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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들이 떠나 황량하기만 했던 농촌 마을이 환하게 바뀌었다. 을씨년스럽기만 했던 동네에 화사한 옷을 입히자 하나둘 찾는 발걸음이 생겼다. 거창 황산마을, 대전 산내동. 저마다의 특성을 담아 벽화를 새겼더니 방문한 사람은 보는 재미가 쏠쏠하고 사는 사람은 이를 통해 저마다의 추억을 더듬는다. 벽화로 농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공공벽화연구소 꺼리'백혜미 대표를 만났다.

홍정기 기자 사진 최영희 기자 일부 사진 제공 공공벽화연구소 꺼리 070-7625-7826 www.ggeory.co.kr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마을은 작은 개천을 사이에 두고 1구와 2구로 나뉜다. 외지인에게는 크게 다를 바 없는 농촌 마을이지만 원주민들은 오래전부터 묘한 신경전을 벌여왔다. 양반이 다수였던 1구와 평민층이 주를 이뤘던 2구의 주택 형태는 지금까지 이어져, 으리으리한 기와집과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초가에서 모습을 바꾼 슬레이트 지붕의 양옥이 개천을 경계로 상반된 모습으로 놓였다.
여느 농촌이 그렇듯 외지인이 들어올 일이 적은 이곳은 그래서 꽤나 오랜 시간 갈등을 겪어왔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한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구를 찾는 사람이 늘자 몇년 전 지자체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1구를 '황산고가마을'로 지정하고는 이를 위한 각종 지원책을 내놨다.
그러자 2구 사람들이 "있는 집에 더 주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단단히 뿔이 났다. 당황한 지자체는 2구를 지원할 방법을 고심하다 '벽화'를 떠올렸다. 최근 전국에 걸쳐 생기기 시작한 벽화 마을이 나름 인기몰이를 하던 터라, 지자체는 적은 비용으로 잘만 하면 상대적으로 낙후된 2구를 쾌적하게 변모시켜 1구와 2구의 묵은 갈등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자체는 벽화마을 조성을 위해 지역 미술가 단체와 협의를 했지만 벽화 전문가를 찾기 어려웠다. 결국 수소문 끝에 2011년 초 '공공벽화연구소 꺼리'백혜미 대표와 연락이 닿았다. 이렇게 시작한 '황산2구 벽화마을 조성 사업'은 석 달이 걸려 끝이 났다.

 

마을 주민 벽화 덕에 어깨 펴고 살아… 그런데
백혜미 대표는 지자체 관계자, 미술 단체와의 미팅을 통해 디자인 초안을 잡고 몇 차례의 수정 작업을 거쳐 시안을 완성한 후 바로 벽화 작업에 들어갔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그림을 그린다고 마을이 나아지느냐"며 탐탁지 않게 여겼던 몇몇 주민들도 달라진 마을 풍경에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이제는 '황산고가마을'보다 '황산벽화마을'을찾는이들이더많다. 마을 앞 수승대(명승 제53호)를 거쳐 이전에는 1구로 움직였던 관광객 발길이 벽화가 등장한 후로는 2구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요즘 2구 사람들 어깨가 확 펴졌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작업을 의뢰했던 지자체에서도 만족도가 높아 이 정도면 소위 '대박'이라 할만도 한데 정작 작업을 맡았던 박혜미 대표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 지역미술전문가들이 도와줬으니 다른 어떤지역보다 디자인과 결과물이 잘 나왔어요. 그런데 벽화는 예쁘다고 좋은 게 아니거든요. 현장에 가보면 알겠지만, 벽화에 지역 이야기만 있지 정작 그 곳에 사는 주민 이야기는 없어요."
주민과 제대로 된 소통이 없었던 점이 못내 아쉽다는 이야기다. 벽화는 보기에 좋은 그림에 그쳐서는 안 되고 담장 주인의 목소리와 마을의 역사를 담아야 한다고 믿는 백 대표에게 황산마을 작업은 다른 상업용 벽화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벽화 작업을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듣는 거예요. 특히 마을 벽화일 경우 더 그렇지요. 상업 공간은 누가 봐도 한눈에 반할 정도로 예쁜 그림이면 되지만 마을 벽화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거든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가 그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이웃 주민일 수도 있고 이장님일 수도 있어요. 물론 그림 그릴 담벼락 주인이 가장 좋지요."
담 주인이건 이웃 주민이건 이장님이건 처음이 어렵지 한 번 안면을 트면 인생사를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지는 인생역정을 듣다 보면 어느 순간 벽화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친다. 그 아이디어를 붙잡고 디자인 시안을 만든 후, 작업을 의뢰한 지자체 관계자와 협의를 하는데, 아무리 좋은 시안이 나와도 한 번에 오케이 나는 일은 거의 없단다. 결국 주민을 다시 만나 모자란 것을 보충하고 관계자와의 미팅을 수차례 거친 후에야 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
"듣는 게 중요한 다른 이유는 관리적인 측면 때문이에요.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그림이 있다면 별 신경을 안 쓰지만 그림 안에 자신의 이야기가 녹아 있고 역사가 묻어 있으면 상당한 관심을 두게 되죠. 실제 어느 어르신은 당신 집 담 벽화가 혹시라도 때가 탈까 노심초사하고 누군가 광고 스티커를 붙이면 불같이 화를 내세요."

 

 

 

 

 

8개월간 한 마을에 집중… 소통이 가장 중요
그러다 보니 당연히 작업 기간이 길 수밖에 없다. 황산마을은 그나마 짧은 축에 속해 백혜미 씨가 가장 애착을 갖는 대전 산내동 벽화는 장장 8개월에 걸쳐 작업이 이뤄졌다. '무지개프로젝트'일환으로 진행된 산내동 벽화마을 조성 사업은 점점 낙후되는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고자 지자체에서 상당한 공을 들였다고 한다.
마을 입구 벽, 산내동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 그림이 길을 안내한다. 큰 길을 끝까지 걷는 데 20분 남짓 걸리는 짧지 않은 거리지만 곳곳에 그린 벽화를 보는 재미가 쏠쏠해 시간 가는 지, 다리 아픈지 모른다.
버스 정류장 앞 벽에는 한 여성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차를 기다리는 동안 책을 보고 있고, 그 옆에는 여러 의자를 침대 삼아 턱 하니 누워있는 남성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여성이 그려져 있다. 인근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여학생에게 벽화에 대해 물었다. 백 대표가 말한 주민과의 소통의 결과가 궁금했다.
"이 동네 집들이 낡아 예전에는 되게 삭막했거든요. 사람들이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려서 지저분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벽화가 완성되고 나니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고 거리를 걷는 재미가 생겼어요. 어른들뿐만 아니라 제 친구들도 좋아서 사진 찍고 그랬어요. 정류장에 있는 이 그림은 '차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만 보지 말고 책을 읽어라, 그리고 공공장소에서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자'뭐 이런 뜻 아닐까요?"
그림에 대한 두 학생의 해석이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들이 그림을 단순히 '그림'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로에서 동네로 진입하는 골목 어귀에 쓰레기통을 뒤지고 나오는 고양이 벽화가 있다. 일명 산내동 지킴이다. 외지인이 보기에는 그냥 귀여운 고양이지만 여기에도 마을 이야기가 담겼다. 골목으로 접어드는 길이다 보니 언제부턴지 사람들이 이곳에 몰래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 잦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림을 그려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하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호시탐탐 쓰레기통을 노리는 고양이에게 감시 임무를 맡긴 것이다. 그리고 한 식당 측면 벽에는 엄마와 아이가 숨바꼭질 놀이에 한창이다. 이곳 벽에 딱 붙어 친구들을 놀라게 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주인의 말에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렇게 산내동 벽화에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벽화의 핵심은 사람과 그들의 이야기
사실 '공공벽화연구소 꺼리'를 운영하는 백혜미 대표에게 마을 벽화를 그리는 일은 그리 큰 이문이 남는 사업이 아니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8개월을 한 지역에서 먹고 자며 매달려야 하는데, 대부분이 지자체가 주도하는 것이라 예산이 넉넉지 않아 큰 이익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틈틈이 카페 등 상업용 시설에 벽화를 그린다.
"그래도 농촌 마을 벽화 작업이 가장 보람 있어요. 상업용 벽화는 작업이 끝나면 더 이상의 소통이 없지만 공공 벽화는 계속 끈이 이어지거든요. 제 그림을 주민이 좋아해 주고 제 그림으로 인해 인적 없던 마을에 찾는 사람이 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해요. 처음에는 '이런 낙서를 우리 집에 왜 그리느냐'며 반대했던 분이 나중에 연락이 와 '하고 나니 아주 좋다'고 감사의 말을 전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정말 기분이 좋았죠."
그리고 그는 벽화 작업을 하면서 주민이 커피 타 주고 라면 끓여주고 재료 제공하고 했던 일들을 소개하며 평생 잊을 수 없는 좋은 추억이라고 말했다.
한편 전국적으로 우후죽순 생겨난 벽화 마을에 대한 우려의 말을 꺼내기도 했다. 지자체에서 적은 예산으로 하다 보니 특징이 없는, 이도 저도 아닌 그림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 '벽화는 비바람 맞으면 금방 망가진다'는 말을 하는 분이 있는데 그 이유가 재료의 특성도 모른 채 그저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봉사 차원에서 그려서 그래요. 전문가들은 자신이 쓰는 재료의 물성을 잘 알기에 한 번 그린 그림은 적어도 십 년이상 갑니다."
돈 안 되는 일에 무작정 뛰어들었다가 어느덧 마을 벽화 전문가 소리를 듣게 된 백 대표. 그는 긍정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더니 얼마 전 중소기업청에서 지원하는 1인 창조기업에 선정됐다며 환한 웃음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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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기만 해서는 안돼요. 이야기, 역사가 담겨야지요” , 마을벽화 그리는 ‘공공벽화연구소꺼리’ 백혜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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