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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원 박도수 가옥提原朴道秀家屋(중요민속자료 제137, 충북 제천시 금성면 구룡리 305)은 안채 상랑채에 쓰여 있는 同治三年甲子五月初三日寅時立柱五日未時上樑(동치삼년갑자오월초삼일인시입주오일미시상량)이라는 묵서명에서 보이듯 1864년에 지은 집이다. 그러나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의하면 사랑채와 아래채를 20세기 초에 지었다고 한다.

 최성호   사진 홍정기

안채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은 모두 초가다. 박도수 가옥은 소박하게 지내려 했던 모습이 여러 곳에서 묻어난다.

박도수 가옥은 중부지방의 전형인 ㄱ자 형태를 보이는 안채에 사랑채와 아래채가 둘러져 안마당을 형성하고 사랑채 바깥에 담을 둘러 바깥마당을 이루고 있다. 80년대 초 조사해 작성한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의 배치도를 보면 대문간채는 원래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안채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은 모두 초가다. 한때는 사랑채에 시멘트 양기와를 얹은 적도 있었으나 원래 초가였다는 증언으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고쳤다고 한다.
 
안채는 전면 다섯 칸의 몸채 좌측에 세 칸 날개채가 붙어 ㄱ자 형태를 이룬다. 날개채는 부엌 두 칸과 안방 한 칸으로 구성했는데 안방은 몸채 쪽 퇴칸까지 뻗어 한 칸 반규모다. 안방 위로 윗방이 있다. 형태로만 따지면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구조지만 안채는 다른 집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여러 특징이 있다.

안쪽으로부터 광 두 칸, 방 두 칸, 부엌 한 칸으로 구성된 아래채.
가옥 오른 편에 있는 출입문으로 원래는 외양간으로 썼던 곳이다.

고방, 대공에서 보는 특이한 모습에 눈길
우선 눈에 띄는 것이 독특한 평면이다. 대청 건너편에는 건넌방이 위치하는 게 보통이나 이곳에는 고방을 뒀다. 귀중한 것을 건사하고자 대청에 붙여둔 것인데 ㄱ자 평면집에서는 극히 이례적인 모습이다. 대청에 붙여 고방을 두는 경우는 안채 평면이 ㄷ자 형태일 때이며, 이때에도 건넌방 윗방에 고방이 자리하기 마련이다. 고방문은 현재는 합판으로 돼 있지만 예전에는 널빤지로 된 판장문이었다. 툇마루 쪽으로 창날 끝 날이 몇 가닥으로 갈라진 살창을 설치했고 지금은 화장실로 개조해 사용한다.
 
다음은 마룻대를 받는 짧은 기둥인 대공이다. 기와집은 판대공이 일반적이고 그렇지 않다면 동자주로 대공을 받친다. 그러나 이곳에는 첨차를 사용했다. 대들보 위에 소로를 올려놓고, 그 위에 첨차를 설치하고 다시 소로 5개를 놓아 장혀를 받치고 있다. 한편 중도리를 인장혀 한가운데에는 다시 이를 받치는 소로를 설치했는데, 이것은 도리가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한 보강책으로 판단된다. 목수가 기존 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했으나 구조적으로 판대공 형식보다 유리할 것은 없어 보인다. 어쨌든 이렇게 첨차로 도리를 받치는 형식은 지금까지 다른 곳에서 보지 못했다.

유일하게 기와를 얹은 안채는 삼량집임에도 팔작지붕을 한 특이한 모습이다.
안채에서 본 사랑채 후면.
내외를 두고자 설치한 판장벽. 낮고 짧아 엄격한 의미의 내외벽 역할을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삼량집임에도 팔작지붕을 얹은 안채
안채 구조 역시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삼평주 삼량집이다. 이 집처럼 퇴칸이 있는 경우 대부분 가운데 기둥을 고주로 올리고 오량집으로 계획한다. 또한 삼평주집이라고 해도 대부분 보 위에 동자주를 세워 중도리를 걸고 오량집으로 만든다. 그러나 여기는 모든 기둥을 평주로 하면서 삼량집으로 만들었다. 칸 반 규모의 집에서 삼량집으로 할 경우 서까래가 길어져 하중 부담이 커져 부재를 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삼량집을 고집한 이유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또한 삼량집은 맞배지붕 또는 우진각지붕으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나 집은 오량집에서나 볼 수 있는 팔작지붕을 이고 있다. 오량집은 중도리에서 외기를 낸 곳에 박공을 올려 팔작지붕을 구성하지만, 이곳은 삼량집에 팔작지붕을 만들고자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지붕 구조를 만들었다. 어떻게 팔작지붕을 올렸는지 연등천장인 부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엌 지붕 구조를 보면 우선 휜 부재를 종도리로 사용하고 외부 마구리는 외벽에 설치된 도리에 얹었다. 도리 위에 추녀를 걸도록 짧은 부재를 얹고 마족연(서까래 뒷부분을 잘라 추녀에 차례로 붙이는 것)으로 지붕 면을 구성한 후 그 위에 박공 면을 만들 부재를 얹어 팔작지붕을 만든 것이다. 정상적인 팔작지붕 구조는 아니지만 나름의 기술로 오량집의 전유물인 팔작지붕을 삼량집에 적용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집을 지은 목수 솜씨가 대단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기가 가진 재주 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한 노력은 곳곳에서 접할 수 있다.

외부에 설치한 초가를 얹은 창고.
방으로 개조해 쓰는 아래채는 측면 칸 반 정면 다섯 칸 규모다.
박도수 가옥 입구.

성주를 모신 보기 드문 집
박도수 가옥은 사당을 세우지 않고 안채 대청 뒤쪽에 감실(신위를 모셔둔 곳)을 만들어 신주를 모신다. 그리고 안방 대공에는 한지를 접어 만든 성주(집에서 모시는 신으로 건물을 수호하며 가신家神가운데 맨 윗자리를 차지한다)를 모시고 있다. 성주를 모시는 방법은 이렇게 한지를 접어 대들보나 대공에 묶어두거나 독에다 쌀을 넣어 집 한 귀퉁이에 두기도 한다. 여러 집을 돌아다녔지만 성주를 모시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은데 아직 나름 전통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안채 부엌 중문 기둥 바깥에는 내외를 나누고자 판장벽을 설치했다. 내외 구분을 위해 중문을 두칸으로 만들어 돌아들어 가게 하거나 내외벽을 만들어 시야를 차단하곤 했는데 이 집에서는 후자를 택해 내외벽으로 판장벽을 이용했다. 그러나 벽이 시야를 차단하기에는 짧고 낮아 엄격한 의미의 내외벽이라 하기에 힘들다. 심리적 안정감을 주려는 의도 정도로 보인다. 이것만을 놓고 봤을 때 안팎구분이 엄격한 가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래채는 측면 칸 반 전면 다섯 칸이다. 안쪽으로부터 광 두 칸, 방 두 칸, 부엌 한 칸으로 과거에는 두 칸 방 뒤에 툇마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툇마루까지 방으로 개조해 사용한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아래채 구조가 보기 드문 도리가 4개인 평사량집라고 하는데 확인하지는 못했다.

굴뚝 위 지붕 모양을 목재 맞배지붕 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모습으로 제법 운치가 있다.
안채 측면과 담 사이로 길게 항아리가 늘어섰다.
평면도

권위를 벗고 소박하게 꾸민 사랑채
또하나재미있는부분은나무판재로만든굴뚝이다. 주인말로는원래부터 그랬다고 하나 강원도 산 중에 위치한 집에서 굴뚝을 나무로 만들지 이처럼 평지에 있는 집에서는 흔한 것이 아니다. 연가(굴뚝위에꾸밈으로 얹는 지붕모양의 물건)를 나무로 맞배 지붕형식으로 한 것이 나름 운치가 있다. 세련된 맛은 없지만 푸근한 느낌을 주는 굴뚝이다.
 
박도수 가옥은 집 배치나 구성에서 권위를 내세우는 종가宗家나 사대부 집이 아니라 살림집으로 지어진, 전형적인 농가의 체취가 느껴지는 집이다. 이런 모습은 사랑채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우선 사랑채가 사대부 사랑채와는 달리 매우 소략하게 지어졌다. 중문과 동시에 지은 사랑채는 전체 규모가 다섯 칸이다. 광, 중문, 외양간으로 사용하는 세 칸을 제외하고 나면 사랑채는 고작 두 칸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두 칸 모두 방이고 대청은 한 칸도 없다. 따라서 박도수 가옥의 사랑채는 사대부가에 반드시 필요했던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제사와 차례를 지내고 손님을 접대하는 일, 양반집에서 지켜야 했던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순수하게 바깥주인의 생활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런 실용적인 모습은 중문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중문칸에는 사랑방을 위한 아궁이가 설치돼 있는데 대부분 부엌 공간 확보를 위해 중문을 칸 반 규모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외형적인 모습에 치중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사랑채를 초가로 꾸민 점도 근검한 생활을 하려했던 의도로 보인다.

좌측 아래채와 우측 사랑채 사이에 예전에는 외양간이 있었다고 한다.
부엌과 가까운 곳에 뗄감이 높게 쌓였다.
연등천장인 부엌은 마족연으로 지붕면을 구성한 후 그 위에 박공면을 만들 부재를 얹었다. / 대들보 위에 소로를 올려놓고 그 위에 첨차를 설치하고 다시 소로 5개를 놓아 장혀를 받치고 있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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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근검한 생활이 곳곳에 묻어나는 제천 박도수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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