원주택이 쾌적한 환경 속에서 호젓하게 누리는 생활이라면, 도심 주택 현장에서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을 위한 주거 공간이다. 당초 분양 가격도 주변 시세에 비해 저렴하게 책정해 큰 부담이 없었다. 블루버드 이태원에는 고급 부자재 등 상위 스펙이 적용됐다. 이와 관련해 리얼피에셋컨설팅 박병찬 대표는 “소비자들도 기업에 고마운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것이 온전한 비즈니스”라고 말했다. 실내의 밝은 톤을 배경에 두고 곧게 뻗은 짙은 색 프레임이 경쾌한 인상을 준다.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가운데 실내 풍경은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블루버드 이태원을 기획한 사업팀과 공간을 설계한 디자인 팀은 데드스페이스를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차례 평면 작업에 많은 공을 들였다. 또한, 지역의 문화와 생활양식 등을 치밀하게 조사해 입주자에 최적화된 평면을 디자인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집안 구석까지 골고루 닿을 수 있도록 유리문을 적용했다. 계단실 아래를 다양한 용도의 공간으로 최대한 활용해 실제 규모에 비해 공간을 넓고 짜임새 있게 쓸 수 있다. 규모가 작은 빌라 세대이지만, 복층이 있는 세대는 수직적인 개방감을 느낄 수 있다. 복층은 지붕과 외벽의 형태가 반영돼 아늑하면서도 재미있는 공간 형태를 보여준다. 시스템 파고라를 비롯해 고급 가구와 작은 정원으로 꾸며진 루프탑 테라스에는 블루버드 이태원의 백미인 남산의 모습이 넓은 시야에 들어온다. 실별로 최적화된 공간 설계대개 공동주택의 평면 설계는 획일화된 경우가 많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더라도 크게 표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블루버드 이태원에는 20세대가 들어섰고, 9개의 평면이 만들어졌다. 일반적인 다세대주택과는 달리, 세대의 위치에 따라 최적화된 평면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사업팀은 예상 입주자의 라이프스타일 등을 조사해 설계팀과 이상적인 공간의 형태를 연구했다고 한다. Q 여유가 있는 공간에 비해 투룸을 설계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A 단독주택을 짓는다는 생각을 갖고 임했다. 내가 입주자라면 이 부분을 어떻게 하고 싶을지, 혹시 데드스페이스 Dead Space는 없는지 등 많은 고민을 했다. 무엇보다, 실제 규모에 비해 넓게 보이면서 쾌적한 공간이 되게 하려고 노력했다. 건물의 사방이 탁 트여 있어 창문의 위치와 크기도 세심하게 계획했다. 최적의 공간을 찾기 위해 일곱 번 넘게 평면을 변경해야 했다. 박 대표는 이정도 스펙에 루프탑 테라스까지 갖춘 빌라는 서울 내에서는 첫 시도일 거라며 “정말 과투자”라고 말했다. 높은 품질을 내기 위해 집을 두 채 정도 지을 수 있는 공사원가가 투입됐기 때문이다. 이는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생리와는 자칫 어울리지 않는 시도로 보일 수도 있다. 박 대표는 “돈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게 있다”면서 리얼피에셋컨설팅과 블루버드에게는 그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대개 기업은 소비자에게 고마워하기 마련이지만, 박 대표는 “소비자들도 기업에 고마운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것이 온전한 비즈니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많은 사업자들이 블루버드 이태원을 모방하길 바란다”라고 말하고, “이를 계기로 빌라 건축 문화가 바뀌길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다. 고급 외장재로 손꼽히는 듀라스틱 롱브릭 타일로 마감해 건물의 빛깔과 질감이 세련되다. 블루버드 이태원이 자리한 부지는 경사지이지만 덕분에 사방으로 탁 트인 조망을 자랑한다. 리얼피에셋컨설팅의 박병찬 대표. 블루버드 이태원은 비교적 소규모 빌라에 속하지만 높은 스펙을 적용하는 등 많은 공을 들였다. 박 대표는 오로지 계획만 믿고 빌라를 구매한 사람들에게 보답으로 당초 계획한 것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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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을 즐길 수 있는 고급빌라 블루버드 이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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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대갓집의 위엄을 한눈에… 장위동 김진흥 가옥
- 서울시 성북구 장위동에 있는 김진흥 가옥(서울시 민속자료 25호)은 조선시대 순조의 셋째 딸 덕온공주의 남편 윤의선이 지은 집이다. ㄷ자형 안채와 ㄱ자형 사랑채, ㄷ자형 중문간 행랑채, ㄷ자형 별채, 一 자형 별당채로 이뤄져 있다. 중대문으로 들어서면 안마당 전면에 안채가 자리한다. 중앙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이 건넌방이고 ㄱ자로 꺾여서 아궁이 부엌 · 마루 · 사랑채의 침방으로 연결한 방을 배치했다. 대청 왼쪽이 윗방과 안방이고 꺾여서 부엌과 찬마루다. 안채 왼쪽 터에 별당채가 있다. 사랑채는 중문간 행랑채 오른쪽에 있는 일각대문으로 출입하는데 큰사랑방 · 대청 · 작은사랑 · 침방을 배치했다. 침방은 안채와 이어지고 작은사랑 북쪽에 별채가 자리한다.글 최성호사진 홍정기 김진흥 가옥은 서울시 성북구 장위동에 있다. 장위동은 조선시대까지 경기도 고양군에 속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경기도 집이다. 순조의 셋째 딸인 덕온공주의 부마 남녕위군 윤의선이 살던 집이다. 을축년에 지었다고 쓰인 상량문으로 보아 건립 연대는 1865년으로 추정한다. 지금은 우리은행 체육관으로 둘러싸였지만, 이 집을 지을 당시에는 한적한 농촌이었을 것이다. 대지가 759평으로 넓지만, 예전에는 훨씬 더 넓었다. 주소가 장위 2동 76-59인데 집을 지을 당시만 해도 주변 76번지가 모두 이 집 땅이었다. 구성은 사랑채와 안채 · 별당 · 안별당 등이다. 안채 옆에 있는 안별채 앞을 체육관이 가리고, 집 앞 문간채가 사라져 예전의 위엄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현재 모습만으로도 어느 대가 못지 않은 규모와 위엄을 보여준다. 문간채만 제외하고 옛 규모가 온전하다. 일제강점기 이후 몇 차례 손을 본 흔적이 있다. 안채 · 사랑채 · 별채 할 것 없이 모두 툇마루 끝에 미서기문을 설치했는데, 그 대부분이 일본강점기 이후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도 조금씩 바뀌었지만 큰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집주인이 1998년 이 집을 선학원이라는 불교 단체에 기증해 사찰로 개조하면서 원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원형을 많이 훼손했지만 전체 집 구조나 배치는 옛 모습을 유지해 초기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거의 정남에 가까운 남남서향이다. 행랑 마당을 앞에 두고 동쪽에는 사랑채를, 서쪽에는 안채를 배치했다. 사랑채와 안채 모두 행랑 마당에서 약 2m 위에 앉혔다. 예전에는 주변 건물들이 낮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기에 지금보다 훨씬 더 위엄스러웠을 것이다. 사랑채와 안채로 올라가는 계단 좌우를 화계로 꾸몄는데, 지금보다 잘 관리했을 과거에는 세련된 아취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행랑 마당 동쪽에 사랑채를, 서쪽에 안채를 배치했다. 사랑채와 안채로 올라가는 계단 좌우를 화계로 꾸며 아취를 풍긴다. 잘 다듬은 장대석 기단 위에 앉힌 안채는 ㄷ자형 배치다. 중문간 행랑채 오른쪽에 있는 사랑채 출입문인 일각대문. 소박함이 묻어나는 안채잘 다듬은 장대석 기단 위에 앉힌 안채는 ㄷ자형 배치다. 동쪽 날개 끝에 사랑채를 연결했는데, 사랑채는 전면 5칸에 측면 2칸으로 동쪽 작은 사랑은 뒤로 2칸 반을 더 늘려 아래 사랑채의 규모를 키웠다. 큰 사랑채 쪽도 안채 날개 1칸을 같이 붙여 전체로는 전면이 6칸 규모다. 가운데 2칸이 사랑 대청인데 앞쪽 반 칸을 퇴칸으로 만들어 사랑채 모든 방을 연결하도록 배려했다. 사랑채와 안채 모두 홑처마 민도리집으로 부마의 위상에 비해 상당히 소박하다. 사랑채를 장대석 2벌대 기단 위에 앉혀, 이것으로 공주와 부마가 살던 집임을 느낄 뿐이다. 2벌대 기단을 높게 만들어 사랑채 마루에 앉아서도 담 너머 경관이 바라보인다. 사랑 마당도 담으로 구획해 독립성을 주었다. 안채는 3칸 대청 앞으로 5칸씩 날개를 붙여 다른 집에 비해 안마당이 깊다. 마당은 중문 행랑채를 옆으로 길게 붙여서 뒤집힌 ㄴ자형으로, 그 크기가 중문칸부터 7칸이라 넓고 시원하다. 마당이 남쪽으로 길게 뻗어 늘 햇빛이 들어 밝고 경쾌하다. 현재 안채 대청은 불당으로 사용하는데 조선 말에 성행하던 염불당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원래 모습은 안방 쪽이 윗방과 안방 2칸, 부엌 2칸, 찬방 칸 반이다. 그리고 건넌방 쪽은 건넌방 2 칸, 부엌, 마루, 방, 사랑채 곁방이라는데 현재는 그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청도 원래는 1칸 깊이 대청과 반 칸 규모 퇴였을 것인데 지금은 모두 터서 불당으로 사용한다. 또한 안방 서쪽 반 칸도 벽장이나 툇마루였을 것이나 지금은 옛 안별당 건물 안방 사이를 터서 방으로 만들고 지장전으로 사용한다. 안채 서쪽에 전면 3칸에 측면 2칸인 안별당이 있다. 서울시《한국의 건축 문화재》에 의하면 정자로 사용하던 건물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위치가 안채 뒷마당 쪽이고 바로 옆이 장독대라 남성 공간인 정자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도 초기에 공주 거처로 사용하다 후에 정자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현재는 안채 쪽을 터서 지장전으로 사용한다. 장대석 2벌대 기단 위에 앉힌 사랑채. 홑처마 민도리집으로 부마의 위상에 비해 상당히 소박하다. 다. 별당채는 안방, 2칸 대청, 건넌방을 둔 구조 대청 앞에 반 칸 퇴를 가진 1고주 오량집이다. 문화재 못지않게 주변 경관도 보존해야안별당은 잘 다듬은 장대석 2벌대 기단 위에 안채보다 높게 앉혔는데 드림랜드가 있는 서쪽을 바라보는 배치다. 지금은 체육관 건물에 가려 음산하고 답답하지만 옛날에는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이 바라보이는 대단한 장소였다. 안별당은 예전에 산호벽루라 불렸다. 안별당에서 바라보이는 북한산과 도봉산이 파란 산호처럼 보여 그러한 당호를 붙였을 것이다. 이 집을 돌아보면서 느낀 아쉬운 부분이 바로 안별당이다. 주변까지 제대로 보전했더라면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 명확하게 느꼈을 것이다. 정자와 안채 북쪽이 내정이다. 정자와 안채 대청 그리고 별당채 안방에서 모두 내정이 보인다. 예전 살림집일 때는 안사람들이 모두 공유하는 좋은 정원이었을 것이다. 부마 집안이라면 응당 사당을 갖춰야 함에도 사당이 없다. 안채 대청 등에도 위패를 모신 흔적이 없다. 아마도 후원에 사당을 두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집터에서 가장 높고 조용한 곳이기 때문이다. 사랑채 뒤쪽으로 또 다른 별당채가 있다. 별당채는 전면 4칸에 측면 2칸 규모로 동쪽에 광채로 사용했을 건물이 늘어져 있다. 별당채는 안방, 2칸 대청, 건넌방을 둔 구조다. 2칸 규모인 안방 앞쪽으로 1칸 부엌이 있다. 이 별당채도 규모가 커서 웬만한 대갓집 안채 규모다. 별당채를 누가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채와 관계를 보아 사내아이들의 공부방으로 쓰였을 것이다. 별당채는 대청 앞에 반 칸 퇴를 가진 1고주 오량집이다. 별당채 기둥이 꽤 기울었다는데 언뜻 보아선 잘 느껴지지 않는다. 문을 전면에 내달며 문선으로 기울어진 기둥을 살짝 감췄을 것이다. 수리한 목수의 재치가 돋보인다. 이 집에서 매우 넓은 별당채 안마당이 가장 마음에 든다. 규모만 보면 깊이 7칸에 폭이 4칸으로 안채 마당보다 넓다. 이 마당도 남북으로 길게 자리해 막힐 것이 없고, 옛날 방식대로 백토를 깔아 마당이 밝고 시원하다. 더욱이 마당 가운데 나무 한 그루가 있어 자칫 적막할지 모를 분위기를 안온하게 만든다. 마당을 감싼 건물의 지붕선과 창호의 적절한 비례까지 곁들여 한옥 마당의 멋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안채 동쪽 날개 끝에 사랑채를 연결했다. 툇마루 끝에 미서기문을 설치했는데, 그 대부분이 일본강점기 이후 만든 것으로 보인다. 별당채 안방. 별당채 동쪽에 있는 광채, 지금은 선방으로 쓰인다. 현재 김진흥 가옥은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집 앞에 개울이 흘러 다리를 건너야만 이 집에 들어왔다고 한다. 한창 영화를 누릴 때는 공주에게 딸려 온 궁인까지 포함해 많은 식솔이 살았을 것이다. 이제는 그 영화를 찾아볼 수 없다. 또한 현재 사찰로 개조하다 보니 제맛을 잃고 있다. 이 집을 원상태로 복원하면 좋은 문화재 하나를 후손에게 남겨주는 것인데 참으로 아쉽다. 최근 지자체가 이 주변을 재개발하면서 공원으로 조성하려고 한다니, 그때는 어느 정도 제 모습을 찾지 않을까 한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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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대갓집의 위엄을 한눈에… 장위동 김진흥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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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청백리의 귀감 오리 이원익 종택
- 오리 이원익(1547∼1634)은 태종의 5대 손으로 선조, 광해군, 인조에 걸쳐 영의정을 다섯 번이나 지냈다. 이원익은 벼슬을 마치고 이곳에 정착할 때, 청렴하게 살아 변변한 집도 마련하지 못했다. 종손에 따르면 "오리 선생이 살던 집은 초가 몇 칸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를 안 인조가 현재의 종갓집을 하사했다"고 한다. 인조는 집과 함께 '청백리의 본보기로 모든 관리와 백성〔臣民〕이 보고 느껴야 할 곳'이란 뜻을 지닌 관감당이란 당호를 같이 내렸다. 사랑채에 걸린 편액이 그것이다. 종가 뒤엔 충현서원터가 있다. 효종 9년(1658)에 사당을 짓고 이원익을 배향하고, 1676년(숙종 2년) 충현서원이란 사액을 받고 강감찬 · 서 견 · 이원익을 배향한 곳인데 대원군이 서원 철폐를 단행할 때 헐렸다 글 최성호사진 홍정기 인조가 청백리 이원익에게 하사한 관감당. 오리 이원익 종택(문화재자료 제90호)은 경기 광명시 소하동의 약 3000평 부지에 자리 잡고 있다. 터는 주변 경관을 내려다보기에 좋고 드나들기에도 적당한 산자락인데, 지금은 연립주택과 아파트 등으로 둘러싸여 답답하다. 현재 배치는 약간 바뀐 상태다. 종손은 "현재 담 밖 안내판 위치에 초가인 다섯 칸 행랑채가 있었고, 중문간채는 1940년대 다른 집을 옮겨다 고쳐지었다"고 한다. 지금의 집은 지은 지 오래지 않다. 원래 사랑채인 관감당은 1916년에, 안채는 그 이듬해에 지어졌다. 종손은 "증조부 때 재산을 많이 모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 재산을 기반으로 집을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집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 모두 몇몇 부분에서 당대 기법이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조선시대 전통 방식이 그대로 살아 있다. 이 집을 다시 지을 당시엔 안채와 사랑채의 구별이 모호했다. 그럼에도 사랑채와 안채를 분리한 데다 모두 접시받침을 끼워 지은 소로수장집이다. 유리문만 아니라면 언뜻 조선시대 전통 사대부가 구조로 착각할 정도다. 이러한 구조는 이원익의 종가라는 자부심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임금이 하사한 집이란 자부심으로 집을 중건하면서 옛 모습과 구조를 보전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안채는 ‘ㄴ’자형 중문간채와 ‘ㄱ’자형 안채가 맞물린 튼 ‘口’자 구조다. 안채 대청 우측의 2칸 안방. 유리문만 아니라면 언뜻 조선시대 전통 사대부가 구조로 착각할 정도다. 일고주 오량 전퇴 소로수장집, 안채 안채는 'ㄴ'자형 중문간채와 'ㄱ'자형 안채가 맞물려 튼 '口'자형을 이룬다. 중문간채 벽엔 벽돌을 사용했다. 그 재질이 1940년대 것이 아니기에 종손에게 물으니 "1980년대 안채 뒤쪽에 보일러실을 증축하면서 고쳤다"고 한다. 중문간채 왼쪽 부분은 안채 쪽으로 3칸 반을 늘였는데 사랑채로 가는 통로가 반 칸, 광이 1칸, 방이 2칸이다. 안채는 큰 기둥 하나에 도리가 다섯 개 들어간 일고주오량에, 집채 앞쪽에 다른 기둥을 세워 만든 조그마한 칸살을 둔 전퇴 소로 수장집이다. 종도리는 높은 편이라 사랑채만큼 무겁지는 않지만 도리 등 부재가 커서 경쾌한 느낌이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다. 후에 모든 툇간에 유리문을 설치했다.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3칸 건넌방이, 우측에 2칸 안방이 있다. 안방 아래쪽에 2칸 부엌과 1칸 찬모방을 늘여 붙였다. 안방과 건넌방 부분 뒤쪽 처마 밑에 후대에 살강(부엌의 부뚜막 및 조리대 위의 벽 중턱에 가로로 기다랗게 드리운 선반)을 만들었다. 건넌방은 3칸으로 다른 곳에 비해 규모가 커서 처음엔 안방으로 착각했다. 확인 결과 건넌방 쪽은 나중에 1칸을 더 늘여 지은 것이다. 현재 욕실로 사용하는 곳이다. 2칸 부엌은 특이하게도 다목적으로 사용하도록 찬모방과 같은 높이로 마루를 설치했다. 안채 뒤쪽에 자연석을 쌓은 장독대가 있다. 석축을 너무 가지런하게 쌓아 우리의 옛 정서와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도 다시 쌓은 것 같다. 그렇지만 잘 가꾼 나무들이 장독대를 감싸 아늑하고, 정갈하게 놓인 장독들에서 안주인의 성향이 느껴진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일고주 오량 전퇴 소로수장집이다. 중문간채 벽은 1980년대 증축하면서 벽돌로 마감했다. 안채 좌측 뒤쪽 처마. 인조가 청백리에게 하사한 사랑채사랑채는 정면 5칸에 측면 칸 반인 '一'자형 팔작지붕 소로수장집이다. 기단이 높아 주변 경관을 내려다보기에 좋다. 앞쪽 건물만 없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랑채는 2칸 방과 2칸 대청, 구들방으로 이뤄졌다. 좌측 큰 사랑채는 2칸인데 방은 1칸 반이고 반 칸은 아래쪽에 아궁이를, 위쪽에 벽장을 설치했다. 측면은 1칸 반으로 큰사랑 쪽만 처마 밑에 살강을 덧달아 수납공간을 넓혔다. 일고주 오량집으로 대공 부분이 재밌다. 대부분 지붕을 높이고 물매를 잡고자 종도리를 높게 올리다 보니 판대공(두꺼운 널빤지로 만든 대공)을 높고 세련되게 만든다. 그러나 종도리가 그리 높지 않아 판대공은 정사각형처럼 느껴질 정도로 둔중하다. 또한 도리와 서까래도 굵은 부재를 사용해 집 안이 경쾌하지 않고 무겁다. 사랑채 뒤에 불천위(큰 공훈으로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 이원익의 영정을 보관한 오리영우가 있다. 1693년에 지은 건물로 정면 1칸에 측면 1칸 반 규모고 오리영우란 현판은 숙종이 하사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건물은 19세기 말에 지었다. 영정은 사본이고 진본은 충현박물관에 보관한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원래 사랑채인 관감정과 오리영우 사이에 사당이 있었다. ‘청백리의 본보기로 모든 관리와 백성이 보고 느껴야 할 곳’이란 뜻을 지닌 당호 관감당. 관감당에서 본 이원익이 거문고를 타던 탄금암과 수령 400년 된 측백나무. 이 종택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부지 내에 이원익의 부모와 형 내외의 묘소가 같이 있다는 것이다. 집과 묘지가 이렇게 가까운 곳은, 그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종손은 "원래 주변을 전주 이씨 가문의 선산처럼 이용해 묘지가 많았는데 모두 이장하고 두 분 묘소만 남겨 놓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원익이 부모와 형을 가까이 모시고픈 생각에 집 근처에 묘지를 마련한 것이, 그 후 묘지가 점점 늘어나 전주 이씨 가문의 묘지로 된 게 아닌가 한다. 이 집은 부지가 매우 넓다. 이곳엔 충현서원 터, 이원익이 우의정 · 좌의정 · 영의정을 모두 역임한 것을 기념해 지은 삼상대, 바람으로 목욕한다는 풍욕대 그리고 이원익과 그 직계 후손들의 유적과 유물을 보관한 충현박물관도 있다. 무엇보다 주변을 흐트러짐 없이 잘 가꿨다는 것이 맘에 든다. 그간 여러 고택을 보았지만, 이 집만큼 주변을 잘 가꾼 곳을 보지 못했다. 이곳은 답사 처뿐만 아니라 조용히 휴식과 사색하는 장소로도 더할나위 없이 좋다. 주변을 산책하며 이원익의 자취를 느껴보는 곳으로 가꿨다는 점에서 종손의 가문에 대한 사랑이 남다름을 느끼게 한다. 사랑채에서 본 안채. 이 집을 다시 지을 당시엔 안채와 사랑채의 구별이 모호했음에도 채를 나눴다. 바람으로 목욕한다는 풍욕대.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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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택&인테리어
- 상가주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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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청백리의 귀감 오리 이원익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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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서울 장교동 한규설 韓圭卨 가옥
- 한규설 가옥(시도민속자료 제7호)은 원주인인 박준혁이 명원 김미희에게 기증함으로써 서울시 중구 장교동에서 성북구 정릉동 국민대학교 후문으로 옮겨졌다. 한규설(1848∼1930)은 조선 말기 무과에 급제해 전라좌수사와 우포도대장,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법무대신 및 고등재판소 재판장을 역임했다.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해 면직당하고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하지만 한일합병 후 일제 작위를 못 받겠다며 칩거했다. 1920년 이상재 등과 조선교육회를 창립해 교육 활동에 힘썼다.글 최성호사진 홍정기 한규설 가옥은 현재 을지로 입구 장교빌딩 터에 있었다. 대지나 집의 규모만 보아도 예나 지금이나 대저택이다. 자료를 보면 예전 서울에는 대지가 1000평이 넘는 큰 집이 많았다. 현재는 전쟁과 도심 개발로 다 없어지고 몇 곳만 남았는데, 그것도 이렇게 자리를 옮겨 명맥만 유지할 뿐이다. 이 집은 1890년대 지은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국민대학교 후문으로 옮기면서 행랑채와 솟을대문을 새로지었다. 주남철이 쓴 《한국의 전통민가》에는 옮기기 전 배치도와 평면도가 나오는데 현재 것과는 차이가 난다. 현재는 뒤쪽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나오는 행랑마당에서 중문과 행랑채를 지나 안채와 사랑채로 향하지만, 예전에는 남쪽에서 들어가는 배치로 사랑채로 향하는 곳에 일각문만 있고 행랑칸은 없었으며 중문이 내외문 형식이라 안채가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전체 배치에서 대지 좌우 폭도 줄어들어 행랑 마당이 작아졌다. 현재는 뒤쪽 담이 거의 일직선이지만, 예전에는 뒤쪽 장독대와 사당이 안채 쪽으로 밀려들어와 장독대와 사당이 훨씬 안채에 가까웠다. 전체 대지 규모는 최소한 지금 규모였을 것이다. 안채 뒷마당. ' ㄴ'자형 안채와 행랑채, 사당 등이 튼 '口'자를 이룬다. 부잣집의 풍미를 간직한 사랑채사랑채는 잘 다듬은 장대석 이벌대 기단 위에 앉혔다. 기단이 앞으로 튀어 나와 월대 臺(대궐의 전각 따위 앞에 있는 섬돌)처럼 느껴진다. 또한 주춧돌 사이를 돌로 막아 세벌대처럼 보인다. 겹처마 소로수장(접시받침) 집으로 전면 4칸에 측면 2칸인데 좌측을 뒤로 1칸 내달아 'ㄴ'자 형태다. 구조는 가운데 2칸 방을 중심으로 좌측에 방 1칸을, 우측에 마루 1칸을 붙였다. 전면 3칸 툇마루 옆에 대청 창문를 개방했을때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평난간을 화려하게 장식한 쪽마루를 설치했다. 뒤쪽 전체에도 쪽마루를 놓아 편의성을 높였다. 사랑방에서 대청쪽 문은 개방성을 높이고자 들어열개로 달았다. 사랑방은 전면 2칸에 측면 칸 반으로 매우 넓고 뒤쪽은 침방으로 이어진다. 댓돌에서 정성을 들여 지은 집임을 알 수 있다. 댓돌은 대부분 문지방 앞에 놓는 것으로 그친다. 이 집은 2칸 전체에 댓돌을 연결하고, 중간 주초 부분은 댓돌을 다듬어 하나의 돌처럼 붙였다. 얼마전까지 사랑채에는 하인을 부를때 잡아당기는 설렁줄이 걸려 있었다. 지금도 고풍스러운 가구를 잘 배치해 부잣집 사랑채의 풍미를 느끼게 한다. 앞마당은 집 규모나 품격에 비해 매우 좁다. 도심의 제한된 공간에 집을 짓다보니 어쩔 수 없던 선택으로 보인다. 집의 규모와 품격으로 보아 아쉬운 부분이다. 사랑채는 팔작지붕 밑에 사랑마루와 사랑방 그리고 앞뒤로 방을 배치했다. 사랑채 전면 3칸 툇마루. 뒤쪽 전체에 쪽마루를 설치했다. 고가구를 잘 배치해 옛날 부잣집 사랑채의 풍미를 느끼게 한다. 안방마님의 권위 돋보이는 안채잘 다듬은 이벌대 장대석 위에 앉힌 안채도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ㄴ'자형이다. 전면이 7칸인데 좌우측 방이 칸 반 규모로 실제는 6칸 집이다. 가운데 3칸이 대청이고 좌우 칸 반을 각각 안방과 건넌방으로 꾸몄다. 부엌이 뒤쪽으로 들어간 것이 다른 집과 다르다. 안방쪽 뒤로 4칸이 늘어졌는데 안방 1칸에 부엌 2칸, 찬모방 1칸으로 구성했다. 예전 도면을 보면 건넌방이 1칸으로 현재와 다른데 옮기면서 늘렸을 것이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고 앞은 굴도리며 뒤는 납도리인 소로수장집이다. 오량집으로 칸 살이 넓다보니 시원시원하고 대들보 역시 우람하게 느껴진다. 종도리를 받는 판대공에 별도로 뜬창방을 설치했다. 장혀와 뜬창방 사이는 화반으로 받쳐 품격을 높였다. 7칸이지만 칸살이 매우 넓어 8칸이나 9칸 집처럼 보인다. 안방도 깊이 4칸에 넓이 칸 반으로 넓고 시원해 지방의 웬만한 집과 차이가 완연하다. 또한 전면에 넓은 이벌대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안채를 올려 집이 한층 높아 보일 뿐만 아니라 안에 앉아서 보는 느낌도 시야가 높아 한층 시원하다. 이곳에 살던 안방마님의 권위를 느끼게 한다. 안채 대청. 오량집으로 칸살이 넓어 시원하고 대들보도 우람하게 느껴진다. 깊이 4칸에 넓이 칸 반인 안방. 안채 옆 별채는 본채와 광채를 'ㄱ'자 형태로 연결했다. 풍류가 흐르는 연못과 정자안채 옆 별채는 본채에 광채를 연결한 'ㄱ'자 형태다. 본채는 정면 3칸 반에 측면 반 칸인데 전면 반 칸이 퇴退다. 좌측에서부터 방이 칸 반이고 가운데 1칸이 대청, 우측 1칸 앞에 전퇴를 가진 건넌방을 배치했다. 아마도 어린 딸들이 생활하던 공간으로 보인다. 사당은 맞배지붕으로 구조가 매우 특이한정면 2칸에 측면 칸 반이다. 삼면이 벽으로 막히고 앞만 트였는데 삼면 벽구조가 모두 다르다. 안채에서 보이는 벽은 방화장 위에 꽃무늬로 치장했지만, 반대편은 일반 방화장이고 뒷부분은 회벽이다. 안채에서 보이는 장독대 주변을 후원 개념으로 가꾸면서 눈에 잘 띄는 사당 벽부분을 조경 개념에 맞게 치장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 앞 일각문을 지나면 새로 조성한 연못과 정자가 잔잔한 풍광을 만들어낸다. 1980년대 집을 옮길 때만 해도 지금처럼 연립주택 등이 시야를 가리지 않아 풍광이 자못 볼만했을 것이다. 관리자에 따르면 "예전 이곳에서 학생들이 몰래 술을 마시곤 하여 내쫓았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필자는 "요새 사람들은 그러한 풍류를 즐길 만한 여유를 잃어버려 휙 지나고 마니 이제라도 그런 풍류를 느끼게 오히려 차나 술 한 잔하도록 권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1칸짜리 방과 마루로 구성한 정자, 녹약재 綠겭齋. 사당은 3면 벽을 각기 방화장과 꽃담, 방화장, 회벽으로 치장했다. 다성 茶聖 초의선사가 기거하던 해남 대흥사 일지암과 같게 지은 초당. 돌아보며 잠시 상념에 빠졌는데 산들바람에 들려오는 잔잔한 풍경소리에 마음이 차분해 졌다. 도시에 살면서 참 오랜만에 이러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곳에서 이런 풍경소리를 듣고 생활한다면 현대 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모두 사라질 것 같다. 바쁨에서 벗어나 천천히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한옥이 빚어내는 소리와 풍광은 더 없이 소중한 자산이다. 글쓴이 최성호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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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서울 장교동 한규설 韓圭卨 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