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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문화로서 과거 이해하기
과연 전통은 존재하는가

모든 사람은 집에서 산다. 조그만 집도 있고 큰 집도 있다. 대통령은 관저에서 살고 부자는 수백 평 규모의 집에서 사는 반면, 돈 벌러 서울로 올라온 사람은 한 평도 안 되는 하숙방에서 산다. 조금만 생각해도 같은 하늘 아래에서도 수십 가지의 사는 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생기고, 과거에는 어떤 이유로 지금하고는 다른 집에서 살았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문을 탐구해 보자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집에 앞서, 어떤 방법으로 과거의 문화를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자. 집은 주변 환경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집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당시의 문화나 지역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이해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시대나 환경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은 결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배고파 보지 못한 사람은 배고픔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고,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은 아픈 사람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남의 경험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조차 없이 다른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화를 이해하는 기본 태도는 자신의 눈이 아닌, 그 시대의 눈으로 과거를 보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에서 배운 연대사 중심의 역사가 아닌, 생활사 중심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특히 집에 관심이 있다면 생활사에 관심을 갖고 공부해야 한다.
집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과거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몇 가지 명제를 검토하기로 하자.

전통은 있는가

전통의 사전적 정의는 ꡐ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 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관습이나 양식․의식․태도 등의 일정한 계통이나 흐름ꡑ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ꡐ역사는 변한다ꡑ고 하면서도 ꡐ전통은 불변하는 것으로 고수해야 한다ꡑ고 생각한다. 즉 ꡐ전통ꡑ이란 불변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ꡐ전통은 불변의 요소인가ꡑ에 대한 답은 한마디로 ꡐ아니다ꡑ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불교용어로 ꡐ무상(無常)ꡑ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ꡐ인생무상(人生無常)ꡑ이라는 말로 더 익숙해졌기에 ꡐ허무(虛無)ꡑ라는 의미가 짙게 배어 있다. 하지만 ꡐ고정된 실체가 없다ꡑ는 것이 원뜻에 더 가깝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의 무상은 전통에도 적용된다.
과거 우리의 역사를 종교라는 주제만 놓고 살펴보자. 삼국시대 이전은 샤머니즘이었으며 불교가 전래된 이래 고려시대까지는 그것이 대표적 종교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유교가 지배했으며, 오늘날의 대표적 종교는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등록된 신도 숫자만 본다면 기독교(가톨릭을 포함)다.
이러한 종교의 변화는 단순히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건축 분야에 한정해 보아도 각 종교를 대표하는 건물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샤머니즘의 건물은 현재 유구(遺構;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가 명확하지 않아 이야기할 수 없다. 하지만 불교나 유교, 기독교의 대표적인 건물 변화를 보면 절이나 대성전, 사당, 교회 순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일어나는 행위는 보다 많은 차이를 나타낸다.
이러한 예를 보더라도 ꡐ우리의 전통이 무엇인가ꡑ라고 할 때, 과연 ꡐ어느 시대가 우리의 전통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ꡑ 하는 의문이 생긴다.

다른 예로 재산 분배만 보더라도 조선시대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중기까지만 해도 남녀, 또는 출가 여부에 관계없이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했다. 그러했던 것이 후기로 오면서 점점 장자 중심으로 변했다.
제사도 재산 분배하고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중기까지만 해도 제사를 지내는 대상에 의무적으로 사위까지 포함했다. 즉 일가 친척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냈다. 이렇게 진행하던 것이 중기로 오면서 종손 중심으로 변했다. ꡒ처삼촌 무덤 벌초하듯 한다ꡓ는 속담이 있다. 이 뜻은 어떤 일을 대충 대충하는 모습을 빗댄 말이다. 그 시대의 사위들이 제를 지내는 모습을 빗댄 말로 생각된다. 이렇다 보니 제사를 남자 쪽 문제로만 정리하고, 또한 재산 문제도 출가한 여자 쪽에는 분배하지 않는 것으로 정리했을 것이다.
결국 제사와 재산 분배의 관계는 그 의무하고 관계가 깊다. 제사에 돈이 많이 들다 보니, 그 의무를 지는 사람에게 재산 상속을 집중해 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다고 해도 제사권과 재산권의 상관 관계를 단순화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재산 상속 문제는 임진란 이후의 경제 상황하고도 관련이 있고, 또한 성리학의 종법에 대한 연구 결과하고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사제도와 재산권의 변화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서로 간에 어느 정도 인과관계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재산권 문제는 단순히 제사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재산이 있다는 것은 권한이 있다는 것하고도 일맥상통한다. 여자가 재산을 갖고 시집온다는 것은 일정 권한을 행사했음을 뜻한다. 따라서 성차별 문제도 조선시대 초기와 말기하고 같지 않았다는 것을이해할 수 있다.
결혼제도도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장가간다는 의미가 많이 남아 있었다. 즉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들어서 아이들이 장성한 후, 본가로 돌아오는 예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조선시대 초기 왕권을 강화하려고 태종이 세자하고 유대가 깊은 외척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하기까지 했다. 어쨌든 여자에게도 재산권이 있는 상황에서는 일방적인 남녀차별은 있을 수 없다. 여자에게 재산권이 있는 이상 집안에서 일정한 발언권을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재산권을 가진 여자의 발언권이 강했음을 집을 통해 찾아볼 수 있는 예가 있다. 조선시대의 건물은 아니지만 남녀 구분이 명확했던 시절인 1918년에 지어진 경남 함양의 허삼둘 가옥(중요민속자료 207호)이다. 그곳에 가보면 기존의 집하고는 구조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바깥 사랑채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형식을 띄지만, 안채는 이전 주택의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기본적인 구조가 여자의 취향에 따라 조정됐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출입구의 경우, 별도로 사랑채를 거치지 않고 곧장 안채로 들어갈 수 있어 사랑채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 즉, 이 집은 여자의 권한이 남자의 권한과 동일하거나 벗어나 있다.
이러한 구조는 그 내력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1918년 윤대흥이라는 사람이 당시 진양(晋陽) 갑부인 허씨 집안으로 장가갔는데, 배우자 이름이 허삼둘이다. 결국 몰락한 명문가의 남자가 돈에 팔려 장가갔기에 집의 이름조차 배우자의 이름으로 불린 것이다.
조선시대 말기 남녀차별의 개념이 많이 남아 있던 시절, 이러한 집 구조가 나왔던 것은 재산권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조선시대만을 보더라도 생활 방법에 있어 전반기와 후반기의 차이가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그 변화가 더욱 심해졌다.
결국 전통이라는 것은 사회 변화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 정확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은 급격한변화로 인한 사회적 갈등과 충격을 어떻게 흡수할 것인가 하는 문제일 뿐이다.

사상의 변화와 문화

ꡐ사상(思想)ꡑ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들지 않더라도, 생각이 변하면 생활도 많이 변하므로 집도 변한다. 사상의 대표적인 예가 종교다. 우리나라의 종교가 불교에서 유교, 기독교로 변화함으로써 그 시설도 절에서 대성전이나 서원, 교회 순으로 변했다. 건축물 이외에 종교 변화로 발생한 사회 변화에 대해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불교가 국교였던 만큼 도성 내에는 많은 절들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도첩제가 생기고 승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되면서 불교는 산중으로 들어갔다. 금세기 들어 승려의 도성 출입이 허락되자, 다시 도심에 절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가 생긴 지 한 세기가 되어감에도 우리의 머릿속에는 ꡐ절은 산중에 있는 것ꡑ이라는 선입관 때문에 도심 내에 있는 절을 생소하게 느끼고 있다. 이렇게 한 번 머릿속에 고착된 생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어쨌든 앞에서 말한 변화는 수많은 변화 가운데 일부일 뿐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왕은 고귀하다고 생각해 그 모습을 아무나 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궁중에서 일어나는 각종 행사를 그린 그림에는 왕과 왕비를 그려넣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얼굴을 드러내 자신 알리기에 열심이다.
이러한 차이는 왕이 사는 곳과 대통령이 사는 곳에서도 명확히 나타난다. 옛말의 ꡐ구중궁궐(九重宮闕)ꡑ이라는 단어만큼이나 왕궁은 높은 담과 많은 전각들로 극도의 폐쇄성을 유지했다. 하지만 지금의 청와대는 일반인의 관광코스가 됐다. 과거의 궁궐과 청와대를 비교하면 왕과 대통령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명확하게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생각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고, 그 결과 집을 포함해 생활하고 연관된 모든 것들까지도 변화시킨다.

사고의 변화가 생활에 영향을 준 대표적인 예가 남녀유별이다. 남녀를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같은 집에서도 생활하는 공간이 달랐으며, 또한 안채도 밖에서 쉽게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것이 평민에게까지 적용된 것은 아니다. 양반과 평민의 삶이 엄연히 다르다는 생각 때문에 평민은 그들만의 규범이 있었고, 그에 따라 집의 구조도 달랐다.
그렇다면 남녀유별 문제는 조선시대 이전에도 같았을까?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생각해 보자. 통일신라시대에는 유교가 그렇게 중요한 사상으로 대두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소개되는 정도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신라 토기는 남녀구별을 유난히 강조했는데 성리학적 개념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성기가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고 성교를 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국보 195호로 지정된 토우장식장경호(土偶裝飾長頸壺: 계림로 30호분 출토품)를 보면, 여러 동물과 주악상과 함께 적나라하게 성교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부장품이라고는 하지만 이러한 조각을 그릇에 베풀어 놓은 사회에서 남녀의 엄격한 구별이 있었을까? 분명 아니다.
결국 남녀의 엄격한 구분은 유교에서 적자(嫡子)의 구분을 강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온 것일 뿐이다. 지금의 사회는 어떠한가. 집에 자식이 하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남자면 어떻고 여자면 어떨 것인가.

문화 이해의 방법

과거의 문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과거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철저하게 과거의 눈으로 보라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경험이 다르다는 것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되지만, 과거의 눈으로 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당대의 눈으로 과거를 이해해야 하는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먼저 계단과 경사로의 예다. 옛집에 가보면 오르기 힘들 정도로 높은 계단을 볼 수 있다. ꡐ왜 이렇게 불편하게 만들었을까ꡑ 의아함마저 든다. 장애자를 위한 편의시설로 경사로를 만들고, 편의를 위해 계단의 높이를 낮추는 등 수직이동 시설에 배려를 많이 하는 현재의 기준으로는 과거의 시설을 이해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왜 당시에는(지금의 기준으로)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ꡐ오늘날의 사람보다는 건강했기 때문에 그 정도의 높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ꡑ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계단의 문제는 기단하고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 건물, 특히 대가(大家)의 기단이 높은데 그것은 권위를 내보이려는 의도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권위만을 내세우려는 것만은 아니다. 여름철은 고온 다습하고 겨울에는 눈이 만만치 않게 온다. 그러한 기후 조건에도 불구하고 집을 짓는 데 나무를 사용했기에 지면과 많이 떨어져야 습기로부터 집을 보전하는 데 유리했다. 그리고 온돌이라는 난방시설 때문에 방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부의 경우 앞에서 언급한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기단을 높였다.
그런데 단을 높이다 보니 오르내리는 것이 문제였다. 편하게 오르내리기 위해 계단을 낮게 만들면 그것이 차지하는 면적이 많아져 집의 효용성을 떨어뜨리므로, 그 높이를 높이는 것이 오히려 기능적이었다. 또한 예전에는 장애자가 거의 없어 장애자를 고려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러한 궁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건물에 경사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강릉 ꡐ선교장ꡑ의 행랑채로 들어가는 길과 구례 ꡐ운조루ꡑ의 안채로 들어가는 길은 경사로로 되어 있다. 영덕 ꡐ충효당ꡑ과 ꡐ만괴당ꡑ은 부엌에서 안방으로 가는 통로가 경사로다. 한옥에 있는 경사로는 물건을 옮기기에 편하도록 기능적으로 배려한 것일 뿐 장애자를 위한 시설이 아니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장애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의술이 발달함으로써 예전 같으면 사산했을 애를 살려내고, 또한 교통사고 등과 같은 후천적 장애가 급증하면서 장애자가 극소수에서 이제는 고려의 대상이 될 만큼 많아졌다. 장애자의 증가 때문에 최근에는 건물에도 그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사실 장애자에 대한 배려는 소위 선진국에서도 우리보다 조금 앞선 최근에서야 이루어졌다. 즉 이러한 장애자의 문제도 시대적 상황일 뿐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한옥의 솟을대문(행랑채의 지붕보다 높이 솟게 지은 대문)은 부잣집의 상징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솟을대문은 부자나 권력자의 부와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만든 것일까. 솟을대문은 원래 권위의 상징으로 의도된 문이 아니라, 초헌(조선 시대 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던 수레)이나 말을 타고 다니던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요즈음의 대문은 넓지만 높지는 않다. 이러한 변화는 중요한 이동수단으로 자동차가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없는 사람의 단독주택은 이삿짐이 들어갈 정도의 넓이만 필요하기에 문은 그리 넓지 않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개념으로 본다면 문이 넓으면 넓을수록 부잣집이라고 할 것이다. 이렇듯 대문조차도 사회적 상황에 따라 그 구조가 변한다.

한옥이나 기타 옛 물건을 볼 때 무조건 의미론을 먼저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구는 기능이 우선이다. 단지 도구는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뿐이다. 백정이 도끼를 들면 소를 잡는 것이지만 무당이 들면 귀신을 쫓는 것이 된다. 이렇듯 상황이 변하면서 각각의 도구에 그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걸 맞는 장식을 첨가하는 것이다.
집도 마찬가지다. 기능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그것이 갖는 상징성이 부여되는 수순을 밟는다. 솟을대문의 경우도 원래는 기능이 우선되어 말이나 가마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높이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말을 타고 다닐 정도의 집이라면 권세가 있는 집의 사람들이기에 상징성이 부가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田

■ 글 최성호<산솔 도시․건축연구소 대표, 전주대 건축학과 겸임교수>

* 글쓴이 최성호는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서 ꡐ산솔 도시건축ꡑ을 운영중입니다. 주요 건축작품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유치원․박물관․인문관․약학관, 데이콤중앙연구소, 삼보컴퓨터사옥, 홍길동민속공원 마스터플랜, SK인천교환사 등이 있습니다. 02-516-9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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