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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한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것은 재능과 부, 혹은 예술 문화 등 많은 요소가 있겠지만 '인연'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 않을까 싶다.

2002년 월드컵 기간 중에 필자는 경기도 하남시에서 식당으로 사용하던 통나무집을 주택으로 리모델링하고 있었다. 당시 건축주는 종합건설회사와 장학재단을 비롯해 몇 개의 회사를 거느린 회장이었다. 어느 날 건축주가 필자에게 함께 가볼 곳이 있다고 하여 영문도 모르고 따라 나섰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경기도 화성시 송라리 저수지가 보이는 개발제한구역 내 농장이었다. 건축주는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체격 좋은 한 사람을 소개하면서 두 분은 아주 오랫동안 같은 업계(전기공사업)에서 일했고 형제애보다 더 큰 우정으로 두 가문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저기 보이는 저 집을 헐어 버리고 여기에 제대로 된 집을 하나 지어 드리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니 나는 아직 집 지을 준비도 안 됐고 저 집도 새로 지은 지 1년도 안 됐는데… 아직 하룻밤도 지내본 적이 없는 집인데……." 하면서 "그래도 ○회장님이 모시고 온 분이니 저 집이 아까워도 다시 해볼 수밖에" 하면서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건축주(앞으로 지어질 송라리 주택의)는 5자매를 둔 딸 부잣집의 가장으로 한때 경영하던 회사가 어렵던 시절 부인이 직접 회사 일을 챙기면서 회사를 튼튼한 기반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그러다 몇 년 전 부인의 건강 상태가 나빠졌고 급기야 수술까지 받았는데, 퇴원 후 부인은 "죽기 전에 농장에 좋은 집 지어서 살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에 건축주가 직접 목수를 불러 아주 튼튼하게 집을 짓기는 했는데, 그 집을 보고 부인은 맘에 들지 않아 여태껏 하룻밤도 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집터가 명당자리라면서 스님들이 오셔서 절을 짓고 싶다며 팔기를 원했지만 건축주는 나중에라도 와서 살 것을 생각하고 거절했다고 한다.

건축주 라이프 스타일 분석

건축주의 가족 구성원은 60대 후반의 부부와 장모님, 딸 다섯. 딸들 중 막내는 당시에 중학생이었다. 거주하는 곳은 4층짜리 회사 사옥의 3층과 4층이었으며 막내딸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 현재의 집에서 살 계획으로 새로 지어질 집은 당분간 주말주택으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주변 사람들과의 인연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 분이라 전체적으로 실망스런 내용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시간이 꽤 흐른 지금에야 알았지만 어떤 것이 설령 잘못 됐다 하더라도 열심히 하다가 잘못 된 것이나 오류는 이해하는 성격이고, 다만 이런 경우 돈이 많이 들어가더라도 만족스러운 상태로 반드시 수정해야 한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데, 실례로 농장에는 집 잃고 떠돌던 개를 데려와 손수 털을 깎아주고 식사도 함께 할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돌본다. 한 번은 농장에 매어 두고 키우는 암컷 개가 임신해 강아지를 여러 마리 낳았다. 건축주는 "개 한 마리 건사를 못해서 임신시켰다"며 아주 호통을 쳤다. 이유인즉 살아있는 생명체는 반드시 거두어 잘 키워야 하는데 그 많은 새끼들을 다 돌보려면 또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써야 할까 하는 생각에서 그랬던 것이고,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건축주는 조경에 대한 식견이 풍부했다. 회사의 복도나 사무실, 집 안까지 수많은 화분으로 장식했다. "이 화분은 10년 전 ○회장께서 주셨고, 또 이 화분은 5년 전 누가 주셨고, 이 나무는 금송인데 어디서 구해 왔으며 또 이 감나무는……." 그 많은 사연을 가진 식물을 죽이지 않고 오랫동안 그 사연과 인연을 간직한 채 잘 가꾸어 왔던 것이다.

·손주들을 위하여 별도의 놀이터를 만들기 위해 아직도 미완성된 계획을 추진 중으로 손주들이 주말이면 농장을 찾아와 조부모를 뵙도록 하는 것을 상례화하는 것을 보면 가족 구성원 내 어른으로서의 위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내에 대하여 그간의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해 많은 것을 하려고 하지만 정작 실행에 옮길 때에는 낭비적 요소를 싫어해 가급적 직원들과 함께 직접 하려고 든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부인은 썩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회사 구내식당과 집에서 먹는 반찬용 고추, 호박, 쌀, 상추 등 대부분을 농장에서 부인과 함께 가꾸어 조달하며 큰 결정 사항 외에는 회사일은 직원들에게 맡기는 편이었다.

건축주의 요구 조건

·건축주의 요구 사항은 "알아서 좋은 건물 지어주세요" 외에는 없었다. 사실 건축설계를 하면서 이런 경우 좋은 점도 많지만 일은 오히려 더 어려워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자재 선정에 대해서도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 호화스러워 보이는 형태의 집이나 노출콘크리트 같은 현대적인 집보다는 일반적인 단독주택을 원했다.

대지 분석 및 배치 계획

·대지에서 정면으로 송라리 저수지가 보이도록 배치할 경우 남향 배치에 뒤쪽은 산이고 어려움이 없는 땅이다.

·다만, 건축물의 뒤쪽에 산과 만나는 곳이나 대지 주변으로, 역 ㄷ자 형으로 이루어진 산 능선과 만나는 곳곳에 조경수 및 유실수들을 아주 잘 가꾸어 놓았기에 건축물은 전면뿐 아니라 건축물의 좌측면으로 넓게 펼쳐지는 농장과 우측 뒤를 돌아가는 곳들을 향해 모두 열린 형태 또는 접근이 가능하도록 동선이나 시선을 교차시켜야 한다.

·내부 주거공간은 최대한 방을 많이 만들어야 하지만 너무 답답하게 작은 방들이 겹치는 것은 피하고자 하며 1층에 부부침실만 두고 2층에 막내딸을 위한 전망 좋은 방 1개와 나머지 방 2개 정도면 200㎡(개발제한구역이므로 총 면적의 제한)가 될 것이다.

·동선이 막히더라도 시선이 통과하도록 한다. 시선의 통과는 열십十자 형으로 뚫리도록 해 현관에 들어서면 뒤쪽 산 조경이 보이고 뒤쪽 산에서 작업할 때라도 앞마당이 보이고 서쪽에서 바라보면 동쪽의 정원이, 동쪽에서는 서쪽의 농장이 보이도록 배치한다.

·설계 당시에 건물 우측에 해당하는 동쪽 마당을 향해 나갈 수 있는 분합문(드나드는 큰 창)을 설치하고 여기에 정원을 끌어들여 덱을 계획한다. 이는 남측에 분합문을 둘 경우 여름철이면 뜨거운 남쪽 햇살을 피하기 위하여 늘 커튼을 치거나 차양을 설치해야 하는 문제점이 있기에 남측으로는 조망용 창문 정도만 둔 것. 따라서 벽난로도 남측으로 배치하고 주된 창을 동측으로 열어 두기로 한다.
또한 거실과 맞닿은 동측 덱은 평면상 뒤쪽에서 동측 마당을 향해 뻗어나간 식당에서 볼 때 남측이 되기에 덱의 끝에 고정형 큰 창을 두고, 덱의 끝 부분에 오죽烏竹을 심어 놓아 식당에서 스크린을 통해 실루엣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오죽을 감상하도록 한다.
한편 식당의 2층 부분에 좀 큰 덱형 발코니를 설치한다. 이곳에 올라서면 여름철 1시 이후의 뜨거운 햇살은 자연스레 1층 지붕에 가리고 남측의 주된 정원과 식당 앞의 키 큰 대나무의 흔들림이나 저수지가 모두 한눈에 들어올 것이다.

·감수성이 강한 막내딸을 위해 별도의 전용 발코니를 계획한다. 배치 계획상 어쩔 수 없이 서쪽 위치(안방 위)이지만 오히려 서측의 농장이 한눈에 들어와 훌륭한 조망을 확보한다. 다만 서쪽의 긴 햇살은 최대한 피해야 하기에 남측에 주된 창을 두고 서측으로는 예쁜 베이-윈도우(삼각형 돌출창)을 두기로 하되, 그 곳에 서면 농장에 있는 목련꽃이 한눈에 들어오고 가을 스산해지는 저녁나절 허공에 매달리듯 열린 선홍색 감들을 볼 것이다. 그러다 달이 뜨면 또 어떤 생각을 하느라 턱 괴고 앉아 있으려나.

·배치 및 평면 계획을 하다 보니 1층 거실의 천장고를 확보하고자 지붕을 높여야 하지만 그 지붕은 2층 서재 겸 거실에서 바라보는 전망을 방해할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2층의 서재 겸 거실 방을 다른 방이나 복도보다 1계단 높게 만들기로 한다. 천장에는 천창을 설치해 남쪽을 향한 개방감 부족을 해결. 서재 겸 거실과 2층의 뒤쪽 방은 식당 위 발코니를 공동으로 사용 가능하도록 한다.

입면 및 외부 마감에 대한 계획

·외부 마감재는 따뜻한 계열의 벽돌을 기본으로 필요한 부분만 목재 사이딩으로 마감한다. 지붕재는 전면에서 바라보이는 둥근 지붕 및 현관의 지붕은 동판 각재심기로 하고 나머지는 황금색의 아스팔트 슁글을 사용한다.

·이 집에 대하여 앞뜰과 뒤뜰을 나누는 복도 부분은 모두 커튼-월로 처리해 개방감을 최대로 확보한다.

·대지는 어머니가 아이를 감싸는 듯한 ㄷ자 형이지만 이로 인하여 습기가 많은 장마철에는 습해질 우려가 있어 1층 바닥을 약 1m 정도 높게 계획하다 보니 수직적으로 비례감이 떨어지는 느낌이 어쩔 수 없다. 이 것을 해결하기 위해 수평적으로 강한 선이나 재료 분리가 필요하다고 판단돼 전면 덱의 핸드레일을 없애고 마천석(검은색 돌)을 버너로 튀겨서 거칠지만 부드러운 질감의 회색 빛깔을 띄는 장대석(세로로 길게 만든 판상형 돌)을 만들어 마치 핸드레일의 수직선 같은 느낌을 주도록 한다.

·이렇게 해 놓고 보니 전체적으로 역동성이 부족한 너무 조용한 집이 될 것 같아 현관 부분엔 씨블랙(검은 대리석) 물갈기(광이 많이 남)로 튀는 색상을 적용하고 지붕의 각과 90도가 되도록 벽체를 기울여 놓았다.

건축공사 시행 및 계속되는 인연

건축주가 매일같이 농장으로 출근해 공사 기간 내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것 같았는데 막상 공사가 시작되자 현장 동측의 정원에 대형 천막을 설치하고 그곳에 의자까지 준비해 놓고는, "덥고 지칠 때 이곳에 앉아서 현장 감독하십시오. 일이야 작업하는 분들이 알아서 하실 테니까" 했다. 또한 현장 작업자들을 위하여 주변에 키 1m 정도 되는 쇠꼬챙이에 재떨이 대용으로 빈 음료수 캔을 매달아 주는 것으로 현장 감독을 끝냈다. 그리고 일이 끝날 때쯤 함께 소주 한 잔 하러 가는 정도 외에는 공사가 끝날 때까지 작업자들이 맘 편하게 일하도록 배려했다.

공사가 끝난 후 한해 겨울이 지나면서 문제가 생겼다. 건축주 부인이 수술 후 절절 끓을 정도로 따뜻한 방에서 지내야 하는데 이 집은 바닥 온도가 그렇게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곳저곳 점검을 해 보았다.

거실의 경우 주방/식당과 연결돼 있으며 거실 바닥은 원목마루를, 주방/식당에는 타일을 시공했는데 타일 부분은 따끈따끈한데 마루 부분은 그리 따끈따끈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아뿔싸! 값비싼 수입 원목마루는 일반 온돌마루보다 두꺼운 데다 바닥에 스펀지 같은 쿠션 층이 있어서 바닥의 열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외국은 바닥 난방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열전도율이 적은 바닥 마감재가 유리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바닥 난방을 하는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몇 년이 지나도록 이것 때문에 항상 건축주 내외에게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지금도 길 가던 사람이 집 구경하러 오면 친절하게 안내해 주고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누가 왔다 갔는데 최 사장에 대해 설명하고 연락처를 알려 줬다"고 말한다.

필자가 어쩌다 방문하면 꼭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최 사장 왔어. 같이 점심 먹으러 가려는데 당신 시간 있어요?" 대부분의 점심 메뉴는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간장게장이고 여기에 건축주가 좋아하는 오가피주 한 병이 덤으로 준비된다. 재작년에는 넷째딸까지 결혼시키고 이제는 손주들도 더 늘었다. 부인께서 맘에 들어 하시지 않는다는 까닭에, 손주들을 위해 만들던 놀이터는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다. 부인은 회사일에서 손을 놓고 주로 농장을 돌보다 보니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 전해 듣는다.

필자가 이 인연을 더 소중하게 끌고 나가기 위해서는 아직도 미해결된 부분을 올해 겨울이 오기 전에 해결해야 할 것이다.
지금 연결돼 있는 많은 또 다른 인연들-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는-을 위해 해야 할 다른 것이 있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田


최길찬<건축사·시공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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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길찬의 전원주택 설계 노트 8] 인연因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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