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메뉴보기
 
문화유적을 찾아서

역사의 소쇄(瀟灑)한 풍취 베어 있는 ‘소수서원’

백운동서원으로 불리던 소수서원은 명종 4년(1549)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경상감사 심통원에게 서원의 편액과 토지·노비를 하사해 주도록 청하여 이듬해 명종 5년(1550) 5월, 왕명으로 대제학 신광한이 ‘소수(紹修)’ 라고 이름지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명종 임금은 손수 ‘紹修書院’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공인된 사학기관의 탄생이다. 경내에는 강당, 동·서재, 학구재, 서고, 문성공의 능이 있고, 회헌영정(국보 제111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58호)등 중요유물과 각종 전적(典籍)이 소장되어 있다.


소수(紹修)’라 함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하였음’이란 뜻으로 명종 임금이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서원은 풍기군수였던 신재 주세붕(周世鵬: 1495∼1554) 선생이 안향 선생의 연고지에 사묘(祀廟)를 세우고 안향 선생을 주향(主享) 하였으며, 이듬해 다시 안향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학사(學舍)를 이건(移建)하였는데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건립 당시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란 이름이 붙었었다.

이어 중종 39년(1544)에는 안축 선생과 안보 선생을 배향하였으며 명종 원년(1545)엔 안향 선생의 후손 안현이 경상 감사가 되어 서원의 사당을 참배하고 각종 경비를 지원하게 되었다.

백운동서원으로 불리던 소수서원은 명종 4년(1549)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경상감사 심통원에게 서원의 편액과 토지·노비를 하사해 주도록 청하여 이듬해 명종 5년(1550) 5월, 왕명으로 대제학 신광한이 ‘소수(紹修)’ 라고 이름지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명종 임금은 손수 ‘紹修書院’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공인된 사학기관의 탄생이다.

경내에는 강당, 동·서재, 학구재, 서고, 문성공의 묘가 있고, 회헌영정(국보 제111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58호)등 중요유물과 각종 전적(典籍)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경내에는 이 곳이 통일신라시대이래 사찰이었음을 알려주는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보물 제59호) 등의 불적(佛蹟)도 남아 있다.

전각의 배치

정문을 들어서면 강당이 동쪽을 향해 자리해 있어 곧바로 그 강당 측면에 마주하게 된다. 강당 바로 북쪽에는 一자 모양의 동·서재(東西齋: 공부하는 선비들의 처소)가 남향으로 자리하여 명륜당의 중심축과 동서재의 중심축이 직교(直交)를 이루게 된다.

공부하는 처소와 관계되는 전각(殿閣)은 강당과 동서재 말고도 학구재(學求齋), 지락재(至樂齋)가 있는데 학구재, 지락재는 강당과 동서재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들의 배치는 학구재의 중심 축이 동서재 중심축과 평행을 이루고 있으며 지락재는 그 동쪽에 치우쳐 있어 중심축이 이 서원의 어느 건물과도 평행 되거나 직교되지 않는다.

동서재 서쪽(사당 동쪽)엔 책을 간직하는 서고와 제향 때 제수(祭需)를 차리는 전사청(典祀廳)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사당(文成公廟)은 강당의 서북쪽(동서재의 서쪽) 구석진 곳에 따로 베푼 담장 안에 자리하고 있어 한층 외지고 조용하다.

정문 밖 왼쪽에 경렴정(景濂亭)이 있고, 동서재 뒤편에는 회헌 영정이 있으며, 공자와 그 제자의 전좌도(殿座圖) 등 귀중한 유적을 보존하기 이해 새로 지은 유물각이 있다. 그 북쪽 담장 너머엔 주사(廚舍)가 있다.

사당(文成公廟)

회헌을 주향(主享)으로, 문정공 안축(安軸), 문경공 안보(安輔), 문민공 주세붕(周世鵬)의 위패가 함께 봉안된 사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평면은 통간(通間)으로 되어있다.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둥글게 주좌(柱座)를 쇠시리한 다듬은 주춧돌 위에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에는 운두가 낮은 주두(柱頭)를 놓고, 기둥머리 도리 방향으로는 밑면에 초각(草刻)한 첨차를 내어 그 위에 소로(小爐)를 놓아, 주심(柱心)도리의 장여를 받치고 게 했다. 보 방향으로 그 끝에 날카로운 쇠혀(牛舌)를 내고 안쪽으로는 보아지 모양을 하여 퇴간(退間)의 보를 받치게 했는데 전형적인 초익공(初翼工)식 구조로 볼 수 있다.

가구(架構)는 오량(五梁)으로 앞면을 퇴간으로 개방했기 때문에 대들보는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평주(平柱)에 걸었다. 첨차대공을 놓아 마루보(宗樑)를 받치며 그 위에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떠받치고 있도록 하고 처마는 겹처마, 막새기와를 사용했다.

강당(講堂)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장대석 바른층 쌓기의 높은 기단 위에 주추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쪽은 창방(昌防)으로 결구하고 기둥 위에 주두를 놓고 쇠혀를 하나 내어 서로 결구한 초익공(初翼工)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주두 위에 놓인 대들보의 보뺄목은 일부에선 사면(斜面)으로 끊겼으나 방(枋)을 둔 곳에서는 초각을 하여 둥글게 처리했다.

앞뒷면에 놓인 평주(平柱)들의 간 살은 통간으로 20여척 이상이 되나 대들보를 전후 평주(平柱) 위에 놓고, 거기에 동자기둥을 세워 중보(中樑)를 받치게 하고 그 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종도리의 장여를 바치게 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 반 크기의 대청은 우물 바루 바닥에 연동 천장을 하고 있고,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 뒷면엔 반 칸의 마루방을 달았다. 강당 사방 둘레엔 반 칸 폭의 툇마루를 깔았으며 처마는 겹처마, 추녀는 활주가 받치고 있다.

동·서재(東·西齋)

동재는 일신재(日新齋), 서재는 직방재(直方齋)로 양재가 한 채(棟)로 되어있다. 평면은 정면 6칸, 측면 1칸 반, 기단은 앞면은 다듬은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로 했고 후면은 거칠게 다듬은 네모진 돌로 바른층 쌓기를 했다.

복판에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각각 정면 2칸, 측면 1칸의 온돌방, 그리고 방 앞엔 각각 반 칸 폭의 툇마루를 두었다.

주추는 막돌의 모난 기둥인데 양쪽 온돌방 앞 두 개씩의 기둥과 뒷면 양쪽 우주(隅柱)만이 두리기둥이다.

기둥에는 굽면이 사면(斜面)이고 굽받침이 없는 주두(柱頭)를 놓아 첨차로 결구했는데 첨차의 모양은 매우 단순하다. 특히 뒷면 우주에는 기둥 윗몸에서 헛첨차 모양으로 돌출했으나 건물 밖으로는 단순한 직선부재(副材)로서 보아지 형식을 이루고 있다.

가구는 오량(五梁)으로 대들보를 평주(平柱) 위에 걸고, 그 위에 간결한 동자기둥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홋처마, 팔작지붕이나 지붕 높이가 낮아 합각면이 적어 전체적으로 웅장한 맛은 적은 편이다.

학구재(學求齋)

동서재(東·西齋)의 동쪽 조금 뒷 편 동남향에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막돌 허튼층 쌓기의 낮은 기단(基壇)이 특징이다. 개방된 마루 좌우에 온돌방이 있으며 주세붕 선생의 문인 황응규(黃應奎)가 세웠다고 한다.

지락재(至樂齋)

동·서재와 학구재(學求齋)의 동편에 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막돌 허튼층 쌓기의 낮은 기단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북쪽 끝 칸을 온돌방으로 하고, 다음 두 칸은 개방된 마루로 꾸며져 있다. 이는 이준(李埈)이 풍기군수(광해 5년, 1613년 부임, 이듬해 이임)로 있으면서 세웠다 한다.

경렴정(景濂亭)

정문 밖 동쪽 언덕 절벽 위에 있는 것으로 주세붕 선생이 세웠다. 정면 3칸 측면1칸의 팔작집으로 호박 주추에 두리기둥을 하고 있으며 개방된 마루바닥에 계각(溪脚) 난간을 둘렀다.
연화봉(蓮花峰)을 마주하고 취한대(翠寒臺)를 굽어보는 이 정자는 둘레엔 울창한 노송 숲이 있고 바로 절벽 밑엔 잔잔한 푸른 못이 있다. 정자에서는 주세붕, 이퇴계, 황금계, 이준 등 명류들의 시판(詩板)이 있다.田

■ 자료참조 · 영주시청(www.yeongju.go.kr)/사진 · 류재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역사의 소쇄(瀟灑)한 풍취 베어 있는 ‘소수서원’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