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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다. 원시시대 불은 어둠을 밝히고 추위를 견디게 하며 맹수로부터의 공격도 막아내게 했다. 불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들었고 불은 집 안에서도 항상 중앙을 차지했다. 원시시대, 고대 주거 형태에서 불은 화덕과 비슷한 형태를 띠다가 중세에 이르러 벽난로, 굴뚝 모습으로 발전했다. 더불어 음식을 구워먹고 추위를 막는 기능으로 족하던 불은 유럽인들에 의해 부의 상징으로 나타났고,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이에 대한 반발로 '불'을 자연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다. 과연 벽난로는 어떤 모습으로 등장해 오늘날에 이르렀을까. 벽난로의 어제와 오늘, 그 역사의 현장으로 가보자.



4개의 기둥과 원추형 지붕 그리고 화로



불의 사용은 원시사회에 급격한 발전을 가져왔다. 불은 얻기도, 또 보관하거나 운반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사람들은 힘들게 지핀 불에서 너무 먼 곳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이것이 불 근처에 정착하는 계기였다. 흩어져 살던 움집이나 귀틀집 그리고 동굴 생활에서 벗어나 비로소 정착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원시, 고대 주거 형태에서 화로는 굴뚝이 없는 개방형으로 주거의 상부에 위치한 구멍(Hole)을 통해 연기를 자연적으로 배출했다. 당시 집의 지붕이 하늘로 뾰족한 형태(원추형)를 취한 것도 바람이 통하는 구멍을 차차 좁게 해 연기가 자연스레 잘 빠져나가도록 한 것이다.



고대 중국의 주거 형태에서 원형 평면 중앙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원추형 지붕을 세운 것을 볼 수 있다. 이 4개의 기둥은 지붕을 받치는 역할과 더불어 불을 지필 수 있는 내부 공간을 만들었다. '파오'라 일컫는 몽골인 주거 형태에서도 이와 비슷한 형태가 나타나는데 원추형 지붕에 4개의 기둥과 한 가운데에 화로가 위치해 있다.

일본 주거 양식에서 보이는 화로 형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화로 밑으로 구멍을 파 놓았다는 점이 중국이나 몽골 지역과 다르고, 이는 오히려 미국이나 멕시코와 닮았다. 미국 남서부 애리조나, 뉴멕시코주 부근에 살던 푸에블로족은 원형 평면에 4개의 기둥이 보를 받치고 중앙에 화로가 있으며 그 밑으로 구멍을 판 '피트하우스'라는 수혈주거 형태에서 거주했다. 그들은 죽은 조상이 대지 밑에 있다고 여겨 '시파프'라고 불리는 구멍을 팠으며, 이를 통해 조상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이렇듯 원시 고대 사회에서 불의 위치는 집의 구조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화로는 음식을 조리하는 주방으로, 몸을 녹이는 휴식 장소로, 다른 구성원과 대화를 나누는 모임 장소로, 조상을 섬기는 신성한 장소로 활용됐다.

벽난로 시대의 개막을 알린 중세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개방형이 대세를 이루던 화로는 중반기에 접어들면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접하는 굴뚝이 달린 반 개방형의 모습을 띤다. 화로 시대가 가고 본격적인 벽난로 시대가 열린 것이다.

빈번한 전쟁은 나무가 아닌 돌로 만든 집들이 생겨나게 했고 겨울철 냉기를 내쫓기 위해 벽난로는 진일보하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은 벽난로 주위에 몰려 앉으면서 연기를 밖으로 빼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고안해 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굴뚝이다. 실제 노트르담성당, 샤르트르대성당, 림즈대성당 등으로 대표되는 고딕(Gothic) 건축 시대의 벽난로는 내면이 경사진 모습으로 여기에 연도를 설치해 하나의 통로로 연기를 외부 배출시켰다. 원시 고대 원추형 지붕을 벽난로 내면에 도입시켜 연기의 원활한 흐름을 유도하고 이를 밖으로 빼기 위한 연통을 설치한 것이다. 지금 흔히 보는 반사벽을 설치한 것도 이때부터다. 대략 15세기경으로 추정되는데 강한 열로 손상을 입는 벽난로 뒷벽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설치됐으나 이후에는 각종 장식물을 올려놓는 역할을 담당했다.



가장 눈여겨볼 점은 고딕 시대를 거치면서 벽난로가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부를 상징하는 수단이 됐다는 점이다. H.Buttner & G.Meissner는 《Town House of Europe》이란 책을 통해 "중세의 일반 가정에서는 보통 하나의 벽난로에 의존해서 취사 및 난방을 해결했지만, 부유한 계층 가정에는 여러 개의 난로가 설치됐다. 따라서 중세 주택에서 난로는 부의 상징이었으며 사회 계층의 구분도 주택 내에 설치된 벽난로의 숫자에 의해 좌우됐다"고 저술하고 있다.

고딕 시대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면서 벽난로는 난방과 취사라는 본연의 기능과 아울러 외적인 미까지 추구한다. 천편일률적인 표현과 수법을 거부한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 양식은 벽난로에도 그대로 도입되면서 다양한 형태를 띤 벽난로가 등장한다.

프랑스 프랑소와 1세가 거주한 방의 벽난로는 천장에 다다를 정도로 높고 한 복판에는 그의 상징인 도룡뇽이 조각돼 있다. 같은 시기 영국에서도 벽난로를 돌로 된 튜더 아치로 만들고 그 위에 다양한 조각상을 올려놓아 집 주인의 개성과 화려한 멋을 강조한 것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웅장한 바로크, 섬세한 로코코



왕과 귀족이 중심인 전제주의를 반영하듯 바로크 시대의 벽난로는 웅장함과 거대한 조형물을 간직한 것이 특징이다. 스케일이 크고 전체 또는 부분 묘사가 양감적이고 감각적이어서 강렬한 이미지를 발산한다. 생활과 부의 중심이 된 벽난로는 말할 것도 없이 이를 감싸는 가구와 장식 등 모든 구조물에서 이 같은 풍부한 디자인이 나타난다.

벽난로 위에는 주로 초상화나 당대 유명한 화가의 작품들을 전시했고, 이는 서민 가정에서도 다를 바 없었다. 집 안의 소중한 그릇이나 귀중한 물건들이 항상 벽난로 위에 놓여졌던 것이다.



이에 비해 로코코 시대는 섬세한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바로크가 남성적이라면 로코코가 여성적이라는 말이 있듯, 로코코 시대 벽난로는 웅장함보다는 대리석을 이용한 세련된 주변 장식이 널리 퍼졌고 분위기도 경쾌했다. 또한 벽난로 설계 시 부드러운 곡선을 도입해 그 위를 고가의 거울로 장식했다.

섬세하고 여성스러움을 강조한 로코코 시대의 벽난로는 이전 시대처럼 실의 중심에 자리하고 장식적인 요소가 강했으며 그 위에 고가의 거울을 설치해 부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고전 부흥, 신고전주의·자연으로의 회귀,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은 로코코의 섬세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복잡한 곡선을 없애고 단순한 직선으로 대치하는 한편 다시 로마와 그리스 시대의 고전 양식을 부활시켰다. 벽난로 역시 직선을 사용한 직사각형이 주를 이루었고 프랑스 개선문에서 볼 수 있는, 기둥 위에 수평으로 연결된 지붕을 덮는 장식인 엔타블러처(Entablature)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디자인 면에서는 엄격하고 균형 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 형상의 입체적 표현 등을 중시했다.

1837∼1901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는 새로운 소재와 스타일이 등장하면서 각양각색의 벽난로를 탄생시켰다. 서로 다른 소재가 뒤섞이며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여러 재료를 혼합한 형태의 벽난로를 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벽난로는 이전에 찾아볼 수 없던 화려한 제품들이 속속 등장했다.



그러나 19세기 산업혁명에 따른 난방기술의 발달은 벽난로의 급속한 침체를 가져왔다. 이전까지 '난방'과 '장식'적인 측면이 전부였던 벽난로의 쓰임새가 점점 줄어든 것이다. 산업혁명이 몰고 온 '합리주의'는 당시까지 부의 상징으로 여겼던 벽난로의 설자리를 앗아갔다.

벽난로의 침체를 벗어나게 한 것은 당대를 대표하는 두 건축가에 의해서였다. 건축가들로부터 가장 위대한 건축가로 손꼽히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Wright, Frank Lloyd)'는 당시 이전 시대의 획일화된 양식이나 장식을 거부하고 생활적으로나 구조적으로 또 자연으로서의 '불'을 받아들이는 본연의 벽난로를 부활시키는 데 주력했다. 또 다른 거장인 '르 꼬르뷔제' 역시 기존의 틀을 탈피, 집의 공간을 분할하는 조형적 존재로 벽난로를 설계했다. 이 두 거장은 현대 건축물과 더불어 벽난로 디자인에 있어서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를 받는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르 꼬르뷔제는 벽난로는 단순히 난방과 부의 상징이 아니라 '불'이라는 자연을 집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인간성을 회복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알렸다. 후대 건축가들은 이들을 '벽난로가 거실이나 응접실, 주방, 야외 등 어디에 위치해야 생활의 확대와 진실한 풍요로움에 가까워질 수 있는가를 고민했던 건축가'로 평하고 있다.

신소재와 함께 발전하는 벽난로



기계공업의 발달과 신소재의 개발은 벽난로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미세한 노즐을 통해 빠져나온 막대한 물의 압력을 통해 소재를 절단하는 워터젯 공법, 레이저를 이용한 컷팅 방법 등이 등장하면서 벽난로는 정교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또 주물, 금형 및 프레스 기술의 발달은 신소재를 이용한 벽난로 제조가 가능해져 자유롭고 다양한 디자인의 벽난로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있다.

무엇보다 벽난로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세라믹 유리'. 고온이나 외부 충격에도 높은 내구성을 자랑하는 세라믹 유리로 인해 화구가 노출된 개방형 벽난로의 단점, 즉 열의 낭비, 화재, 먼지 등을 극복함과 동시에 개방형과 마찬가지로 불이 타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현재 선보이는 제품들은 물을 저장하는 공간을 두어 내부의 열로 수증기를 발생시키는 가습 기능, 갑자기 화구를 열면 공기 압력 차에 의해 내부 연기가 밖으로 역류되는 현상을 막는 리프트 업 도어 기능, 화실 내부에 공기 훅을 설치해 불을 다시 한번 연소시키는 다중연소 기능 등을 갖추고 있다.

이렇듯 초기 화로의 모습에서 현대적인 벽난로에 이르기까지 벽난로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생활과 문명을 반영한 집합체였다. 또한 초기 난방과 취사의 목적에서 나아가 산업 발달에 의한 신소재의 개발로 다양한 디자인과 기능적인 면까지 갖추면서 벽난로의 진보는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이 있다. 벽난로는 구성원 간 소통의 창구이자 무대라는 점이다.田



홍정기 기자 / 자료·사진 제공 : 삼진벽난로, 02-547-2003, www.samjinfi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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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난로I - 벽난로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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