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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중반부터 아름다운 계곡 경치 좋은 산비탈을 끼고 동호인 단지나 전원주택 단지라는 이름으로 많이들 개발되어 왔다.
논과 밭이 메워지고 산이 깎이면서 태곳적부터 터를 지켜오던 바위덩어리는 흰색의 조경석으로 대치되고 솔숲은 보기에도 깔끔한 잔디와 멋지게 비틀어진 소나무에 자리를 내어주고 그곳을 지배하던 옛 땅주인의 털털거리던 경운기 대신 디젤엔진이 장착된 4륜구동 RV차량이나 외제차가 다니는 길로 포장이 되고 있다.
이웃한 옛 마을에는 젊은이들이 빠져나가니 아이들 울음소리 웃음소리가 없는 적막한 마을로 되어 가는 한편, 동호인 단지에는 주말이면 손주들을 데리고 젊은 부부들이 찾아든다.
그러던 전원주택 단지들도 10여 년이 지나면서 쇠락의 길을 향하거나 아직도 활성화가 되지 않아 을씨년스런 빈 땅들이 지배하는 명목상의 동호인 단지가 되어 입주한 사람들에게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곳들이 속속 나타나게 되었다.
아마도 수요 예측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로 과잉 공급된 택지의 양도 문제지만 그보다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공급자 위주의 이름뿐인 동호인 단지로 개발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목현리 동호인 단지 4채의 주택

경기도 광주시 목현리 '봄마을'은 성공한 동호인 단지의 전형은 못되더라도 실패하지 않은 아름다운 동호인 단지의 한 예다.

2001년쯤이었다. 필자의 한 고객의 소개로 부부 몇 쌍이 찾아왔다. 지금은 손을 놓았지만 강남에서 살 집을 직접 짓는 취미 활동을 하거나 아예 업으로 이런 일을 한 여성들이면서 같은 교회에 다니는 분들 같았다.

나이 60을 바라보거나 50대 중후반의 지긋한 나이에 관록이 상당한 분들이라서 그런지 당시 근근이 설계를 해서 먹고살던 필자에게 설계비를 깎는 솜씨와 그러면서도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해 주는 마음씨 등등 여러모로 내공이 대단한 분들이었다.

어찌 되었거나 설계계약을 마치고 일을 착수했는데 처음에는 1, 2, 3, 4, 7호를 동시에 진행하기로 했지만 이중 7호집이 진행을 중단하고 나머지 4채만 진행되었다. 조건은 건축설계만 해주고 감리 및 인허가 행정 및 시공 관련 행위는 모두 자신들이 직접 한다면서 계획만 잘해서 도면 몇 장만 제공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이 설계다.

우선 설계를 위하여 현장을 방문했다. 아~ 이건 정말 삭막할 정도로 골짜기 깊은 곳에 단지의 우측은 20m가 넘는 낭떠러지가 있고 단지는 북쪽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은가.
대지의 뒤쪽은 산허리를 잘라 만든 2~4m 높이의 콘크리트 옹벽이 단지를 몰아내듯 계곡을 향해 활처럼 휘어져 있었다. 다행히 2호집 쪽 남쪽 산 계곡의 경사가 완만하여 해를 받기엔 큰 부족함이 없을 듯 하였다.

오랫동안 형제 이상으로 의좋게 지내던 이들이라 함께 부지를 물색하고 땅을 개발하였고 오랜 우정이 상하지 않도록 사다리타기를 하여 땅을 선택했다 한다.

"산으로 둘러싸인 부지에서 바라본 물안개 짙게 깔린 풍경은 한 폭의 산수화였지요. 부지 앞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는 도롱뇽이 살고, 제때를 만난 메뚜기들이 사방에서 뛰고, 간간이 꿩이며 산토끼들이 눈에 띄었지요. 이곳이 전원이구나 하는 생각에 전답 1,900평을 평당 30만 원에 구입했지요.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산비탈이라 토목 공사비로 평당 25만 원이 들었지만.....(월간 전원주택라이프 2006년 6월호 기사 발췌)"

프라이버시 보호와 소통의 기능을 동시에

한 채 한 채 설계를 시작했다.
단지의 활성화 및 우정을 위하여 집의 수준이나 외장형태 마감재 등을 비슷한 형태로 하도록 유도하였는데 이는 추후에 이 동네에 그려질 집들에 대한 무언의 지표며 경고이고 필자가 그 설계를 싹쓸이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는 일이기도 했는데 이때 필자의 단지 내 주택 설계목표는 이러했다.

첫째, 지붕은 경사도가 너무 크지 않도록 하며 너무 진하지 않은 색상으로 한다.
둘째, 외장재는 벽돌과 나무를 사용한다.
셋째, 너무 화려하지 않도록 한다.
넷째, 각 주택 별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되 '아무개야-' 하고 소리치면 다른 집에서 들을 수 있고 이웃집에 사람이 드나듦을 서로 알 수 있도록 대문의 방향과 거실의 방향 또는 마당을 배치시킨다.

1호집-해피네

지금은 권사이지만 당시엔 집사였던 건축주는 처음 함께 필자를 찾아온 3가족 중 가장 젊은층으로 필자와의 연락 및 설계진행 스케줄 등을 논의하고 전달하는 일종의 총무역할을 맡아 했다.

가족은 부부만 와서 사는데 몇 년간은 서울 집과 이곳을 반반 정도 생활할 예정이었다. 이 집의 위치는 마을 진입로를 따라 죽 들어오면 정면에 있고 진입로의 경사가 심하기에 진입로를 따라 좌우의 집들은 높은 옹벽을 쌓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자동차 액셀러레이터 페달를 밟아 한숨에 올라서면 사실상 단지 내 첫 집에 해당한다.

집은 마을 정면을 향해 시선을 다 줄 수 있도록 방향을 잡고 보니 외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거실의 전면에 벽난로를 두고 그 양쪽으로 창을 두기로 했다. 사실 뒤쪽의 활처럼 휘어져 들어온 옹벽이 마음에 걸려 건물을 남향으로 앉힐 수 없었고 뒤쪽 옹벽에 맞대듯 가로로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건축주는 식당에 앉아 길게 세로로 만들어진 창을 통해 마을 입구 쪽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 좋다고 한다. 마을의 관리사무실 기능이라고 할까.

2호집-왕언니네

사실상 집을 제일 먼저 지어 마을의 터를 잡고 기를 충전시킨, 건축주의 연령도 가장 높은 명실공히 터줏대감 1호집이다.

사다리타기로 택지를 선택해 당사자도 어쩔 수 없는 점을 이해는 하지만 단지의 맨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보니 당시에는 쓸쓸할 것 같은 느낌이 강했다. 그래도 완전 남동향의 집을 지을 수 있는 터였다. 다만 집이 남동향으로 앉을 경우 마을을 외면하는 배치가 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남서쪽으로 펼쳐지는 가파르지 않은 계곡의 아름다움과 전면의 계곡의 물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터였다.

얼마 전 방문했을 때도 예쁘게 만든 떡을 내오는 인자함처럼, 설계도면에도 수월하게 수긍해 준 점이 인상적이었다.

건축을 직접 했을 정도로 근면함이 몸에 밴 건축주였는데 지금도 매일 봉사활동 차 서울로 다닐 때 승용차를 이용하지 않고 2㎞ 정도 되는 길을 걸어 나가 마을버스를 탄단다. 그 자체가 운동이라고 사는 곳을 자랑한다.

봉사활동이 끝나고 집에 도착하면 피곤함에 한숨 자야지 했다가도 막상 집에 도착하면 텃밭으로 나간다고 한다. 고추며 가지, 오이, 고구마 등을 직접 일궈 먹는데 첫해에는 네댓 평 텃밭을 일구었는데 밭일에 선수가 되다 보니 십여 평으로 커졌다고.

3호집-노 선생님 댁

이 마을에 깃들어 사는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이지만 이 3호집 건축주 부부는 불교 신자다. 마을에 들어서면 맨 처음 '봄마을'이라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오고 길 좌우로 높은 옹벽과 함께 지하주차장이 눈에 들어온다. 한눈에도 그 위로 대지가 있을 것이고 주택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요즘 이 부부는 서울이나 읍내에 나갔다가 물건을 살 때 같은 것을 몇 개씩 사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왕언니네 한 개, 해피네 한 개, 조카네도 주어야 하고, 그리고 우리도 한 개. 늘 함께하기에 마을일을 의논하기 위해 따로 모일 일도 없다 한다. 함께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가족들이 다 모여 삼겹살 파티도 연다.

다른 집들은 2층집으로 지었지만 이 집은 1층이다. 봄마을로 향하는 계곡 밑에서 한길 낭떠러지 위로 쳐다보면 첫 번째에 해당하는 집. 이 집을 2층으로 누각같이 세우면 왠지 모르게 더 불안해 보일 것 같아서 1층으로 계획했던 것이다. 다행히 이 건축 의도를 건축주도 쉽게 이해했다.

평범하고 편안한 1층집. 북서쪽의 겨울바람이 차가울 것 같아 다용도실, 드레스룸과 같은 서비스 공간을 북서쪽으로 위치시키고 조금이라도 마을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도록 했다.

4호집-조카네

이 집은 2005년이 되어서야 설계를 하고 집을 지었다. 현직 교사로 있는 건축주 두 분은 자매인데 자매가 함께 살 집을 짓겠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몇 년 늦게 짓는 집이다 보니 처음 집들보다는 좋을 것이라 예상했다. 왕언니네 집 앞 개천과 바로 만나면서 왕언니네를 바라보도록 앉혀야 할 것 같았다. 이 동호인 단지를 시작한 이들은 도곡동에 모여 살았고 해피네 덕분에 처음의 어려움 없이 이 땅에 들어올 수가 있었으며 건축 시공자도 해피네로 정해 놓고 설계를 시작했다.

맨 처음 해피네 집을 지을 때와 또 다른 집을 지을 때도 목수반장과 언쟁이 있었는데 이 목수반장은 상당한 목공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공 시 설계도면을 조금씩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변경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설계를 시작하기 전 권사(해피네)는 "이번에는 설계도면대로 그대로 하라고 시킬게요"라며 웃었다. 아마도 필자의 설계도면만 곤지암, 오포, 양평 등지에서 7채 정도를 시공했지만 설계도면대로 시공한 경우가 한 번도 없었던지라 건축주와 권사에게 "또 그 목수분 데리고 할 겁니까? 또 도면 바꾸어 하시게요?" 하며 그렇게 하려면 못하겠다는 먹히지 않는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설계를 마치고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어느날 현장을 방문했더니 "보세요. 설계도면대로 그대로 시공하고 있지요?" 했다. 설계 내용을 바꾸어 하는 경우는 대체로 그 부분 시공이 까다롭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잘 계획된 설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대로 하는 것이 대체로 균형이 잘 나오기 때문에 강조하는 것이다.

훌륭하지는 않지만 원작대로 시공된 이 집은 시집간 두 딸이 치매를 않는 아버지(85세)를 위한 휴식 공간으로 집을 활용하고 있어 '심청이네'로 통한다.

한번은 큰딸이 한번은 작은 딸이 아버지를 모시고 번갈아가며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서 이곳까지 주말마다 오간다. 이곳에 오면 아버지가 정신이 맑아지고 혈색이 돌면서 걸음걸이도 한결 편안해진다고 하니 듣는 사람도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집들이 들어서고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지명도 바뀌었다. 이곳은 용샘골, 용생골 혹은 용산골이라 불려 왔는데, 옛날 마을 아래 샘에서 용이 나와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노후의 삶을 살고 있지만 새로운 터에서 새롭게 생활을 시작하는 곳이고 젊고 희망차게 살기 위해 '봄마을'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 이름처럼 오래도록 행복한 웃음이 끊이지 않았으면 하는 필자의 바람이다.田


최길찬<건축사·시공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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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길찬의 전원주택 설계 노트11] 봄마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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