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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목조건축대전 본상- 작지만 큰 집, 일상의 한옥 채효당采孝堂
- 한옥은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특별한 건축이 되어버린 한옥이 은평한옥마을에서 가장 작은 135.00㎡(40.83평)의 대지에 2층 한옥을 통해 우리 삶에 일상의 건축으로 자기 몫을 할 수 있게 계획했다.글 김장권 건축가(북촌 HRC 대표) 사진 북촌 HRC HOUSE NOTEDATA위치 서울 은평구 진관길지역/지구 제1종 전용주거지역, 제1종 지구단위계획구역건축구조 지하 - 철근콘크리트조 지상 - 한식 목구조토목공사유형 오픈 컷※ 지반을 지표면으로부터 굴착해 굴착면이 노출된 상태에서 구조물을 시공하는 방법. 오픈 컷 공법 또는 개굴식 공법대지면적 135.00㎡(40.83평)건축면적 67.47㎡(20.40평)건폐율 49.98%연면적 143.49㎡(43.40평) 지하 37.94㎡(11.47평) 1층 68.42㎡(20.69평) 2층 37.13㎡(11.23평)용적률 78.19%설계기간 2016년 2월~10월공사기간 2016년 10월~2017년 11월설계 북촌HRC, 건축사사무소 서림 02-742-5042 http://myhrc.co.kr시공 북촌HRC 02-742-5042 외부 전경 동쪽 측면에 설치한 대문 일상의 한옥‘채효당’은 작은 대지에서 꿈꿀 수 없었던 전통 한옥의 채 나눔에 의한 공간 구분과 기능 역할을 중층 한옥으로 가능하게 했다. 지하층은 가족의 화합과 다양한 모임과 쓰임을 할 수 있는 별채 기능으로, 1층은 안방과 자녀 방, 주방, 대청 등 안채의 기능으로, 2층은 서재와 손님방, 소청 등 아버지가 사용하는 사랑채 기능으로 계획했다. 마을 만들기와 도시 재생에서 추상의 가치를 시각적 가치로 형상화하는 일인 건축에서 협소 한옥을 통해 한옥의 역할과 쓰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지하층은 가족이나 지인들과의 모임, 취미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도록 계획했다. MATERIAL외부마감 지붕 - 한식 그을림 기와 벽 - 회벽마감 마당 - 마사토 마감내부마감 천장 - 연등천장, 전통 한지 벽 - 전통 한지 바닥 - 원목마루, 마모륨계단실 디딤판 - 집성목단열재 지붕 - 로이단열재 벽 - 글라스울 내단열 - 글라스울창호 외부: 한식 시스템창호, 내부: 한식 창호주방가구 한샘위생기구 대림바스난방기구 가스보일러(린나이) 대청에서 안방을 본 모습. 천장 장선에 조명을 매립해 불빛이 은은하다. 계단은 오른쪽 문 뒤에 있다. 주방과 식당은 한 공간에 있다. 식당에서 또는 문 너머 마루에 걸터앉아 후정을 감상할 수 있다. 안방 잃어버린 것을 회수하는 건축공간 민주주의와 빈부 차이에 의한 공간의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본의 가치가 아닌 정주의 주거 공간으로, 일상생활에서 우리다운 문화와 그것을 통한 한옥의 가변적 공간적 특징에서 탄생되는 문화적 성취감으로, 그리고 우리가 들어가지 않았던 빈집, 버려두고 방치해 흔적만 남아있는 집, 과거의 발자국 같은 모습이 아닌 주거 공간의 기능과 적층된 삶의 방식 회수를 위해 공간 기능의 분해가 아닌 가변적 요소의 특징 극대화를 위한 칸의 깊이와 가림과 단절을 통해 형태뿐만이 아닌 공간들이 유연하게 쓰이도록 계획했다. 또한 가림과 소통의 기능을 지닌 문과 공간의 독립성을 주는 벽을 통해 사람의 삶이 다양하고 풍요로운 좋은 집이 되도록 계획했다. 2층에 있는 소청과 서재에서 방을 바라본 모습 서재에는 독서나 잠시 누워서 쉴 수 있도록 침상을 설치했다. 서재와 소청은 미닫이문으로 경계를 나눈다. 오른쪽 문 뒤에 계단실이 있다. 침상에서 본 조경 2층 방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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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목조건축대전 본상- 작지만 큰 집, 일상의 한옥 채효당采孝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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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12월호 특집 4] 2018 대한민국목조건축대전 수상작_은평 채효당
- 대한민국목조건축대전 본상 작지만 큰 집, 일상의 한옥 채효당采孝堂 한옥은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특별한 건축이 되어버린 한옥이 은평한옥마을에서 가장 작은 135.00㎡(40.83평)의 대지에 2층 한옥을 통해 우리 삶에 일상의 건축으로 자기 몫을 할 수 있게 계획했다. 글 김장권 건축가(북촌 HRC 대표) | 사진 북촌 HRC HOUSE NOTE DATA 위치 서울 은평구 진관길 지역/지구 제1종 전용주거지역, 제1종 지구단위계획구역 건축구조 지하 - 철근콘크리트조, 지상 - 한식 목구조 토목공사유형 오픈 컷 ※ 지반을 지표면으로부터 굴착해 굴착면이 노출된 상태에서 구조물을 시공하는 방법. 오픈 컷 공법 또는 개굴식 공법 대지면적 135.00㎡(40.83평) 건축면적 67.47㎡(20.40평) 건폐율 49.98% 연면적 143.49㎡(43.40평) 지하 37.94㎡(11.47평) 1층 68.42㎡(20.69평) 2층 37.13㎡(11.23평) 용적률 78.19% 설계기간 2016년 2월~10월 공사기간 2016년 10월~2017년 11월 설계 북촌HRC, 건축사사무소 서림 02-742-5042 http://myhrc.co.kr 시공 북촌HRC 02-742-5042 MATERIAL 외부마감 지붕 - 한식 그을림 기와 벽 - 회벽마감 마당 - 마사토 마감 내부마감 천장 - 연등천장, 전통 한지 벽 - 전통 한지 바닥 - 원목마루, 마모륨 계단실 디딤판 - 집성목 단열재 지붕 - 로이단열재 벽 - 글라스울 내단열 - 글라스울 창호 외부 - 한식 시스템창호, 내부 - 한식 창호 주방가구 한샘 위생기구 대림바스 난방기구 가스보일러(린나이) 배치도 일상의 한옥 ‘채효당’은 작은 대지에서 꿈꿀 수 없었던 전통 한옥의 채 나눔에 의한 공간 구분과 기능 역할을 중층 한옥으로 가능하게 했다. 지하층은 가족의 화합과 다양한 모임과 쓰임을 할 수 있는 별채 기능으로, 1층은 안방과 자녀 방, 주방, 대청 등 안채의 기능으로, 2층은 서재와 손님방, 소청 등 아버지가 사용하는 사랑채 기능으로 계획했다. 마을 만들기와 도시 재생에서 추상의 가치를 시각적 가치로 형상화하는 일인 건축에서 협소 한옥을 통해 한옥의 역할과 쓰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지하 평면도지하층은 가족이나 지인들과의 모임, 취미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도록 계획했다. 잃어버린 것을 회수하는 건축 공간 민주주의와 빈부 차이에 의한 공간의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본의 가치가 아닌 정주의 주거 공간으로, 일상생활에서 우리다운 문화와 그것을 통한 한옥의 가변적 공간적 특징에서 탄생되는 문화적 성취감으로, 그리고 우리가 들어가지 않았던 빈집, 버려두고 방치해 흔적만 남아있는 집, 과거의 발자국 같은 모습이 아닌 주거 공간의 기능과 적층된 삶의 방식 회수를 위해 공간 기능의 분해가 아닌 가변적 요소의 특징 극대화를 위한 칸의 깊이와 가림과 단절을 통해 형태뿐만이 아닌 공간들이 유연하게 쓰이도록 계획했다. 또한 가림과 소통의 기능을 지닌 문과 공간의 독립성을 주는 벽을 통해 사람의 삶이 다양하고 풍요로운 좋은 집이 되도록 계획했다. 1층 평면도 대청에서 안방을 본 모습. 천장 장선에 조명을 매립해 불빛이 은은하다. 계단은 오른쪽 문 뒤에 있다. 주방과 식당은 한 공간에 있다. 식당에서 또는 문 너머 마루에 걸터앉아 후정을 감상할 수 있다. 안방 2층 평면도 2층에 있는 소청과 서재에서 방을 바라본 모습 서재에는 독서나 잠시 누워서 쉴 수 있도록 침상을 설치했다. 서재와 소청은 미닫이문으로 경계를 나눈다. 오른쪽 문 뒤에 계단실이 있다. 오래되었지만, 늙지 않는 집 채효당은 과거의 기억인 오래된 한옥 구법構法으로 작업했다. 하지만, 현재와 미래도 여전히 유효한 공간으로 오래된 집이 가지고 있는 축적됨과 자기성찰을 통한 낮춤과 작음, 겸손과 의연함을 갖추도록 크기와 높이가 아닌 적층된 깊이의 켜를 통해 한옥의 품격을 유지하며 다양한 수납과 형태로 시대성을 담아 표현하려 했다. 침상, 계단, 2층 간이 주방, 계단실 위 수납, 복도, 화장실, 지하실 채광 등. 침상에서 본 조경 2층 방 동쪽 측면에 설치한 대문 아담한 마당은 관리하기 편하게 마사토를 깔아 깔끔하게 계획하고 담장을 따라 아기자기한 정원을 만들었다. 식당에서 본 담장 정원. 절구를 향해 뛰어오른 물고기가 앙증맞다. 외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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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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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12월호 특집 4] 2018 대한민국목조건축대전 수상작_은평 채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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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집을 찾아서 ② 민주주의 꿈 장면 총리 가옥
- 민주주의의 꿈 장면 총리 가옥 한옥이 유난히 많았던 명륜동 일대. 이곳에 일찍이 한옥과 양옥이 혼합된 가옥 한 채가 들어섰다. 제2공화국의 내각 수반이었던 장면 총리의 가옥으로 그가 서거할 때까지 30년간 거주했던 집이다. 근현대 역사적 현장인 그의 가옥을 만나본다. 글·사진 박치민 기자 취재 협조 종로구 문화과 한·양 절충형 주택 서울 명륜동. 이곳에 장면 총리의 가옥이 있다. 장면이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부터 서거할 때까지 약 30년간 거주했던 집이다.정면에서 바라본 안채. 전통 한옥의 모습이지만 1930년대 ‘주택 개량 운동’의 영향으로 대청을 거실화했다. 장면 가옥은 크게 전통 한옥인 안채와 일본 및 서양 건축 양식이 혼합된 사랑채로 나뉜다. 마당 왼쪽이 안채, 전면이 사랑채. 가옥은 대지면적 403.40㎡(122평)에 안채, 사랑채, 경호원실, 수행원실 총 4동으로 조성돼있다. 집은 전체적으로 한식과 일식, 그리고 서양식의 건축 양식이 혼합되면서 독특한 모습을 띄고 있다. 전통 한옥의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욕실의 내실화라던가 대청의 거실화 등 1930년대 ‘주택 개량 운동’의 영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여기서 ‘주택 개량 운동’이란 일제강점기 당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옥을 시대에 맞게 재구성했던 신주거 문화 운동을 말한다. 화장실과 욕실이 실내에 들어서고, 대청 앞 유리문 설치로 거실을 만드는 주거 문화는 이즈음에 시작된 것이다. 안채, 한식 목구조에 편리함을 강조한 평면 구성 안채 내부는 외부와 달리 편안함을 강조한 현대적인 특성을 담고 있다. 대청 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이 구성돼 있고, 뒤쪽으론 찬마루를 통해 부엌으로 연결된다. 안채의 건넌방. 현재는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문에 들어서면 마당이 아닌 담장부터 마주하게 된다. 좌측의 중문을 거쳐야 비로소 마당 진입이 가능한데, 이는 외부인이 안마당으로 바로 진입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다. 조선시대 반가의 특징인 내외담과 안채 중문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마당 정면에는 안채가, 우측엔 사랑채가 놓여있다. 안채는 외관이 전형적인 한옥이지만 내부는 편리함을 강조한 현대적인 특징을 담고 있다. 화장실의 내실화나 부엌의 실내·외 출입이 가능한 동선 계획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는 앞서 말한 ‘주거 개량 운동’의 영향이다. 안채는 중앙 마루 양측으로 온돌방이 있고, 북쪽으론 찬마루와 부엌이 연결돼 있다. 가족이 오래 머무는 방들은 정남향에 온돌로 구성돼 실내에 온기가 가득하다. 공용 공간인 거실도 강마루의 찬 성질에도 불구하고 채광이 풍부하게 따스하게 느껴진다. 사랑채, 공과 사의 철저한 분리 찬마루와 연결된 부엌. 자그마한 항아리와 주방 용품들이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연탄아궁이 3개소의 흔적이 보이는데 이는 최초 건축 당시 장작아궁이었다가 후대에 연탄아궁이로 개수한 것이다. 사랑채의 응접실. 안채가 우리나라 전통 좌식 구조라면 사랑채는 서양식 입식 구조로 조성됐다. 사랑채는 ㄴ자 형태로 서향에 자리한다. 한식 목구조인 안채와 달리, 사랑채는 제재목으로 간단히 구성하는 경골식 목구조에 일식 지붕이 올려져있다. 사랑채 구조의 가장 큰 특징은 접객 공간과 개인 공간의 철저한 분리에 있다. 먼저 외부인과 내부인의 출입구부터가 다르다. 마당을 통한 주출입구 외에 안채와 직접 연결된 북문으로 내부인이 통행하고, 남쪽 현관에 설치된 외여닫이문으로 외부인이 바로 응접실과 연결된다. 공과 사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해 놓은 것이다. 장면 선생과 김옥윤 여사. 국무총리 재직시 받은 교황청 훈장. 주미대사 신임장. 1949년 주미 특명 전권대사고 재직 시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정한 신임장. 제2공화국 국무총리 시절 '도시락 총리'라는 별칭을 얻게 한 도시락. 당시 장면 총리는 점심을 도시락으로 먹으며 국정을 돌보았다고 한다. 장면 선생이 즐겨쓰던 모자. 장면 선생이 사용하던 만년필. 장면 선생이 사용한 놋그릇. 김윤옥 여사의 옥반지. 장면의 삶, 우직하게 세상을 공명하다 장면 선생은 1899년 국운이 기울던 구한말에 서울 적선동에서 태어났다. 일제 치하에선 교육과 종교 운동에 헌신했고, 광복 이후 가톨릭계를 대표해 민주의원과 입법의원을 역임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국가의 초석을 다지다 장면 선생은 1948년 5.10총선거에서 제헌국회 의원으로 당선된 후,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선출됐다.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에 참석한 그는 유엔 회원국 대표를 상대로 대한민국 정부 승인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그 결과, 1948년 12월 12일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유엔 승인을 획득했다. 이후, 주미대사로 부임하면서 워싱턴 주재 각국 대사관을 방문해 대한민국에 대한 33개국의 승인을 얻어냈고, 대통령 특사로 ‘태평양 동맹’의 체결을 모색하는 등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이처럼 동서를 넘나들며 외교에 주력할 때 국내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선생은 전쟁 발생 하루만인 25일 유엔본부에서 열린 안보이사회에 참석해 북한군의 철퇴와 유엔 회원국의 침략자 원조금지를 규정한 결의안을 채택해냈다. 또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미국의 개입을 요청, 미군의 전장 투입을 이끌어냈다. 유엔군 총사령부 설치, 대한구호안 가결, 가톨릭교회를 통해 지원받은 구호금품 본국 급송 등 전쟁으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을 덜기 위한 외교활동에도 전념했다. 민주주의를 구현하다 장면 선생은 1956년 5월 총선에서 제4대 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그해 9월 고령의 대통령 유고시 승계권을 우려한 자유당 핵심부의 사주로 저격당했다. 이후 선생은 4년간 순화동 공관을 반독재 투쟁의 보루로 삼아 국민의 권익수호에 전념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현실 독재정치와 관료 지배하에 왜곡된 경제 구조, 반일 정책 등을 비판했다. 또한 대안으로 인권 옹호, 다원화된 민주사회 건설, 공정한 분배구조 정착, 한일관계 정상화 등의 정책을 제안한 바 있었다. 1960년 6월 내각책임제 개헌이 단행되며 선생은 선거에 출마해 제2공화국 국무총리에 인준됐다. 이후 5.16군사정변으로 실각하기까지 9개월간 4.19혁명이 제기한 시대적 소명인 ‘민주주의의 황금시대’를 꽃피웠다. 그는 말한다. “국민이 열망하던 자유를 한 번 주어보자는 것이 민주당 정부의 이념이었다. 우리는 철권으로 억압하는 대신 시간으로 다스리고자 했다. 이론과 학설로 배운 자유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경험으로 체득한 자유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선생은 군사정권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이주당사건으로 사형을 구형받는 등 숱한 박해를 당했다. 정계에 물러난 후 그는 신앙생활에 전념했으며, 1966년 간염 악화로 이 주택에서 향년 67세로 서거, 국민장으로 포천 교회 묘지에 안장됐다.田 ·1899 서울 출생 ·1912 인천성당부설 사립 박문학교 고등과 졸업 ·1916 김옥윤 여사와 결혼 ·1917 수원 농립학교 졸업 ·1921 성 프란치스코 제3회 입회 ·1925 맨해튼 대학 졸업 ·1936 동성상업학교 교장 취임 ·1946 미군정 자문기관 민주의원 의원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의원 ·1948 제헌국회의원 당선 제3차 유엔총회 대표, 대한민국 정부 승인 획득 ·1951 제2대 국무총리 취임 ·1952 제2대 국무총리 사임 ·1955 민주당 창당 최고의원 선출 ·1956 제4대 부통령 당선 ·1959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 당선 ·1960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 초대 국무총리 취임 ·1961 5.16 군사정변으로 실각 ·1962 군사재판에서 사형 구형 ·1963 항소심 판결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선고 ·1965 천주교 혜화동성당 평의회 회장 취임 ·1966 향년 67세로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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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집을 찾아서 ② 민주주의 꿈 장면 총리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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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린초당과 공동체 문화의 열린공간 ‘마당’
- 다린초당과 공동체 문화의 열린공간 ‘마당’ -------------------------------------------------------------------------------- 요즘 귀농 희망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IMF를 만난 시대적 산물이라 약간은 씁쓸하지만... 아무튼 반가운 일이다. 나 자신도 앞으로의 희망이 농사짓고 이름 없는 한 촌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귀농이 ‘환상적인 전원생활’이나 단순히 시골로의 도피가 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귀농을 결심한 이들이 손수 집을 자신의 집을 지으려는 자세도 한번쯤 가져 주었으면 한다. 이는 번듯한 집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지은 집’은 귀농을 일회성이 아닌 평생 동안의 생업으로 이끌어 줄 시금석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집은, 집다운 집은 몸뿐만 아니라 제 영혼까지 담는 또 하나의 작은 우주일 테니까.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쳐 민들레울이 지어지는 과정과 함께 나 자신이 이 속에서 얻게된 조상의 삶의 지혜를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너무도 짧은 지식으로 출발한 것으로 얼마나 조상의 삶의 지혜를 이끌어냈는지, 아니 오히려 조상의 사고에 누를 끼치지나 않았는지 걱정하며 이제 마지막으로 본관 민들레울과 더불어 지어진 초가, ‘다린초당’을 통해 우리네 조상의 집을 다시금 이야기하고 또 마당이라는 것이 우리네 조상의 살림집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집에서는 어떠한 의미를 부여받는지를 살펴보며 한옥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 ■ 연재순서 1 조상의 삶이 담긴 우리네 살림집 ‘한옥’ 2 규모설정에서 기둥 세우기까지 ‘작은집이 길하다’ 3 입주상량과 수장 “평당 얼마 들었소” 4 흙일과 담벼락 ‘자취를 감춘 흙일’ 5 다린초당과 공동체 문화의 열린 공간 ‘마당’ 초가 초가삼간이라는 말이 있다. 궁핍한 생활의 대명사로 쓰이는 말이다. 이는 초가가 우리에게 있어서 궁색한 모습으로 각인 되어왔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초가가 그 만큼 서민적이라는 말이 된다. 초가는 우리네 조상의 가장 서민적인 삶을 담고 있다. 때문에 정겨움으로 우리의 정서에 아직도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초가지붕의 외형은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소박한 심성의 우러나옴이다. 이는 우리 문화의 바탕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데, 자연 친화의 마음이 산의 형상을 집의 형상에 담아낸 것이다. 즉 자연 속에서 함양해 온 인격이 마을 주변의 산봉우리와 닮은 근사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옥에 있어서 초가는 매우 꺼리는 입장이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궁핍한 생활의 대명사격인 초가가 주는 이미지가 물질만능주의의 오늘날 일고의 가치도 없음은 당연하거니와 또 한편으로는 관리와 유지보수의 어려움 때문이다. 와박사를 불러 품을 들였던 기와지붕과 달리 농경생활이 주를 이루었던 시절, 추수가 끝난 후 이엉을 엮어 얹는 게 일상 생활의 한 부분이었으나 농경문화가 사라진 오늘날 초가는 기피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집이 지니고 있는 문화성을 생각해 볼 때 지붕의 변모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한옥이 홀대를 받아 명맥만 유지해 오고 있는 오늘 남겨진 집들이 대부분 기와집이지만 오늘날의 한옥을 살려낸다면 자연의 심성과 닮은 초가집을 권장하고 싶다. 이는 자연 친화적문화의 보존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최소한의 자연에 대한 배려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린 초당 예전의 초가는 반상(班常)을 가리는 계급사회의 한 방편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신분상승을 꾀하는 이들에게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갖는 상징성은 대단했다. 그러나 신분에 대한 갈등이 타파된 오늘날 초가집이 지닌 고향의 품같은 포근함을 기필코 살려내야 할 과제이다. 민들레울을 두르고 있는 교육관은 초가집이다. 본관과 상랑채가 이실집이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이 기와집이 되었는데 이것과 조화를 이루도록 다린초당은 초가로 지었다. 한옥을 살려야 한다는 당위성 하나로 건축에 대한 깊은 식견 없이 벌렸던 일인지라 어설픈 점이 많지만 일단 초가로 지을 수 있었음에 안위를 삼는다. 다만 아쉬운 점은 지붕의 물매가 싸지 못하고 뜨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량집으로서 마루대공과 동자주 대공의 높이가 고려되어 서까래 자체의 물매는 적당한 편이지만 새우흙을 받을 때 물매를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96년도에 지어져 현재까지 세 번 이엉을 올렸는데 본때가 나지 않는다. 이번에 새로 이엉을 올려 제대로 물매를 잡아볼 작정이다. 마당 우리 조상네 살림집은 대개 남향한다. 그리고 예로부터 마당에 나무나 꽃을 심어 정원을 꾸미지 않았다. 집안에서 바라보아 멀리 보이는 앞산과 시냇물, 수목, 흐르는 구름 등 자연 그대로를 마당으로 끌어들이는 천연스러움을 선호했다. 이는 양기(陽氣)를 받고자 함인데, 이처럼 건물이 양기를 받기 위해서는 마당의 존재가 필수적이었으며, 또 밝은 기운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당이 비워져 있어야만 했다. 특히 한옥은 양옥과 달리 깊은 처마가 있어 직사광선을 받지 않으므로 마당의 밝은 기운이 필수적이었고, 마당의 밝은 백토에 반사된 햇볕은 대청과 집 전체를 명랑하게 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햇빛을 받아들이는 안뜰, 백토가 깔린 마당은 자칫 침울한 집의 기운을 명랑하게 해줄 뿐 아니라 뙤약볕이 내리쬐는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위에 안뜰과 뒤뜰에서 솔솔 상쾌한 바람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에대해 큰 나무가 마루 앞에 있으면 좋지 않고 뜰 가운데에 나무를 심는 것도 좋지 않다고 홍만선은 ‘산림경제’에서 지적했다. 심지어 “뜰 가운데 있는 나무를 한곤(閑困)이라 하는데 뜰 가운데 오래 심어 놓으면 재앙이 생긴다”라고 경계했다. 마당은 또한 공동체 문화의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는 놀이터로서의 구실도하며 온 가족이 한 여름밤에 모깃불을 피워 놓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얘기꽃을 피우는 바깥의 사랑방이기도 하다. 또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밤하늘의 은하수를 바라보며 옛날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던 우리들만의 낭만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달빛 머무는 뒷뜰 살림집 앞의 마당은 햇볕을 받아들이는 공뿐 아니라 작업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곡물과 과실을 널어 말리는 적은 물론 탈곡과 수장공간의 역할도 한다. 곡물의 건조 및 이엉엮기 등의 작업공간으로서 마당은 중요한 장소인 것이다. 그런데 안마당의 역할과 달리 살림채 뒤에 있는 뒷마당은 주로 수장공간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곡물과 농사도구 식료품 등 통풍과 채광이 필요한 물건들을 뒷뜰에 보관하였던 것이다. 신분이 높은 저택에서는 대부분 앞뜰에 정원을 조성하는 대신 뒷뜰이라고 부르는 후원에 동산을 조성한다. 그러므로 뒷뜰은 여인들의 호흡이 머무는 여성적 공간이며 시적 정취가 넘치는 곳이다. 여기에 앞뜰과 뒷뜰 한켠에는 장독대가 설치되어 안살림을 맡은 아낙네들에겐 더 할 나위 없이 소중한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마당- 민주주의 광장 마당이 갖는 또 하나의 놓치기 쉬운 의미는 민주적 광장이라는 점이다.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지신밟기를 하는 놀이의 마당이며 집안 대소사간 모든 일들이 마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동리의 중심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마을의 큰 일들이 결정되고 치뤄졌다면 집마당은 가족간의 의사소통과 정감을 나누던 열린 마당이다. 일과 놀이를 함께 즐겼던 민족이고 보면 마당은 이러한 신명을 풀어내는데 없어서는 안될 민주주의 광장인 셈이다.田 ■ 글·정순오 (민들레울 대표 031-544-0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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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가볼 만한 전시회
- 도시의 경계와 균열, 새로운 연결의 공공예술광주광역시-경기도 성남시 간 물리적 시간과 거리 3시간 10분, 281KM도시 간 연계와 예술교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성남과 광주의 경계와 균열을 공공예술로 고민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보는 최종 전시회를 추진한다. 6명의 참여 작가들은 공동 네트워크와 워크숍 공통 주제인 ‘문화적 재생 회복 공간과 창작 작업을 통한 예술 탐구’, ‘인공 도시-급성장을 이룬 경기도 성남시 & 민주주의-예향의 도시, 광주광역시’를 통해 구현되는 예술적 관점을 함께 고민하고 공유한다. 도시 예술가, 즉 창작자들은 일상적인 삶과 작업을 연구와 워크숍을 통해 중앙·제도권-지역 간 경계와 균열 사이 공존하는 예술과 담론을 시각예술로 보여주기로 한다. “미술의 본질은 공공성에 있다”라고 본 미학자 힐데 하인(Hilde Hein)의 말을 빌려 팬데믹 시대 새로운 창작을 주제로 도시 교류에 대한 공공예술 재생과 회복의 공간을 살핀다. 움직임에 대한 인지와 확산을 나누는 워크숍도 추진해 창작자를 연결하는 소수자 커뮤니티 연구와 전시회를 추진하고자 한다. 전시 일정기간 2022년 11월 05일 ~ 2022년 12월 31일장소 광주광역시 이강하미술관문의 062-674-8515 도시직조 오버랩 웹전시사람과 도시는 그곳에 살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억과 얽혀 집단적 기억을 품는다. 87여 년의 역사를 지키는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은 시민들에게 일제 수탈의 아픈 기억이면서 해방 이후 광주, 전남 지역 산업화시대 상징으로 애증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또한, 광주에 마지막으로 남은 근대산업시설이자 여성 노동자들이 살아온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장소다. 이 작업은 언젠가 사라질 공간과 삶에 대한 기억 그리고 새로운 미래 동력을 모색하기 위한 다양한 가능성을 담은 예술적 기록과 재현된 상상을 표현한다. <도시직조>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 지역성 그리고 장소성에 주목한다. 예술적 시각으로 도시의 시간과 삶을 짜고, 관계를 엮는다.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에 대해 다양한 예술적 사유를 건네는 도시직조는 삶의 다양한 측면들을 들여다보고 사고의 유연성을 제시한다. 들숨과 날숨으로 이루어진 우리 몸의 생명력과 씨실과 날실로 직조되는 방직산업은 같은 순환의 고리에 있다. 방적, 방직의 원리에서 사회와 생명의 관계 구조로 상상력을 부여해 삶의 원동력이자 하나의 생명체로서 재해석한다. 더불어 여러 정치적·경제적 논란으로 인해 접근조차 불가능한 근대산업유산 공간을 가상공간에서 웹 전시를 통해 재영토화 함으로써 시공간을 자유롭게 하는 개념적 장소를 설정한다. 이 장소가 사회 곳곳 잔존하는 통치의 개념을 예민하게 포착해 예술적 탐구를 통한 실천과 제안으로 새로운 가상 공동체를 설정해 나가는 곳이 되길 기대한다. 전시 일정 기간 2021년 12월 28일 ~ 2022년 12월 28일 장소 김달진 미술연구소 온라인 전시 문의 02-730-6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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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가볼 만한 전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