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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지나 봄

혹독한 겨울이었다. 겨울 아닌 세월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한겨울을 벗어나서 봄을 기다리던 때인지라 갑작스레 찾아든 꽃샘추위로 어안이 벙벙했다. 1998년 IMF 체제 하의 경제 위기 상황에서 맞은 부도 이후 6년여… 가슴은 졸아들었고, 영혼은 메말랐으되, 그래도 가야 한다는 모진 꿈이 있어 버티어 온 세월이었다. 고통스러웠던 이 기간에 사람들은 밀물처럼 들어왔다가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아무런 조건 없이 함께 일하자며 시작한 관계는 짧으면 1년, 길어야 2년을 가지 않았다. 일도 힘들었지만 그에 따른 처우 개선과 안정된 직업으로써 전망을 갖기 힘들었던 때문이다.

외로운 사투를 벌이던 2003년 가을, 사람들이 하나 둘 다시 모여들었다. 이들 모두 나름대로 전문 분야가 있었기에, 인적 구성도 기획 관리와 현장 관리를 통일적으로 모색하는 기회였다. 때에 맞추어 일도 많아졌다. 새로운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그 희망의 불씨는 2005년 2월을 넘기지 못했다. 어려워만 가는 경제 여건 탓인지 상담은 계속 어그러졌고, 1월 지나 2월에 들어서는 직원들의 동요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뇌관은 밀린 급여 문제였지만, 본질은 회사의 전망과 관련한 문제이기도 했다. 나는 회사의 지향과 현실을 이야기했고, 어려움을 극복하며 함께 갈 것인지, 떠날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했다. 또 한 번 결단의 시기가 온 것이다. 나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공든 탑이 무너져 갔다.

구정을 전후하여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나는 홀로 서 있었다. 일부는 흙건축 자재 유통 등 자신들의 사업을 하겠다며 떠났고, 일부는 대기 상태로 남겨졌다. 계절의 봄은 가까워 오는데, 나는 겨울의 한복판을 홀로 지나야 했다. 지옥 같았던 지난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일진대, 사람들은 어쩌면 환상을 보고 내게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세월의 이력 때문이었던가. 있던 사람들의 빈자리가 커 보이지 않도록, 혼자서도 모든 일을 처리하는 구조를 회사는 갖추고 있었다. 기획 및 설계, 홍보와 마케팅, 사람(건축주)과의 관계, 공정별 협력 업체에 대한 장악력, 매년 보강되는 시공 기술력… 이 모두를 끌어안았기에 ‘언제든 보따리 싸 들고 현장으로 가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었고, 혼자됨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의 무기이기도 했다.

구성원 개개인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조직적으로 성장하는 규모의 경제학을 모르는 바 아니나, 통박으로 깨우치길 소기업의 생존 전략으로써는 모든 것이 오너 손에 달려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탓이다. 꼭 시간의 문제는 아니지만 1년, 2년, 3년을 넘어서야 긴 여정을 함께 갈 수 있는 사람과의 신뢰가 만들어진다고 믿어 왔다. 모두들 그 3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이전에 상담해 두었던 단지 계획이나 지주 회사 공동 사업 등 돌파구를 찾아내려 부산하게 움직이던 때, 큰아이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뜻하지 않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여기 명동성당인데요. 수도원이요.”
“아, 예―.”
“허가까지 끝났으니, 빠른 시간 안에 현장 답사를 해서 진행해 주세요.”
“예―.”

이런 일도 있는 법이다. 지난해 5월경, 강원도 평창군 진부에 계신 수녀님 한 분이 본당에 계신 건축 책임자 수녀님을 모시고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수녀원이 자리할 터의 문제로 주변 토지를 추가로 매입하여야 하는 문제도 있었지만, 종교 시설로써 기존 건축 양식을 대신하여 한옥 목구조 형식의 흙집으로 수녀원 신축이 결정 나기는 어려워 보였다. 특히 중앙에서 집행되는 수많은 성당과 수녀원 건물의 신축은, 그에 따른 건축 회사와 통상적인 건축비가 정해져 있을 법하기에 더욱 그랬다. 미련은 남았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희미해져 가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 ‘수녀원’ 신축이 결정된다면, 규모로나 새롭게 시도해 볼 건축 유형으로나 상징성 모두에서 새로운 활로가 될 것이 분명했다. 전화를 끊고 나는 하늘에 기도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2월 22일, 눈발을 뚫고 강원도 진부로 향했다. 장평에서 모릿재를 넘어 가는 길을 포기하고, 진부 나들목에서 평지로 달렸지만 강원도의 겨울에 능한 수녀님 차로 옮겨 타고서야 현장에 도착했다. 20센티미터 이상 눈으로 덮인 현장은 흡사 백야의 초원 같았다. 부지의 터를 지나 계곡의 맨 꼭대기에 올라서니 웅장한 규모의 기존 수녀원이 자리했다. 천혜의 요새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지형이었다. 하지만 겨울만 되면 고립되는 생활이 마을 초입에 보급로처럼 새로운 수녀원의 신축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현장 답사 후, 진행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3월 초 도면 협의를 진행했으며, 최종적으로 수녀원과 손님의 집, 창고, 하우스로 구성하는 배치 및 설계를 확정했다. 전광석화처럼 한나절에 초안 설계가 끝났던 일이다.

수녀원은 한옥 목구조 뼈대 방식에 맞배지붕, 양식 기와로 마감 짓도록 기획했다. 집의 기본인 뼈대는 한옥이되 전체의 느낌은 수녀원이라는 이미지를 살려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손님의 집은 건축비를 절감하면서도 수녀원과 조화롭게 어울릴 토담집 느낌을 줄 수 있도록 구성했다. 처음으로 시도하는 경량 목구조 뼈대 방식에 현대식 박공지붕, 아스팔트 슁글로 마감되는 집이다. 샛기둥 사이 흙벽돌을 쌓고 안과 밖 모두를 황토 미장하는 방식인데 토담집 느낌을 주기 위하여 하방, 중방 및 문얼굴을 넣는 방식을 택했다. 창고는 일반 조적조에 목조 지붕으로 내부 공간의 쓰임에 주목했다.

도면 작업을 할 줄 아는 전기 팀장을 긴급 투입했고, 캐드로 작업한 평면과 입면, 배치도는 기존에 비해 못하지 않았다. ‘그래, 해 냈어―’ 자신감이 온몸에 붙었다. 3월 중순 견적을 제출하고, 3월 말 공사 계약이 이루어졌다. 6월 말까지 입주하도록 해주면 고맙겠다는 주문을 받으며, 겁 없이 도장을 찍었다. 남은 시간은 오로지 3개월.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두려웠지만 이미 던져진 주사위였다. 때맞추어 상담자들이 몰려들었지만 모두를 미루었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지난해 지붕공사까지 완료한 인제 현장의 마감과 함께 6월 말까지 진부 수녀님들을 입주시켜야 하는 책임만이 남은 것이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의 끝자락, 봄을 그리며 애타하던 3월이 그렇게 가고 있었다.

땅은 파 보아야 알아…

드디어 2005년 4월 1일, 진부로 향했다. 터에서 바라본 산등성이에는 아직도 희끗희끗 눈발이 남아 있었다. 수녀원이 자리할 터의 구옥 철거 작업은 의외로 간단했다. 작은 규모의 건물인데다 한옥 형태의 흙집이어서 목재는 땔감으로 재활용하기 위하여 한 곳으로 모으고 나머지는 덤프트럭 두 대분 정도의 건축 폐기물로 처리했다. 그곳에 터를 잡고 수십 년 동안 살았을 옛 주인의 자취는 사라졌다. 그리고 오랜 산통 끝에 또다시 수십, 수백 년을 이어갈 새 생명을 출산하게 될 것이다.

산자락 아래로 집을 감싸고 있던 얕은 돌담은 토방을 만들기 위해 한쪽으로 모았다. 문제는 산자락 아래에서 흐르던 샘물인데, 집 한편으로 자연 배수되던 물이 집의 규모가 커짐으로써 샘의 위치와 물길의 변경이 불가피해 보였다. 터의 윤곽이 드러나고 설계된 건축물이 앉아야 할 외곽선을 가늠하는데 구옥의 터에서 확장된 임야의 경계를 파 들어가자, 아뿔싸… 포크레인의 삽날이 텅텅 튀기 시작했다. 암반인 것이다. 정막 속에 찬바람이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구옥의 터 산자락에서 물이 흐르고, 그곳에 뿌리박고 있던 나무들이 고목처럼 느껴졌던 정황을 되새겨 보니 지표면 아래가 모두 암반이었던 까닭이다. 이런―, 젠장. 세심하지 못했던 자신을 탓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일정 정도의 택지를 확보하기 위한 암반 파쇄 작업을 시작했고, 기초팀은 손님의 집터 기초 공사를 먼저 하기로 했다. 하지만 손님의 집과 창고 터의 부지 조성 공사도 만만치 않았다. 경사면이 심하여 창고는 지하층을 두도록 처음 설계했으나, 손님의 집과 창고 부지의 단을 주어 단층으로 작게 하고 별도의 하우스 창고를 만들기로 했던 일이다. 하지만 부지 정리 작업을 시작하자 윤곽이 드러낸 절토와 성토면의 경사는 양쪽 모두 부담스러운 상태였다. 경사면 처리를 위해서는, 그에 따른 구조물 공사를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경사지 상단부를 절토하여 하단부 조성을 하던 때, ‘파아-악’하는 소리와 함께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이런―, 장비가 마을 지하수 관로를 건드린 것이다.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는데―, 어쩌겠는가. 우선 물길을 내고 연결 부속을 사왔다. 끊어졌던 두 관이 부속으로 결속되었는가 하면 ‘피-익’하면서 내뿜어 올리는데 정통으로 그 물에 몇 번 맞고 나니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수압으로 인하여 연결 부속은 계속 엇나갔고, ‘엎친 데 덮친다’고 끝내는 부속 하나가 물기둥을 타고 사라졌다. 한 사람은 다시 부속을 사러 나갔고, 입술이 파랗게 질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하필 이 순간, 수녀님이 현장을 지나가고 계셨다. 놀란 얼굴을 하며, ‘무슨 일이냐’고 물으시는데, 턱이 덜덜 떨려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다. 의연해 보이려는 내 모습이 내가 보아도 안쓰러워 보였다. 갈아입을 옷이 있느냐고 물으시기에 ‘괜찮다’고, ‘작업을 마저 해야 하기 때문에 소용없다’고 하였는데도, 수녀님은 길을 돌려 잠바 하나를 주고 가셨다.

처음부터 이렇게 고생을 해서 어떻게 하냐고 미안해 하셨다. 겨우 임시 처방으로 상수도 관을 소통시킨 후 함께 일하던 기초팀장과 마주보며 웃는데, 칼바람이 속곳을 파고든다. 강원도의 4월은 아직 한 겨울인 것이다. 물에 젖은 잠바를 벗어놓고 수녀님이 주신 잠바로 갈아입었다. 한기가 조금은 가셨다. 마음이 따뜻했다.

수녀원 자리는, 건물이 앉을 자리만 겨우 암반 파쇄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경계대로 부지를 확보하자면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릴지 장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기초 공사를 하고 나면, 암반 절토 면에 구조물을 설치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자연석 돌쌓기 작업을 기초공사보다 먼저 해야 했다. 보통은 집이 다 지어지고 난 후, 조경 공사에 포함되는 공정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토목 기초팀, 조경팀, 전기·설비팀을 모두 투입했다. 샘에서 흐르던 물길은 겉흙을 모두 걷어 내고 암반을 깬 돌로 채웠다. 손님의 집과 창고 부지에도 수녀원 터에서 나온 돌들로 기반을 다졌다. 포크레인 장비 두 대와 덤프트럭 두 대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한쪽에선 뿌레카(브레이커)로 암반을 깨고 있고, 또 한쪽에선 돌쌓기를 진행했다. 기초팀은 손님의 집과 창고부터 기초 작업에 들어갔고, 공사 착공 후 십여 일, 드디어 수녀원 본채의 기초 공사를 시작했다. 이제사 전체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대역사였다. 이전에도 전원주택 단지 조성을 해본 경험이 여러 번 있었지만 이렇게 혼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긴장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위기 속에서 보다 강해지는 것이 인간의 본 모습이지 않는가. 현장 판단이 익숙한지라 판단이 서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밀고 나갔다. 주어진 시간표는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기에 주저할 시간적 여력이 없었다.

한 달 여 전부터 계속되던 설사는 멈추지 않았다. 찬바람과 긴장의 연속은 몸의 조절 기능을 급속히 떨어뜨렸고, 신호가 오면 우선 산으로 달려야 했다. 아직 임시 화장실도 짓지 못한 상황이었다. 때맞추어 걸려 온 전화를 받다가 끊지 못해 타이밍을 놓쳐서는 바지에 낭패를 보았다.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알 수 없는 외로움과 설움이 북받쳤다. 그 상황에서 ‘수족을 잃어버린 장수의 눈물(?)’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피식 웃어 버렸다. ‘암반이 나올 줄 누가 알았어, 시간이 조금 걸려서 그렇지, 해 냈잖아. 땅은 파 보아야 알아. 그만한 모험도 없다면 세상 살 맛나겠어. 어려움은 극복하라고 있는 거야’ 속말을 하면서 허리띠를 묶었다.

사람도 그러한 것을, 그 속을 누가 알아. 서로의 암반을 깨고 들어앉아야 제대로 된 관계가 만들어지는 법이지. 뽀송뽀송한 흙인지 알았는데, 만나 보니 겹겹이 암반인지라 몇 번 깨 보고는 겉 상처만 남는 관계가 얼마나 많다고. 아마도 지금껏 내가 살아 온 과정이 그렇지 않았나 싶었다. 그래서 아직 내 인생은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음이랴. 하지만 내가 만들어 가는 이 수녀원은 암반을 깨고 들어앉은 반석 위의 집이 될 것이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을 이 자리에 터 잡고 뿌리내릴지 모른다. 그래서 내 인생의 절반은 뿌리 내려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田


글 이동일((주)행인흑건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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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집 이야기-내 생에 최고의 집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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