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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에게 역사 속의 통나무집이라 하면, 엉클 톰스 캐빈이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전기에서나 보는 이국적이고 생소한 주거 형태다. 그런데 미국 개척 시대에나 있음직한 통나무집 촌(村)을 국경 건너 백두산 북쪽에서 발견했다.

백두산, 중국 이름 장백산 기슭 '이도백하'라는 곳에 막 도착했을 때만 해도 통나무집으로 이루어진 우리 민족 집단촌을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백두산 깊숙이 자리 잡은 내두산촌에 사는 왕년의 명포수 최석도 씨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마을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여느 한국 산촌처럼 무질서하고 빈곤한 느낌의 마을이겠거니 했는데 영 딴판이었다. 비포장이지만 잘 다듬어진 넓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널찍널찍하게 자리 잡은 집들이 주는 정돈된 인상은 주변의 수려한 경관을 조금도 해치지 않는 깔끔함 그 자체였다.

내두산촌은 해발 800미터 고원에 자리한다. 백두산에서 내려오다 보면 만나는 사람 사는 첫 동네라고 해서 오래 전부터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도 부른다. 한국 이곳저곳 산간 마을에 가 보면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별칭이 있는데, 이 동네가 원조일 것 같다. 이국(?) 땅 오지 마을이지만,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고 언론에도 자주 소개된 바 있다.

이 산촌은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1930년대 김일성 부대 토벌에 골머리를 앓던 일제의 기획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일제는 밀림을 제 집처럼 헤집고 다니는 김일성 부대의 활동을 제약하고자, 전인미답(前人未踏)의 밀림 오지 곳곳에 이런 마을을 세웠다.

당시 일제는 인근 이도백하에서 신체 강건한 젊은 사람을 지원 받아 그 가운데 40명의 사람을 뽑아 군사훈련을 시킨 뒤, 소 한 마리와 기본 살림 도구를 주어서 밀림 한복판인 이곳에 마을을 이루어 살게 했다. 김일성 부대를 감시 소탕하면서 농사를 짓게 한 것이다.

이 전략 계획은 나중에 영국군이 말레이시아 공산 반군 소탕 때도 사용했고, 월남전에서도 미군에 널리 채택했던 전략촌 개념과도 비슷하다. 촌민들은 생업을 이루다가도 상황이 발생하면 김일성 부대 토벌에 동원됐다. 지금도 마을 뒷산에는 그때 파 놓은 감시 초소용 참호의 흔적이 보인다.

나는 이 동네에서 왕년에 호랑이 잡던 명포수 최석도 씨를 만났다. 그의 집에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지내고 막내아들 최광석 씨의 안내로 마을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여기저기에 통나무집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초기 이주민들이 힘들게 지은 살림집은 대부분 통나무집이었으나, 근래에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훨씬 크고 넓은 시멘트 집으로 바뀌었단다. 그러나 상당수의 집들이 옛 통나무집을 창고나 외야간으로 사용했다. 최석도 씨 집에도 통나무집이 남아 있어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들 한민족(韓民族)형 통나무집은 미국형 통나무집에 비해 몇 가지 고유한 특징이 있다. 내두산촌은 고원지대라 그런지 건축 자재로 쓸 만한 굵고 곧은 나무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이런 악조건에서 이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자재로 부적합한 가늘고 굽은, 크기도 제 각각인 나무를 사용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통나무와 통나무 사이에 뜬 공간이 많아 다량의 진흙으로 막아 놓았다. 미국의 통나무집이 통나무와 통나무 사이를 숲에서 풍부하게 채취할 수 있었던 이끼로 막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지붕에는 너와라는 판자 기와를 올렸다. 통나무를 조각조각 두꺼운 판재로 켜서 이것을 기와처럼 지붕에 이은 것이다. 이런 형태의 집은 강원도 삼척에서는 굴피집, 울릉도 나리지역에서는 너와집이란 이름으로 관광객을 부른다. 강원도는 방언이나 풍습이 여러 가지로 함경도와 비슷한 점이 많다. 이것으로 보아 이런 집은 아마도 함경도의 독특한 주거문화인 듯 싶다. 그 영향이 남쪽으로는 강원도, 북쪽으로는 국경 넘어 만주지역까지 흘러 들어간 게 아닐까.

동네를 둘러보다가 다른 형태의 민족형 통나무집을 발견했다. 통나무 외벽에 흰 회칠을 한 집이었다. 중국 동북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농촌주택의 한 현상이 눈에 띈다. 즉 벽돌집에는 거의 중국사람인 한족이 살았고, 벽에 흰 회칠을 한 집에는 동포들이 살았다. 반만 년 백의 민족사에 유전인자에 강하게 각인된 백색 선호 본능은 이국 땅 변방에 사는 동포들에게도 끈질기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내두산촌의 동포들도 이 유전인자가 시키는 본능을 거부하기가 어려웠던 듯했다.

동네 한 통나무집에서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백엽수, 즉 자작나무라는 북국의 나무 껍질로 만든 물받이 홈통이다. 이 북국의 나무는 여러 가지로 쓸모가 많다. 봄이면 고로쇠나무처럼 수액을 얻지만, 목재가 단단해서 피아노를 만드는 재료로도 쓰인다. 특히 껍질은 매우 견고하고 질겨서 현대의 플라스틱이나 비닐 같은 역할을 한다.

내두산촌으로 들어오는 길에 하얀 자작나무들을 하도 많이 봐서, 과연 현지민들이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나 궁금했다. 그런데 말로만 듣던 많은 용도 가운데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지붕의 빗물을 받는 백엽수는 설치한 지 오래됐을 텐데 조금도 변색되지 않아 그 강인함을 실감하게 했다.

사흘 밤을 지낸 최석도 씨의 집은 시멘트로 크게 지은 것이지만, 그 형태는 옛 통나무집의 형태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 우선 남쪽의 집처럼 큰 방 작은 방, 대청, 마루 등으로 세분되지 않고, 방 하나로 덩그렇게 터 있는 일옥 일실형이다.

그 안에 부엌을 드린 것은 이해가 갔지만 아궁이까지 있었다. 저녁을 짓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지피자, 온기와 함께 향긋한 참나무 연기가 집 안에 은은하게 전해졌다. 어떤 집에는 소를 키우는 외양간까지도 집 안에 있단다. 춥디추운 북쪽 기후에 적응하다 보니 이런 형태의 독특한 주거 형태가 나온 듯하다. 그 덕분인지 영하 25도를 오르내리는 추위였는데, 그 집에 머무는 동안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이곳 내두산촌은 독특한 주거 형태로만 나의 관심을 끈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한국의 역사를 뒤바꿔 놓았을지도 모를 큰 사건이 벌어질 뻔한 사연도 간직하고 있다.
1940년대 초 공산계 항일 유격대에 골머리를 앓던 만주국의 일제는 이들의 활동에 종지부를 찍을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전개했다. 노조에[野副] 작전이라 명명한 대 소탕 작전에 만주 일대의 공산계 항일 유격대는 거의 소멸되고 김일성 부대도 소련으로 도주해야 했다.

이 작전의 주요 무대 언저리였던 내두산촌의 뒷산 감시병은 멀리 밀림 한가운데에서 모닥불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모닥불 연기는 연달아 이틀 꺼지지 않았다. 무인지대의 밀림 속에서 계속 연기가 오르는 것은, 그 곳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를 확인한 마을의 무장 민병대는 토벌하기 위해 출동했다. 이들이 무장을 갖추고 출발한 지 불과 몇백 미터를 가지 않아 밀림지대로 들어서는 작은 강을 건널 때였다. 사령관인 한 대장이라는 사람이 짐짓 실수하는 체 하면서 강에 풍덩 빠졌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한 대장은 한참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어젯밤에 아주 흉한 꿈을 꾸었는데, 이제 물에 빠지는 사고까지 만났다. 영 예감이 안 좋다. 우리가 대 참변을 겪을지도 모르는 불길한 징조이다. 우리 모두 처자식이 있는데 오늘 출동은 취소하자."

뻔한 일이지만 이심전심이라고 내키지 않은 출동에 동원돼 불안해하던 대원들은 대찬성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닥불 연기는 토벌 작전에 쫓기다 못해 소련으로 도주 길에 올랐던 김일성 부대가 며칠 간 야영하면서 피운 것이었다. 이때 오합지졸 같은 민병대가 아니라 잘 훈련된 정규 부대가 급습했더라면 밤낮 모닥불을 피울 정도로 경계가 느슨했던 김일성 부대는 전멸을 했을지도 모르고, 김일성도 이곳에서 최후를 맞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랬다면 한국 역사는 지금과 크게 달라져 있을지 모른다.

내두산촌은 관광지로도 한 번 방문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 마을 앞에 끝이 안 보이게 펼쳐진 밀림은 장거리 트랙킹에도 적합하고, 마을 근처에 빠르게 흐르는 강은 계류낚시나 래프팅에도 좋을 듯하다. 마을 근처에 있는 최석도 씨가 발견한 옛 항일 유격대 밀영도 볼거리다. 택시를 타고 옛날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이 젊은 나이에 죽어 묻혔던 이도백하 부근 소사허 무수촌도 가볼 만하다. 특히 인상에 남는 것은 내두산촌 금가루를 가득 뿌린 것 같은 밤하늘의 야경이다. 오염되지 않은 대기가 가득한 고원지대이기에 가능하다.

최석도 씨 집에서 민박하면 그 분의 흥미진진한 호랑이 사냥 이야기도 밤새 즐길 수 있다(연락처는 86[중국 국가 번호]-433-572-7555). 농사일에 바쁜 집이므로 밤에 하는 것이 좋다. 막내아들 최광석 씨와 며느리의 친절함과 집에서 만든 두부 맛이 지금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田


김창원

글쓴이 김창원 님은 공인중개사로서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에서 강, 바다, 호수 경관 전문 부동산 '물빛뜨락'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문의 : 02)749-0396. www.waterview.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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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전원주택] 백두산 기슭의 한민족형 통나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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