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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꿈
장면 총리 가옥

한옥이 유난히 많았던 명륜동 일대. 이곳에 일찍이 한옥과 양옥이 혼합된 가옥 한 채가 들어섰다.
제2공화국의 내각 수반이었던 장면 총리의 가옥으로 그가 서거할 때까지 30년간 거주했던 집이다.
근현대 역사적 현장인 그의 가옥을 만나본다.

글·사진 박치민 기자 취재 협조
종로구 문화과

한·양 절충형 주택
서울 명륜동. 이곳에 장면 총리의 가옥이 있다. 장면이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부터 서거할 때까지 약 30년간 거주했던 집이다.정면에서 바라본 안채. 전통 한옥의 모습이지만 1930년대 ‘주택 개량 운동’의 영향으로 대청을 거실화했다.
장면 가옥은 크게 전통 한옥인 안채와 일본 및 서양 건축 양식이 혼합된 사랑채로 나뉜다. 마당 왼쪽이 안채, 전면이 사랑채.
가옥은 대지면적 403.40㎡(122평)에 안채, 사랑채, 경호원실, 수행원실 총 4동으로 조성돼있다. 집은 전체적으로 한식과 일식, 그리고 서양식의 건축 양식이 혼합되면서 독특한 모습을 띄고 있다. 전통 한옥의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욕실의 내실화라던가 대청의 거실화 등 1930년대 ‘주택 개량 운동’의 영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여기서 ‘주택 개량 운동’이란 일제강점기 당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옥을 시대에 맞게 재구성했던 신주거 문화 운동을 말한다. 화장실과 욕실이 실내에 들어서고, 대청 앞 유리문 설치로 거실을 만드는 주거 문화는 이즈음에 시작된 것이다.

안채,
한식 목구조에 편리함을 강조한 평면 구성
안채 내부는 외부와 달리 편안함을 강조한 현대적인 특성을 담고 있다. 대청 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이 구성돼 있고, 뒤쪽으론 찬마루를 통해 부엌으로 연결된다.


안채의 건넌방. 현재는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문에 들어서면 마당이 아닌 담장부터 마주하게 된다. 좌측의 중문을 거쳐야 비로소 마당 진입이 가능한데, 이는 외부인이 안마당으로 바로 진입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다. 조선시대 반가의 특징인 내외담과 안채 중문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마당 정면에는 안채가, 우측엔 사랑채가 놓여있다. 안채는 외관이 전형적인 한옥이지만 내부는 편리함을 강조한 현대적인 특징을 담고 있다. 화장실의 내실화나 부엌의 실내·외 출입이 가능한 동선 계획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는 앞서 말한 ‘주거 개량 운동’의 영향이다.
안채는 중앙 마루 양측으로 온돌방이 있고, 북쪽으론 찬마루와 부엌이 연결돼 있다. 가족이 오래 머무는 방들은 정남향에 온돌로 구성돼 실내에 온기가 가득하다. 공용 공간인 거실도 강마루의 찬 성질에도 불구하고 채광이 풍부하게 따스하게 느껴진다.

사랑채,
공과 사의 철저한 분리
찬마루와 연결된 부엌. 자그마한 항아리와 주방 용품들이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연탄아궁이 3개소의 흔적이 보이는데 이는 최초 건축 당시 장작아궁이었다가 후대에 연탄아궁이로 개수한 것이다.

사랑채의 응접실. 안채가 우리나라 전통 좌식 구조라면 사랑채는 서양식 입식 구조로 조성됐다.
사랑채는 ㄴ자 형태로 서향에 자리한다. 한식 목구조인 안채와 달리, 사랑채는 제재목으로 간단히 구성하는 경골식 목구조에 일식 지붕이 올려져있다.
사랑채 구조의 가장 큰 특징은 접객 공간과 개인 공간의 철저한 분리에 있다. 먼저 외부인과 내부인의 출입구부터가 다르다. 마당을 통한 주출입구 외에 안채와 직접 연결된 북문으로 내부인이 통행하고, 남쪽 현관에 설치된 외여닫이문으로 외부인이 바로 응접실과 연결된다. 공과 사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해 놓은 것이다.

장면 선생과 김옥윤 여사.
국무총리 재직시 받은 교황청 훈장.
주미대사 신임장. 1949년 주미 특명 전권대사고 재직 시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정한 신임장.
제2공화국 국무총리 시절 '도시락 총리'라는 별칭을 얻게 한 도시락. 당시 장면 총리는 점심을 도시락으로 먹으며 국정을 돌보았다고 한다.
장면 선생이 즐겨쓰던 모자.
장면 선생이 사용하던 만년필.
장면 선생이 사용한 놋그릇.
김윤옥 여사의 옥반지.

장면의 삶,
우직하게 세상을 공명하다
장면 선생은 1899년 국운이 기울던 구한말에 서울 적선동에서 태어났다. 일제 치하에선 교육과 종교 운동에 헌신했고, 광복 이후 가톨릭계를 대표해 민주의원과 입법의원을 역임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국가의 초석을 다지다
장면 선생은 1948년 5.10총선거에서 제헌국회 의원으로 당선된 후,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선출됐다.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에 참석한 그는 유엔 회원국 대표를 상대로 대한민국 정부 승인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그 결과, 1948년 12월 12일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유엔 승인을 획득했다. 이후, 주미대사로 부임하면서 워싱턴 주재 각국 대사관을 방문해 대한민국에 대한 33개국의 승인을 얻어냈고, 대통령 특사로 ‘태평양 동맹’의 체결을 모색하는 등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이처럼 동서를 넘나들며 외교에 주력할 때 국내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선생은 전쟁 발생 하루만인 25일 유엔본부에서 열린 안보이사회에 참석해 북한군의 철퇴와 유엔 회원국의 침략자 원조금지를 규정한 결의안을 채택해냈다. 또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미국의 개입을 요청, 미군의 전장 투입을 이끌어냈다. 유엔군 총사령부 설치, 대한구호안 가결, 가톨릭교회를 통해 지원받은 구호금품 본국 급송 등 전쟁으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을 덜기 위한 외교활동에도 전념했다.

민주주의를 구현하다
장면 선생은 1956년 5월 총선에서 제4대 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그해 9월 고령의 대통령 유고시 승계권을 우려한 자유당 핵심부의 사주로 저격당했다. 이후 선생은 4년간 순화동 공관을 반독재 투쟁의 보루로 삼아 국민의 권익수호에 전념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현실 독재정치와 관료 지배하에 왜곡된 경제 구조, 반일 정책 등을 비판했다. 또한 대안으로 인권 옹호, 다원화된 민주사회 건설, 공정한 분배구조 정착, 한일관계 정상화 등의 정책을 제안한 바 있었다.
1960년 6월 내각책임제 개헌이 단행되며 선생은 선거에 출마해 제2공화국 국무총리에 인준됐다. 이후 5.16군사정변으로 실각하기까지 9개월간 4.19혁명이 제기한 시대적 소명인 ‘민주주의의 황금시대’를 꽃피웠다. 그는 말한다. “국민이 열망하던 자유를 한 번 주어보자는 것이 민주당 정부의 이념이었다. 우리는 철권으로 억압하는 대신 시간으로 다스리고자 했다. 이론과 학설로 배운 자유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경험으로 체득한 자유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선생은 군사정권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이주당사건으로 사형을 구형받는 등 숱한 박해를 당했다. 정계에 물러난 후 그는 신앙생활에 전념했으며, 1966년 간염 악화로 이 주택에서 향년 67세로 서거, 국민장으로 포천 교회 묘지에 안장됐다.田

·1899 서울 출생
·1912 인천성당부설 사립 박문학교 고등과 졸업
·1916 김옥윤 여사와 결혼
·1917 수원 농립학교 졸업
·1921 성 프란치스코 제3회 입회
·1925 맨해튼 대학 졸업
·1936 동성상업학교 교장 취임
·1946 미군정 자문기관 민주의원 의원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의원
·1948 제헌국회의원 당선
 제3차 유엔총회 대표,
 대한민국 정부 승인 획득
·1951 제2대 국무총리 취임
·1952 제2대 국무총리 사임
·1955 민주당 창당 최고의원 선출
·1956 제4대 부통령 당선
·1959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 당선
·1960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
 초대 국무총리 취임
·1961 5.16 군사정변으로 실각
·1962 군사재판에서 사형 구형
·1963 항소심 판결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선고
·1965 천주교 혜화동성당 평의회 회장 취임
·1966 향년 67세로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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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집을 찾아서 ② 민주주의 꿈 장면 총리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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