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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까닭 없이 외로울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뒷동산 너머 길게 걸린 무지개를 보면 까닭 없이 개운해지곤 했다.
2006년 8월, 2년 7개월의 긴 여정에 종지부를 찍은 KBS-6시 내고향 '백년가약' 프로그램의 마지막 방송 대상지 공주시 편이 생각난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와서 생활하는 많은 결혼 이민 여성을 만났다. 한 필리핀 며느리가 울먹거리며 한 인터뷰 내용이다.

"한국에 온 지 1년이 되어 가는데 아직 친구가 없습니다. 하루 종일 한 마디도 못 한 적도 있어요. 그럴 땐 방 안에서 울기만 해요. 시간은 자꾸 가고 한국 생활은 너무 외롭고 필리핀에 있는 가족이 너무 보고 싶어요. 부모님 생각도 많이 나고 그리워요."

당시 우리는 설문으로 그들의 생활고를 조사해 보고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위의 인터뷰 내용에서처럼 외로움과 소외감으로 더해만 가는 향수병으로 나타났다. 언어와 문화 차이가 만들어 놓은 일상에서의 높은 장벽은 심지어 남편과의 사이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불가항력적인 것인 듯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몸에 밴 남존여비男尊女卑, 가부장家父長 문화와 체면을 위해서 남편이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현실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공주시에서 만난 결혼 이민 여성들

방송 시나리오 중에서 #1
(*시어머니 목소리, 약간 조롱하듯이) 아가야- 니네 나라는 TV가 나오니?
(*남편 목소리, 조롱하듯이) 나오긴 뭐가 나와요- 전기나 들어오나 몰라.
(*시아버지 목소리) 그럼 촛불 켜놓고 사나?
(*놀리듯 같이 웃고)
(*외국인 며느리, 슬프고 화난 듯) 왜 외국에서 왔다고, 왜 아무것도 모른다고 아무렇게나 말하세요? (hold) 무시하면 기분 나빠요. -중략-

이런 것들을 그럭저럭 극복하고, 한국 생활에 익숙해질 때쯤이면 이들에게는 또 한 번의 큰 시련이 다가온다. 한국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유치원을 가고 초등학교를 가면서 그 아이마저 따돌림을 받게 된다. 교육열 강한 우리나라 부모들은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모두 익히게 하고 구구단도 외우게 하고 영어도 가르치지만, 이들은 자신의 서툰 한국어 능력으로 아이 교육을 시키는 것이 버겁고 현실적으로 높은 벽이다 보니, 자녀들은 한국 아이들과 피부색도 조금씩 다른 데다 한국말도 어눌해 놀림감이 된다는 것이다.

방송 시나리오 중에서 #2
#아이 나오고
男나레이터 / (*초등학교 저학년생 목소리로) 엄마, 학교 다녀왔습니다-
# 0점 시험지 내밀고
女나레이터 / (*엄마-외국인 며느리- 목소리로 화내면서) 아니, 받아쓰
기가 빵점이니? 이게 뭐야?
# 아이 말하고
男나레이터 / (*초등학교 저학년생 목소리, 퉁명스럽게) 쳇! 엄마는 나
보다도 한국말 못하면서 왜 그래요?
# 머리에 돌 떨어지고
女나레이터 / (*충격 받은 엄마 목소리로) 제 아이가 던진 그 한마디에
전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hold)
한국말 너무 어려워요. -중략-

자식 교육 못지않게 결혼 이민 여성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요리다.

방송 시나리오 중에서 #3
# 밥 가져오는 며느리
女나레니터 / (*외국인 며느리 목소리, 발음 어눌하게) 여보, 어머니-
식사하세요-
# 가족들 FS
女나레이터 / (*시어머니, 다정하게) 아가야 애썼다.
男나레이터 / (*시아버지, 반갑게) 이거 맛있겠는걸-
# 시어머니 얘기하는
女나레이터 / (*시어머니, 놀라며) 아이구- 얘야! 이거 나 먹으라고 준
거니? 맛이 왜 이래?
# 시아버지, 남편 얘기하는
男나레이터 / (*시아버지, 노여운 듯) 당신은 며느리 교육을 어떻게 시
켰기에 밥도 제대로 못 해?
男나레이터 / (*남편, 변명하듯 ) 하하 - 날씨가 더워서 그런가… 난 입
맛이 통 없네-
# 밥상 앞 우는 며느리
女나레이터 / (*우는 목소리로) 다들 너무해요. 그래도 열심히 만든 건데 -
밥, 된장찌개- 너무 어려워요. (hold)
도대체 한국 요리 어떻게 만들어요? -중략-

우리는 그들에게 한국에서 사는 가운데 가장 좋은 점이 무언지 물어 보았다. 의외로 "남편이 좋아요"였다. 외롭고 괴로운 한국 생활에서 남편은 그나마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해 주는 유일한 친구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스스로 "남편이 좋아요"라고 최면을 걸면서 한국 생활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혼 이민 여성을 위한 학습과 커뮤니티 공간 필요

우리는 그들을 위한 쉼터 겸 만남의 장소를 만들기로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건축물의 기능은 동네 주민들 모두의 의견을 들어서 정해야 하므로 면사무소 직원까지 참석한 자리에서 장시간에 걸친 열띤 토론을 벌였다.

건축물의 기능으로,
·(마을 어르신들) 현재의 마을회관이 너무 낡고 비좁고 해서 마을회관이 필요하다.
·(중국 출신 결혼이민 여성) 마을에 있는 외국인 결혼 이민자뿐만 아니라 근처에 살고 있는 많은 분들이 한글도 배우고 한국 요리도 배우고 할 수 있는 교육적 기능이 필요하다.
·(네팔/일본 출신 결혼 이민 여성) 요리교실이나 한글교실 등이 지자체나 사회단체 등으로부터 지속적인 지원을 받도록 한다.
·(중국 출신 결혼이민 여성) 결혼 이민자들끼리 모여서 어울릴 수 있는 노래방 시설도 필요하고, 한글 교육 등 한국 문화를 공부하는 동안 아기들이 놀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다.
·마을 어르신들과 쉽게 교류도 하면서 때로는 간섭받지 않도록 동선 처리가 필요하다.

이렇게 건축물의 콘셉트를 잡아가는 한편 한국인 마을 주민에게 외국인 결혼 이민자에게 느끼는 가장 마음 아픈 점과 고마운 점에 대해 질문했다.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어린 외국인 며느리들이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에 왔지만, 넉넉지 못한 한국 농촌의 생활고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을 보면 당신의 딸들처럼 마음이 아려 온다는 것. 그리고 아이 울음소리 하나 나지 않고 노인들과 노총각들만 있던 마을에 이들이 오면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나고 또 손주를 안아볼 수 있게 해 준 것이 가장 고맙다고 했다.

기능별 실을 갖춘 2층 건물로 구상

건축물의 콘셉트가 정해지면 다음에 할 일은 예산 편성과 거기에 맞춘 건축물의 규모 및 품질 수준을 생각하고 건축설계를 하는 과정이 남아 있다. 방송이라는 것이 일상의 이런 경제적 접근 방법이나 스케줄을 무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데다 휴머니즘에 마음이 쉽게 흔들리는 필자의 특성과 긴 시간의 종지부를 찍은 프로젝트인지라 예산은 초과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우선 1층을 노유자 시설로 하고 2층은 교육연구 시설이라는 기능을 부여한다. 1층에는 마을회의를 할 수 있는 큰 방을 만들어 평소에는 마을 경로당의 남성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복도 반대편에는 여성을 위한 방과 주방을 두기로 하고 규모는 약 40평 미만 정도로 계획한다. 2층에는 작지만 아기들이 잠자거나 놀 수 있는 공간과 결혼 이민 여성들을 위한 교육 시설을 갖춘 조금은 큰 방을 하나 만들고 한국요리를 배울 수 있는 요리실습실을 두고 25평 정도로 한다. 이렇게 해서 총 연면적 65평 정도로 규모를 정한 후 방송 시나리오 작가들과 협의하여 건축물의 이름을 정하기로 했다.

건축물의 이름을 정해 놓으면 그것이 곧 시나리오의 토대가 되고 건축의 인테리어나 외부 모양도 이에 많이 근접하는 방법을 우리는 취했다.
총 예산은 1억 2,500만 원을 확보했는데 이 가운데 어르신들을 위한 안마 의자, 교육 시설에 들어갈 컴퓨터 및 방송용 소품 등을 위한 경비로 약 1,000만 원을 제외하고 건축비로 충당할 예정이었다.

세계지도 위에 그린 배치 계획도

이 마을에서 만난 외국 출신 며느리들의 국적은 네팔, 일본, 중국, 베트남, 필리핀 등 주로 중앙아시아와 태평양 연안의 동남아시아 출신들이 많았지만 필자는 좀더 확장하여 지구촌의 개념을 넣고 싶어서 종이 위에 먼저 세계지도를 그렸다.

그리고 바닷길을 통한 전면부를 마을 진입로 및 건축물의 주 출입구 등 움직임이 있는 구획으로 정하고 중앙아시아와 북아메리카의 지도를 기준으로 평면을 앉히고자 했는데 이는 대지의 형상상 그 이상은 무리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다음 왜곡과 편견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삶의 애환을 조금이나마 줄여 주고자 완벽한 대칭형의 건축물을 만들고 싶었다.

편견 없는 세상을 상징하는 대칭 구조

평면 계획은 명쾌하게 떨어지는 층간 분리 동선을 기준으로 기능적 실만 나누는 작업이므로 그리 어려울 게 없었지만 예산을 고려해 가능하면 기능을 축소시켜야 하는 현실이 필자의 무모한 감성을 이기고 있었다.

입면 계획은 방송의 비주얼한 면을 생각하고 야간 촬영의 아름다움을 연출하고자 흰색의 대칭성 강한 건물로 만들기로 했다. 이 건물의 이름인 '무지개 세상'이 함축하고 있는 '편견 없는 세상, 희망이 솟는 세상'이라는 느낌과도 통할 수 있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흰색 외벽은 무지개의 7색 빛이 합쳐지면 우리 눈에는 흰색으로 지각되는 것과도 통하는 데가 있다.

실제로 야경을 카메라에 담아 방송에 내보낼 때 아름다웠다. 어떻게 보면 그 아름다움은 단순히 건축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건축물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여기에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투영돼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들 역시 한국의 어머니입니다. 밤이면 남몰래 흘리는 서러움을 걷고 당당한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이 무지개 세상이 다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들의 자녀 역시 한국의 소중한 생명입니다. 무지개 세상이 그들에게 꿈이 있는 미래를 만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방송 시나리오를 제공해 주신 KBS교양국 측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田


최길찬<건축사·시공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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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길찬의 전원주택 설계 노트 6] 무지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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