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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시절,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신성희* 작가님 댁에 방문한 적이 있다. 파리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 넓은 평지 위에 소박한 자태로 세워진 주택이었다. 집 안 정리를 한참 도와드리다 차 한 잔을 권하시기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고 뒤뜰로 이동했다. 허리 높이의 울타리가 쳐져 있고 고향의 향수 때문인지 세워 놓은 3층 석탑과 거북이 모양의 물두멍 그리고 마치 서로를 의지하는 듯한 체리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있는 아기자기한 정원이었다. 신 작가님이 문득 말씀하셨다.
"정 군! 차경借景이란 말 들어본 적 있나?"
"차경이요?"
그동안 들어본 많은 단어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했지만 차경이란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요, 처음 듣는 단어입니다. 무슨 뜻이죠?"
"미술에 차경기법이라는 말이 있지. 주변 시설물이나 자연 풍경을 경관 요소의 일부로 활용하는 기법이야. 문자 그대로 경치를 빌려오는 것이지…."
그렇게 입을 연 작가님은 하늘에 걸린 작은 잎사귀를 바라보며 말을 이으셨다.
"자연은 우리에게 늘 아름다움을 빌려주고 있지. 두둥실 떠가는 구름과 파란 하늘, 푸른 숲과 나무들, 화단에 심겨진 화초까지…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풍요로운가…"하며 지그시 미소를 지으셨다.
신 작가님의 말씀에 한참 말없이 커피잔을 들고 있던 나는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내 몸 속의 신경세포들이 하나하나 깨어나 잊고 있던 아름다움을 새롭게 느끼는 듯했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차경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자연은 대가없이 그 풍요와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친환경, 자연주의, 웰빙이란 단어를 아무리 외쳐도 우리마음이 자연과 친해 지려하지 않는다면 자연은 우리에게 자신의 경치를 빌려 주지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찻잔을 들고 차경이란 단어를 떠올리며 창을 통해 자연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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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借景- 빌려 온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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