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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업무 차 충남 태안에 간 일이 있다. 초행길, 서산까지는 도로 표시판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갈 수가 있었지만 문제는 서산을 벗어나면서 부터였다. 차를 세우고 도로 지도 책자를 통해 목적지를 확인하고 책을 덮는 순간 뇌리에 남아 있던 기억의 한 장소가 되살아 났다.
‘가로림만.’ 천리포, 만리포를 따라 해안을 이룬 선이 가는 반도로 변해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육지와 함께 만을 이룬 곳. 마치 외국 지형 이름처럼 들리는 이곳은 예전부터 조력 발전소나 대규모 산업항 후보지로 여러 번 언론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만灣이다. 그런데 지도 속에 펼쳐진, 가로림만이 위치한 태안반도 주변의 지형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그래, 어디선가 분명 본 기억이 있다. 내 기억 어딘가에서도 기다란 태안반도 끝자락에 ‘석포’라는 어촌이 있음을 반복해 외치고 있었다. 석포라…. 아른 거리는 기억의 끈을 붙잡기 시작했다.


어느 해인가, 해외 업무 부서에서 근무했던 나는 사장의 지시로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미국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친구를 만날 요량으로 LA로 향했다. 학기말 고사라 눈코 뜰 새 없었던 친구를 대신해 준 것은 대학도서관. 지역이 지역인지라 그곳에는 한국 간행물도 적지 않아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이것저것 뒤적이다 우리나라 관련 영문도서에까지 손이 가기 시작했다.

하버드대 사회학과 브란트 교수가 쓴 ‘Korean Village[한국의 마을]’라는 책이 눈길을 끈다. 1960년대 우리나라 서해안 한 어촌에 2년간 기거하면서 촌락 사회의 여러 부문을 조사하고 검토해 만든 일종의 리포트로, 나는 내용의 자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촌민들의 연령이나 직업, 풍습, 생산품, 수입 등의 자세한 해설은 물론이고 마을에서 일어나는 여러 재미있는 사소한 일상사까지도 자세히 기술해 놓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걸핏하면 부부싸움질로 동네를 시끄럽게 하는 집안을 주위 사람들이 ‘Ssaum Gongjang(싸움공장)’이라고 부른다는 대목은 아직도 내 머리에 명료하게 남아 있다.

능숙하지 못한 영어로 그 책을 더듬더듬 읽어 나갔다. 한국의 옹색한 시골구석에 미국 최고 명문대학의 교수가 찾아와 가난에 시달리는 촌민들과 같이 지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 책은 나에게 매우 흥미로웠다. 우리나라에 돌아가면 꼭 한번 그곳을 찾아가보리라 다짐하곤 어촌의 위치를 밝힌 지도를 머리에 새겨 놓고 책을 닫았다. 당시 브란트 교수가 머물렀던, 옹색하기 그지없던 어촌이 바로 ‘석포’였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집에 있는 지도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당시 책에 언급된 비슷한 지역은 찾았지만 아무리 훑어도 ‘석포’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석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의항’이라는 이름이 버젓이 올라와 있었다. 확인해 보니 석포는 가명이었다. 오래된 그 시절 부족했던 내 영어실력을 탓할 수밖에. 하여간 이후 나는 몇 번이고 석포, 아니 의항에 가보리라 단단히 벼르고 별렀지만 먹고 사는 문제에 쫓겨 끝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고 굳게 벼르던 마음도 점점 약해졌다. 하버드대 교수가 지냈다던 태안반도의 한 마을은 내 기억 속에서 그렇게 잊혀져만 갔다.

그랬던 것이 태안 출장을 계기로 나의 감각 안에서 불쑥 다시 튀어 올라온 것이다. 관심과 흥미가 불끈 솟구친다. 이번에도 놓치면 이런 기회가 다시 없을 듯 싶어 서둘러 일을 끝내고 기억속의 어촌을 찾아 나섰다. 바다가 양쪽에 보이는 반도의 좁은 도로를 타고 끝까지 차를 모니 정말 의항이라는 동네가 나왔다. 책의 빛바랜 사진들에 있었던 40년 전의 가난하고 초라했던 마을은 오간데 없고, 여러 현대식 건물과 널찍하게 포장된 도로가 마을을 점령한 상태였다. 오로지 마을 앞 ‘가로림만’의 넘실대는 파도만이 변하지 않은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마을 중앙 나무 그늘 아래서 더위를 버티고 있는 노인을 발견하곤, 짐작만 하고 있는 이곳이 과연 브란트 교수가 살던 마을이 맞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차를 세우고 그에게 브란트 교수라는 미국인이 이 마을에 살다가 갔는지를 물었다. 그는 심심하던 차에 대화상대가 생겼다는 듯이 청산유수로 대답을 엮어 나갔다.

“여기 살았었죠. 부부하고 아기가 동네에 들어와서 집까지 짓고 한 이년 살다 갔어요.”

아기를 포함한 전 가족이 살다 갔다니.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다시 물었다.

“그가 무엇을 조사했어요?”

“별별 것을 다 물어봅디다. 얼마나 버냐? 어디다 쓰냐? 저축은 하냐? 우리도 외국인이 이런 시골까지 들어와 같이 살아주는 것이 고마워서 성의껏 협조해 주었지요.”

그는 말을 이었다.

“그가 여기에 있으면서 좋은 일도 많이 했어요. 마을에 배도 한척 기부했었고 아픈 사람들 병원비도 내줬고…. 여러 가지로 고마운 일을 많이 해서 우리는 그가 떠날 때 송덕비까지 세워줬어요. 마을 사람 중에 그를 따라서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까지 있었으니까요.”

브란트 교수와 그 가족은 이런 벽촌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나는 그가 이런 벽촌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 집이 아직 남아 있나요? 어디에 있어요?”

“저 언덕 위를 보세요. 저기 꽃으로 싸인 집이 그들이 직접 지은 집이요. 거기서 일하는 아주머니 한 분과 같이 가족들이 살았어요. 떠날 때 동네주민에게 그 집을 그냥 기증했는데 새 주인이 나중에 다시 개축했다고 합디다.”

나는 노인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 곳으로 향했다. 언덕위로 난 길을 오르면서 브란트 교수의 선택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햇살을 듬뿍 받는 언덕의 남쪽 사면에 집이 위치한다. 뒤로 솟은 언덕이 북쪽의 외해에서 불어오는 거센 해풍을 막아 주고, 앞으로는 가로림만이 다소곳하게 자리 잡아 집의 경관 가치를 한층 높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집은 개축하면서 원래의 특성이 많이 없어졌는지 집 자체만으로는 별다른 특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저 여느 평범한 농가의 한 형태를 가지고 있을 뿐.
나는 집둘레에 심어진 꽃들이 뿜는 향기를 취하게 맡으면서 옛날 여기에 살던 브란트 씨를 떠올렸다. 하고많은 세계의 국가 중 우리나라를 택한 것도, 그리고 이곳 서해안의 외진 어촌을 찾아온 것도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닐 것이다. 의항의 아래 있는 천리포 수목원 설립자 미국인 칼 밀러 씨와 인연이 있지 않았을까.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군복무를 하다 한국은행에 취직해 오랫동안 그곳에서 근무했던 밀러 씨는 민병갈이라는 한국이름과 한국 국적까지 취득한 사람이었다. 밀러 씨는 1950년대 휴가차 천리포에 한번 와보고 경치에 반해 인근 땅을 사들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세계 각국의 식물을 들여다 수목원을 만들었다. 그는 타계했지만 그가 남긴 수목원은 현재까지 운영되고 사람들의 발길은 여전히 끊이지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브란트 교수와 밀러 씨는 무슨 인연이 있어서 이곳을 소개 받은 듯하다. 그랬다 해도 60년대 빈곤이 찌든 이 어촌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어떻게 2년 넘게 살 수 있었을까? 사실 그 것은 그 무렵 미국의 도시민에게 한국의 시골은 지금의 콩고나 뉴기니아 같은 미지의 불안한 빈민국과 비교해 나을 바 없어 그런 곳에 가족을 데리고 가서 긴 세월을 사는 것과 같은 것은 이해하기 힘든 노릇이었다. 선교를 나온 성직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나의 추리는 여기서 그의 심정을 헤아려보는 수준까지 뻗어 나갔다. 우선 동네의 인심이 그를 안심하고 가족까지 데리고 와서 살만한 편안함을 주었을 것이고 치안이 극도로 불안한 후진국 같지 않게 그 무렵 한국의 안정된 치안도 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런 곳에서 이국의 삶을 즐길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판단함에 전원인의 시각을 배제할 수가 없을 듯하다. 그는 교수라는 직업의 지식 노동자였다. 오는 날 상당수의 전원 생활자 또는 전원생활 동경자 가운데 현대 도시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사 변호사 또는 교수같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지식 노동자가 많음을 필자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 역시 상아탑의 황량한 정신노동 세계에 지칠 대로 지친 전원생활 동경자로서 연구를 핑계 삼아 각박한 미국의 도시에서 탈출, 먼 이국의 시골 어촌으로 잠시 피해 나와 일종의 정신적 피난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연구가 목적이라지만 이런 이국의 벽촌에 와서 긴 세월을 보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어쩌면 브란트 교수에게 있어 이국의 이 풍광명미風光明媚한 어촌이 그에게는 최고의 휴가지였는지도 모른다. 모르긴 몰라도 귀국 후 그는 자주 대학 연구실에서 지친 머리를 쉬면서 한국에 두고 온 가로림만의 그림 같은 바다경치를 떠올리며 스트레스를 해소했을 것이다.

브란트 교수의 송덕비 앞에서 양식 어구를 손질하는 아주머니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자, “그가 12년 전 방문한 적이 있다”면서 “아직 그분 생존해 계시냐”며 반문하는 것을 보면, 교수직에서 은퇴한 브란트 교수가 가로림만과 의항을 잊지 못해 그 어느 날 다시 찾은 게 분명했다. 田


김창원

글쓴이 김창원 님은 공인중개사로서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에서 강, 바다, 호수 경관 전문 부동산 ‘물빛뜨락’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문의 : 02)749-0396. www.waterview.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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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전원주택] 외국인을 안아준 전원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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