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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이상을 함께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족 구성원에 변화가 생긴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1999년 어느 날 건축주는 잠을 자다가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새벽 5시가 채 되기도 전에 깨어났다. 흐릿한 눈동자로 방 안을 둘러보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아내가 남편을 향해 큰절 삼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 당신 도대체 왜 이래?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하고 놀라서 물었더니, 아내가 말하기를
"다 죽었던 내 목숨을 살려 주셔서 감사의 삼배를 올리고 있습니다."
아내의 두 손을 꼭 잡은 남편의 가슴이 미어져 왔다.

가족 이야기

남편은, 1976년 충주 경찰서에 초임으로 부임하면서 당시 교사였던 아내를 만나 8월말 결혼했고, 딸과 아들이 태어났고 불교에 귀의하면서 집 안에도 불상을 모시고 매일같이 기도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려왔던 시절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가족을 꾸리고 23년이 지난 1999년 4월 25일 기도를 드리러 영월 법흥사로 향했다. 당시 남편은 근무지가 부산이었고 평소 직장(학교)까지 손수 운전하며 다니던 아내였기에, 그날도 아내가 운전했는데 제천 부근에서 교통사고가 났던 것이다. 남편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상처를 45바늘이나 꿰맨 상태였고 아내는 머리를 비롯해 심하게 다쳐서 6시간 이상의 장시간 수술 후에 의식 불명 상태였다. 의사는 시신경 손상과 정신적 후유증이 클 것이라 했다. 부산에서 용인의 경찰대학으로 근무지를 변경하고 다친 몸으로 아내를 간호하기 시작했다. 퇴원 후에도 한 뼘씩이나 되는 한방 침을 맞으러 반년을 보내고 병원을 전전하면서도 아내를 위해 도롱뇽 알, 웅담, 멧돼지 쓸개, 효소 등 온갖 건강식품을 구해오는 것은 물론이고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마사지를 해줬다. 그러다가 아내는 차츰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 반 정도가 지난 2000년 10월, 아들이 군 입대를 3일 앞두고 외가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4시경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관자놀이가 찌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전화를 받았다.

"여기 OO경찰서입니다. OOO 아버님 되십니까? 아드님이 새벽에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들의 주검 앞에 선 부모. 그토록 사랑스럽던 아들. 늠름한 모습으로 군생활을 하러 떠나려던 아들이 다른 세상으로 아주 떠나버렸다. 그때 옆에 있던 건축주의 누님이 한 말이 더 기가 막혔다.

"너의 아내는 아들을 잃었는데도 슬픈 기색이 없구나."

그때까지도 아내는 온전한 정신이 아니기에 이상할 것도 없었고 오히려 아내의 건강을 위해선 아들의 죽음을 모르는 게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남편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가슴을 무겁게 만드는 형벌 같은 가족과의 인연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가슴이 무거워졌다.

직장일과 가사일 그리고 집안 경조사 등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하면서 아내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며 극진하게 간호한 덕분인지 아내는 시신경이 돌아오고 정신도 되찾아 사람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때가 2003년 여름이었다.

한양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유학을 마치고 외국에서 근무하던 딸이 귀국해서 엄마처럼 교사가 되고 싶어 교대에 편입학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딸의 생각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럼 두 달치 학원비만 줄 테니 앞으로 찾아오지도 말라."

몇 달을 연락을 끊고 지냈는데, 그 해 말 부산교육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대지 분석

남편은 아내의 건강을 위해 이천 마장면에 2002년경 땅을 구입했지만 퇴직에 맞추어 집을 지을 생각으로 2006년 겨울 필자를 만나 설계를 시작했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땅은 아래 위 두 필지가 있고 이미 조경공사를 완벽하게 다 해놓은 땅이었다. 건축주는 가정에 힘든 일이 있음에도 전원주택을 짓기 위해 엄청난 양의 자료 수집과 공부를 이미 다 마친 상태였고 마감재에 대한 선택까지 거의 끝냈을 정도로 치밀했다.

건축주는 위 필지에 건축을 원했지만, 필자는 위에 본채를 짓고 아래 필지에는 손님을 위한 공간인 별채를 제안했더니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렇게 본채와 별채로 구분하게 된 동기는 대지 내 조경 중 멋지게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가 두 필지의 중앙에 버티고 있었는데, 이것을 이용해 뭔가를 계획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에 생긴 변화로 슬픔을 위로해 줄 아늑한 마당이 필요했으며 마을 주진입로에서 볼 때 집 안이 너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이 싫었다. 또 건축부지 주진입로 맞은편 대지가 2m 정도 더 높게 조성돼 있어, 그 집 마당에서 이 집 마당과 거실 앞의 노출이 심해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대지에 앉힐 주택의 기본적 밑그림이 완성될 무렵 건축주는 2007년 6월에 딸 결혼식과 피로연을 집 마당에서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별채에 만들어질 전망 덱은 하객들을 위한 장소가 될 것이고 별채 하부의 벽은 결혼식장의 무대가 될 것 같았다.

평면 계획

본채에 들어갈 기능으로는, 거실과 식당, 주방을 하나의 공간으로 묶고 주인 침실과 예비용 방을 한 개만 두기로 했지만 설계가 마무리될 무렵 본채에 있던 보일러실을 별채로 옮기고 본채에 있던 보일러실을 기도실로 변경하기로 했다.

거실을 중앙에 배치하다 보니 식당 부분이 마을 진입로 길 쪽으로 오게 됐는데 식당 앞 전면을 사선으로 끊어서 마을 진입로와 대지 내 대문 쪽으로 시기능이 가능하도록 하되 외부에서는 거실로 곧장 침투될 수 있는 시선을 막고자 했다.
건축주가 안방은 침대 없는 방으로 요구했으며 안방에서도 마당(남측)을 향하는 곳으로 분합문(Patio Door, 드나듦이 가능한 창문)을 설치하고 앞쪽 덱보다 한 단 높게 만들고 안방 앞 덱에는 예쁜 바닥 타일을 붙이기로 했다.

별채에 들어갈 기능으로는 아래층에 본채에서 옮겨올 보일러실(초기 계획에서는 아래층을 필로티로 띄운 원두막 형태로 하고자 하였음)과 작은 창고를 두고 위층에 화장실과 주방가구가 갖추어진 원룸을 만들고 마당 쪽을 향해 2층에 전망용 덱을 두기로 했다.

입면과 단면 계획

입면 계획은, 단층이지만 한 면 경사 지붕을 만들어 전면을 높고 시원하게 들어 올려주고 외장 재료는 수직적 매스 분할에 따라 벽돌과 시더 사이딩 마감을 하기로 했다. 별채는 전통적 모임지붕에 진입로 쪽을 사각형 박스로 올려 모던한 이미지를 아주 조금 가미하는 정도로 끝냈고, 구조가 목조주택이라서 벽돌을 쌓을 때 외부로 통하는 바람구멍(PVC 기성재)을 설치해 벽체 속의 습기 배출이 원활하도록 만들었다.

내부 마감재는 최대한 친환경 건강 자재를 사용하고자 페인트칠을 하지 않은 시더와 사라리아벽지 등으로 마감하기로 했으며 내부에 석고보드와 건강합판을 이용해 드라이월(건식벽체)을 완성했다.

건축을 하는 동안 이웃집에서 지붕과 벽체가 높다고 하여 약간의 시끄러움이 있었지만 건축주는 인내력으로 이를 극복했고 마침내 집이 완성됐다. 당초에 딸 결혼식을 집 마당에서 올리고자 하는 계획은 마을 사람들이 행여 소란스럽다고 할까봐 집에서 하지 못하고 경기도의 조용한 야외에서 조촐하게 진행했다.

2007년 집이 완성되고 딸을 출가시키고 나서야 건축주의 가정도 안정기를 되찾은 듯 보였다. 급작스럽게 아들을 잃은 아픔과 딸을 출가시킨 섭섭함을 가슴속에 삼키고 신혼 때 두 사람이 처음 가족을 이뤘을 때의 기분으로 돌아간 것이다. 비록 그들이 정성껏 일궈놓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구멍이 생기기는 했어도 아내는 남편의 지극한 사랑으로 지금은 거의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고, 그 쉽사리 아물지 않을 상처를 기도로 달래며 가족의 인연을 소중히 지속시켜 나가고 있다.田


최길찬<건축사··시공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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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길찬의 전원주택 설계 노트 10]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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