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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 땅의 형태와 풍수지리적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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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리’라는 마을은 소가 누워 있는 형국, 즉 와우형에서 유래되었으며 귀락정은 거북이 묻혀 있다는 금귀돌니형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마을 이름치고는 특이하다고 생각되는 서중리는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형태와 같다는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이 있어 생긴 이름이다. 또 구이면의 태실리와 난산리도 이같은 형국론에서 유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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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국론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이 풍수지라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이 바로 지명이다. 지명의 대부분은 지역 성격을 강하게 반영한다. 지명은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서 어떤 형태로든 땅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붙여지기 때문이다. 임진왜란때 배수진의 전술로 유명한 신립장군의 얘기를 예로 들어보자. 충북 청원군 가름면 창동리 갈마(渴馬)마을의 유래는 신립장군의 애마가 이곳에 와서 죽어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은 목마른 말이 죽은 자리로 갈마음수지혈(渴馬飮水之穴)이라 부르며 갈마란 마을 이름이 이 때 부터 유래한다.

전북 정읍군 산외면 오공리는 지네형국으로 지네를 가리키는 오공리(蜈公里)였으며 자연부락 이름도 지네 마을이라 불리었으나 일제 때 현재의 오공리로 바뀌었다. 삼례읍의 금반리는 마을 뒤에 옥녀봉이라는 산이 있고 여기에 옥녀금방형이라는 명당이 있어 생긴 이름이며 봉동읍 무등리는 현재 석간리와 합쳐 무석리로 부르고 있으나 원래의 무등리는 옥녀등천형(玉女登天刑)에서 유래됐다. 또 우산리는 마을의 소가 누워 있는 형국, 즉 와우형에서 유래되었으며 귀락정은 거북이 묻혀 있다는 금귀돌니형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마을 이름치고는 특이하다고 생각되는 서중리는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형태와 같다는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이 있어 생긴 이름이다.

또 구이면도 태실리(마을 뒤에 태봉이 있고 여기에 조선조 예종의 태실이 있음)와 난산리(마을 뒷산에 연소혈이 있는데 제비가 알을 품고 있는 모양과 같다고 해서 유래된 것)도 이같은 형국론에서 유래됐다. 거북에 비유되는 형국도 많은데 거북은 흔히 민화에서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거북이가 묻혀 있다는 금귀몰니형으로 잘 알려진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 운조루는 당시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건립한 것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양반가의 집이다. 하늘의 거북 즉, 천귀란 기를 마시며 사는 동물, 그래서 거북이가 땅속에 묻혀 있다는 금귀몰니형은 흙 속에 금귀가 있으니 오행으로 따져 토생금(土生金)이 된다. 토는 오행의 기를 받기 때문에 이런 형국에서는 묘지보다는 양택(집)이 대길 한 것으로 보고 있다.

풍수지리설의 형국론에서는 둥근달(만월)은 좋아하지 않는다. 일과 월은 중요시하면서도 월의 경우 초승달형 즉 반월형을 선호했다. 반월형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쓰면 점점 커져서 보름달처럼 재산이 늘어나거나 출세를 한다고 생각했다. 충남 서산군 안면읍 박모씨는 이런 집터에 살고 있는데 자기 집터가 반월형이어서 한때는 기둥이 뻗어갔으나 보름달이 기울 듯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쇠퇴하였다고 한다. 삼태기 조리 형국도 그런 예에 속한다. 이런 형세는 처음에는 운세가 뻗어나지만 삼태기나 조리는 가득 차면 한꺼번에 엎질러져 버리는 형태이므로 망하게되면 아주 망한다고 본다. 경북 경산군 용성면 곡란동 최씨 집이 조리형으로 알려진 지이다.

삼태기 형국으론 충북 음성군 감곡면 월지리 고니골이 삼태기 형국인데 이런 집터는 대대로 번성하기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겠다. 조선조 학자 홍만선도 '산림경제'의 복거조(卜倨條)에서 사면이 높고 가운데가 낮으면 비록 부자일지라도 점점 가난해지므로 평탄한 것이 가장 좋다고 기술하고 있다.

풍수지리로 본 안동 하회마을

하회마을에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는 명당 이름을 붙인 까닭은 수면의 낙동강이 이 마을을 감싸고 있어 마치 물 가운데 떠 있는 연꽃과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흔히 연꽃은 꽃과 열매를 구비한 아름다운 꽃으로 이름이 나 있어 불교 미술에 많이 이용된다. 하회마을에서 집을 짓고 사는 경우에는 그 터를 수면보다 너무 높게 해서도 안되고 너무 낮게 해서도 안좋다. 다시 말해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그런 자리에 집터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회마을에 행주형(行舟形)이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도 같은 이치다. 하회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 건너 산 위에서 하회마을을 바라보면 이 마을 형상이 마치 강언저리에 매어 놓은 배가 밧줄을 풀고 건너편으로 건너가려는 듯한 모습이다. 이러한 행주형 역시 마을을 빙 둘러싸고 흐르는 화천(花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풍수지리에서 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산을 따라 흐르던 기가 물을 만나면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멈춘다. 하회마을은 마을의 주산인 화산과 원지산 혹은 부용대와 같은 산들이 비록 서로 가까운 위치에 마주보고 있지만 그 계보는 전혀 다르다. 이들은 비록 백두대간이라는 동일한 시조산을 갖고 있지만 아주 멀리 천리 밖에서 파가 갈려 소백산은 백두대간에 의지하고 일월산은 낙동정맥의 한 지맥이 되어 하회마을 쪽을 향해 달리다가 화천을 만나 서로 강을 건너지 못하고 마주 바라보고 있는 형상을 취한다. 이 것을 두고 ‘천리 장강에 형제상봉'이라고 표현한다.

하회마을을 흔히들 산태극 수태극의 길지라한다.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강의 흐름세가 S자를 옆으로 뒤집어 놓은 형상이다. 물이 태극 모양을 이루니 자연 강을 끼고 있는 땅의 모습도 태극을 이루어 산태극, 수태극을 형성한다. 이 음양이 서로 만나 태극을 이룬다. 무엇이든 음이나 양 혼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음양이 서로 만나 단순히 미학적 조화를 이루어 마을의 경관이 수려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음양이 서로 만나면 생산을 하게 된다. 남녀가 서로 만나 부부가 되어 자식을 낳고 가정을 이루듯 산과 물이 만나도 풍부한 산물을 낳고 인물을 낳는다. 산태극 수태극 명당이 좋다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하회마을의 만송정 송림은 풍수의 비보책으로 세운 것인데 풍수의 이론에서 보면 물이 빠져나가는 것이 집안에서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지형 지물이 없는 경우 인공적인 보책을 세운다. 이것이 만송정 소나무 숲이다. 또한 하회마을은 예로부터 이곳에 사는 씨족은 외손의 것이 된다는 말이 전해오는 데 처음 입주한 하씨 외손 안씨가 득세했고 그 이후 안씨의 외손으로 유씨가 득세 오늘에 이르는데 유운룡(원주목사) 유성룡(영의정) 형제를 냈는가 하면 유후조(우의정) 유중령(관찰사) 등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인촌 김성수 가문과 풍수지리

전통적으로 명문거족 일수록 풍수지리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 조선조에만 하더라도 왕으로서는 태조와 세조 임금이, 유학자로서는 하륜, 정도전, 윤선도, 이의신, 스님으로는 서산대사, 무학대사 그 밖에 남사고,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이나 대원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인촌 집안의 경우 그 윗대 조상부터 양택의 풍수와 음택풍수를 매우 신중하게 수용했으며 집안 스스로가 풍수지리에 정통한 인재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촌선생의 조상들이 남긴 유품중에서 풍수지리를 직접 활용했음을 보여주는 패철과 전체보좌도표가 있었다. 풍수지리에 정통한 확신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북향 대문을 두었다는 것은 그 집안의 풍수지리에 대한 식견을 생각하고도 남음이 있다.

‘인촌전기'에 따르면 원파기증(인촌의 양부)은 장손으로 선산을 개수하고 묘각을 세우는 일로 출비가 많았다고 하는데 아마 백련암을 옮기게 하고 그 자리에 선친의 묘를 잡은 것도 그의 노력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인촌 김성수 가문을 일으킨 장본인은 정씨 부인으로 일컬어진다.

장성에 살던 김영환은 고창 해리에 볼일을 보고 돌아가던 중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 정진사댁에서 하룻밤을 유숙한다. 그 집 사랑에서 술잔을 나누며 김공과 정진사는 의기가 상통하여 사돈을 맺기로 언약한다. 정진사의 고명딸과 김공의 셋째 아들 요협이 결혼하여 정착한 곳이 인촌 마을이며 인촌 김성수는 자기가 태어난 마을 이름을 호로 썼다. 김요협의 부인이자 인촌의 조모는 두 아들 원파공과 지산공에 이르러서는 만석지기가 되었다. 한편 원파공은 인촌의 양부이며 지산공은 인촌의 생부이다. 김요협은 큰아들인 원파공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지산공에게서 난 인촌이 원파공에게 들어간다. 인촌의 가문은 이쯤 살펴보고 이제 그의 집을 살펴보기로 하자 인촌의 집은 민간에서 일반적으로 꺼리는 북향집이다. 속설에 따르면 북향 대문은 집안의 귀, 부, 손을 절멸시킨다고 한다.

그런데 인촌생가의 경우 사능선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것을 따라 남쪽에 안방 북쪽에 대문을 설치했다. 양택 풍수에서는 대문 안방, 부엌을 중요시하는데 인촌 생가의 경우 안방은 남방, 대문은 북방이다. 즉 자문오주(子門午主)에 해당되어 ‘子午가 중하는 것' 이므로 나쁘나, 달리 생각하면 북쪽에 대문이 남쪽에 안방이 들어서면 수화(水火)가 기제(旣濟)하여 크게 길하고 번창한다는 역(易)의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참으로 보통사람이 깨닫기 어려운 단계를 뛰어넘는 풍수의 한 면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인촌의 집안은 이 집의 명당 덕을 톡톡히 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인촌의 생가에 도깨비불이 발생하여 이 집안을 부로 이끌었다고 전한다.

아산 맹사성 생가와 풍수지리

옛말에 ‘잘 되면 내탓 안되면 조상탓'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한계에 부딪칠 때 죽은 조상을 탓하거나 묘자리 집터 등을 잘못 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의식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어찌 보면 풍수지리적인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전 외국의 한 유명인사가 한국인의 근성을 들쥐에 비유해 크게 분개하여 뉴스의 초점이된 적이 있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시대의 시류에 잘 따르고 힘있는 자의 편에 섰다가 또 다른 힘센 자가 나오면 또 그곳에 줄을 서고 지나온 자기 과거를 송두리째 망각하는 우리 현실을 개탄하기도 한다. 살다보면 무엇이 진리이고 참다운 삶인지 분간하기 어려울때가 많다. 이런 때에 우리 역사에서 청백리로 우뚝 솟은 고불 맹사성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맹사성은 세종조 좌의정까지 지낸 분이지만 변변한 집 한 채 남긴 것이 없었다. 생전에 그는 관리로서 나라에서 주는 정부미만 먹고살아 어쩌다가 부인이 햅쌀로 밥을 지어내면 상을 물리치고 호통을 쳤다. 또 그를 찾아온 어떤 대신은 비조차 피할 수 없는 그의 집을 보고 자신의 행랑채 짓기를 그만뒀다는 일화도 전해져 오고 있다.

선조의 음택이 좋아서인지 혹은 양택이 그 집안에 좋은 영향을 미쳐서 있지는 그 집안마다 다르고 또 구태여 그것을 어느 한쪽만이라도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통상 일본에서는 양택에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음택에 더 깊은 애정을 쏟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몇몇 명가는 그 집의 정기를 받아서 집안이 크게 번성했음을 알 수 있는데 아산 맹사성 생가도 그중의 하나라 하겠다. 본래 이 터는 최영장군이 살던 집으로 그가 개성으로 영전해 가면서 맹정승의 조부인 맹욱에게 물려준 것이다.

맹정승의 탄생 설화를 보면 그의 어머니가 어느날 꿈에 태양이 입안으로 들어가는 꿈을 꿔 이를 시아버지에게 털어놓았다. 시아버지는 당시 개성에서 과거준비를 하던 아들 맹희도를 ‘부친위독'이란 서신으로 불러 며느리와 함께 하게 한다. 이리하여 맹사성이 태어나게 된다. 한편 영조대왕은 맹정승과 그의 부친 동포공의 제사를 지내고 충효세업 청백가성(忠孝世業 淸白家聲) 즉 충과 효를 대대로 지키고 청렴과 결백을 가풍으로 삼았다는 현판을 내렸다. 후세의 왕이 그의 청백리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충남 아산 배방면 중리 맹정승의 고택을 ‘행단'이라고 부르는 것은 맹정승이 손수 심은 은행나무를 두고 있기 때문이며 건평은 약 30평으로 대청마루를 양옆으로 온돌을 깐 방이 한 칸씩 달려 있다.본채 뒤편에는 그의 부친 동포 맹희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고 현재 남아 있는 구조물은 입구에 행랑채가 달리 솟을대문과 본채, 사당이 전부다.



풍수지리에 정통했던 ‘인촌가’

인촌가의 풍수지리에 대한 식견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함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조상 무덤을 부부합장이나 가족장을 하지 않고 한 명당 한 묘의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는 것이다. 이는 풍수지리의 이론에 입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인촌 가문은 그 조상이 여러 곳에 산재해 있으며 대부분 손꼽히는 명당터에 자리잡고 있다. 명당은 3대에(100년) 하나 쓰면 족하다는 말이 있고 보면 인촌가는 숱한 조상의 명당발복으로 앞으로도 그의 가문은 크게 빛날 것으로 보여진다. 우선 고창군 흥덕면 방암리의 ‘병바우' 동네에 인촌의 할머니인 정씨 묘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신선이 술을 다 먹고 병을 덮어 놓은 채 누어 있는 형국이라는 선인취와형으로 불린다. 물은 남쪽에서 흘러와 서쪽으로 빠져나갔으니 오행에서 말하는 화국으로 정확한 혈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또 무장과 고창에서 흘러오는 물이 묘앞을 가로 흘러 서해로 흘러가는 중에 물의 흐름을 막아주는 산들이 첩첩이 쌓여 서해와 맞닿고 안산은 병바위요, 서쪽은 조산인 말안장 바위니 호남 8대 명당 중 수혈로 꼽힌다. 정씨 부인보다 2년 먼저 타계한 인촌의 조부 요협의 묘는 장군대좌형으로 싸움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진중의 장군 모습이다. 순창 복흥면 화용리 화개산 밑에 있는 인촌 9대조 묘는 이곳 주민들 사이에 비봉포란형이라 불리는데 주산에 해당하는 화개산이 마치 봉이나 금계의 머리 모양과 흡사한 데다가 좌우 청룡백호는 날개를 앞으로 펼쳐 무덤을 감싸고 있다. 또 그 앞에 안산과 조산들의 생김새가 둥글둥글하여 새알을 연상시켜 마치 봉이나 금계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과 같기 때문에 풍수지리를 잘 모르는 사람조차 쉽게 수긍이 가는 형국을 하고 있다.

변산 해수욕장 뒤에 있는 인촌 증조부 묘는 순창 쌍치면 보평마을 뒷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면당의 규모로 볼 때 증조부 묘에 비해 아기자기하면서도 풍수지리 초보자들이 표본으로 삼아 공부할 수 있는 교과서적 명당으로 주마탈안형(달리는 말이 안장을 벗고 쉬는 형국) 혹은 갈마음수형(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 부른다. 풍수지리적인 관점에서 사실 완벽한 명당이란 거의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옥에도 티가 있듯이 천하에 완전무결한 명당은 없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몇 가지 관점에 견주어 명당의 진혈을 가늠하기도 한다. 그 공통적인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면 무덤까지 내려오는 용(산줄기)이 생룡이냐 사룡이냐를 보아야 하고 혈의 종류가 사상으로 진혈인 와, 겸, 유, 돌의 네 가지 형국 하나의 형태를 띠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또 주변 국세나 물길은 적절하며 좌향은 바로 정해졌는가. 해당 명당이 장풍득수국을 이루고 있는지도 보아야 한다. 이러한 모든 관점에서 비교해 볼 때도 인촌 가문은 음택 양택 모두 뛰어난 길지에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글:청운 김영운(풍수지리 연구가 02-845-5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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