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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 이야기 IV] 설계변경이라는 의식!
- 집터를 닦으며 예상치 못할 정도로 많은 비용을 쏟아 부으니 아내와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이런게 바로 집 짓는 것인가. 내손으로 직접 지으면 많은 비용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부지형질변경 신청 후 본격적으로 목재 다듬기(치목)에 들어갔다. 한겨울이어서 폭설과 한파로 중단 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겨울에 일하는게 더 실속 있는 것 같았다.비가 오지도 않고 눈이 오면 쓸어내면 그만이니 치목은 집 짜기 전에 맞추도록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 미리 끄태면 나무가 틀어져 버리기 때문이다.글 황인찬하루는 낮에 군청 직원과 면 직원들이 동시에 집 지을 현장을 방문했다. '1월 3일 토목설계사를 통해 신청한 농지전용(대지로 지목 변경)'에 대한 현장 확인을 위해서였다.설계사를 통해 신청한 서류가 완벽한지 공무원들은 눈으로 확인만 하고 돌아갔다. 직원들이 가지고 온 서류를 보니 2㎝ 두께는 족히 돼 보였다. 그 많은 서류를 보면서 내가 다 준비한다면 한 달은 쫓아 다녀야 했을 것이다. 그것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비록 돈은 많이 들었지만 행정기관과 골치 아픈 트러블이 없었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2월 14일에 허가공문이 왔으니 거의 한 달 보름 이상 걸린 농지전용절차다. 나와 같은 과정을 거칠 분들은 참고하기 바란다.공문이 도착하고 나서 땅이 녹기 시작하니 터를 50㎝ 높이고 마사토와 주춧돌을 준비하고, 포크레인을 불러서 기단을 쌓았다. 자기가 직접 짓는다고 해도 허가공문이 오기 전에 마음대로 터를 닦다가 걸리면 원상복구 명령과 함께 수백 만 원의 벌금을 물어야 하니 반드시 유의해야 한다.목수 서너 명을 확보해(함께 일하던 동료) 겨우내 치목해 놓은 부재들에 장부(홈과 촉)를 파고 치수에 맞게 잘라서 2월 말에 집 짜기를 하고 3월 10일경에 기와를 올릴 예정으로 하룻밤에도 수없이 머릿속에서 그리고 또 그렸지만, 이 계획은 무참하게 무너지고 6개월 정도 예정했던 집 짓기는 3년간 이어졌다.우리 집을 찾아오는 분들은 대개 내가 거쳤던 과정을 그대로 밟는 분들이다. 이런 분들에게는 내 삶이 꿈같아 보이지만.....한옥 목수들이 돈을 벌려면 절이나 제각 같은 신전을 지어야 한다. 우선 규모가 웅장하기 때문에 품값을 많이 받을 수 있고 대목 대접도 받는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일이 단순하다는 것에 있다. 일정한 양식만 갖추면 되는 건축 과정에서 건축주(스님, 종중)의 참견이나 설계 변경 같은 일이 없다.그런데 살림집에는 건축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설계변경이라는 의식(?)을 치러야 한다. 198㎡(60평) 이상의 집을 지을 때는 비용을 지불한 건축사 설계도면이 있지만, 그 이하의 집이 대부분인 민가에서는 건축주의 의도에 따라서 설계도가 작성된다.문제는 이 설계도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집을 짓기 위해 건축주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준비를 해도 집을 짓기 시작하는 단계에 모든 것이 100% 만족될 수 없다. 이 점은 집을 다 짓고도 마찬가지이다.이런 상황은 건축 과정에서 설계변경을 낳게 되는데 대개의 경우 건축주들은 설계변경에 따른 비용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건축업자 입장에서는 설계변경이 가져오는 여러가지 사항이 생겨 추가 비용을 요구하게 된다.이런 문제는 집을 짓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다. 집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면 화장실용품, 창호, 장판과 벽지 그리고 부엌가구 등에서 어떤자재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값이 천양지 차이기때문에 상당히 심각한 문제로 대두 될 수 있고 건축주와 업자는 심각한 갈등으로 치닫게 된다.건축자재 이야기가 나왔으니 짚고 넘어가야겠다. 사람들은 대개 집의 골조만 완성되면 다 될 것처럼 생각하지만 건축 비용의 절반 이상은 마무리(인테리어)에서 결정된다고 보면 맞다. 요새 최고급 아파트들의 차별화도 골조는 여느 아파트와 별반 차이가 없지만 고급 인테리어 자재를 사용한 것에서 나타난다.설계변경 문제가 우리집에도 일어났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99㎡(30평) 이하의 농가주택으로 지으면 농지보전분담금과와 취득세가 감면되기에 우리 식구도 세 식구 밖에 안 되기도 해서 나무를 이에 맞추어 구입해 건조를 시작했다.그런데 세무서에 자세히 알아보니까 우리 같은 경우는 도시에 집이 있기 때문에 감면이 안된다고 한다. 그러자 집사람은 이왕이면 넓게 지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나중에 부모님을 모실 수도 있고, 몇 백 년 이상 우리 자손들이 살아가면서 어떠한 상황이 될지 모르니 평수를 넓히자는 것이다. 건축주 입장인 마누라와 건축업자 처지가 된 나로서는 이 때부터 집짓는 모든 문제에 대해 시시콜콜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이미99㎡이하의설계도면에따라나무를구입해서건조를시작했는데..... 이제와서!여성상위 시대 아닌가! 그래야 가정이 편안하다면 그까짓 것 집사람 뜻을 따라주지 못할 일이 어디 있으랴.안방을 넓히고 다용도실과 안방에 화장실을 하나 더 들이는 것으로 설계변경이 끝나자 117.15㎡(35.5평)이 되었다. 목재를 다시 계산해보니 중보가 두 개 남고 기둥 세 개와 대보가 한 개 모자라고 다락이 넓어짐으로 인해서 판재와 귀틀이 좀더 필요했다. 같은 나무가 부산 목재상에 있으므로 돈만 있으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돈이 있어도 이미 구입한 나무와 같은 목재가 없다면 난감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목재상 사장 어르신은 수십 년의 노하우로 목수가 나무를 더 구입할 때를 대비해 같은 나무를 항상 예비로 확보해 두고 있었다.이렇게해서 설계변경이라는 의식을 나무를 치목하기전에 치를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집주인이 손수 집을 지을 수 있는 커다란 장점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업자에게 맡기고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 비용은 처음보다 엄청나게 더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집을 다 짓고 나니 아쉬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어서 집짓는 일 특히 살림집을 짓는 일은 정말 쉽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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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 이야기 IV] 설계변경이라는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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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 이야기 III]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집터는 내가 원하던 아늑한 곳은 아니지만 북서쪽에는 백두대간인 덕유산이 버티고 양옆은 산 능선이 있어서 커다란 의미로 보면 좌청룡우백호左靑龍右白虎의 형상이고 무엇보다도 내 집터에서 보는 전경이 퍽도 싱그럽게 보인다. 특히 전망이 시원스러운데 후에 집을 짓고 대청마루에 큰 유리창을 설치했더니 집 구경을 오는 사람마다 집터가 좋다고 이구동성이다. 물론 겉치레인 줄 알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다. 글 황인찬우리가 집터 잡는 데 고려한 점이 몇 가지 있다. 우선 개발가능성이 없는 지역이다. 부동산에 대한 투자가치는 완전히 뒷전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었다 싶다. 오로지 목적은 우리 식구가 자연의 품속에서 삶을 평안하게 영위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으니……. 그래서인지 지금 우리가 사는 동네의 땅값은 5년 전과 거의 비슷하다.또 하나는 유명한 관광지를 피하고 싶었다. 고향집이 수백 년 동안 늘 그대로인 집에서 태어나고 성장해서였을까, 집이란 자주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니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돈이 되면 팔고 언제든 떠나야 부자가 되는 것인데……. 그러니 늘 그렁그렁 살고 있나 보다.아들에게 시골 고향을 만들어 주어 어릴 적 추억이 도시라는 황량한 잿빛이 아니라 자연의 풍요로운 초록빛이게끔 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니 다른 것은 전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그렇다고 넉넉하게 돈을 들고 다니면서 집터를 찾을 수 없는 형편이니 결국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미 서울 근처는 우리 같은 서민이 들이대기에는 너무 땅값이 올라버렸고 휴양지나 관광지 근처는 너무 복잡하고 상혼에 물들어 있어서 피하고 싶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이런 요구조건에 부합하였다. 집터는 국립공원에서 100m 떨어진 논밭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집 뒤가 바로 산이 아니라는 점이 흠이고 값이 저렴하다 보니 대도시와의 접근성이 좋지 않다는 것이 최대의 단점이다. 그런데 이 단점 때문에 우리 동네 전체는 전국 어디를 내놔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청정성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생태적인 삶을 추구한 내 마음에 든다.이제 남의 집 짓는 목수일은 일단 잠시 중단하고 본격적으로 내 집을 짓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리라!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세간의 말을 그대로 실천한 장본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남의 집을 지을 때 목수일은 나무를 다듬고 집을 세우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는 거의 이 일만 하고 다음 단계의 지붕공사, 미장, 설비, 조경 등은 모두 다른 업자들이 하기 때문에 잘 모른다. 다음에 다시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꺼내겠지만 상량식을 하고 서까래와 개판을 까는 일은 살림집 공정의 1/3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때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2003년 7월에 부지를 구입하고 9월에 나무를 주문한 나는 입주 일을 2004년 5월로 잡았다. 이론상으로는 1년 안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는 입주를 예상치보다 1년 지난 2005년 5월에 간신히 했으니, 그래서 3년 동안 집을 지은 이야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입주하고 나서도 문도 더 짜야 했고 싱크대 등을 직접 제작했을 뿐 아니라 2006년에는 굴뚝쌓기 등을 했으니 만 3년이 아니라 아직도 마무리를 못하고 그냥저냥 지내고 있는 미완성의 집이다.나무 사는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에서 자세히 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잠시 농지를 집터(대지)로 바꾸는 과정을 늘어놓겠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농지는 절대농지와 관리지역(준농지)이 있는데 관리지역이 아니면 집을 지을 수 없다. 현지 농업인들은 어떤 방법으로 하는지 몰라도 절대농지에도 집을 짓던데……. 우리같이 외지인들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집터를 구입할 때는 집을 지을 수 있는 관리지역인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농지를 대지로 바꾸는 농지전용 절차는 생각보다 훨씬 까다롭다. 나 같은 경우는 현장에서 매일 일하는 주된 일꾼이고 나무 치목(다듬기)이 모두 나의 몫이라 복잡한 농지전용 서류 절차를 직접 한다는 것이 번거롭고 행정에 문외한이기에 건축 설계사무소에 대행을 의뢰했다. 거의 한 달 이상 소요되는 이 행정절차를 직접 하게 되면 그만큼 일을 추진해 나갈 수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들여 선택한 것이다. 예상보다 많은 비용이 들어갔다. 117.1㎡(35.5평)의 집을 짓는데 관리지역에는 건폐율이 40%라서 최소한 330.0㎡(100평)을 대지로 전환해야 한다. 99.0㎡(30평) 이하로 지을 경우 농어촌주택으로 인정돼 농지전용비가 면제되는데……. 여러 방면으로 알아본 결과 농어촌주택으로 선정 받는 절차도 외지인에게는 하늘의 별 따기이고 혹시라도 도시에 집이 한 채라도 있는 사람에게는 전혀 혜택이 없다.집사람과 심사숙고한 끝에 눈물을 머금고 농어촌주택을 포기하고 더 멋진 집을 짓기 위해서 117.1㎡(35.5평)을 선택하니 363.0㎡(110평)에 대한 취득세 등이 370여 만 원이 들었다. 측량비용도 도로부지를 확보해야 하기에 5필지에 73만원이 들어갔고, 토목설계비용(설계사 대행비용)도 150만 원. 다행히 주택 198.0㎡(60평) 이하는 신고사항이라서 집에 대한 설계도가 없어도 됐다. 만일 설계도가 있어야 한다면 평당 8만 원 그래서 400여 만 원이 더 들어갈 뻔 했는데……. 그런데 요즘은 건축법이 또 바뀌어서 주택설계비를 내야 한다는데 매우 형식적이다. 건축주가 평면도를 그려주면 그것을 설계사가 베껴서 제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행정편의주의이고 전관예우적인 발상이다. 이 부분은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아무튼 600여 만 원이라는 거금이 건축허가에만 들어갔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돈이 들어간다. 시작하자마자 이러니 집 짓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절실하게 체험했다. 내 집을 내 땅에 직접 지으려는데 집터 준비 과정에서 이처럼 목돈이 한꺼번에 들어갈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비용이었다. 흔히들 평당 건축비가 얼마 들어갔느냐고 물어보신다. 만약 집 자체에 대해서 3.3㎡(1평)당 300 정도였다면 그 준비하는 과정까지 합하면 최소한 추가 50만 원은 더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전체적으로 건축비는 최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50%는 더 들어간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대지형질변경이 최종적으로 승인나려면 한 달 이상 소요된다. 그 후에 집터 닦기를 해야지 만일 허가 나기 전에 미리 했다가는 벌금을 낼 뿐 아니라 원상복귀 명령이 떨어진다. 아무리 자기 집을 자기 땅에 짓는다고 해도 건축법을 어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형질변경은 신청은 2004년 1월 3일에 이루어졌고 허가는 한 달 후에 떨어졌다!田<다음 호에 계속>글쓴이 황인찬 님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하늘재'로 더 유명합니다. 인터넷 블로그 '하늘재' (http://kr.blog.yahoo.com/hanuljae)를 통해 집 짓는 방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고재 가구 짜는 일도 왕성하게 하며 직접 주문을 받아 다양한 가구를 만들어 제공합니다. 농학과 철학 전공으로 두 차례 대학교를 다니고 철학박사 과정까지 밟으며 학문에만 경지를 넓혀온 그였지만 전혀 다른 세계인 한옥 목수로 전향해 현재의 삶에 대만족하며, 덕유산자락 개량한옥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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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 이야기 III]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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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 이야기 II] 살만한 터 찾기가 이리도 힘들 줄이야
- 집 짓기의 첫발은 역시 집터를 구하는 일이다. 금수강산을 돌아다니다 보면 절로 눈길 발길을 머물게 하는 아름다운 고장이 어찌 그리도 많은지……. 목수일을 하러 다니거나 여행을 하면서 나도 언젠가 우리 식구들이 깃들어 살 수 있는 아늑한 터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슴 깊이 간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집터를 찾기 시작하자 쉽게 생각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글 황인찬현장에서 일을 하며 경험이 쌓이자 전통 한옥을 스스로 지을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전통 한옥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 먹을 놓을 수 있는 대목장(목수 우두머리)이 되었다는 것이다.스스로 설계하고 먹을 놓고 또 그 먹금대로 나무를 치목해서 집을 짤 수 있게 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나이는 사십대 중반이 되어가고 아이도 점점 인식능력이 풍부해지는데 내 집을 짓겠다는 목표는 늦춰지고만 있었다.몇 년 동안 식구들을 이끌고 서울의 아파트는 비워두고 목수일 때문에 이 지역 저 지역으로 이사 다니며 남의집살이 하며 시간만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해서 5년 동안 일곱 번이나 이사를 다녔으니 식구들에게 미안하고 정말 못할 짓이었다.약국을 한 곳에서 10년 이상 운영했던 아내는 바람돌이처럼 방황하면서 살아가는 나를 만나자 순식간에 운명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어서 빨리 우리 식구들이 깃들어 살 수 있는 집을 짓고 싶은 조급함에 마음먹고 기회만 있으면 부동산 중개소를 통해서 알아보기도 하고 여기 저기 지인들을 통해서 집터를 찾아보았지만 막상 꿈에 그리던 집터를 찾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 지은 집터만한 곳을 찾기 위해서 전국을 삼만 리를 더 다닌 것 같다. 아이를 키우는데 적당한 지역에 집터를 찾고싶었다. 대도시와 접근성이 좋은 경기도 양평, 가평지역이나 강원도 홍천, 인제 같은 지역에 자리 잡고 싶었지만 땅값도 비쌀 뿐 아니라 인연이 아니었던지 마땅한 집터를 만나지 못했다.집터를 찾아다니면서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도 겪었다. 한겨울 만 두 살 된 아들과 강릉 왕산의 깊은 산골로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눈이 많이 와서 점심을 먹기 위해 음식점을 찾아 도시로 나가려면 점심때를 놓칠 것 같았다. 우리 부부야 참을 수 있다지만 멋모르고 따라나선 어린 아들은…….우리는 길가의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혼자 사시는 할머니께 밥을 청해 먹었다. 그 때 기꺼이 우리에게 따뜻한 방을 빌려주며 밥까지 주신 그 할머니의 인자하신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집터를 구하려고 가족이 함께 특히 어린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 아무리 낮선 곳에 가더라도 우리를 의심하지 않고 현지인들이 반겨주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나 혼자 다녔으면 어림없는 일이었으리라! 요즘 하도 흉악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세상이니 낮선 곳에 특히 시골에 집터를 구하러 다닐 때는 혼자 다니지 말고 가족이 함께 다닐 것을 권하고 싶다. 마음에 드는 집터와 인연이 닿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일화를 소개하겠다. 강원도 홍천 내면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서 어느 밭을 소개받았는데 앞에는 청정 1급수가 흐르고 뒤에는 야산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마침 그 밭에는 민가도 한 채 있어서 당장 기거하며 여유를 갖고 내 집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 집을 그냥 수리해서 살면 되지 새로 집을 지을 필요가 있겠느냐 싶었다.그런데 그 집에는 웬 스님이 살고 있었다. 정식 스님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빌려서 살고 있는 듯했다. 몇 번 다시 가서 전후사정을 알아보니 우리가 땅을 사도 쉽게 집을 비워줄 것 같지 않았다. 이미 마음먹고 절을 차린 상황인지라 아무리 법을 동원해도 나중에 골치만 아플 것 같아서 포기하고 말았다. 이런 경험은 강원도 평창의 봉평에서도 했으니 마음에 드는 집터는 벌써 대부분 임자가 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난 다음부터 집터 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게 되었다. 내가 바라는 집터를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했는지 모르지만.우리나라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더니 과연 그런가 보다. 지금은 집을 짓고 가꾸느라 오히려 여행을 거의 못하고 살고 있어서 답답하기도 하지만 집터를 구하러 다니던 수년 동안 삼만 리 넘게 돌아다녔던 시절이 새삼 그리워진다.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 나보고 3년 동안 집을 직접 짓는 과정을 되풀이하라면 못할 테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고 고백하고 싶다. 그 시간은 존재하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삶(Sein)'은 그 자체가 자유롭고 희망이 가득 찬 축복이다. 하지만 집을 다 짓고 나면 이제부터는 '소유하는 삶(Haben)'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그러면 더 행복할 것 같지만 사실 집이라는 것에 자유를 빼앗기고 얽매인다. 그럼에도 인간이기에 집을 짓고 그 안에서 편안하게 살아가려는 기본 욕구를 충족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니…….우리가 이곳 덕유산까지 올 수 있게 했던 사건이 생겼다. 집터를 구하지 못해서 마음이 초조하던 차에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의 아래층 사람이 우리 애가 뛴다고 시비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층간소음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예민하기 이를 데 없는 아래층 사람들은 세 살 된 아들(몸무게 15kg 정도)의 '콩 콩 콩' 뛰어다니는 발소리와 장난감 던지는 소리를 못 참겠던 모양이다. 심지어 청소기 소리도 시끄럽다고 하니…….싸움을 해도 끝이 나지 않는 공동주택의 층간소음 문제는 결국 살인까지 일어난다고 하지 않는가? 싸워도 헛수고임을 알고 나자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아내와 상의한 끝에 이번에는 지리산 근처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 곳에서 목수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이사를 갔다. 함양읍 근처에서 일 년 동안 월세집(일 년에 150만 원을 일시에 지불하는 셋집이었다)을 얻어서 시골생활을 시작했다. 그 때가 2003년 5월 초였다. 전국 어디가나 한옥 짓는 일은 있어서 이사한 다음날부터 목수일을 하면서 비오는 날이나 쉬는 날은 지리산자락에 집터를 구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장마철이 되자 목수일을 쉬게 되어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집터를 찾아 집을 나섰다. 7월 어느 날 이번에는 집터를 찾을 때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아내에게 비장한 각오를 밝히고 떠났다. 산청, 하동, 함양 등에서 마땅한 터를 찾지 못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이곳 덕유산 자락에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田<다음 호에 계속>글쓴이 황인찬 님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하늘재'로 더 유명합니다. 인터넷 블로그 '하늘재' (http://kr.blog.yahoo.com/hanuljae)를 통해 집 짓는 방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고재 가구 짜는 일도 왕성하게 하며 직접 주문을 받아 다양한 가구를 만들어 제공합니다. 농학과 철학 전공으로 두 차례 대학교를 다니고 철학박사 과정까지 밟으며 학문에만 경지를 넓혀온 그였지만 전혀 다른 세계인 한옥 목수로 전향해 현재의 삶에 대만족하며, 덕유산자락 개량한옥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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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 이야기 II] 살만한 터 찾기가 이리도 힘들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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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 이야기 I] 내 집은 내 손으로!
- 입주해서 3년이 지난 요즘에도 우리 집에는 심심치 않게 방문객들이 원근거리를 마다않고 찾아오시는가 하면 수시로 전화로 집짓는 데 필요한 정보를 요청하는 분들이 많다. 건축주가 직영하든 건축업체에게 위탁하든 어떻게 하면 일생에 한 번뿐인 집 짓기를 잘 할 수 있을지 큰 숙제라는 것을 누구나 잘 안다. 잘 지은 집은 아니지만 한옥 대목수로 집 짓는 일을 하다가 내 집을 3년 동안 직접 지으면서 경험한 지식들은 나처럼 집을 직접 지으려는 분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갖고 시작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겠고, 건축업체에 위탁하려는 분들에게는 속지 않고 제대로 지을 수 있는 안내가 될 수 있으리라. 글 황인찬2003년에서 2005년까지 3년 동안 이곳 덕유산자락에서 집 지은 이야기를 연재하려고 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한 세 가지를 꼽으라면 옷 짓기[衣] 밥 짓기[食] 집 짓기[住]일 것이다. 밥짓기는 안사람이 주로 해결해 주기 때문에 나는 거의 초보수준에 불과한 반병신이다. 옷 짓기는 너무 쉽고도 편리하게 구해서 입을 수 있는 시대여서 그런지 더 그렇다.세 가지 중에 다행히 집 짓기 하나만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니 그리 내세울 것도 못된다. 그럼에도 내 집 짓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으려는 이유가 있다.입주해서 3년이 지난 요즘에도 우리 집에는 심심치 않게 방문객들이 원근거리를 마다않고 찾아오시는가 하면 수시로 전화로 집 짓는 데 필요한 정보를 요청하는 분들이 많다. 잘 지은 집은 아니지만 한옥 대목수로 집 짓는 일을 하다가 내 집을 3년 동안 직접 지으면서 경험한 지식들은 나처럼 집을 직접 지으려는 분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갖고 시작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겠고, 건축업체에 위탁하려는 분들에게는 속지 않고 제대로 지을 수 있는 안내가 될 수 있으리라. 한옥과 황토로 집 짓기를 하게 된 것은 가장 생태적인 주택을 찾다가 보니 귀결된 것이기에 다른 방식의 주택과 어느 것이 더 좋다는 비교 우위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한옥 목수로 사찰 재실 살림집을 짓는 데 목수일을 여러 번 해봤지만, 내 집은 단 한 번뿐인 집 짓기이기에 지금 돌아보면 아쉬운 부분도 많다. 글을 써가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부족한 부분들도 밝혀질 것이다."Denken ist Sein- 생각하는 것이 바로 존재하는 것이다"근세철학에서 현대철학으로 넘어오는 봉우리에 서있는 철학자 헤겔의 대명제다.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합리론은 낡은 철학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지금부터 이 명제가 어떻게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서' 실현되었는지 내 집을 3년간 지은 이야기를 통해서 풀어나가도록 하겠다.도시생활을 하는 대한민국의 중년 남성들은 끊임없이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 회색빛 시멘트 도시를 떠나서 초록의 대자연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자식교육, 직장, 경제적인 문제나 혹은 안사람의 반대 때문에 그 꿈을 잠시 접고 사는 것뿐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불과 몇 해 전까지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으니까…….마흔 살이 넘도록 총각으로 살아오던 나는 필요에 의해서 대학을 두 번 다녔고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거의 공부만 하며 살아왔다. 박사과정 5학기를 마칠 무렵 집사람과 어떻게 운명적인 인연이 닿았는지 잠시 그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서울에서 약국을 10년 이상 운영하던 그녀는 당시에는 조제약을 제조할 수 있는 시기였기에 제법 운영을 잘 했었나 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약사로서 환자의 건강보다는 돈벌이로 전락하는 자신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더 마음에 갈등을 일으킨 요인은 약물의 오남용에 대한 심각한 딜레마였다고 한다.요즘 감기약의 부작용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도되는 것을 아내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 양약이라면 거의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거부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팔아야 한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감기에 걸려 약을 조제해 달라고 찾아온 고객에게 약을 팔 생각은 하지 않고 '집에 가서 푹 쉬면서 콩나물국에 파뿌리를 넣어서 끓여 드시라'고 처방을 하니 고객 입장에서는 황당하니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집사람은 창살 없는 감옥 같은 서너 평의 약국에서 건강이 나빠지는 것을 느끼고 어디 시골에 가서 땅 1만 평을 사기로 결심했단다. 시간 날 때마다 부동산업자들의 소개로 서해안부터 강원도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나와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처녀가 부동산 중개하는 남자들과 깊은 산속을 다니는 것을 불안하게 본 나는 동행인으로 나서게 되어 우리는 땅을 구하는 대신 아기를 갖게 되었다.아기가 생기게 되자 나는 더 이상 공부만 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머리로 먹고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손과 발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실존적 과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약사인 아내는 아이를 낳고 기르느라 전공을 포기했고 내가 생활을 책임져야 하니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게다가 아들이 태어나고 잠시 서울 한 아파트에서 살면서 어릴 적 살던 시골의 정취가 정서적으로 아이의 일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절실하게 느끼면서 어서 도시를 탈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자연의 품에 안길 미래를 꿈꾸며우리 나이 또래들이 대부분 그렇듯 내가 태어난 곳 역시 전형적인 시골이고 그곳에서 성장하며 살았던 나는 얼마 되지 않은 인생살이 동안 어릴 적 경험했던 풍요로운 자연환경이 주었던 자산에 감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늦둥이 아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자연을 마음껏 누리도록 해 주고 싶었다.이런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으로 전통한옥 목수를 선택하게 되었다. 다행히 아내도 내 생각에 동의했기에 쉽게 목수일에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사실 전망 없는 인문학 전공은 배곯는 현실이니 셈 빠른 아내도 못 이기는 체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가장으로서 가솔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감과 동시에 언젠가는 꼭 이루고 싶은 일, 내 집을 직접 지어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꿈을 이룰 수 있는 직업으로 한옥 목수는 매력적이었다.어렸을 때 아버지가 시골 목수여서 틈틈이 배워놓은 일은 목수 일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다. 다시 끌과 톱 그리고 망치를 잡으니 비로소 내 남은 삶을 투자할 만한 일거리를 찾았다는 생각에 빠져들게 되었고 그 이후 지금까지 목수일을 선택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그러나 생계를 위해서 직업적으로 목수일은 그리 많이 해보지 않았다. 한옥 짓는 일을 하러 이곳저곳을 몇 년간 다니면서 나의 관심은 돈벌이보다 내 집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다. 전통한옥으로 집을 짓되 우리의 경제상황에 맞게 그리고 내 손으로 직접 지을 수 있는 집은 어떤 집일까를 끊임없이 연구하는 시간들이었다.돈벌이가 시원치 않아도 나의 큰 뜻을 믿고 묵묵히 참아준 아내가 있어서 꿈을 이룰 수 있었지, 그렇지 않으면 '생각하는 것(Denken)'만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내 집을 직접 내 손으로 짓는 일(Sein)'이었다.田<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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