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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나절 고추 지주대 말뚝을 박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 나 어쩌지? 큰일이다!"
"뭔 일???"
"영규 시끼가 귀여워 죽겠어!"
"엥???"
"영규가 누나 공부 열심히 하는 걸 보고 자기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구…"

'영규가 어쩌고 저쩌고…'하는 아내의 영규자랑이 끝이 없습니다.
제 자식 귀엽지 않은 사람이 없다지만 정도가 좀 심합니다.
공주병 왕자병보다 더 심각한 고슴도치병이 아닌가 합니다.

영규는 암기력이 심각할 정도로 떨어집니다.
숫자 감각이 얼마나 무디고 더딘지 1부터 10까지 숫자를 가르쳐주다가 저는 벌써 나가떨어지고, 그 고슴도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지요.
입학 전에 한글을 가르쳐 주다가 벽에 혼자서 머리박고 가슴을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아예 입학 전 한글 깨치는 것은 포기하자고 했을 정도이지요.

대신 언어 구사력은 얼마나 멀쩡한지 영규가 한글을 모른다는 고슴도치의 걱정에 어린이집 선생님도 '에이~ 그럴리가 없는데요'라며 고개를 흔들었지요.
매일 어린이집에 책을 가져가 아이들한테 읽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한테 책을 읽어주니 당연히 글자를 아는 줄 알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 책 읽기는 글자를 읽어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에서 그림책을 읽어주면 들은 내용을 기억하고는 그대로 글자를 아는 척 흉내를 낸 것에 불과했습니다.
읽어준 내용은 거의 토씨도 안 틀리고 기억하면서도 막상 ㄱ, ㄴ을 가르치면 도저히 알지를 못하니…
정말 조화속이고 환장하겠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규의 그런 언어 구사력이나 표현력에 깜박 속은 사람은 어린이집 선생님뿐만 아니라 또 있습니다.
바로 할아버지.
어느날 식구들 함께 모여 밥을 먹는데 아버지는 아주 진지하게 말씀하셨지요.

"애들아, 영규 저놈 너무 똑똑하니 너희들 신경 잘 써서 가르쳐라."

영규의 암기력을 익히 알고 뒤집어진 상태의 고슴도치와 저는 순간적으로 눈을 마주치고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이구~~!!! 저 시끼 맹탕인 걸 누가 알겠누???' 하면서…

임자가 따로 있다고 결국 영규도 모 학습지 선생을 모셔와서야 한글을 깨치고 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십년 묵은 체증이 풀리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요.
그리고 영규한테는 결코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자고 다짐을 했지요.

그랬는데…
요즘은 또 영규의 잔머리(아주 쓸데없는 기억력과 순간적 말 빨)에 아내가 고슴도치가 되어가나 봅니다.
뭐든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려서야 깨치는 게 주특기인 영규가 자전거를 두 대나 잃어버리고 이제는 쏜살같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대견한가 봅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큰 찻길을 건너서 혼자 학교에 가겠다고 나서는 영규가 뿌듯한가 봅니다.

하긴 저도 어느 날,
"여ㅂㅗ 사라ㅇ 해 홍주원 쑤ㅁ" 이란 문자를 받고는 영규의 짓이란 것을 눈치 채고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지요.
시내로 나갔지만 아직도 촌놈 티가 얼굴에 뚝뚝 흐르는 영규가 보고 싶습니다.
고슴도치나 기러기 아빠나 마음은 거기서 거기지요.田


김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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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띄운 편지-여섯 번째 이야기] 고슴도치 엄마와 기러기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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