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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집과 황토집 2동이 있는 대지 2백50평을 4천만원에 놀러왔던 아이들이 떠난 계곡엔 새소리 물소리만 가득
- 문중땅 임대하여 주택겸 화실·전통찻집으로 슬라브집과 황토집 2동이 있는 대지 2백50평을 4천만원에 놀러왔던 아이들이 떠난 계곡엔 새소리 물소리만 가득 화가는 서울생활이 지쳐갈 때 쯤 변화를 생각했다. 시골로 내려가 조용한 곳에 묻혀 그림을 그려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계곡 속의 끝 집을 찾아 이사를 했다. 대지 2백50평에 슬라브집과 황토집 2동이 있는 문중땅을 4천만원에 임대하고 8백70만원을 들여 컨테이너 집을 지었다. 이곳서 화가는 태림화실이라 하여 전통찻집을 열고 산속을 찾는 사람에게 향기나는 차를 대접한다. 그리고 그 생활 하나하나를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협회일을 하다보니 시간이 좀체 나지 않았다. 만나야 할 사람들은 많았고 자연 그림을 그릴 시간도 없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지 않으니 수입도 줄어들었고 생활이 버거워졌다. 엄태림 화백은 이렇듯 서울생활에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할 때 쯤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시골로 내려가 그림 그리는 일에만 몰두하고 싶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다. 적은 돈으로 시작하다 보니 쉽지 않았다. 수도권에서 내집을 만들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돈이었다. 그래서 임대하기로 했다. 서울 인근을 뒤져 이곳저곳을 쫓아 다니다 자리를 잡은 곳이 이곳 포천군 신북면 기지리 문암골 계곡의 끝집이다. 작년 2월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조용한 계곡과 덜 녹은 눈으로 버짐을 먹은 듯 희끗희끗한 산등성이, 제멋대로 휘어져 자란 소나무들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서 서둘러 계약을 했다. 이곳은 문중땅이다. 그래서 조건이 비교적 좋았다. 총 대지 2백50평에 슬라브 집인 20평형의 본채와 10평 정도의 황토집이 2동 있었다. 이들 땅과 집을 4천만원에 임대했다. 이사온 후 콘테이너 박스 두개를 붙여 10평정도의 창고를 짓는데 8백70만원이 들었다. 그 외에는 더 이상의 투자는 없었다. 본채는 살림집 겸 작업장으로 쓰고 황토집 하나에는 전통찻집을 열었다. 그리고 또다른 황토집은 그림 배우러 오는 이들을 위한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 이곳엔 그림을 배우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집을 찾아오는 길은 쉽지 않다. 4차선 도로에서 마을길을 따라 6백m 정도 들어온 후 다시 비포장도로로 1㎞ 정도 들어와야 한다. 비포장 도로는 그야말로 산길 수준이다. 길을 따라 한쪽으로는 계곡이 있다. 계곡에는 식수로 쓰이는 맑은 물이 흐른다. 강의실에 가기 위해서는 계곡을 건너야 한다. 계곡에는 흔들다리가 놓여져 있다. 이 길을 따라 차를 마시기 위해 찾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에게 차를 팔아 한달에 생활비 정도는 번다. 그림을 팔지 않는 이상 이것이 주 수입원이다. 화가가 이곳에 터를 잡을 때 그림을 그리는 것과 찻집을 여는 것에 대해 동시에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찻집을 운영하며 생활비는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이런 화가의 조건에 가장 잘 맞는 집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은 마을에 있는 학교에 다닌다. 등교는 자동차로 학교까지 데려다 주지만 하교땐 친구들과 어울려 1㎞ 이상되는 산길을 걸어서 온다. 가까이에 집은 없지만 마을에 있는 아이들이 이곳 계곡까지 놀러온다. 아이들은 계곡의 바위가, 계곡물이 장난감이다. 하루종일 이곳서 뛰놀던 아이들은 저녁 어스름이 시작되면 집으로 돌아간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면 계곡엔 물소리뿐이다. 때론 찻집의 향기를 찾아 오는 늦은 손님들도 있지만 …. 나의 도시 탈출기 물소리 바람소리에 씻긴 봄볕 가득한 산속으로 서울서 벗어나고 싶었다.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지쳐 있고 황폐해 있는 자신을 더 이상 가눌 수 없었다. 돌파구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자 심경의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로 내려가 작업을 하고 싶었다. 주변사람들과의 잦은 만남과 미술단체의 과중한 업무를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모험이었다. 미술단체의 사무국장과 총무일로 바쁘게 생활하다보니 정작 필요한 작업시간은 늘 부족했다. 작업을 안하다 보니 자연 경제적인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중대한 결심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98년 들어 서울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제부도쪽을 생각했다. 군생활을 대천과 무창포에서 하였기 때문에 짠 바다내음과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 질펀한 갯벌을 제대하고 나서도 항상 그리웠다. 하지만 예산이 맞지 않았다. 내가 갖고 있는 경제력으로는 작업장과 살림집, 찻집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작업만 하여서는 버틸 수 없었다. 오히려 작업을 하는데 연 2백만~3백만원 정도가 들어가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수입원으로 찻집을 운영하기로 한 것이다. 제부도는 이렇듯 경제적인 이유로 포기를 했다. 다음으로 포천을 택했다. 서울 진입이 쉽다는 이유에서였다. 대부분의 전시와 활동 그룹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울진입이 편하며 유리했다. 포천에서 나흘동안 헤매고 다니다 이곳 신북면 기지리에 터를 잡을 수 있었다. 이곳은 첫인상이 좋았다. 4차선 도로에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6백m쯤에서 비포장도로가 시작되었다. 해발 4백24m의 천주산을 배경으로 문암골 계곡이 약 1㎞ 이어져 있었다. 계곡은 비교적 소박하였지만 2월초의 잔설이 드문드문 보이며 참나무와 꼬불꼬불하게 자란 소나무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계곡의 끝에 집이 하나 있었다. 황토방 2동과 슬라브 건물 1동, 원두막이 보였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농구들과 시골생활용품들이 있었다. 위쪽에는 사슴과 염소, 닭, 꿩, 오리 등이 보였다. 이런 풍경들은 어릴적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고향에 온 듯 전혀 낯설지 않았다. 원두막에 앉아 모닥불에 물을 끓여 커피를 타서 마셨다. 겨울의 추위가 눈녹듯이 가셨다. 이렇게 시작된 전원생활이 벌써 1년이 지났다. 돌이켜 보면 10년이 된 것같이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 이야기들은 이곳 하늘에 있는 무수한 별들과 같이 아득하기만 하다. 이곳에 온 후 많은 변화가 일었다. 일일 8시간 이상으로 작업량이 늘었고 자신을 차분히 다스릴 수 있는 시간이 있어 좋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은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닌다. 오후면 아들녀석의 친구들이 몰려와 이곳 계곡을 운동장 삼아 재잘거리며 뛰어다닌다. 까치의 울음소리와 돌 위를 내달리는 다람쥐, 하루종일 들리는 계곡 물소리,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소나무와 참나무의 장작타는 냄새 등… 이 모든 것들을 아름다움이란 말 이외에는 표현할 것이 없다. 작년 여름엔 폭우로 피해를 보았다. 길이 끊겼고 계곡의 다리가 떠내려 갔다. 전화와 전기가 끊겨 거의 한달을 고립된 채 생활했다. 동네 어른들은 40년만의 큰 비라 했다. 복구는 하였지만 계곡은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올해를 지내고 내년에는 그 앙상한 모습들이 다시 풀이며 꽃이며 나무들로 덮힐 것이다. 나는 지금 봄빛 완연한 나른한 오후를 택해 상념에 잠겨있다. 잡힐 듯 잡히지 않은 내면의 움직임이 무한 공간 속으로 끝없이 배회를 한다. 내일이면 이런 산속의 흔적들과 나의 생각들이 화폭에 가득 담겨질 것이다. 봄빛 가득한 문암골 계곡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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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집과 황토집 2동이 있는 대지 2백50평을 4천만원에 놀러왔던 아이들이 떠난 계곡엔 새소리 물소리만 가득
집짓기 정보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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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길찬의 전원주택 설계 노트 10]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 30년 이상을 함께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족 구성원에 변화가 생긴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1999년 어느 날 건축주는 잠을 자다가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새벽 5시가 채 되기도 전에 깨어났다. 흐릿한 눈동자로 방 안을 둘러보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아내가 남편을 향해 큰절 삼배를 하고 있지 않은가?"아니 당신 도대체 왜 이래?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하고 놀라서 물었더니, 아내가 말하기를"다 죽었던 내 목숨을 살려 주셔서 감사의 삼배를 올리고 있습니다."아내의 두 손을 꼭 잡은 남편의 가슴이 미어져 왔다.가족 이야기남편은, 1976년 충주 경찰서에 초임으로 부임하면서 당시 교사였던 아내를 만나 8월말 결혼했고, 딸과 아들이 태어났고 불교에 귀의하면서 집 안에도 불상을 모시고 매일같이 기도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려왔던 시절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가족을 꾸리고 23년이 지난 1999년 4월 25일 기도를 드리러 영월 법흥사로 향했다. 당시 남편은 근무지가 부산이었고 평소 직장(학교)까지 손수 운전하며 다니던 아내였기에, 그날도 아내가 운전했는데 제천 부근에서 교통사고가 났던 것이다. 남편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상처를 45바늘이나 꿰맨 상태였고 아내는 머리를 비롯해 심하게 다쳐서 6시간 이상의 장시간 수술 후에 의식 불명 상태였다. 의사는 시신경 손상과 정신적 후유증이 클 것이라 했다. 부산에서 용인의 경찰대학으로 근무지를 변경하고 다친 몸으로 아내를 간호하기 시작했다. 퇴원 후에도 한 뼘씩이나 되는 한방 침을 맞으러 반년을 보내고 병원을 전전하면서도 아내를 위해 도롱뇽 알, 웅담, 멧돼지 쓸개, 효소 등 온갖 건강식품을 구해오는 것은 물론이고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마사지를 해줬다. 그러다가 아내는 차츰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 반 정도가 지난 2000년 10월, 아들이 군 입대를 3일 앞두고 외가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4시경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관자놀이가 찌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전화를 받았다."여기 OO경찰서입니다. OOO 아버님 되십니까? 아드님이 새벽에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아들의 주검 앞에 선 부모. 그토록 사랑스럽던 아들. 늠름한 모습으로 군생활을 하러 떠나려던 아들이 다른 세상으로 아주 떠나버렸다. 그때 옆에 있던 건축주의 누님이 한 말이 더 기가 막혔다."너의 아내는 아들을 잃었는데도 슬픈 기색이 없구나."그때까지도 아내는 온전한 정신이 아니기에 이상할 것도 없었고 오히려 아내의 건강을 위해선 아들의 죽음을 모르는 게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남편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가슴을 무겁게 만드는 형벌 같은 가족과의 인연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가슴이 무거워졌다.직장일과 가사일 그리고 집안 경조사 등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하면서 아내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며 극진하게 간호한 덕분인지 아내는 시신경이 돌아오고 정신도 되찾아 사람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때가 2003년 여름이었다. 한양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유학을 마치고 외국에서 근무하던 딸이 귀국해서 엄마처럼 교사가 되고 싶어 교대에 편입학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딸의 생각은 요지부동이었다."그럼 두 달치 학원비만 줄 테니 앞으로 찾아오지도 말라."몇 달을 연락을 끊고 지냈는데, 그 해 말 부산교육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다.대지 분석남편은 아내의 건강을 위해 이천 마장면에 2002년경 땅을 구입했지만 퇴직에 맞추어 집을 지을 생각으로 2006년 겨울 필자를 만나 설계를 시작했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땅은 아래 위 두 필지가 있고 이미 조경공사를 완벽하게 다 해놓은 땅이었다. 건축주는 가정에 힘든 일이 있음에도 전원주택을 짓기 위해 엄청난 양의 자료 수집과 공부를 이미 다 마친 상태였고 마감재에 대한 선택까지 거의 끝냈을 정도로 치밀했다.건축주는 위 필지에 건축을 원했지만, 필자는 위에 본채를 짓고 아래 필지에는 손님을 위한 공간인 별채를 제안했더니 흔쾌히 받아들였다.이렇게 본채와 별채로 구분하게 된 동기는 대지 내 조경 중 멋지게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가 두 필지의 중앙에 버티고 있었는데, 이것을 이용해 뭔가를 계획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에 생긴 변화로 슬픔을 위로해 줄 아늑한 마당이 필요했으며 마을 주진입로에서 볼 때 집 안이 너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이 싫었다. 또 건축부지 주진입로 맞은편 대지가 2m 정도 더 높게 조성돼 있어, 그 집 마당에서 이 집 마당과 거실 앞의 노출이 심해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대지에 앉힐 주택의 기본적 밑그림이 완성될 무렵 건축주는 2007년 6월에 딸 결혼식과 피로연을 집 마당에서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별채에 만들어질 전망 덱은 하객들을 위한 장소가 될 것이고 별채 하부의 벽은 결혼식장의 무대가 될 것 같았다.평면 계획본채에 들어갈 기능으로는, 거실과 식당, 주방을 하나의 공간으로 묶고 주인 침실과 예비용 방을 한 개만 두기로 했지만 설계가 마무리될 무렵 본채에 있던 보일러실을 별채로 옮기고 본채에 있던 보일러실을 기도실로 변경하기로 했다.거실을 중앙에 배치하다 보니 식당 부분이 마을 진입로 길 쪽으로 오게 됐는데 식당 앞 전면을 사선으로 끊어서 마을 진입로와 대지 내 대문 쪽으로 시기능이 가능하도록 하되 외부에서는 거실로 곧장 침투될 수 있는 시선을 막고자 했다.건축주가 안방은 침대 없는 방으로 요구했으며 안방에서도 마당(남측)을 향하는 곳으로 분합문(Patio Door, 드나듦이 가능한 창문)을 설치하고 앞쪽 덱보다 한 단 높게 만들고 안방 앞 덱에는 예쁜 바닥 타일을 붙이기로 했다.별채에 들어갈 기능으로는 아래층에 본채에서 옮겨올 보일러실(초기 계획에서는 아래층을 필로티로 띄운 원두막 형태로 하고자 하였음)과 작은 창고를 두고 위층에 화장실과 주방가구가 갖추어진 원룸을 만들고 마당 쪽을 향해 2층에 전망용 덱을 두기로 했다.입면과 단면 계획입면 계획은, 단층이지만 한 면 경사 지붕을 만들어 전면을 높고 시원하게 들어 올려주고 외장 재료는 수직적 매스 분할에 따라 벽돌과 시더 사이딩 마감을 하기로 했다. 별채는 전통적 모임지붕에 진입로 쪽을 사각형 박스로 올려 모던한 이미지를 아주 조금 가미하는 정도로 끝냈고, 구조가 목조주택이라서 벽돌을 쌓을 때 외부로 통하는 바람구멍(PVC 기성재)을 설치해 벽체 속의 습기 배출이 원활하도록 만들었다.내부 마감재는 최대한 친환경 건강 자재를 사용하고자 페인트칠을 하지 않은 시더와 사라리아벽지 등으로 마감하기로 했으며 내부에 석고보드와 건강합판을 이용해 드라이월(건식벽체)을 완성했다.건축을 하는 동안 이웃집에서 지붕과 벽체가 높다고 하여 약간의 시끄러움이 있었지만 건축주는 인내력으로 이를 극복했고 마침내 집이 완성됐다. 당초에 딸 결혼식을 집 마당에서 올리고자 하는 계획은 마을 사람들이 행여 소란스럽다고 할까봐 집에서 하지 못하고 경기도의 조용한 야외에서 조촐하게 진행했다.2007년 집이 완성되고 딸을 출가시키고 나서야 건축주의 가정도 안정기를 되찾은 듯 보였다. 급작스럽게 아들을 잃은 아픔과 딸을 출가시킨 섭섭함을 가슴속에 삼키고 신혼 때 두 사람이 처음 가족을 이뤘을 때의 기분으로 돌아간 것이다. 비록 그들이 정성껏 일궈놓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구멍이 생기기는 했어도 아내는 남편의 지극한 사랑으로 지금은 거의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고, 그 쉽사리 아물지 않을 상처를 기도로 달래며 가족의 인연을 소중히 지속시켜 나가고 있다.田 글 최길찬<건축사··시공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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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길찬의 전원주택 설계 노트 10]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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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짓기 스토리 ② 부녀의 따뜻한 집짓기 - 아버지 송칠복 씨
- “집은 저희 가족의 소중한 추억입니다” 32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한 아버지, 이제 막 취업한 사회초년생 딸. 이들 부녀가 의기투합해 집을 지었다. 구조와 기능은 아버지가 맡고, 디자인은 딸이 전담했다. 집짓기에 대한 정보? 지식? 별로 없었다. 이들에게 그저 아버지의 군인정신과 딸의 젊은 패기만이 있었다. 이들 부녀의 집 짓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저희 가족부터 소개합니다. 부지런히 사회생활 중인 딸과 얼마 전 대입 시험을 치른 아들, 그리고 2년 전에 전역한 저까지, 이렇게 세 식구입니다. 지난 2014년은 저희 가족에게 잊을 수 없는 한 해였습니다. 먼저 삶의 터전이 바뀌었습니다. 수년간 살아온 도시의 아파트를 떠나 흙냄새 물씬 나는 전원주택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희 가족은 어느 때보다도 대화를 많이 나눴습니다. 중요한 사안에서부터 시시콜콜한 농담까지... 집 얘기로 시작한 대화는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자연스레 웃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집짓기가 저희 가족을 하나로 이어주는 구심점 역할을 해준 셈이었죠. 물론 어려움도 적지 않았습니다. 관련 지식과 정보는 부족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운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수영을 배우려면 일단 물에 들어가야 하듯이,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첫 발을 성큼 내딛었습니다. 처음엔 물 도 제법 먹었습니다. 그러나 차츰 자세를 잡고 순조롭게 나아갔습니다. 그 과정을 짧게나마 소개하려 합니다. 예 비 건축주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인허가 사항은 직접 검토해야 32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저는 일상이 다소 무료했습니다. 전역 후의 생활을 준비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막상 늘어지는 시간들을 마주하니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무료함에 익숙해질 때쯤, 딸 미화가 전원생활을 제안했습니다. 마침 저도 마음에 두고 있던 터라, 미화의 제안이 반갑게 다가왔습니다. 저희는 꿈꾸던 전원생활에 대한 얘기들을 풀어놓았고, 계획과 동시에 실행에 옮겼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다면 과정이 수월했겠지만, 저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에겐 충분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관련 정보들을 수집, 분석하고 현장을 답사했습니다. 역시 발품을 판 만큼 얻는 것이 많았습니다.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얻는 정보도 알찼지만, 직접 보고 듣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건축주들의 시행착오는 집짓기에 가장 큰 공부가 됐습니다. 경기도 용인에 부지를 마련하고 믿음직한 시공업체를 선정했습니다. 시공 관련 정보도 충분했습니다. 여기까진 모든 게 순조로웠습니다. 그런데 배수로 허가 관련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전원주택단지라서 토목 인허가 사항은 큰 문제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저의 불찰이었습니다. 해결까지 무려 5개월. 경제적인 것을 떠나 심적 어려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민감한 건축 인허가 관련해선 직접 하나하나 세밀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좋은 집은 작업 환경에 달려있어 집 지으면서 건축주와 시공사 간에 얼굴 붉히는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다행히 저희는 신뢰할 수 있는 베테랑 시공 업체를 만났습니다. 자신의 일에 긍지를 갖고 작품을 창조하려는 장인정신을 갖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불편 없이 즐겁게 지었습니다. 저는 운동 삼아 매일 현장을 찾았습니다. 건축주가 현장에 눌러앉아 감놔라 배놔라 하면 작업하는 분들이 편할 수 없겠죠. 그래서 처음부터 얘길 했습니다. 감리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소일거리 삼아 더 나은 작업환경을 만들러 왔다고. 그렇게 아침마다 현장으로 출근해서 힘쓰는 일을 거들었습니다. 틈틈이 굴러다니는 자재나 쓰레기들을 정리했습니다. 간식거리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현장 분위기가 좋으니 일도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일하시는 분들은 뭐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좋은 집은 작업 분위기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집을 짓는 사람들이 즐거운 마음일 때 뿌리부터 잎까지 견고한 집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집을 지으면서 저희 가족의 소중한 추억들이 쌓여갔습니다. 이 점이 가장 벅차고 뿌듯합니다. 저희 집짓기는 아직 끝이 아닙니다. 내부 정리도 해야 하고, 정원도 가꿔야 합니다. 현재는 작은 소나무와 몇 그루 과일 나무들을 정원에 심어놨습니다. 푸르게, 정원이 풍성해지면 주변 경관과 더욱 조화를 이루리라 봅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사랑하는 제 아들과 딸이 이곳에서 여유를 잃지 않고 삶 그 자체를 누렸으면 합니다. 바쁜 와중에도 새 소리를 듣고 흘러가는 구름을 볼 수 있는, 그런 여유를 말입니다.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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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짓기 스토리 ② 부녀의 따뜻한 집짓기 - 아버지 송칠복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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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짓기 스토리 ⓵ 부녀의 따듯한 집짓기 - 딸 송미화 씨
- “활기 찾은 아버지 모습에 행복합니다” 32년 간 군생활 후 얼마 전 전역한 아버지, 이제 막 취업한 사회초년생 딸. 이들 부녀가 의기투합해 집을 지었다. 구조와 기능은 아버지가 맡고, 디자인은 딸이 전담했다. 집짓기에 대한 정보? 지식? 별로 없었다. 그저 아버지의 군인정신과 딸의 젊은 패기만이 있었다. 이들 부녀의 집 짓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안녕하세요. 저희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몇 달 전, 저희 가족은 경기도 용인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아버지와 딸인 제가 머리를 맞대고 수정을 거듭하며 완성한 집입니다. 집 짓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땅 구입부터 각종 허가, 시공사 선정 등 제겐 모든 일이 무겁게만 느껴졌습니다. 알아야 되는 건 또 어찌나 많은지........ 공부의 연속이었죠. 그러나 즐거움 또한 가득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집을 구성하면서, 소소한 추억들도 함께 쌓여갔습니다. 그 순간들이 제게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집이 완성됐을 때의 그 뿌듯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그 과정을 짧게나마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 집, 우리가 지어보자! 먼저 저희 가족을 소개합니다. 32년 간 군생활을 하고 2년 전에 전역하신 아버지와 입시 공부 중인 23살 남동생, 그리고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저까지, 이렇게 세 식구입니다. 저희는 경기도 용인에서 20년간 줄곧 아파트에서만 생활했습니다. 여느 가족이 그렇듯, 저희도 언젠간 전원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저 한때 지나가는 동경에 그칠 뿐이었죠. 또 아파트 생활에 익숙했기 때문에 크게 불편한 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전역하신 후 얘기가 달라졌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워낙 부지런하시기 때문에 전역하신 후에도 활기차게 삶을 즐기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파트 생활에 무료함을 느끼셨습니다. 운동도 하고 틈틈이 베란다에서 화초들을 가꾸며 시간을 보내셨지만, 아버지는 전과 달리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이셨습니다. 말은 없으셨지만, 딸인 제가 모를 리 없었죠. 그때 제가 먼저 전원생활에 대해 얘기를 꺼냈습니다. 아버지도 생각하고 계셨던 듯, 저와 전원생활에 대해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인터넷을 통해 전원주택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엔 직접 발품을 팔며 완성된 집들을 보러 다녔습니다. 많이 보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으니까요. 처음엔 집을 짓기보다 지어진 집을 살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족이 살기엔 대부분 큰 집들이 많았습니다. 또 한 쪽이 마음에 들면 다른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더군요. 아버지도 우리 가족과 맞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고요. 그래서 결심했죠. 우리 보금자리는 우리가 지어보자고. 따뜻하고 섬세한 분홍색 집 예산을 마련하고, 인허가 사항 등을 살펴 터를 사고, 믿을만한 시공사를 정해 주택을 계획하고, 관련 서류를 갖춰 허가 관청에 착공 신고하고....... 집짓기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했습니다. 집을 짓기도 전에 갖춰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 배수로 허가 관련해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2월에 시작될 공사가 7월이 돼서야 진행됐습니다. 시간이 지연되면서 아버지는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혹시라도 뭔가 잘못될까봐, 노심초사 하셨죠. 그래도 다행히 원만히 해결돼서 그 후론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저는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집이 되길 바랐습니다. 훗날 저와 동생이 출가해서 혼자 집에 계실 아버지를 생각하니 좀 더 색감 있고 따뜻함이 느껴지는 집을 구성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벽지나 타일 하나도 신중을 기해 골랐습니다. 조명 하나 선택하는데 하루를 보낼 정도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 중, 외벽을 마감할 스타코 색상을 결정하는 것이 가장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대부분 화이트나 아이보리 스타코를 사용하는데, 저는 너무 흔해서 끌리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섬세하고 따뜻한 파스텔 핑크를 원했습니다. 아버지도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분홍색 스타코로 마감한 주택 사례를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도 나오지 않더군요. 시공사에서도 분홍색 스타코로 마감하기는 처음이라고....... 그렇다고 포기할 제가 아니었죠. 직접 분홍색의 여러 색채들을 살펴본 후 따뜻하면서도 보기에 편안한 분홍색을 골랐습니다. 결과는? 대만족입니다. 요즘 저희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외벽 색부터 얘기하십니다. 다들 직접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다면서 볼수록 아기자기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원하는 느낌이 잘 살려진 것 같아 뿌듯합니다. 저는 집짓기를 통해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준비과정부터가 살아있는 공부였습니다. 학교에서나 책을 통해서는 얻기 힘든 것들이었죠. 뭐랄까. 집짓기를 통해 세상을 좀 더 알게 된 기분이랄까요. 완성된 집을 보는 것도 가슴 벅차지만, 집을 지으면서 제 사유가 넓어진 것 같아 더욱 뿌듯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쁜 건 활력을 되찾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무표정이었던 아버지 얼굴에 웃음이 잦아진 것을 느낄 때면 저는 너무나 행복합니다. 아버지께 소중한 경험과 추억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새 보금자리에서 펼쳐질 아버지의 제 2의 삶을 응원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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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짓기 스토리 ⓵ 부녀의 따듯한 집짓기 - 딸 송미화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