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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땅 임대하여 주택겸 화실·전통찻집으로

슬라브집과 황토집 2동이 있는 대지 2백50평을 4천만원에
놀러왔던 아이들이 떠난 계곡엔 새소리 물소리만 가득

화가는 서울생활이 지쳐갈 때 쯤 변화를 생각했다. 시골로 내려가 조용한 곳에 묻혀 그림을 그려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계곡 속의 끝 집을 찾아 이사를 했다. 대지 2백50평에 슬라브집과 황토집 2동이 있는 문중땅을 4천만원에 임대하고 8백70만원을 들여 컨테이너 집을 지었다. 이곳서 화가는 태림화실이라 하여 전통찻집을 열고 산속을 찾는 사람에게 향기나는 차를 대접한다. 그리고 그 생활 하나하나를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협회일을 하다보니 시간이 좀체 나지 않았다. 만나야 할 사람들은 많았고 자연 그림을 그릴 시간도 없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지 않으니 수입도 줄어들었고 생활이 버거워졌다. 엄태림 화백은 이렇듯 서울생활에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할 때 쯤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시골로 내려가 그림 그리는 일에만 몰두하고 싶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다. 적은 돈으로 시작하다 보니 쉽지 않았다. 수도권에서 내집을 만들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돈이었다. 그래서 임대하기로 했다. 서울 인근을 뒤져 이곳저곳을 쫓아 다니다 자리를 잡은 곳이 이곳 포천군 신북면 기지리 문암골 계곡의 끝집이다.

작년 2월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조용한 계곡과 덜 녹은 눈으로 버짐을 먹은 듯 희끗희끗한 산등성이, 제멋대로 휘어져 자란 소나무들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서 서둘러 계약을 했다.

이곳은 문중땅이다. 그래서 조건이 비교적 좋았다. 총 대지 2백50평에 슬라브 집인 20평형의 본채와 10평 정도의 황토집이 2동 있었다. 이들 땅과 집을 4천만원에 임대했다. 이사온 후 콘테이너 박스 두개를 붙여 10평정도의 창고를 짓는데 8백70만원이 들었다. 그 외에는 더 이상의 투자는 없었다.

본채는 살림집 겸 작업장으로 쓰고 황토집 하나에는 전통찻집을 열었다. 그리고 또다른 황토집은 그림 배우러 오는 이들을 위한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 이곳엔 그림을 배우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집을 찾아오는 길은 쉽지 않다.

4차선 도로에서 마을길을 따라 6백m 정도 들어온 후 다시 비포장도로로 1㎞ 정도 들어와야 한다. 비포장 도로는 그야말로 산길 수준이다. 길을 따라 한쪽으로는 계곡이 있다. 계곡에는 식수로 쓰이는 맑은 물이 흐른다.

강의실에 가기 위해서는 계곡을 건너야 한다. 계곡에는 흔들다리가 놓여져 있다. 이 길을 따라 차를 마시기 위해 찾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에게 차를 팔아 한달에 생활비 정도는 번다. 그림을 팔지 않는 이상 이것이 주 수입원이다.

화가가 이곳에 터를 잡을 때 그림을 그리는 것과 찻집을 여는 것에 대해 동시에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찻집을 운영하며 생활비는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이런 화가의 조건에 가장 잘 맞는 집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은 마을에 있는 학교에 다닌다. 등교는 자동차로 학교까지 데려다 주지만 하교땐 친구들과 어울려 1㎞ 이상되는 산길을 걸어서 온다.

가까이에 집은 없지만 마을에 있는 아이들이 이곳 계곡까지 놀러온다. 아이들은 계곡의 바위가, 계곡물이 장난감이다. 하루종일 이곳서 뛰놀던 아이들은 저녁 어스름이 시작되면 집으로 돌아간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면 계곡엔 물소리뿐이다. 때론 찻집의 향기를 찾아 오는 늦은 손님들도 있지만 ….



나의 도시 탈출기

물소리 바람소리에 씻긴 봄볕 가득한 산속으로

서울서 벗어나고 싶었다.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지쳐 있고 황폐해 있는 자신을 더 이상 가눌 수 없었다. 돌파구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자 심경의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로 내려가 작업을 하고 싶었다. 주변사람들과의 잦은 만남과 미술단체의 과중한 업무를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모험이었다.
미술단체의 사무국장과 총무일로 바쁘게 생활하다보니 정작 필요한 작업시간은 늘 부족했다. 작업을 안하다 보니 자연 경제적인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중대한 결심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98년 들어 서울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제부도쪽을 생각했다. 군생활을 대천과 무창포에서 하였기 때문에 짠 바다내음과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 질펀한 갯벌을 제대하고 나서도 항상 그리웠다. 하지만 예산이 맞지 않았다. 내가 갖고 있는 경제력으로는 작업장과 살림집, 찻집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작업만 하여서는 버틸 수 없었다. 오히려 작업을 하는데 연 2백만~3백만원 정도가 들어가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수입원으로 찻집을 운영하기로 한 것이다.

제부도는 이렇듯 경제적인 이유로 포기를 했다. 다음으로 포천을 택했다. 서울 진입이 쉽다는 이유에서였다. 대부분의 전시와 활동 그룹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울진입이 편하며 유리했다. 포천에서 나흘동안 헤매고 다니다 이곳 신북면 기지리에 터를 잡을 수 있었다. 이곳은 첫인상이 좋았다. 4차선 도로에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6백m쯤에서 비포장도로가 시작되었다. 해발 4백24m의 천주산을 배경으로 문암골 계곡이 약 1㎞ 이어져 있었다.

계곡은 비교적 소박하였지만 2월초의 잔설이 드문드문 보이며 참나무와 꼬불꼬불하게 자란 소나무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계곡의 끝에 집이 하나 있었다. 황토방 2동과 슬라브 건물 1동, 원두막이 보였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농구들과 시골생활용품들이 있었다. 위쪽에는 사슴과 염소, 닭, 꿩, 오리 등이 보였다. 이런 풍경들은 어릴적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고향에 온 듯 전혀 낯설지 않았다. 원두막에 앉아 모닥불에 물을 끓여 커피를 타서 마셨다.

겨울의 추위가 눈녹듯이 가셨다. 이렇게 시작된 전원생활이 벌써 1년이 지났다. 돌이켜 보면 10년이 된 것같이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 이야기들은 이곳 하늘에 있는 무수한 별들과 같이 아득하기만 하다. 이곳에 온 후 많은 변화가 일었다. 일일 8시간 이상으로 작업량이 늘었고 자신을 차분히 다스릴 수 있는 시간이 있어 좋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은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닌다.

오후면 아들녀석의 친구들이 몰려와 이곳 계곡을 운동장 삼아 재잘거리며 뛰어다닌다. 까치의 울음소리와 돌 위를 내달리는 다람쥐, 하루종일 들리는 계곡 물소리,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소나무와 참나무의 장작타는 냄새 등… 이 모든 것들을 아름다움이란 말 이외에는 표현할 것이 없다.

작년 여름엔 폭우로 피해를 보았다. 길이 끊겼고 계곡의 다리가 떠내려 갔다. 전화와 전기가 끊겨 거의 한달을 고립된 채 생활했다. 동네 어른들은 40년만의 큰 비라 했다. 복구는 하였지만 계곡은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올해를 지내고 내년에는 그 앙상한 모습들이 다시 풀이며 꽃이며 나무들로 덮힐 것이다. 나는 지금 봄빛 완연한 나른한 오후를 택해 상념에 잠겨있다. 잡힐 듯 잡히지 않은 내면의 움직임이 무한 공간 속으로 끝없이 배회를 한다. 내일이면 이런 산속의 흔적들과 나의 생각들이 화폭에 가득 담겨질 것이다.

봄빛 가득한 문암골 계곡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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