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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항 건축의 배경과 위항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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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사대부가 설계한 계획도시였다. 행정 도시이자 사대부의 주거도시로 탄생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체의 도시기능과 거주민은 사대부를 위해 봉사하도록 안배되었다. 소비주체로서 사대부들은 조세와 지대로 생활을 영위했고 나머지 제 계층들은 그 일부를 수동적 처지에서 재 분배받아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병양란 이후 사정은 달라졌다. 조선 후기 서울의 인구는 약 20만명에서 30만명 사이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의 서울인구 10만명에 비하면 거의 두배이상이 늘었고, 임병양란으로 숨진 사람까지 계산하면 급속도로 성장한 거대도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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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고전의 문화적 배경인 동아시아의 한문 문화권에는 일찍부터 유불도의 사상이 인간사회와 자연세계의 관계 및 그 중심점을 두고 서로 다른 관점을 대표해 왔던 전통이 있으며 그러한 사유인식은 현실권의 문학과 방외적 취향의 문학에 다각도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경향의 조선 전기 한문학을 학자들은 관각문학, 사림파문학, 방외인문학으로 나누었다.

이 시대의 관각문인들은 현상적인 사물 속에 이미 심성의 도리를 조화롭게 구현하였으며 한문 고전을 통한 단련을 중시하면서 중세문학을 지탱할 만한 불변의 문학적 전범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형식주의자들 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그러한 형식을 통해 심성이라는 내용을 어떠한 착오와 갈등 없이 담을 수 있는 표준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고전주의적 가치를 지향했다고 본다.

또한 사림파들은 훈구화 되어 가는 관각문인들과는 달리 재야의 문학을 추구하면서 현실참여를 위한 문학을 겸해야하는 양면적 성격 때문에 관각문학과 방외인문학 모두와 다르면서도 그것들을 어느 정도 포괄해야하는 고민을 내포하고 있다.

이 사림파는 훈신, 척결계열과 대립하는 재야의 사림을 배경으로 하여 정치세력을 형성했던 집단을 지칭하며, 16세기 일군의 재야 지식인들이 정치집단화 함으로써 형성된 협의의 사림집단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유학적 세계관을 심화시키고 더욱 넓은 사회적 기능을 자임하였다.


방외인, 방외인문학

방외인문학은 '방외인'이 주체가 되어 이룩해 놓은 문학 활동 내지 문학 작품의 총칭을 말한다. 방외인은 어떤 문화의 중심권에서 벗어나 있는 공간이라는 의미의 '방외'에서 삶을 꾸려간 인물들을 지칭한다.

방외인문학에 관한 총괄적 연구에 의하면 조선전기에서 관각문인과 사림파문인에 소속되지 않는 재야의 제3 작가군을 설정하고 그 문학을 '방외인 문학'이라는 개념으로 포괄했다. 그리고 그 특징은 '세계와의 모순을 추구하고 현실주의를 지향한다'는 점과 '객관화된 요건보다 내심의 반발을 더욱 긴요한 문학적 과제로 삼는다'는 점이다.

방외의 개념은 크게 세 부류로 대별된다.

첫째, 구심적 공간개념에서의 변두리,
둘째, 상대화된 문화적 개념에서의 안팎 중 외부,
셋째, 절대화된 종교적 개념에서의 초월적 공간내지 경지가 그것이다.

이 개념은 역사적으로 첫째 단계에서 둘째 단계로, 문학적 사상적으로는 둘째 단계에서 셋째 단계로 이행되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으로 이 방외사상의 짝은 중화사상 혹은 중세적 이념이다. 중화사상이 동아시아의 중세문명권을 결속하는 구심적세계관을 담고 있었다면 방외사상은 관심의 초점을 주변부의 문화로 옮기면서 중세의 다양성을 담지하는 원심적 세계관을 구축했다.

따라서 방외인은 중세적 지식인의 한 전형이며 그 맞은편에 거대한 중세의 문명체계를 떠받쳤던 방내의 지식인이 있다. 방외인은 위계질서를 아름다움으로 여기는 중세의 시대정신으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져 나가면서 스스로의 존재근거를 해체하고 중세문화에 섬광과 같은 무늬를 선사했다.

고대 이전이나 근대 이후에는 원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방외인은 문화사적으로, 근대라는 목표를 향해 자기부정을 거듭해왔고 종국에는 시대의 전면에서 퇴장하여 빛 바랜 존재로서 새로운 위상을 찾아야하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방외인들은 중심권의 수준 높은 문화를 주변부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하거나, 그것을 주변부 문화의 입장에서 재해석하거나 더 나아가 주변이 곧 중심이라는 개성 보편론의 세계관을 보이기도 했다.

이들 방외인은 조선후기에 유가이단, 위항인, 시정인, 이인, 도사 그리고 녹림호걸 등의 개념으로 확대해 감을 보여 주었다. 이는 고독한 지식인으로서의 조선 전기 방외인의 성격에 비해 구체적 대안을 모색하는 지식인 상으로 변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 중 위항인에 의한 위항문학은 방외인 문학 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된다.


위항, 위항인, 위항문학

위항문학은 '위항인'에 의해 창작된 한문학이다. 우선 위항인이란 용어의 근거인 위항이란 무슨 뜻일까?

위항 또는 여항은 '예기'의 '단종'상편과 '사기'의 '이사열전'등에 나오는데, 그 원의는 '꼬불꼬불한 거리 또는 골목'으로 '인구가 조밀한 주거지'란 의미이며 동시에 지배층이 아닌 피지배층의 거주지란 의미가 겹쳐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후기 문헌에 자주 나타나는 위항이란 말에는 구체적인 사회상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위항이란 어휘에 내포된 '인구의 조밀지역'이란 다름 아닌 도시의 주거지를 가리키며, 조선 사회와 관련지어 서울의 비 양반층의 생활공간을 의미한다.

즉 위항이라는 어휘에는 조선후기 서울이 경험한 변화, 즉 양반 중심의 도시에서 비 양반층이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성장해 갔던 시대적 변화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가끔은 문헌에서 시정이라는 원의와 가깝게 또는 특수한 역사적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것을 확대하면 위항인이란 도시에 거주하는 비 양반층 전체를 포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위항인은 거의 예외 없이 경아전과 기술직 중인에 한정되어 쓰이고 있다.

이에 일단 위항인 부류의 주축을 경아전과 기술직 중인으로 잡을 수 있고, 좁게는 이처럼 경아전과 기술직 중인이 된 특정부류의 한문학이 위항문학이다.

위항시, 즉 위항문학은 이 특정부류인 위항인들의 한시를 가리킨 것이다. 이것이 위항문학이란 용어가 일정한 역사적 구체성을 가지게 된 까닭이다. 그 외에 위항인들에는 그들과 동등한 위상을 가진 액속, 시전상인, 군교, 의금부 나장, 승정원 사령 등을 위항인의 범위에 포함시켰다.

조선 후기 '홍재 전서'의 자료는 양반도 아니고 천민도 아닌 중간 신분 층을 따로 독립시키고 있다. 이 자료가 중인과 시정을 갈라 보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 두 신분은 서로 이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신분간의 미세한 차이를 밝히는 것일 뿐 양반-중간층-하천민이란 큰 구분을 염두에 두고 다시 중간층 내부의 상대적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위항인들은 조선 전기부터 등장하기는 하나 위항문학이 조선후기의 문화현상이듯, 그 담당 층 역시 조선후기의 사회변화 속에서 의미 있는 계층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 조선 전기에는 이들 제 부류들은 객관적으로 확고부동한 신분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 전기에 기술직과 경아전직으로 진출하는 층은 일정한 범위 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확고한 신분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때는 17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되며 위항인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둘째, 위항인을 구성하는 각 부류들은 조선 후기에 와서야 신분으로 성립함과 동시에 일정한 경제적, 문화적 능력을 갖춘 사회세력으로 대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 전기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현상이다. 이들은 조선 후기의 계급체계 내에서 지배계급에 속하나, 권력의 원천을 소유한 세력은 아니었고, 경제적 토대를 그 이하 계급의 생산물을 착취하는데 둔다는 점에서 중간계급에 해당한다.


도시-서울의 발달과 위항인

서울은 사대부가 설계한 계획도시였다. 행정 도시이자 사대부의 주거도시로 탄생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체의 도시기능과 거주민은 사대부를 위해 봉사하도록 안배되었다.

소비주체로서 사대부들은 조세와 지대로 생활을 영위했고 나머지 제 계층들은 그 일부를 수동적 처지에서 재 분배받아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병양란 이후 사정은 달라졌다.

조선 후기 서울의 인구는 약 20만명에서 30만명 사이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의 서울인구 10만명에 비하면 거의 두배이상이 늘었고, 임병양란으로 숨진 사람까지 계산하면 급속도로 성장한 거대 도시인 것이다.

또한 조선 시대 인구 구성은 다음과 같이 형성되어 있다.

1.왕실과 양반관료
2.행정 실무 집단
3.공사노비와 천역담당 양인
4.직업군인
5.상인, 수공업자
6.농민. 그리고 여기서 급격한 인구증가는 2~5에서 일어났으며, 실제로 그 수가 증가하고 부와 지식을 소유한 사회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2의 경아전 층과 기술직 중인, 그리고 5의 상인이었다.

이렇듯 경아전 층과 기술직 중인 그리고 상인층의 문화적 경제적 성장은 서울이란 도시의 성격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위항인은 수탈의 단순한 재분배에 의존하는 상태를 벗어나 독자적인 생활공간을 창출하는 도정에 섰던 것이다. 위항은 인구의 증가와 도시상업의 발달이란 역사적 변화에 반응하여 새로이 창출된 도시 피지배층의 생활영역이다.

그 시대 사람들은 새롭게 창출된 비 양반층의 생활영역을 위항이란 말로 표현했으며 또 그 주축을 위항인 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 영역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문화가 형성되었던 바, 그것이 위항문화이며 위항문학은 위항문화의 한 갈래인 것이다.

위항인은 기본적으로 '도시' 서울의 역사적 변화 속에서 형성된 도시민이다. 이런 점에서 위항인은 중세도시를 근거로 하여 출연했던 서구의 부르즈와나 일본의 덕천막부 성립이후 도시의 상인층이었던 정인과 발생론적 차원에서 유사한 성격을 갖는다.

서구의 부르즈와는 원래 성벽속의 거주자에서 유래하였던 바, 부르즈와는 도시민을 의미하는 것이다. 11세기에 와서 부르즈와는 기사, 성직자, 농노라는 말에 대해 아주 명백히 대립적인 어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 역시 덕천막부 성립이후 17세기에 오면 전국 통일로 촉진된 상업의 발달로 인하여 도시에 거주하는 상인과 수공업자가 주축이 된 정인계급이 성립하였다.

'정'이라는 말 역시 농촌의 촌락과는 구분되는 도시의 생활공간을 의미하니, 정인 역시 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성립되었던 것이다. 정인은 지배계급인 무사에 대해서는 피지배계급이지만 재력과 문화적 교양을 가졌다는 점에서 농민과는 구별되는 존재다.

중세 해체기의 도시의 발달과정에서 서구는 부르즈와가, 일본은 정인이 만들어 졌다면 조선에서는 위항인이 출연했던 것이다.

요컨대 위항인이란 용어는 도시의 발달이란 역사적 현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중인이 포괄하지 못하는 중간계급의 제 부류를 포괄할 수 있는 탄력성 있는 용어이다.

그러나 서구의 부르즈와가 봉건영주로부터 도시의 자유, 자치권을 획득하고 급기야 시민혁명을 거쳐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시민사회를 창출하였다면, 조선의 위항인과 일본의 정인은 사회변화를 추동하는 주체적 계급으로 전화하지 못하고 봉건 사회 내부에서 그 성장의 폭이 제한되었던 것에서 결정적인 성격의 차이가 있다.

위항인은 성장하는 계급으로서 권력으로부터의 소외란 동질적인 유대감, 즉 계급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체제에 기생하는 부류들 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의 경제적 토대가 체제의 타락과 체제가 제공하는 특권에 있었다는 점에서 진보적 계기를 성장 시킬 수 없었고' 이러한 미 성숙한 정치의식은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문학예술 활동으로 집약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위항문화요 위항문학인 것이다.


위항의 시사와 예술 활동

조선후기 위항인의 예술 활동의 영역은 대단히 넓다. 특히 진경시대와 맞물려 그들이 개입한 예술 활동은 음악, 회화, 글씨, 국문학 (시조, 판소리 등), 한문학 등의 광범위한 영역에 걸치고 있다.

따라서 위항인을 주축으로 한 문화예술 활동이란 총체적 시각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특히 한문학을 중심으로 한 위항의 예술 활동이 시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만큼 각각의 특성이 드러난 조선후기 200년 전통의 시사활동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시사란 창작활동을 위한 동인적 결사체이다. 또한 조선시대의 시사란 특정한 세계관 내지 창작방법을 표방하는 문학 유파라기보다는 보다 단순한 시 창작을 목적으로 하는 유흥적 서클에 가깝다.

그러나 위항문학에 있어서 시사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위항의 시사는 주로 위항인의 동질감을 핵으로 하여 결성되었고 위항문학 자체가 시사를 중심으로 발달했기 때문이다.

'육가'와 '낙사'를 시발로 위항시사는 약 2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각 시기마다 시사의 성격이 상당히 달라지는 바, 그 변화의 양상과 원인을 추구하는 것은 위항문학의 성격파악에 중요한 사안이 된다.


조선 후기 위항 시인들의 시사와 모임터

풍월향도와 침류대 : 16세기 후반, 선조대

풍월은 원래 양반들의 전유물이다. 그래서 양반들은 어울리지 않게 풍월이나 읊고 다니는 상두꾼을 '풍월향도'라고 불렀다. 대표적으로 백대붕과 유희경인데, 백대붕이 죽고 유희경이 의병활동을 하면서 양반으로 신분이 상승된 뒤에 '풍월향도'의 모임은 해체되었다.

창경궁 서쪽 지금의 중앙고등학교 자리인 침류대의 경치가 아름다워 사대부 문인들의 모임터로 바뀌었지만 아직까지는 평민과 양반들이 함께 어울린 시사는 아니다. 왜냐하면 16세기 중반만 해도 퇴계와 율곡에 의한 성리학이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육가잡영과 삼청동 : 1600-1685, 광해군과 현종조 시대

임란 후부터 병자호란 후까지 유희경의 제자인 최기남은 자기 집에다 서당을 열어 위항의 제자들을 가르쳤다. '산이 맑고, 물이 맑고, 사람이 맑다.'고 하여 삼청동이라 불린 이 동네는 경치가 좋아 그와 신분이 비슷한 위항시인들이 모여들었다.

여섯 명의 동인들 가운데 그를 제외한 다섯 명은 모두 역관과 의원이었다. 이들 여섯 시인이 여러 가지 형태의 시를 모은 책이 바로 첫 번째 위항시선집인 '육가잡영'이다. 그들 중 최대립은 육가와 이후에 형성되는 시사인 낙사와의 가교 역할을 하였으며, 이 시기는 기술직 중인이 형성되는 때와 상응한 시기다.

낙사와 삼천동/ 옥류동, 필운대 : 1650-1730, 숙종 년한

이 시기는 역관 무역의 전성기이고 역관 내부에서도 계층적 분화가 발생하였다. 초기 삼청동에서의 활동 시기는 기술직 중인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후기 옥류동과 필운대 시기는 경아전으로 중심이 이동하면서 음악과 서화 등 다채로운 영역으로 활동의 폭이 넓어졌다.

또한 이 시기는 율곡에 의한 조선 성리학이 완벽하게 뿌리를 내린 시기였고, 우리 문화의 진경시대 중 초기인 숙종 년한의 문화 절정기와 때를 같이하면서 진경시대의 예술과들과 폭넓은 교류를 시작하였다.

최기남의 제자인 임준원과 그 외 제자들, 그리고 아들인 최승태등이 홍세태, 정내교와 어울려 시를 지었다. 권률과 이항복의 집 바로 위가 필운대이고 여기서부터 백련봉 서쪽 까지가 북부이다. 지금의 사직동, 누상동 그리고 옥인동에 해당하는 이 지역에 주로 가난한 위항시인들이 모여 살았으며 모임 날짜와 장소를 정하여 시사가 열렸다. '서울의 모임'이라는 뜻의 낙사는 1680년(숙종6년)경 절정을 이루었다. 시집 '소대풍요'에 116명의 시가 실렸다.

금란사와 구곡정사, 반포암 : 18세기 중반, 영조시대

18세기는 초기 역관출신들의 낙사와 후기 경아전 중심의 낙사가 금란사를 거쳐 구로회로 이어지고 옥계사로 연결되는 위항모임의 절정기 이다. 금란사는 군부의 아전이었던 김광익이 주동하여 10여명이 만든 시사이고 주로 경아전 계통의 위항시인들의 모임이었다.

옥계사와 누상동,옥인동 : 1786-1818, 정 순조대

정조10년 1786년 7월 16일 최창규를 비롯한 우대에 거주하던 경아전이 옥계에 모여 시사를 결성하였고 지금의 옥인동 47번지 일대가 옥계사 동인들의 모임터 이다.

천수경이 옥계로 이사와 소나무와 바윗돌아래에 초가집을 짓고 송석원이라고 이름붙인 뒤부터 옥계사가 송석원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1817년에 추사 김정희가 '송석원' 세 글자를 써주었고 봄, 가을에는 수백명이 모여 시를 지으며 놀았는데 이를 백전이라 하였다. 규장각 서리들이 주로 참가 하였으며 사대부와 공동시집을 내기도 하였고 공동전기집을 발간하기도 한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팽창된 시기였다.

경제적 문화적으로 성장한 이 시기의 위항시인들은 긍정적 자아의식과 함께 중세적 인간형에서 근대적 인간형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의 변화를 만끽하기도 하였다. 옥계사 번성 후 위항시사 활동 마지막 시기인 182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의 위항시사 모임은 시대별로 소구룹을 형성하였고 더불어 소시인군을 배출하였다.

서원시사

인왕산에서 김낙서의 일보원을 물려받은 아들 김희령과 그 후배들을 중심으로 시사가 열렸다.

금서사

금서사는 인왕산 아래 금천교 서쪽에서 모이던 시사이다. 1817년 여름부터 규장각 서리 정수혁이 살던 곳에서 모여 시를 짓기 시작했다.

비연시사

장지완을 중심으로 모인 시사이며 그의 호를 따서 비연시시라고 불렀다.

벽오사

1847년부터 1861년 까지 집안대대로 의원을 하던 유최진을 중심으로 모였던 시사이다.

칠송정시사와 필운대,우대 : 1840-1873, 대원군시대

지금의 배화여고와 배화 여자 전문대학 바로 뒤에 필운대가 있고 그 옆에 육각현이 있다.
그리고 칠송정은 필운대와 육각현 위쪽에 있었다. 칠송처사 정훈서의 소유였을 칭송정에는 정내교 시기부터 위항시인들이 모였다.

1840년대에 위항시인 지석관이 수리하여 옛 모습을 찾았다. 옥계사의 선배시인 박윤묵이 죽은 뒤에도 칠송정 자리에는 옥계시인들의 모임이 계속되었다.

칠송정 시사는 조기완을 맹주로 하여 장우근등이 모였는데 대원군의 심복이던 오도영, 장신영등이 참석하였으며, 특히 대원군은 집정내내 이 시사를 적극 후원하였다. 칠송정 위항시인들만 아니라 대원군과 가깝게 지내던 박효관, 안민영등의 가객들도 모여들어 마지막 위항문화의 꽃을 피웠다.

육교시사와 해당루 : 1877-1884, 고종시대

청계천 여섯 번째 다리인 광통교옆의 역관 변진환의 집인 해당루에서 강위를 중심으로 한 역관시인들이 모여 시를 지었다.


위항시의 성격

이렇듯 위항시사들의 모임은 임란 전 16세기 후반 풍월향도 시기부터 육교시사 모임까지 무려 300년간을 지속 되어온 녹녹치 않은 우리문화사의 일면을 보여준다.

또 본격적인 활동기간인 200년 동안의 시간은 한 국가의 생성과 소멸기간 중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다.

특히 위항문학이 주체세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변부의 방외문학으로서 지속적인 연결을 갖을 수 있었던 원인은 변방문학으로서의 끈질긴 생명력때문이 아닌가 한다. 물론 위항인들은 자신들의 안정된 경제적 토대위에 위항의 음악과 회화, 서예의 세계를 이끌기도 했고 이로 인해 후기 조선 예술사가 한층 풍부한 질과 양을 갖출 수가 있게 되었지만 말이다.

또한 17세기말 위항인에 의한 위항인의 교육은 높은 수준의 위항문학 성립에 직접적인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학자들에 의하면, 위항문학의 대종을 이룬 위항시는 단계별로 그 성격이 달라져 갔는데

첫째 시기는 육가부터 송석원시사 직전인 18세기까지이고
둘째 시기는 18세기 말 송석원시사부터 대원군 집정기인 고종 초기까지로 본다.

그리고 첫째 시기는 작품 내용의 성격상 두 경로로 집약된다.

그 하나는 신분모순에 대한 갈등을 낭만적으로 처리하여 발전해나간 경로로, 육가부터 시작해 이언진에 의해 일단 완결되고,

두 번째는 사회현실의 인식을 현실주의적 수법으로 형상화한 경로로서, 홍세태에서 시작하여 임광택에 의해 완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위항시의 낭만성과 현실성은 18세기까지 내용의 차원에서는 중세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형식의 차원에서는 재래의 규범적 형식을 해체하고 부정함으로써 근대성의 맹아라 할 수 있는 탈중세적 운동성을 가지고 이었다.

물론 그것은 맹아이지 근대성 자체는 아니니, 맹아라 함은 위항문학이 자신의 모태로 삼았던 중세적 양식인 한문학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또 19세기에 와서는 18세기 위항시가 이룩했던 진보적 계기를 발전적으로 계승하지 못하고, 창작의 방향을 굴절 변형시킴으로써 이미 획득했던 근대적 맹아를 좌절시키게 된다.

두 번째 시기인 송석원시사 이후는 신분모순에 의한 갈등과 현실주의적 시풍이 쇠퇴, 소멸하고 그 대신 소시민적 생활의식에 의한 산수 취미의 형상화와, 비관적 세인식에 기초한 심미적 언어조직이나 탈현실적 순수시로의 몰입으로 발전해간다.

19세기 위항시의 예술적 성취는 현실에 대한 경험이나 새로운 인식과 재현 즉 객관 현실과의 연관에서 획득된 것이 아니라, 객관 현실과의 연관을 끊고 시어의 심미적 조직 그 자체를 추구하거나 순수시의 형태로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넓게 보아 그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하여 중세사회의 지배계급을 대체할 주체적 사회세력으로까지 성장하지 못했던 계급적 한계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위항문학의 미학적 가치는 위에서 거론한 것 외에, 위항문학은 중세를 해체하여 근대로 지향하는 과정 속에서 중세적 문학양식의 확산이지만, 그것은 중세문화의 보편화를 추구한 것이 아니고 사대부에 의한 지식과 문학과의 독점을 해체하고 근대로의 지향을 의미하는 역설적인 가치인 것이다. 田

■ 글 도창환(경기대학교 건축학부 디렉터, 건축가협회 부설 건축가학교 공동 총괄교수)

참고문헌 : 허경진-조선위항문학사, 윤주필-한국의 방외인 문학,
강명관-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
윤재민-조선후기 중인층 한문학의 연구, 최완수-진경시대

■ 이 글은 지난달 8일 국민대학교 목조건축디자인센터(02-2006-6212)가 주최한
2001'목조건축 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을 발표자의 동의를 얻어 발췌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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