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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건축 Dwelling and Architecture

양성필 건축사(건축사사무소 아키제주 대표)
     www.archijeju.com  064-751-9151

대화와 선언
‘less is more’는 위대한 근대건축가인 미스 반 데로에Mies van der Rohe(1886∼1969)가 자신의 건축 디자인을 설명하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가변적인 공간개념으로 유명한 그는 형태뿐 아니라 공간을 구상함에 있어서도 많은 것을 넣으려 하기보다 함축적인 디자인을 추구했으며, 공간을 다양한 기능으로 세분하려고 하기보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하나의 공간에 담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미스의 선언은, 장식이 하나도 없이 간결한 그의 디자인을 설명하는 아주 적절한 표현으로도 알려져 있죠.

포스트모던 건축가로 알려진 로버트 벤추리Robert Charles Venturi Jr.(1925∼2018)는 미스의 선언에 대응해 ‘less is bore’라고 말했습니다. 미스 반 데로에뿐만 아니라 근대건축가들이 추구해 온 장식 없는 모던한 디자인이 재미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식으로 비판하기 위한 말이었죠. 자신의 디자인과 철학을 이렇게 하나의 명쾌한 선언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턴지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건축이 무엇인지, 이렇게 선언적으로 말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리고 ‘그게 건축을 설명하는 올바른 태도일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건축사의 작품도 그게 자신의 집은 아니죠. 그런데 건축사가 일방적으로 ‘이게 좋다’, ‘저게 좋다’하고 선언적으로 말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요. 흔히 하는 말로 ‘내 집 갖고 네가 왜 그래’라고 의뢰인은 말할 수도 있어요.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모두 취향이 다르듯이 건축사도 의뢰인도 제각기 취향이 다른 사람이죠. 건축사와 의뢰인의 취향이 다르다는 것은 앞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가장 큰 난관입니다.

이 난관을 풀어나갈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의뢰인이 자신과 취향이 비슷한 건축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건축사가 자신의 취향과 비슷한 의뢰인을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고풍스러운 장식으로 집 안을 꾸미기를 원하는 의뢰인이 미스 반 데로에와 같이 모던한 디자인을 추구하는 건축사를 만나면 자신이 원하는 집을 요구하기가 얼마나 어렵겠어요. 반대로 말끔한 모던디자인을 선호하는 사람이 로버트 벤추리와 같이 장식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건축사를 찾아가도 힘이 들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기가 어떤 디자인을 추구하는지를 공개하는 것은 건축사의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건축사의 능력도 소비자를 기다리는 하나의 상품이니까요. 건축사를 선택할 의뢰인은 건축사가 어떤 취향을 가졌는지,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집을 잘 디자인할 수 있을지를 알 수 있어야 하니까요. 어쩌면 집을 지을 때 의뢰인이 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집을 같이 고민하고 구상해줄 건축사를 선택하는 일이 아닐까요.

물론 디자인이 훌륭한 건축사를 선택했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저절로 다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건축사는 의뢰인의 생각이 좋은 집을 짓는 데 적절한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아무리 의뢰인이 정말 좋은 집을 갖고 싶어서 오랫동안 자기 집에 대해 고민했다고 해도 몇십 년간 공간 계획을 작업해온 건축사처럼 생각을 구체화하는 데 익숙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도면을 그리는 기술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구체적인 사물로 그려내려면 단순히 도면을 그리는 기술이 아닌 생각을 합리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햇빛이 잘 들고 전망이 좋은 화장실을 갖고 싶다고 했는데 설계하면서 다른 공간을 배치하다 보면 정작 화장실은 외기에조차 면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어떤 꿈을 포기하고 어떤 꿈을 유지할 것인가를 판단해야 합니다. 건축사는 도면으로 그려가면서 그 꿈을 성취거나, 혹은 포기해야만 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됩니다.

그럼 건축설계를 선언적으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것을 조금은 이해하셨는지요. 물론 디자인에 대한 중요한 가치는 있습니다. 저도 아주 싫어하는 디자인과 해보고 싶은 디자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좋은 집은 건축사의 취향이나 의뢰인의 결정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좋은 집을 디자인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건축사의 훌륭한 철학과 일방적인 선언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의뢰인과 건축사 간의 진솔한 대화입니다.

그런데 선언은 지향하는 바와 답이 있지만, 대화는 정해놓은 답이 없지요. 지루하지만 답이 나올 때까지 대화하는 것, 저는 그게 가장 좋은 설계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때론 장식이 없는 모던한 집이 되기도 하고, 때론 이런저런 장식이 붙은 고전적인 집이 되기도 하죠. 의뢰인과 건축사가 대화하는 과정 속에서 둘 다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건축물이 예술작품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해서 탄생한 건축물은 누구의 작품일까요. 글쎄요. 누구의 작품이라는 게 중요할까요. 정말 내가 살 집이 예술작품이 되는 게 중요한 걸까요. 집이란 작가에 의해서 창작되는 것이 아니라 건축주와 의뢰인 사이의 대화 속에서 스스로 태어나는 것으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저는 건축을 통해서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냥 좋은 집을 짓고 싶어요. 좋은 집이 될 수 있다면 남의 생각을 빌리기도 하고 의뢰인의 생각을 엿보기도 하고 과거의 지혜를 탐닉할 수도 있어요. 예술작업엔 독창적이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좋은 집을 짓기 위해서 반드시 독창적이란 것을 전제조건으로 삼을 필요는 없어요. 저는 세계의 아름다운 도시들이 비슷한 집들로 가득 찬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독창적인 건축물로 가득해서 혼란스러워져 버린 서울이나 헤이리 같은 도시보다 베니스와 로마 같은 도시가 더 아름답고 양동마을이 더 편안했습니다. 그럴 때면 건축에서 독창적이고 뛰어난 작품이란 것이 좋은 건축의 필수조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 기사는 연재물로 '전원주택 짓기' 시리즈에서 차례대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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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의 집 이야기 12편, 대화와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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