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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목가구
-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목가구 목재를 다루는 작가는 나무의 숨결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본연의 성질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이유는 바로 사람에 있다. 사람의 눈으로 보고, 사람의 손으로 만졌을 때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다. 작품은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거기서 누구도 소외돼서는 안된다. “따뜻한 가슴으로 디자인하고 제작해 사용하는 사람이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김낙붕 목가구 작가의 작품은 그래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예술문화는 소수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의 것이 되기 위해선 생활 속에 녹아있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작품에 고스란히 스며있다. 철학이 담긴 디자인과 나무 특유의 따뜻함이 공존하는 김낙붕 작가의 작품을 소개한다. 정리 김수진 자료협조 김낙붕 목가구연구소 www.kimswork.com 6선 ; 한옥의 멋을 담은 선반 반의 변죽을 한옥의 처마 끝처럼 살짝 들어 올려 한국의 멋을 살렸다. 전체적으로 얇고 날렵함이 세련된 한국미를 보여준다. 선반 중간의 난간은 선반에 둘 물건을 소중히 여겨 보호하는 느낌이 든다. 920w × 335d × 1610h / Walnut + White Oak 고좌 ; 고결한 기품을 보여주는 팔걸이의자 앉은 이의 어깨 위로 보이는 등받이의 격자무늬가 앉은 이의 기품을 높여준다. 유연한 곡선의 등받이는 편하게 등을 기댈 수 있으며 앉음판은 따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입체감을 준다. 580w × 625d × 1320h / Walnut + White Oak 사족장 ; 문고리 달린 미니멀 수납장 미니멀한 박스형 수납장이 4개의 긴 다리로 서 있다. 문판의 손잡이는 원형의 문고리, 삼각배판, 복판에는 정방형의 구멍이 있어 ●▼■의 형태로 현대미를 이룬다. 1680w × 600h × 360d / Walnut 안휴 ; 곡선미가 아름다운 안락의자 모던 인테리어에 어울리는 안락의자로서 휴식을 취하거나 독서, TV시청을 하기 좋다. 앉을 때나 앉지 않았을 때도 보기 좋고 편안한 평형을 유지한다. 600w × 1000h × 1600d / Walnut + White Oak 오족반 ; 다리 부분이 검은 까마귀 다리 티테이블 한국 선비의 고결함과 현대 디자인의 미니멀리즘이 상통하므로 그 멋을 담아 서안書案 형태의 티테이블로 제작했다. 다리를 비롯한 하부는 검은색(무광)을 칠해 천연 나무색의 상판이 돋보이게 하였으며, 상판과 하부 사이에 서로 간격을 벌려 상판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공간감이 느껴지게 했다. 1300w × 500d × 320h / White Oak 투반 ; 양 날개가 접히는 접이식 티테이블 티테이블이 늘 펴져 있는 것은 공간적 부담이 크다. 접는 테이블은 접고 펴기가 쉬워야 하며 접었을 때나 폈을 때나 보기 좋아야 한다. 투반의 옆 판은 그저 들기만 하면 저절로 펴져 상판이 되고, 접을 때는 하부의 양 관절 부분을 동시에 살짝 밀면서 내리면 간단히 접힌다(실수로 한 관절을 밀어도 상판은 내려가지 않는다). 상판을 받치는 관절은 철재가 아닌 목재로 만들어 장난감 변신로봇과 같은 흥미를 유발한다. 테이블 상판으로 쓰이는 판재 부분이 컬러 투명유리라 펴지고 접히는 하부구조의 움직임을 직접 보는 재미가 있다. 1200w × 340h(펼쳤을 때) → 806d × 320h(접었을 때) / Walnut + Glass Profile 김낙붕작가 경력 1992~1999년 | KCC 홍보실 근무 1999~2007년 | 광고기획사 ‘바오디자인’ 운영 2005~현재 | 한국가구공방협회 회장 2006~2009년 | 가구디자이너그룹 ‘안톤엔올리비’ 초대회장 2007~현재 | ‘김낙붕목가구연구소’ 운영 2010~현재 | 목공학교 ‘소목간’ 운영 전시경력 2005. 8 | 제1회 숨쉬는 나무 心심은 가구전(가나아트스페이스) 2006. 10 | 제2회 숨쉬는 나무 心심은 가구전(갤러리 호) 2006. 8 | 가구가이드 디자이너 초대전(KINTEX) 2007. 2 | 홈덱스 기획전(COEX) 2008. 8 | 목가구디자이너 3인전(갤러리 호) 2010. 5 | World Design Festival(Dsquare Gallery) 2011. 6 | 제1회 개인전 - 김낙붕 목가구전(초이 갤러리) 2014. 11 | 제2회 개인전 -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다(남포미술관) 수상경력 2013. 4 | A’ Design Award & Competition Winner(Milan/Italy) 홈페이지 www.kimswork.com 블로그 http://blog.naver.com/rbbird 이메일 rbbir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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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목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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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김경록 가구전
- 사색의 힘 사유의 회복 시간의 몫 전라남도옥과미술관 초대전 김경록 가구展 현재와 과거를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는 것. 전통을 이어가는 작가들에게 숙명과 같은 과제다. 나무를 통해 전통가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김경록 작가는 재료 본연의 성질을 통해 그 해답을 찾는다. 김경록 작가는 재료의 탄생, 소멸과정을 통해 그 쓰임새를 알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재료의 물성과 그 쓰임을 찾는 행위가 기술이며, 거스름없는 자리잡기(배열) 행위가 예술활동”이라면서 “재료에 내재된 욕망, 형태, 쓰임새를 찾는 행위가 예술활동을 선행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고스란히 작품에 배어있다. 전통과 현재를 관통하는 디자인에 나무의 본디 성질을 그대로 따랐다. 하지만 그가 내세우는 절제미는 단순한 심플함이 아니다. 작가는 지금 우리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목조가구라는 형태로 끊임없이 관객에게 질문한다. 수백 수천 번 스스로에게도 던졌을 그 질문의 가지가 다듬어져 군더더기 없는 작품으로 탄생했다. 작가의 깊은 고찰 속에서 간결하게 다듬어진 선과 형태는 그래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STOOL_790B 430×320×460(H), Afzelia(아프젤리아) bipndensis harms, Africa, oil&shellac, 2015 具 Set of small drawers 330×383×700(H), Rosewood, Burma, Mayple, oil&wax, 2015 잃어버린 감각에 대하여 피부를 통한 감각에도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는 것에 걸맞는 다양한 대상이 필요하다. 피부 접촉이 차단된 현대인은 ‘볼거리에 집착’하는 비접촉방식의 감각에 의존한다. 문명은 인간을 편리와 효율을 추구하도록 만들었지만, 대신 감각의 퇴화를 선물 받았다. 卓子 Dinning table 2400×800×750(H), White oak, North america, oil&shellac, 2015 1500×645×735(H), Rosewood, Burma/Mayple, oil&shellac, 2014 音床 Audio desk 1800×660×733(H), Rosewood, Burma, phosphor bronze Knobs, oil&shellac, 2015 만듦에 대한 생각 악기 제작의 마지막 단계는 연주자에 의해 검증되고 결정된다. ‘연주자’의 마음을 울리는 악기가 좋은 악기다. 長椅子 BENCH_DUPLICATING WORK 1500×500×400(H), Red f ine, Traditional Korean lacquer, Design by: Phillip Sell, Wimberley, Taxas, 옻칠장인 임창균, 2013~2016 700×510×725(H), Rosewood, Burma, oil&wax, 2014 寢牀 Bed 2240×1150×530(H), Beli(벨리), Africa, oil&wax, 2014 작가노트 “삼백년을 삼십년만에 산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느냐” - 교육운동가 김진경 - 삼백년을 삼십년 만에 살아버린 세대, 자취를 지우기 위해 몸부림하는 세대. 그림자는 자신을 따르는 지울 수 없는 자기 정체이며 다음 세대를 지향하는 주체이다. ‘잊기 위함 어떤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 함’이다. 과거는 여전히 현재이며, 미래 또한 그들 안에 있을 것이다. 내 감각은 여전히 이전 시대의 아날로그 감성에 영향받고 있으며, DNA가 기억하는 지난 세대를 추억할 것이며 다가올, 미처 경험하지 못한 다음 세대 또한 내 안에 담겨 있으리라. 다음 세대가 기억할 시대를 사는 이의 소명은 어떤 메시지로 조작할 것인가?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삶’해야 할 것 아닌가? 고졸함과 고루함에 대하여 2016.3 작가약력 1997년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졸업(산업디자인) 2003년~2005년 사단법인 한옥문화원에서 전통건축법식 수학 2004년~2009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6호 심용식 선생에게 전통창호법식 도제 2009년~현재 전통목창호 제작/가구디자인 스튜디오 ‘달든’ 대표 전시 2016년 2월 서울한옥박람회_전통창호/가구전시 2016년 3월 도립 전라남도옥과미술관 초대전 문의 전라남도옥과미술관 061-363-7278 www.okar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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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김경록 가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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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김성수의 Bed Room
- 미국산 하드우드 친환경가구 디자인展 가람 김성수의 Bed Room AHEC(미국활엽수수출협회) 초대전으로 가람 김성수의 개인전 <사람과 나무 사이展2009>가 '자연과의 대화 - 담다 얹다를 보다'라는 주제로 개최됐다. 이번 전시의 테마는 'Bed Room'으로 미국 하드우드로 만든 침대와 사이드테이블, 옷장, 체스트 등으로꾸민 침실이 전통과 현재의 만남, 가구 본연의 기능적 가치와 조형적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정리 편집부 자료협조 한국조형예술원 디자인학부 02-571-9636 www.kiad.or.kr Wardrobe Left(옷장 좌측) Wardrobe & DrawerSize : h2000 × w800 × d500Species : body-Red Oak, door-Cherry,accent&knob-WalnutWardrobe Right(옷장 우측)Wardrobe & DrawerSize : h2000 × w1350 × d650 Species : body-Red Oak, door-Cherry, accent & knob-Walnut Bed SetBed Head Chest(머릿장)Size : h2070 × w800 × d300 Species : body&door-Cherry, accent&knob-Walnut Bed Case-Body(몸체)Size : h300 × w2070 × d2040Species : CherrySide Chest_left, right(날개 장)Size : h820 × w820 × d300 Species : body-Cherry, accent&knob-Walnut Bed Side Table_left, right(침대 사이드 테이블)Size : h450 × w600 × d450Species : body-Cherry, accent-WalnutWall InstallationSize : h1500 × w3670 × d300Species : Cherry, 자개, 백자Wide ChestSize : h500 × w3000 × d550(module: w1500_1, w600_2)Species : body-Cherry, accent-Walnut, material-Glass 작가의 말 '나무는, 자연이다. 생활이다. 그리움이다. 유년시절 함께 살아온 나무는 어릴적부터 시작한 그림 습작의 오브제였고, 부조회화·설치조형·가구디자인 등 입체작업을 주로 하는 지금까지도 내 표현물의 주요 오브제이자 재료다.'구하기 쉽지 않은 느티나무, 참죽나무, 먹감나무 대신 비교적 수급이 용이하며, 제재, 건조, 방역 등 1차 목재 가공 산업이 표준화돼 있는 미국산 하드우드 중 나무결과 색깔 등 재질감이 비교적 우리 정서와 잘 맞는 붉은 참나무(Red Oak)와벚나무(Cherry)를 주재료로 하고 호두나무(Walnut)를 강조 재료로 사용, 재료 확장성과 경제성을 높였다.또 천연재료 및 부재료 사용에 천연오일로 마무리하여 순수성과 안전성을 확보하는 동시에'건강한 가구 디자인'을 실천했다.가구의 진정성은 명료한 쓰임새에 조형적 아름다움이 더해져 완성되는 것이라 믿는다. 이번 전시에서 가구의 본성인'얹다, 담다를 보다'와 '가구는 손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머리로 그리는 것'이라는 명제를 실천하고자 했다. 가람 김성수 한국조형예술원(KIAD) 교수KIAD 콘서바토리 예술감독가람가구학교 교장국민대 목조건축디자인센터 디렉터 교수011-510-3820karam@kiad.sc.kr Parsons School of Design 대학원 회화·환경조형미술 전공 졸업(MFA)세계독립작가연합, 아시아현대미술가협회 회원, 한국목가구조형협회 회장통영국제음악제 환경디자인 프로젝트 아트디렉터친환경가구디자인전 시리즈 아트디렉터힐스테이트 갤러리 초대 시즌기획전 아트디렉터세계독립작가연합 <부조회화, Land Art, Installation Art 작가집단> 디렉터다수의 환경설치미술 프로젝트, 종교건축 및 공공미술 프로젝트 아트디렉터다수의 회화, 설치미술, 가구디자인 분야 개인전 및 그룹전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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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축제의 도시, 생계형 전원생활이나 창업형 귀농자에 안성맞춤
- 춘천 물과 축제의 도시, 생계형 전원생활이나 창업형 귀농자에 안성맞춤 -------------------------------------------------------------------------------- 더욱이 최근 농사를 짓지 않는 농지에 대한 처분 명령이 내려지면서 내년 봄쯤이면 급매물이 쏟아질 것으로 보여 귀농 창업을 원하는 외지인들에겐 호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 사철 관광객들은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단순히 주거형 저원주택 개념보다 생계형 전원생활을 이루기에도 기회가 많은 지역이다. -------------------------------------------------------------------------------- 물과 축제의 도시 춘천. 춘천은 북쪽으로는 화천군. 남쪽으로는 홍천군, 서로는 가평군, 동으로느느 인제군에 접해 있다. 화천의 파로호와 양구, 인제의 소양호 물줄기가 의암호와 함께 북한강을 이룬다. '춘천'하면 호반의 도시로 사람들에게 친숙한 곳. 그러나 지금은 계절마다 이벤트와 각종 축제가 연이어열리며 축제의 도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축제와 이벤트로는 눈과 얼음의 축제, 만화축제, 한국 현대조각 초대전을 비롯해 국제 연극제,여름 재즈축제, 강변가요제, 국제마임축제 그리고인형극제, 마국수와 닭갈비축제 등이 있다. 춘천은 의암호 주변으로 우뚝 솟은 봉의산 아래 도청과 시청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일대가 춘천의 중심지다. 크게 강북과 강남으로 나뉘어 신시가지가 계속해서 확대, 형성되고 있다. 더욱이 춘천, 대전간 중앙 고속도로(2002년 완공 예정)가 생기고 춘천 서울간 경춘선 복선 전철화 공사 (2006년 완공 예정)가 예정돼 있어 도심의 팽창화 속도는 더욱 빨라질 전망이다. 일부에서느느 교통망이 원활해지면 수년 안에 인구 50만을 넘는 대도시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도시 자체가 전원이다 보니 굳이 전원주택 개념을 끼워 맞추지 않더라도 문화와 자연, 생활편의, 교통편이 함께 어우러져 관심을 가져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더욱이 최근 농사를 짓지 않는 농지에 대한 처분 명령이 내려지면서 내년 봄쯤이면 급매물이 쏟아질 것으로 보여 귀농 창업을 원하는 외지인들에겐 호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 사철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단순히 주거형 전원주택 개념보다 생계형 전원생활을 이루기에도 기회가 많은 지역이다. 그러나 지역적, 매물별로 가겨 편차가 심한 편이다. 단순히 준농림, 농지, 대지 등 지목에 따른 가격적 차보다는 상업적으로 이용가치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가격이 좌우되는 경향이 큰편. 따라서 싼 맛에 무턱대고 사기엔 위험부담이 크므로 지역 부동산에 상담을 의뢰하는 것이 안전하다. 특히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인 지역이 많아 건축이 여의치 않은 겨우도 있기 때문에 전문가 조언은 더욱 필수. 춘천은 1896년 전국 23부제가 13도제로 바뀌면서 도청소재지가 됐다. 이후 1946년 춘천군이 춘천부(춘천시)와 춘성군으로 개편되었고, 1992년에 춘성군을 천천군으로 개칭하게 됐다. 그러다 다시 1995년에 춘천시와 춘천군이 통합되어 춘천시로 불리고 있다. 서면 서울에서 춘천에 이르는 경춘 국도를 기준으로 좌측이 서면 우측이 남면과 남산면 이다. 춘천의 강북 사농동과 서면 박사마을을 잇는 신매대교 공사가 진행 주이며, 춘천시 계획사업의 일환인 놀이시설 공연시설, 영화촬영세트장을 갖춘 테마프크도 예정되어 있다. 특히 서면은 그동안 교통이 불편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된 곳이었는데 신매대교가 개통 되면새롭게 각광 받을 것으로 보인다. 또 안보리 지역은 서울과 춘천을 잇는 길목이어서 창업을 목적으로 도로변에 위치한 땅을 알아보아도 괜찮은 곳이다. 신북면/동리 춘천 중심부에서 약 30분거리에 있는 소양 댐에 이르기전 소양 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과 동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3~4년을 주기로 댐을 방류하는 이 곳은 관광객들 때문인지 막국수 집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 역시 창업을 겸해 전원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알맞은 지역이다. 지가는 10~20만원선에서 거래된다. 사북면 춘천댐이 있는 춘천호 인근 지역이다. 어느 곳을 가도 음식점이 즐비하다. 오월리의 춘천댐 매운탕골, 지암리의 집다리골 휴양림과 수렵장은 휴가철이면 관광객들이 북적여 예약조차 힘든 곳이다. 농지도 많고 기타 지역에 비해 지가도 낮은 편이어서 창업 귀농자에게도 권해 볼만한 곳이다. 10~20만원선에 거래되고 농지는 이보다 다소 낮은 편이다. 남면/남산면 춘천은 몰라도 강촌을 모르는 사람은 대학생은 없다 할 정도로 학생들에게 많이 알려진 곳이 이 일대다. 강촌역에서 15분 거리에 구곡폭포와 문배마을이 있다. 이 곳의 음식점과 숙박업소 등은 IMF관리체제로 들어선 지난해에도 이를 모르고 지나칠 정도였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지가 역시 편차가 심한데 평당 10만원~30만원 선에 거래된다. 동내면/동산면/신동면 춘천과 홍천을 지나는 중앙고속도로가 인접한 곳이다. 삼포유원지와 팔봉산이 있어 이곳 또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지가는 10~20만원 선이다. 글 이춘례(춘천 구구사사부동산 대표 0361-255-9944) 춘천군 추천매물 ■자료제공·구구사사부동산(0361-255-9944) 위 치 지 목 평 수 용 도 평당가격 비 고 동산면 원창리 전,답,대 1,020평 생산녹지 총1억4천 전원주택 25평 포함, 그린벨트 동산면 원창리 전 302평 준농림지 15만원 전원주택지 동산면 원창리 전 640평 준농림지 20만원 전원주택지 동산면 봉평리 전,대 1,850평 생산녹지 15만원 대지 300평 포함,주택30평,그린벨트 사북면 지암리 전 1,200평 준농림지 13만원 전원주택지 사북면 지암리 전답 390평 자연녹지 25만원 사북면 인람리 전,답,대 1,357평 자연녹지 7만원 대지 70평포함 야산밑 도로접,그린벨트 신북면 율문리 전 465평 일반주거지 20만원 전원주택지 신북면 율문리 전 1,085평 일반주거지 20만원 전원주택지,그린벨트 신북면 천전리 전 1,200평 일반주거지 35만원 창업형전원주택지 (막국수촌 입구) 신북면산천리 전,대 1,667평 생산녹지 13만원 주택30평,대지170평, 비닐하우스5동,그린벨트 서면 신매리 전 900평 준농림지 35만원 전원주택지 서면 현암리 전 390평 일반주거지 35만원 전원주택지 서면 방동리 전 1,667평 생산녹지 7만원 전원주택지,그린벨트 신 동 전 94평 생산녹지 30만원 전원주택지,그린벨트 신 동 전 1,400평 자연녹지 15만원 전원주택지,그린벨트 남면 가정리 전 400평 자연녹지 15만원 전원주택지 남면 덕암리 전 520평 자연녹지 15만원 전원주택지,그린벨트 동면 상걸리 전,답 1,500평 준농림지 7만원 전원주택지 동면 만천리 전 470평 일반주거지 45만원 전원주택지 동면 장학리 전,답,대 707평 생산녹지 20만원 대지 120평,주택 20평포함, 그린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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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돌을 사용해 지은 숲속 돌집 '꿈꾸는 다락방'
- 아끼고 보듬은 사물이 반질반질 윤이 나고 본연의 빛을 발할 때 우리는 ‘품위’가 느껴진다고 한다. 땅끝마을 해남에서 만난 아담한 돌집이 바로 그러하다. 글 사진 백홍기취재협조 이세일(목수), 윤용신(플로리스트) 부부 해남에 있는 작은 목신마을에서 아담한 돌집을 만났다. 방 한 개와 주방 겸 거실, 다락을 갖춘 8평 크기의 작은 집이다. 이곳에 초등학생 자녀를 둔 40대 부부가 산다. 돌집을 처음 계획한 건 아내 윤용신 씨다. 타지에서 일하다 귀촌 한 윤 씨는 부모님이 살던 고택 마당 옆에 있던 창고를 허물고 작은 돌집을 지었다. “혼자 살 때부터 집에 관심이 많았어요. 현대식 아파트나 넓은 단독주택이 아니라 숲속의 작은 오두막 같은 집이요. 어린 시절에 겪은 추억과 감성이 무럭무럭 자라 꿈이 된 거예요.” 윤 씨의 꿈은 할머니 집 옆에 있던 초가집 지붕 아래 다락방에서 움텄다. 오래 묵은 책 냄새와 촛불이 일렁이던 다락에서 그녀만의 감성을 키운 것이다. “다락방에 대한 로망도 있었지만, 할머니가 잘 가꾼 살림살이와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예쁜 마당에서 놀던 기억도 좋았어요. 이러한 것들이 몽상에 불과했던 집에 대한 추억을 현실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 거죠. 오래전부터 나만의 감성을 채울 수 있는 집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있다가 고향에 돌아와 꿈의 집을 지어보기로 한 거예요.” 아내의 플로리스트 작업실 앞마당을 부부가 함께 새 단장하고 있다. 정면에 보이는 건물은 이세일 목수 작업실이다. 오랜 곡괭이질 뒤에 잠시 허리 펴고 아내의 작업실을 바라보는 이세일 목수. 작업실은 이세일 목수 혼자 만들고 있다. 남편과 아내의 작업실 풍경. 이세일 목수 작업실이다. 이곳에서 자기만의 작품 세상을 이뤄내 여러 차례 전시와 초대전을 거치며 작가 활동을 하고 있다. 나무 숟가락과 스툴 만들기 등 다양한 수업도 진행한다. 부모님이 살던 옛집을 지나 부부의 공간인 돌집으로 향하고 있다. 고택은 손님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로도 이용한다. 윤용신 씨는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로 돌집을 북향으로 배치하고 오솔길을 만들었다. 자연과 사람을 사랑하게 한 집윤용신 씨가 돌집을 선택한 건 오래될수록 예뻐진다는 게 이유다. 어려서 아버지가 직접 짓고 살았던 돌집에 대한 기억도 한몫했다. “막상 돌집을 짓겠다고 마음먹은 다음부터는 돌만 보였어요. 어떤 돌이 예쁜지 가는 곳마다 돌을 살폈어요. 돌도 지역마다 색과 질감이 달라 찾기 힘들었는데, 지인이 미황사(해남 서정리)가 있는 지역의 돌이 예쁘다고 했어요. 미황사 근처에 있는 밭을 개간하며 쌓아둔 돌을 가져와 집 토대를 쌓기 시작한 게 2008년 6월이에요.” 규모는 혼자 살 집이라 아담한 크기로 계획했다. 당호는 <꿈꾸는 다락방>으로 지었다. “목수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 사람은 경험이 필요했고 저는 집이 필요하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어 함께 시작했어요. 하지만, 서로 모르는 게 많다 보니 힘들어져서 결국 그분이 손을 떼고 다른 분을 소개받았어요.” 두 번째로 소개받은 목수가 현재 남편이 된 이세일 목수다. 20대 초반 불교 조각에 입문해 한창 이름을 날리던 이 목수도 자기만의 삶을 찾아 고향인 해남에 돌아와 조용히 작품 세계를 넓혀왔었다.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삶을 살던 두 사람이 ‘돌집’을 통해 만나게 된 것이다. 집 짓기는 1,500만 원으로 시작했다. 주재료는 주변에 널린 흙과 돌을 사용했지만, 그래도 적지 않게 건축자재 구매 비용이 필요했다. 부족한 예산은 틈틈이 일해 보충했다. 과정이 더뎠지만, 급할 게 없고 얽매일 것도 없었다. 조금씩 형태를 갖춰가는 집을 보며 윤 씨는 행복하기만 했다. 그 사이 두 사람의 관계도 점점 견고해져 갔다. 집을 완공한 2010년 그해 봄 얽매인 제도를 싫어했던 그들답게 고택 앞마당을 정리하고 가볍게 혼례상을 차려 부부의 연을 맺었다. 돌 벽과 잘 어울리는 예쁜 하늘색 목문을 열면 현관 없이 바로 거실과 마주한다. 벽과 주방가구, 살림살이에 부부의 온갖 감정과 이야기가 지나온 시간만큼 쌓였다. 낡고 허름한 공간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다. 작지만, 넉넉하게 보이는 건 비움에 의한 여유로움 때문이다. 윤용신 씨의 다락에 대한 로망이 이 집을 짓게 했다. 오픈스페이스로 만든 다락 뒤에 보이는 또 다른 다락방은 시공 실수로 인해 지붕 아래 생긴 공간을 활용한 것이다. 다락에서 내려다 본 이세일 목수. 부부가 고택 툇마루에 앉아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손때 묻은 벽에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였다. 아치로 쌓은 아궁이 상부 아귀가 맞지 않아 다른 돌로 끼워 넣은 쐐기돌이 포인트 역할을 했다. 초보자도 쉽게 짓는 어스백 하우스 Earthbag House“이 집은 어스백 Earthbag 공법으로 지었어요.”어스백은 영어 Earth와 Bag 합성어로 흙을 담은 부대(마대 혹은 포대)로 짓는 공법을 말한다. 흙 부대 또는 흙 자루 집이라고 하는 어스백 하우스 Earthbag House는 1984년 NASA(미항공우주국)에서 흙밖에 없는 달에 건축물을 짓기 위해 논의하던 중 이란 건축가 네이더 카 흐릴 리 Nader Khalili가 제안한 방법이다. 어스백 공법은 원형과 곡선 구현이 가능하며, 아무 흙이나 사용해도 되기 때문에 구하기 쉽고 쌓는 것도 간단해 초보자들도 쉽게 집을 지을 수 있는 게 큰 장점이다. 흙 부대 폭이 넓어 자연스레 벽체가 두꺼워져 단열과 축열, 방음 효과가 높고 흙 밀도가 높아 충격에도 강해 자연재해에도 안전하다. 이 집은 양파망에 흙을 담아 층층이 쌓고 외벽을 돌로 마감했다. 실내 안쪽 벽은 황토로 미장한 뒤 바탕색을 회벽으로 칠하고 실별로 다른 색을 입혀 아늑하게 꾸몄다. 이 집은 8평이지만, 필요한 공간 요소는 다 갖췄다. 비결은 공유 개념이다. 공간을 기능별로 나누고 하루 공간 사용 시간을 따져보면,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 생기게 되는데, 이러한 공간을 공유 공간에 포함시켜 다기능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이 집은 작은 집을 효율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현관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에 거실-주방-식당-응접실 기능을 한 공간에 담은 공유 공간을 배치하고 주방 옆 안쪽에 안방을 뒀다. 거실 상부에 있는 다락은 기둥을 세울 때 실수하는 바람에 지붕 아래 작은 공간이 더해졌다. 그 덕에 방이 하나 더 생겼다고 한다. 소소한 실수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궁이의 아치를 쌓을 때 정점에 끼워 넣는 쐐기돌 아귀가 맞지 않아 살짝 삐져나온 게 오히려 미적인 효과를 내게 된 것, 굴뚝을 잘 못 설치해 이를 가리려고 단을 쌓은 게 멋진 벤치가 된 것 등이다. 실수를 오점汚點으로 생각하지 않고 재치와 유머로 넘겨 오히려 좋은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부부의 건축은 끝나지 않았다. 현재 윤용신 씨의 플로리스트 작업실을 짓고 있고, 커가는 딸의 공간을 구상하고 있다. 이것들이 끝나면 마지막 건축이 기다리고 있다. 딸이 결혼한 뒤 가족과 놀러 올 때 함께 거주할 공간이다. 돌집이 윤용신 씨만의 공간으로 계획했다면, 다음 집은 모두를 위한 공간으로 시작할 것이다. 햇볕 좋은 날 앉아서 쉬는 돌 벤치도 굴뚝 위치를 잘못 배치해 만들어진 것이다. 실수가 때론 재미를 줄 수 있어 꼭 나쁘지만 않다고 한다. 고택과 돌집 주변에 널린 풍경. 인위적인 것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이곳만의 풍경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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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돌을 사용해 지은 숲속 돌집 '꿈꾸는 다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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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만난 사람】 구룡령 신선 박황재형 화백의 체로금풍體露金風
- 구룡령 신선 박황재형의 체로금풍體露金風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버려 자유를 얻다박황재형을 수식하는 많은 말이 있다. 교수, 사진작가, 문화비평가, 아트디렉터, 동양화가 등등. 아니, 더 많은 수식어들이 있겠지만 아직 그를 잡아둘 만한 말은 없다. 모름지기 예술은 언어로 포착되지 않은 세계를 형상화하는 일이니 예술가를 규정하는 개념을 찾는 것은 오히려 무모할 수도 있다.글 사진 강창대 기자 박황재형 화백 Profile박황재형 화백은 “백수도‘불금’이면 설렌다”고 했다. 첩첩 산중에 둥지를 틀어 세속을 멀리해도 꾸역꾸역 그곳까지 찾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화백은 술 마실 구실을 창조해내는 데도 비범한 면이 있다. 비가 와서, 눈이 와서, 푸성귀들이 싱싱하게 자라서, 날씨가 좋아서. 그만큼 벗들과 어울려 술 마시기를 즐겨한다. 지금까지 여러 권의 평론집을 냈고, 종종 철학 강사로 초대되기도 한다. 경원대학 미술대학교에서 외래교수를 했었고, 한국유네스코 인천지역 전문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주업이니 개인전과 초대전, 기획전 등 지금까지 이루 헤아리기조차 힘든 전시회를 열었다. 활동반경이 넓은 만큼 함께 술잔을 채울 이들도 많을 수밖에 없다. 걷다보면 나오는 자그마한 못 속초에서 양양 시외버스터미널까지의 여정은 무난했다. 거기서 다시 서면 갈천리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그런데 버스 시간표를 훑다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갈천리를 지나는 버스는 하루에 네 번밖에 운행하지 않았다. 황망하게 잡아 탄 택시가 양양 군내를 벗어나 한적한 산길로 접어들었고 얼마 후, 길은 한계령과 구룡령 방향으로 나뉘었다. 고개의 이름이 구룡령인 것은 마치 아홉 마리의 용이 산고개를 넘는 것 같다 해서 붙여진 것이다. 잠시 덮칠 듯이 높이 솟은 산과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 계곡이 차창을 스쳐갔다. 그리고 구불구불한 산길이 시작되는가 싶더니 어느덧 목적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아스팔트 포장길에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산채를 닮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주소가 적힌 작은 푯말을 보고 겨우 산채로 향하는 입구를 찾았다. 산채 입구에 놓인 돌탑. 그 뒤로 은색 쿠페와 황구가 보인다. 차 한 대 지나갈 정도의 산채 입구를 따라 올라가자 돌탑이 눈에 들어온다. 돌탑 주변엔 잡초가 무성하다. 듬성듬성 자라는 고추와 파가 아니었다면 이곳이 텃밭이라는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그 한쪽에는 이곳과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은색 스포츠 쿠페 한 대가 놓여 있다. 아니, 놓여 있다기보다는 버려져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흙바닥에 묻힌 타이어와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가 방치된 세월을 말해준다. 내리쬐는 햇볕 아래 모든 게 정지된 것처럼 고요하다. 산채로 고개를 돌리자 시멘트로 만든 돌사자와 눈이 마주친다. 그 옆에 큰 바위 하나, 또 그 옆에는 털갈이를 하는 황구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녀석이 낯선 이를 보며 짖자 멈춰 있던 풍경이 조용히 바람을 일으켜 객을 맞는다. 비록 산채는 소박하지만, 자연에서 누리는 삶은 풍요롭다. 체로금풍산채 앞에 서니 전서篆書로 흘려 쓴 ‘체로금풍體露金風’이라 적힌 현판이 보인다. 이 구절은 불가에서 선禪 수행의 지침으로 내려오는 벽암록碧巖錄에 등장하는 말로, “가을바람[金風]이 부니 나무가 본모습[體]을 드러낸다[露]”는 의미로 대개 해석한다. 여기서 體란 벽암록의 다른 구절에 나오는 ‘정나나淨裸裸 적쇄쇄赤灑灑’에 견주어 거짓이 없는 깨끗한 모습, 잎이 모두 지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를 말한다. 體에 덧붙인 산채 주인의 해석은 선가禪家의 해석보다도 맵다. 발가벗은 몸으로 이슬을 맞는다. 그 말에는 결기가 있다. 산채의 당호‘체로금풍’이라는 글귀가 새겨 있는 현판 문을 열고 들어서니 묘한 장면이 펼쳐진다. 주방과 식당, 작업실을 겸하는 거실에는 커다란 화강암 바위가 공간을 크게 차지하고 놓여 있다. 바위 위에는 구룡령 산자락에 자리 잡은 산채처럼 작은 석탑이 또 다른 ‘체로금풍’을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바위 한쪽에 놓인 연꽃 모양 향꽂이가 시선을 돌린 채 석탑을 지킨다. 바위는 집터를 고를 때 나온 것이라고 한다. 포크레인이 기세 좋은 소리를 내며 걷어내려 하는 것을 산채 주인은 막았다. 인생이 100년에도 못 미치는 것에 비해 바위는 지구의 생성과 함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을 짓겠다고 그런 바위를 밀어낸다는 게 마치 주객이 전도된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산채는 바위를 품은 채 지어졌다. 산채는 커다란 화강암 바위를 품은 채 지어져 묘한 실내 풍경을 만든다. 인근의 돌을 모아 만든 조작 작품 산채는 화백의 작업실 겸 생활공간이다. 탈주와 정주박황재형 화백(55)이 구룡령에 들어온 지 이제 6년째 접어든다. 이곳에 오기 전, 그는 경계라는 줄 위에 서 있는 곡예사와도 같았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관념체계로 씨줄날줄을 엮은 그물로는 포획할 수 없는 물고기와도 같았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를 개념의 틀 속에 가둔다는 것 자체가 그물을 쳐서 바닷물을 낚겠다는 것처럼 낡은 믿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저 자유로운 사람이었다고 소개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우선, 그는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동양화가다. 하지만 그 점이 젊은 박황재형을 괴롭혔다. 동양화의 주재료로 사용하는 먹과 종이는 한자 문화권에서는 오랜 역사를 가진 매체다. 대체할 만한 다른 매체가 존재하지 않던 과거에 먹과 종이는 그 당시 사람들의 삶과는 분리될 수 없는, 체화體化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젊은 화가에게 먹과 종이는 무엇일까. 왜, 먹과 종이어야 하는 걸까. 젊은 박황재형은 수많은 질문을 열병처럼 앓아야 했다. mate being 경계를 가로지르는 그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 여정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나 질 들뢰즈Gilles Deleuze 등이 대표하는 현대철학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기도, 활자 매체와 인터넷을 통해, 심지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술자리와 우연한 만남에서, 끊임없이 말을 걸며 기존의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찾는 것이기도 했다. 때로는 연체동물의 흔적이나 이름 없는 식물들이 그려내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을 디지털 카메라에 담으며 사물의 본연本然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분열증적 탈주’란 이런 태도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40대, 박황재형의 가슴을 식히기에 쿠페는 좋은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종종 우리는 먼 곳을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차가 있어서 달리기도 하니까.박황재형 화백이 구룡령에 들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운전면허증을 가위로 자르는 것이었다. 그날로 은색 쿠페는 텃밭 한쪽에 멈춰버렸다. 과연 그의 탈주는 여기서 멈추는 것일까, 가슴을 달구던 수많은 질문은 해답을 찾았을까? 화백은 즉답대신 뜬금없이 우주론을 꺼내 든다.“성능이 무한대인 망원경으로 우주의 끝을 본다면 무엇이 보일 것 같아요? 아마도 자신의 엉덩이가 보일지도 모릅니다. (웃음)” 몽유묵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우주의 시공간은 휘어지고 꼬여 있다. 이를 근거로 우주는 안과 밖의 경계도, 중심이나 주변도 없다는 우주론이 제기된다. 천체의 거대한 중력 때문에 시공간이 휘어져 둥근 모양으로 빛을 내는 고리(ring), 즉 ‘아인슈타인의 고리’가 발견되고 있어 이러한 주장은 정설로 여겨진다. 그러고 보니, 우주론은 화백의 ‘분열증적인 자유분방함’과 닮아 있다. 또한, 자연석을 품음으로써 안과 밖의 경계를 두지 않은 산채와도 닮았다. 그래도, 화백이 다시 먹과 종이를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먹이 흑黑이 아니라 현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그 말이 산사山寺의 풍경風磬처럼 머리를 때린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서구적 시각에 길들여졌다. 먹으로 검은 글씨를 쓰고, 그 먹으로 검은 선을 쳐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먹은 단지 블랙컬러black color가 아니었던 것이다. 먹은 만물을 품은 우주처럼 깊고 현묘玄妙한 속성을 지닌 재료인 것이다. 먹은 물에 갈려 붓에 스미고, 촘촘하게 얽히다가도 성글기도 한 종이의 분방한 결을 따라 물들고 번진다. 화백은 먹과 종이에 의지해 그림을 그릴 뿐,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화백 혼자만의 몫은 아니다. 누가 주체냐를 두고 문방文房의 네 친구들[四友]과 다툴 필요도 없이 그림이 만들어지는 것을 즐기면 그만인 것이다. 수백 번, 수천 번 매화를 치면서도 또 붓을 드는 이유는 오늘 어떤 매화가 필지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고양이와 부엉이를 그린‘깜냥’과‘깜붱’연작 고양이와 부엉이를 그린‘깜냥’과‘깜붱’연작 *화백이 데리다와 들뢰즈를 경유해 산채에 이른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전원은 정착지가 아니라 탈주의 새로운 시작점이라 보는 게 맞다. 그래서 화백은 도심과 쿠페, 익숙한 것과 멀어지는 산채의 삶을 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산채를 나오며 전원의 생활이니, 귀농귀촌이니 하는 문화가 과연 자유로운 삶을 위한 탈주의 구실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가졌다. 그리고 자문했다. 과연 우리는 편하고 익숙한 것들을 버릴 수 있는가? 고양이와 부엉이를 그린‘깜냥’과‘깜붱’연작 고양이와 부엉이를 그린‘깜냥’과‘깜붱’연작 전원주택라이프 더 보기www.countryhome.co.kr잡지구독 신청 www.countryhome.co.kr:454/shop/subscription.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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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만난 사람】 구룡령 신선 박황재형 화백의 체로금풍體露金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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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 PEOPLE] 흙과 돌을 사용해 지은 숲속 돌집 꿈꾸는 다락방
- 흙과 돌을 사용해 지은 숲속 돌집 꿈꾸는 다락방 아끼고 보듬은 사물이 반질반질 윤이 나고 본연의 빛을 발할 때 우리는 ‘품위’가 느껴진다고 한다. 땅끝마을 해남에서 만난 아담한 돌집이 바로 그러하다. 글 사진 백홍기 취재협조 이세일(목수), 윤용신(플로리스트) 부부 해남에 있는 작은 목신마을에서 아담한 돌집을 만났다. 방 한 개와 주방 겸 거실, 다락을 갖춘 8평 크기의 작은 집이다. 이곳에 초등학생 자녀를 둔 40대 부부가 산다. 돌집을 처음 계획한 건 아내 윤용신 씨다. 타지에서 일하다 귀촌 한 윤 씨는 부모님이 살던 고택 마당 옆에 있던 창고를 허물고 작은 돌집을 지었다. “혼자 살 때부터 집에 관심이 많았어요. 현대식 아파트나 넓은 단독주택이 아니라 숲속의 작은 오두막 같은 집이요. 어린 시절에 겪은 추억과 감성이 무럭무럭 자라 꿈이 된 거예요.” 윤 씨의 꿈은 할머니 집 옆에 있던 초가집 지붕 아래 다락방에서 움텄다. 오래 묵은 책 냄새와 촛불이 일렁이던 다락에서 그녀만의 감성을 키운 것이다. “다락방에 대한 로망도 있었지만, 할머니가 잘 가꾼 살림살이와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예쁜 마당에서 놀던 기억도 좋았어요. 이러한 것들이 몽상에 불과했던 집에 대한 추억을 현실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 거죠. 오래전부터 나만의 감성을 채울 수 있는 집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있다가 고향에 돌아와 꿈의 집을 지어보기로 한 거예요.” 아내의 플로리스트 작업실 앞마당을 부부가 함께 새 단장하고 있다. 정면에 보이는 건물은 이세일 목수 작업실이다. 오랜 곡괭이질 뒤에 잠시 허리 펴고 아내의 작업실을 바라보는 이세일 목수. 작업실은 이세일 목수 혼자 만들고 있다. 남편과 아내의 작업실 풍경. 이세일 목수 작업실이다. 이곳에서 자기만의 작품 세상을 이뤄내 여러 차례 전시와 초대전을 거치며 작가 활동을 하고 있다. 나무 숟가락과 스툴 만들기 등 다양한 수업도 진행한다. 자연과 사람을 사랑하게 한 집 윤용신 씨가 돌집을 선택한 건 오래될수록 예뻐진다는 게 이유다. 어려서 아버지가 직접 짓고 살았던 돌집에 대한 기억도 한몫했다. “막상 돌집을 짓겠다고 마음먹은 다음부터는 돌만 보였어요. 어떤 돌이 예쁜지 가는 곳마다 돌을 살폈어요. 돌도 지역마다 색과 질감이 달라 찾기 힘들었는데, 지인이 미황사(해남 서정리)가 있는 지역의 돌이 예쁘다고 했어요. 미황사 근처에 있는 밭을 개간하며 쌓아둔 돌을 가져와 집 토대를 쌓기 시작한 게 2008년 6월이에요.” 규모는 혼자 살 집이라 아담한 크기로 계획했다. 당호는 <꿈꾸는 다락방>으로 지었다. “목수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 사람은 경험이 필요했고 저는 집이 필요하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어 함께 시작했어요. 하지만, 서로 모르는 게 많다 보니 힘들어져서 결국 그분이 손을 떼고 다른 분을 소개받았어요.” 두 번째로 소개받은 목수가 현재 남편이 된 이세일 목수다. 20대 초반 불교 조각에 입문해 한창 이름을 날리던 이 목수도 자기만의 삶을 찾아 고향인 해남에 돌아와 조용히 작품 세계를 넓혀왔었다.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삶을 살던 두 사람이 ‘돌집’을 통해 만나게 된 것이다. 집 짓기는 1,500만 원으로 시작했다. 주재료는 주변에 널린 흙과 돌을 사용했지만, 그래도 적지 않게 건축자재 구매 비용이 필요했다. 부족한 예산은 틈틈이 일해 보충했다. 과정이 더뎠지만, 급할 게 없고 얽매일 것도 없었다. 조금씩 형태를 갖춰가는 집을 보며 윤 씨는 행복하기만 했다. 그 사이 두 사람의 관계도 점점 견고해져 갔다. 집을 완공한 2010년 그해 봄 얽매인 제도를 싫어했던 그들답게 고택 앞마당을 정리하고 가볍게 혼례상을 차려 부부의 연을 맺었다. 부모님이 살던 옛집을 지나 부부의 공간인 돌집으로 향하고 있다. 고택은 손님을 위한 게스트로도 이용한다. 윤용신 씨는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로 돌집을 북향으로 배치하고 오솔길을 만들었다. 초보자도 쉽게 짓는 어스백 하우스 Earthbag House “이 집은 어스백 Earthbag 공법으로 지었어요.” 어스백은 영어 Earth와 Bag 합성어로 흙을 담은 부대(마대 혹은 포대)로 짓는 공법을 말한다. 흙 부대 또는 흙 자루 집이라고 하는 어스백 하우스 Earthbag House는 1984년 NASA(미항공우주국)에서 흙밖에 없는 달에 건축물을 짓기 위해 논의하던 중 이란 건축가 네이더 카 흐릴 리 Nader Khalili가 제안한 방법이다. 어스백 공법은 원형과 곡선 구현이 가능하며, 아무 흙이나 사용해도 되기 때문에 구하기 쉽고 쌓는 것도 간단해 초보자들도 쉽게 집을 지을 수 있는 게 큰 장점이다. 흙 부대 폭이 넓어 자연스레 벽체가 두꺼워져 단열과 축열, 방음 효과가 높고 흙 밀도가 높아 충격에도 강해 자연재해에도 안전하다. 이 집은 양파망에 흙을 담아 층층이 쌓고 외벽을 돌로 마감했다. 실내 안쪽 벽은 황토로 미장한 뒤 바탕색을 회벽으로 칠하고 실별로 다른 색을 입혀 아늑하게 꾸몄다. 돌 벽과 잘 어울리는 예쁜 하늘색 목문을 열면 현관 없이 바로 거실과 마주한다. 벽과 주방가구, 살림살이에 부부의 온갖 감정과 이야기가 지나온 시간만큼 쌓였다. 낡고 허름한 공간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다. 작지만, 넉넉하게 보이는 건 비움에 의한 여유로움 때문이다. 윤용신 씨의 다락에 대한 로망이 이 집을 짓게 했다. 오픈스페이스로 만든 다락 뒤에 보이는 또 다른 다락방은 시공 실수로 인해 지붕 아래 생긴 공간을 활용한 것이다. 다락에서 내려다 본 이세일 목수. 부부가 고택 툇마루에 앉아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손때 묻은 벽에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였다. 아치로 쌓은 아궁이 상부 아귀가 맞지 않아 다른 돌로 끼워 넣은 쐐기돌이 포인트 역할을 했다. 이 집은 8평이지만, 필요한 공간 요소는 다 갖췄다. 비결은 공유 개념이다. 공간을 기능별로 나누고 하루 공간 사용 시간을 따져보면,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 생기게 되는데, 이러한 공간을 공유 공간에 포함시켜 다기능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이 집은 작은 집을 효율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현관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에 거실-주방-식당-응접실 기능을 한 공간에 담은 공유 공간을 배치하고 주방 옆 안쪽에 안방을 뒀다. 거실 상부에 있는 다락은 기둥을 세울 때 실수하는 바람에 지붕 아래 작은 공간이 더해졌다. 그 덕에 방이 하나 더 생겼다고 한다. 소소한 실수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궁이의 아치를 쌓을 때 정점에 끼워 넣는 쐐기돌 아귀가 맞지 않아 살짝 삐져나온 게 오히려 미적인 효과를 내게 된 것, 굴뚝을 잘 못 설치해 이를 가리려고 단을 쌓은 게 멋진 벤치가 된 것 등이다. 실수를 오점汚點으로 생각하지 않고 재치와 유머로 넘겨 오히려 좋은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부부의 건축은 끝나지 않았다. 현재 윤용신 씨의 플로리스트 작업실을 짓고 있고, 커가는 딸의 공간을 구상하고 있다. 이것들이 끝나면 마지막 건축이 기다리고 있다. 딸이 결혼한 뒤 가족과 놀러 올 때 함께 거주할 공간이다. 돌집이 윤용신 씨만의 공간으로 계획했다면, 다음 집은 모두를 위한 공간으로 시작할 것이다. 햇볕 좋은 날 앉아서 쉬는 돌 벤치도 굴뚝 위치를 잘못 배치해 만들어진 것이다. 실수가 때론 재미를 줄 수 있어 꼭 나쁘지만 않다고 한다. 고택과 돌집 주변에 널린 풍경. 인위적인 것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이곳만의 풍경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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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 PEOPLE] 흙과 돌을 사용해 지은 숲속 돌집 꿈꾸는 다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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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만난 사람] 구룡령 신선 박황재형의 체로금풍體露金風,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버려 자유를 얻다
- 구룡령 신선 박황재형의 체로금풍體露金風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버려 자유를 얻다 박황재형을 수식하는 많은 말이 있다. 교수, 사진작가, 문화비평가, 아트디렉터, 동양화가 등등. 아니, 더 많은 수식어들이 있겠지만 아직 그를 잡아둘 만한 말은 없다. 모름지기 예술은 언어로 포착되지 않은 세계를 형상화하는 일이니 예술가를 규정하는 개념을 찾는 것은 오히려 무모할 수도 있다. 글 사진 강창대 기자 속초에서 양양 시외버스터미널까지의 여정은 무난했다. 거기서 다시 서면 갈천리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그런데 버스 시간표를 훑다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갈천리를 지나는 버스는 하루에 네 번밖에 운행하지 않았다. 황망하게 잡아 탄 택시가 양양 군내를 벗어나 한적한 산길로 접어들었고 얼마 후, 길은 한계령과 구룡령 방향으로 나뉘었다. 고개의 이름이 구룡령인 것은 마치 아홉 마리의 용이 산고개를 넘는 것 같다 해서 붙여진 것이다. 잠시 덮칠 듯이 높이 솟은 산과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 계곡이 차창을 스쳐갔다. 그리고 구불구불한 산길이 시작되는가 싶더니 어느덧 목적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아스팔트 포장길에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산채를 닮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주소가 적힌 작은 푯말을 보고 겨우 산채로 향하는 입구를 찾았다. 차 한 대 지나갈 정도의 산채 입구를 따라 올라가자 돌탑이 눈에 들어온다. 돌탑 주변엔 잡초가 무성하다. 듬성듬성 자라는 고추와 파가 아니었다면 이곳이 텃밭이라는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그 한쪽에는 이곳과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은색 스포츠 쿠페 한 대가 놓여 있다. 아니, 놓여 있다기보다는 버려져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흙바닥에 묻힌 타이어와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가 방치된 세월을 말해준다. 내리쬐는 햇볕 아래 모든 게 정지된 것처럼 고요하다. 산채로 고개를 돌리자 시멘트로 만든 돌사자와 눈이 마주친다. 그 옆에 큰 바위 하나, 또 그 옆에는 털갈이를 하는 황구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녀석이 낯선 이를 보며 짖자 멈춰 있던 풍경이 조용히 바람을 일으켜 객을 맞는다. 산채 입구에 놓인 돌탑. 그 뒤로 은색 쿠페와 황구가 보인다.비록 산채는 소박하지만, 자연에서 누리는 삶은 풍요롭다. 체로금풍 산채 앞에 서니 전서篆書로 흘려 쓴 ‘체로금풍體露金風’이라 적힌 현판이 보인다. 이 구절은 불가에서 선禪 수행의 지침으로 내려오는 벽암록碧巖錄에 등장하는 말로, “가을바람[金風]이 부니 나무가 본모습[體]을 드러낸다[露]”는 의미로 대개 해석한다. 여기서 體란 벽암록의 다른 구절에 나오는 ‘정나나淨裸裸 적쇄쇄赤灑灑’에 견주어 거짓이 없는 깨끗한 모습, 잎이 모두 지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를 말한다. 體에 덧붙인 산채 주인의 해석은 선가禪家의 해석보다도 맵다. 발가벗은 몸으로 이슬을 맞는다. 그 말에는 결기가 있다. 산채의 당호‘체로금풍’이라는 글귀가 새겨 있는 현판 문을 열고 들어서니 묘한 장면이 펼쳐진다. 주방과 식당, 작업실을 겸하는 거실에는 커다란 화강암 바위가 공간을 크게 차지하고 놓여 있다. 바위 위에는 구룡령 산자락에 자리 잡은 산채처럼 작은 석탑이 또 다른 ‘체로금풍’을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바위 한쪽에 놓인 연꽃 모양 향꽂이가 시선을 돌린 채 석탑을 지킨다. 바위는 집터를 고를 때 나온 것이라고 한다. 포크레인이 기세 좋은 소리를 내며 걷어내려 하는 것을 산채 주인은 막았다. 인생이 100년에도 못 미치는 것에 비해 바위는 지구의 생성과 함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을 짓겠다고 그런 바위를 밀어낸다는 게 마치 주객이 전도된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산채는 바위를 품은 채 지어졌다. 산채는 커다란 화강암 바위를 품은 채 지어져 묘한 실내 풍경을 만든다.인근의 돌을 모아 만든 조작 작품 산채는 화백의 작업실 겸 생활공간이다. 탈주와 정주 박황재형 화백(55)이 구룡령에 들어온 지 이제 6년째 접어든다. 이곳에 오기 전, 그는 경계라는 줄 위에 서 있는 곡예사와도 같았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관념체계로 씨줄날줄을 엮은 그물로는 포획할 수 없는 물고기와도 같았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를 개념의 틀 속에 가둔다는 것 자체가 그물을 쳐서 바닷물을 낚겠다는 것처럼 낡은 믿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저 자유로운 사람이었다고 소개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우선, 그는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동양화가다. 하지만 그 점이 젊은 박황재형을 괴롭혔다. 동양화의 주재료로 사용하는 먹과 종이는 한자 문화권에서는 오랜 역사를 가진 매체다. 대체할 만한 다른 매체가 존재하지 않던 과거에 먹과 종이는 그 당시 사람들의 삶과는 분리될 수 없는, 체화體化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젊은 화가에게 먹과 종이는 무엇일까. 왜, 먹과 종이어야 하는 걸까. 젊은 박황재형은 수많은 질문을 열병처럼 앓아야 했다. mate being 경계를 가로지르는 그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 여정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나 질 들뢰즈Gilles Deleuze 등이 대표하는 현대철학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기도, 활자 매체와 인터넷을 통해, 심지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술자리와 우연한 만남에서, 끊임없이 말을 걸며 기존의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찾는 것이기도 했다. 때로는 연체동물의 흔적이나 이름 없는 식물들이 그려내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을 디지털 카메라에 담으며 사물의 본연本然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분열증적 탈주’란 이런 태도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40대, 박황재형의 가슴을 식히기에 쿠페는 좋은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종종 우리는 먼 곳을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차가 있어서 달리기도 하니까. 박황재형 화백이 구룡령에 들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운전면허증을 가위로 자르는 것이었다. 그날로 은색 쿠페는 텃밭 한쪽에 멈춰버렸다. 과연 그의 탈주는 여기서 멈추는 것일까, 가슴을 달구던 수많은 질문은 해답을 찾았을까? 화백은 즉답대신 뜬금없이 우주론을 꺼내 든다. “성능이 무한대인 망원경으로 우주의 끝을 본다면 무엇이 보일 것 같아요? 아마도 자신의 엉덩이가 보일지도 모릅니다. (웃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우주의 시공간은 휘어지고 꼬여 있다. 이를 근거로 우주는 안과 밖의 경계도, 중심이나 주변도 없다는 우주론이 제기된다. 천체의 거대한 중력 때문에 시공간이 휘어져 둥근 모양으로 빛을 내는 고리(ring), 즉 ‘아인슈타인의 고리’가 발견되고 있어 이러한 주장은 정설로 여겨진다. 그러고 보니, 우주론은 화백의 ‘분열증적인 자유분방함’과 닮아 있다. 또한, 자연석을 품음으로써 안과 밖의 경계를 두지 않은 산채와도 닮았다. 그래도, 화백이 다시 먹과 종이를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먹이 흑黑이 아니라 현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 말이 산사山寺의 풍경風磬처럼 머리를 때린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서구적 시각에 길들여졌다. 먹으로 검은 글씨를 쓰고, 그 먹으로 검은 선을 쳐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먹은 단지 블랙컬러black color가 아니었던 것이다. 먹은 만물을 품은 우주처럼 깊고 현묘玄妙한 속성을 지닌 재료인 것이다. 먹은 물에 갈려 붓에 스미고, 촘촘하게 얽히다가도 성글기도 한 종이의 분방한 결을 따라 물들고 번진다. 화백은 먹과 종이에 의지해 그림을 그릴 뿐,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화백 혼자만의 몫은 아니다. 누가 주체냐를 두고 문방文房의 네 친구들[四友]과 다툴 필요도 없이 그림이 만들어지는 것을 즐기면 그만인 것이다. 수백 번, 수천 번 매화를 치면서도 또 붓을 드는 이유는 오늘 어떤 매화가 필지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 화백이 데리다와 들뢰즈를 경유해 산채에 이른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전원은 정착지가 아니라 탈주의 새로운 시작점이라 보는 게 맞다. 그래서 화백은 도심과 쿠페, 익숙한 것과 멀어지는 산채의 삶을 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산채를 나오며 전원의 생활이니, 귀농귀촌이니 하는 문화가 과연 자유로운 삶을 위한 탈주의 구실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가졌다. 그리고 자문했다. 과연 우리는 편하고 익숙한 것들을 버릴 수 있는가? 몽유묵원고양이와 부엉이를 그린‘깜냥’과‘깜붱’연작 ■□Profile 박황재형 화백은 “백수도‘불금’이면 설렌다”고 했다. 첩첩 산중에 둥지를 틀어 세속을 멀리해도 꾸역꾸역 그곳까지 찾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화백은 술 마실 구실을 창조해내는 데도 비범한 면이 있다. 비가 와서, 눈이 와서, 푸성귀들이 싱싱하게 자라서, 날씨가 좋아서. 그만큼 벗들과 어울려 술 마시기를 즐겨한다. 지금까지 여러 권의 평론집을 냈고, 종종 철학 강사로 초대되기도 한다. 경원대학 미술대학교에서 외래교수를 했었고, 한국유네스코 인천지역 전문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주업이니 개인전과 초대전, 기획전 등 지금까지 이루 헤아리기조차 힘든 전시회를 열었다. 활동반경이 넓은 만큼 함께 술잔을 채울 이들도 많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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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만난 사람] 구룡령 신선 박황재형의 체로금풍體露金風,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버려 자유를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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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EDITION 돈 보이는 짭짤한 전원생활 노하우(2)-2] 창의적인 '농산물+2·3차 산업’이 적중-제부도 연꽃 차기설
- 귀 농 인 : 차기설귀농시기 : 2004년위 치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광평리농지규모 : 21000㎡(6363.6평) 주요작물 : 연, 수련 농업연소득 : 1억 3,000만 원(추정치)특 징 : 유기농업, 농산물 가공제조업 (백설연차), 매해 연꽃축제 개최홈페이지 : www.moseslotus.com 연 락 처 : 031-356-2943 011-230-4044창의적인 '농산물+2·3차 산업'이 적중제부도연꽃 차기설귀농 1년차, '농사를 지어봤어야 알지…… 일단 씨는 뿌렸는데 언제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우리집에 수확물을 가져다줄지 도통 알 수가 없네.' 하루가 한 달 같고 한 달이 일 년 같았다. 2004년 귀농한 차기설 씨는 5월 어느 날 연밭에 싹이 트는 것을 보는 순간 '감사합니다'라는 외마디의 외침과 함께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고 했다. 이윽고 꽃봉오리가 생기고 꽃이 만개했을 때는 감격의 눈물이 하염없이 주르르 흘렀다고도 했다. 이웃 아주머니가 그 광경을 보더니 '이제 되었어, 축하해' 하더란다. 그런 그의 자식 같은 연이 해외로도 나가고, 유명인들도 찾아와 아침 이슬 내린 고아한 자태를 카메라 속에 담아간다. 자식이 잘 돼도 이처럼 뿌듯하지는 않을 것이다. 글 박지혜 기자 사진 서상신 기자해마다 여름이면 전국 곳곳에 연꽃 향기가 물씬하다. 서해 제부도 가는 길목에 위치한 화성시 광평리에도 이른 여름부터 가을까지 연꽃 향기로 가는 이의 발목을 잡으니 '제부도연꽃'에서 밀려오는 향기다.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열린 제부도연꽃 축제행사에는 무려 5만여 명이 다녀가 올해 성공적이었다 한다. 제부도연꽃 대표 차기설(52) 씨는 서울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도시 삶에 염증을 느끼고 전환점을 모색하던 중 우연찮게 연을 접한 것이 계기가 돼 귀농을 굳혔다. 차 씨는 연과 인연이 닿았을 뿐 특별한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고 농사 경험도 없었다고 한다. 귀농 정착기간은 3년으로 보는데 차 씨는 그보다 단기간에 정착했다. 2004년 귀농하자마자 연밭을 꾸미고 연 가공제조회사 '백설연차'를 세워 연차를 생산 판매하는 등 힘찬 출발이 좋았다. 첫해라 매출실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장사가 안 됐지만 적어도 '무얼 어떻게 할까' 우와좌왕하는 시기는 없었다고. 연을 테마로 관광자원화하고 식품을 제조하겠다는 목표를 귀농 전에 미리 세우고 사전 지식 습득과 구체적인 농사 및 사업 계획을 세우는 등 철저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귀농 사례를 보면 귀촌을 우선 계획하고 소득활동은 그 다음으로 생각한다. 이와 달리 차 씨의 경우는 귀농 아이템이 먼저 정해져 있었고 전원생활은 덤으로 따라왔다는 점이 눈여겨볼 만하다. Successs Point 1 자신에게 맞는 작물 선택"연은 나처럼 초보 농부가 다루기에 비교적 쉬운 작물이에요. 봄에 파종하고 기다리면 5월경 싹이 올라오고 여름에 꽃이 피어 제철을 맞지요. 대신에 연근, 연밥, 연잎, 연꽃 등 모든 부분을 다 식용으로 쓰기에 농약이나 제초제 등 화학약품을 가하지 않아 그만큼 노동력은 많이 들어가요."연은 파종만 잘해 놓으면 잘 자라는 성질이 있으므로 다른 농작물에 비하면 실패 확률이 낮은 다루기 쉬운 작물이라는 설명이다. Successs Point 2 2·3차 산업으로 연계 발전 차기설 씨는 계획적인 영농과 고생산성, 고소득을 목표로 체계적인 사업계획을 세웠다. 무엇보다 연의 특성을 파악하고 잘 활용하여 2차 3차 산업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다. 연은 모든 부분이 버릴 데 없이 식용이나 약용으로 쓰임새가 좋고, 연꽃은 대중에게 친근하고 사람들의 발길을 머물게 하니 연밭을 관광지로 개발하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처음 상품을 기획하고 나서는 유통망을 뚫는 게 제일 어려웠어요. 직거래로 알음알음 팔다가 우리 상품을 어디서 봤는지 한 인터넷 쇼핑몰에서 먼저 연락이 왔어요. 그 계기로 인터넷 판매가 시작되고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지요."백설연차 브랜드가 어느 정도 알려지자 인터넷 쇼핑몰 몇몇 곳에서 문의가 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응할 수 없는 법. 차 씨는 쇼핑몰을 꼼꼼히 살펴보고 다른 상품들과 어울리는지, 쇼핑몰이 소비자에게 신뢰성이 있는지 등의 기준에 따라 타당성을 심사한 후 판매업체와 거래관계를 맺는다. 2006년 차 씨는 연 공예품으로 특선을 받으면서, 또 경기도관광협회의 박람회 초대전시에 참여함으로써 제부도연꽃과 백설연차가 유명해졌다. 백설연차 제품은 올해 일본으로도 진출했는데 최근 일본 수입 담당자가 방문해 연밭의 유기농법 환경을 관찰하고 만족스러워했단다. "사람들은 '농사로 언제 본전 뽑을래' 하고 말해요. 농사하면 가난을 면치 못할 거라는 보편적인 생각이지요. 그러나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농사로도 부유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차 씨는 앞으로 연 제품 아이템을 다양화하고 외자유치 등의 계획도 고민 중이다. Successs Point 3 주변환경 적극 활용농사에 문외한이 단기간에 농촌에 정착할 수 있었던 큰 요인 중 하나가 농업기술센터와 지역 관공서의 농정 담당 부서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차기설 씨는 말한다. 농업 관련 공공기관을 통해 정부의 농업 정책이나 예산 등의 흐름을 읽을 수 있고, 이에 따라 앞으로의 농사나 사업 계획에 아이디어를 얻게 되며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뿐만 아니라 연고 없이 귀농해 지지자가 절실한 귀농민일수록 공공기관에서 상담을 통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얻고 문제 발생 시 대처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한다. 차 씨는 이러한 공공기관을 적극 활용, 핫라인을 가동해 영농과 사업에 차질이 없도록 진행한다. 차 씨가 외부 지원을 받은 경험으로는, 경기도농업기술원 농업인 마케팅대학 1기 수료, 화성시농업기술센터 전자상거래·e-비지니스 교육, 화성시농업기술센터 시범사업인 화성호 연 재배시범 참여 등이 있다. 올해 일본에 진출한 계기도 경기도가 추천하여 이뤄졌다는 것을 보면 공공기관과의 관계성도 무시할 수 없다. Successs Point 4데이터에 의한 영농 차기설 씨는 '데이터에 의한 영농'을 한다. 영농일지를 기록하고 회계장부 기장을 빠트리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번 연밭 사진을 찍어 관리한다. 데이터가 모여 한 해를 넘겼을 때 이듬해 영농에 도움이 되는데 한 번 실수를 두 번 하지 않게 되고 예측이 가능해 일이 원활하게 진척되고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국내외 정세와 경제 동향을 파악하고 위험요인을 차단한 아래 매해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는 것도 도움이 되고 있다. 귀농 준비백문불여일견이라성공신화 이면에는 인내와 고통이 있는 법. 차기설 씨도 어려움이 많았다. 연 재배와 가공법을 배우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다녔지만 냉랭한 반응에 쉽지 않았고 국내 연 전문서적이 없어 해외 서적을 탐독했다. 연 전문가 밑에서 1년 동안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실습하면서 연에 대한 이론적 실제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터득하는 데 2년여 소요됐다. 현지 농업인들의 배타적인 반응에는 심리적으로 힘들었고, 애지중지 정성을 다해 키워놓은 연꽃을 관람객이 아무렇지도 않게 꺾어 갈 때는 마치 내 자식을 해치는 것처럼 애가 탔다고 한다. 연꽃이 꺾여 사라지면 다음 관람객에게 볼거리가 줄어든다는 점에서도 사업에 차질이 생기므로 그냥 두고 볼 수도 그렇다고 관람객에게 핀잔을 줄 수도 없는 문제였다. 차기설 씨는 귀농 후배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귀농할 지역의 분위기를 먼저 파악하라. 농촌은 배타성이 짙은 특징이 있으므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그 사회에 자신이 잘 어울릴 수 있을지 등을 미리 타진해보도록 한다. 귀농민의 부류는 크게 생업을 위해, 전원에서의 여유를 만끽하기 위해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만약 전자에 속한다면 지역의 일원으로 지역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봉사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3년간 수입이 거의 없다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다. 귀농 준비단계에서는, 농촌에서의 다양한 가능성을 스스로 조사해보고 앞으로 하고 싶은 분야를 결정한 다음 그 분야 전문가나 선험자를 직접 찾아가 몸으로 부딪히며 배우는 것을 추천한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옛말이 그르지 않다.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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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EDITION 돈 보이는 짭짤한 전원생활 노하우(2)-2] 창의적인 '농산물+2·3차 산업’이 적중-제부도 연꽃 차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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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하는 청춘, 아름다운 황혼을 맞다 -이동표 화백
- 계속되는 통화 연결음.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하릴없이 수화기만 바라보다 사뭇 비장하게, 일정에 쫓기는 다른 취재진들을 보낸다. 홀로 떨궈진 곳은 경기도 양평의 한 휴게소 앞. 약도라도 받아 놓을 것을, 이젠 어쩐다, 고민할 새도 없이 바람 한 줄기가 가슴팍을 후빈다. 버릇처럼 옷깃을 여미다가 코를 큼큼거린다. 얼마 전까지 칼날같이 시리던 바람이 한껏 봄을 품었다. 그 바람에 취해 무작정 걷는다. 이동표 화백.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 안은 사람. 그리고 그 아픔을 작품 속에 녹여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 그의 집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생긴다. 그에게 다가가는 길 얼마를 걸었을까. 발 아래로 그림처럼 굴곡진 길이 흐르고, 머리 위로 티 하나 없이 뚜렷한,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경기도 양평군 복포리다. 평온한 지세(地勢)와 풍광으로 이미 정평 난 곳인 듯, 개별 전원주택부터 단지까지 들어서 있다. 그냥 보기만 하면 척하니 알아볼 것 같던 처음의 자신감이 많은 집들 사이에서 사라져 간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네사람에게 길을 물으니 이리이리 가라고 일러준다. 어떻게 생긴 집이냐 물으니 “어떻게 생기나 마나 거기서 물으면 대번에 알려줄 거요” 한다. 이동표 화백의 집은 전원주택 단지를 비껴 마을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독일풍의 경사지붕과 조적벽을 가진 그의 집 옆에는 이웃집의 우사가 면해 있어 소가 개처럼 사람을 맞는다. 대문 대신 몇 개의 계단으로 입구임을 구별하고, 딱딱한 담장 대신 차폐수를 심어 경계를 지었다. 천장은 한지로, 벽은 벽돌로 마감한 거실에는 벽난로에서 태우는 나무향이 그윽하게 배어 있다. 그 창가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이야기는 시작됐다. 칠순을 넘긴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몸에 활기 넘치는 목소리의 그가 입을 연다. 유토피아를 찾아서 “어두운 세파 속에서 자라난 풍란 같이, 말라빠진 몸둥이에서라도 고고한 향냄새 솔솔 날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욕심도 부려본다. 다 털고 일어나 나만의 세상으로 가자. 거들먹거리는 저 살 피둥피둥 찐 사람들, 꼴 보기 싫어 서울 골목집 팔아 치우고 유토피아 찾아간 곳이 경기도 고양군 고양리다. 고향 가는 길목이어서 통일되면 남보다 더 빨리 가고파서, 그리고 외톨박이들 신세타령하며 살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이동표 화백이 십수 년 전 서울의 ‘골목집’을 팔아치우고 전원 속으로 가며 던진 말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그의 근간을 이루는 정서다. 이러한 그리움들은 다시 흙에 대한 그리움으로 화하고, 흙을 찾아 나선 길 끝에 고양리가 있었다. 그 곳에서 평생을 살리라 결심하고 터를 잡았으나, 개발의 바람을 피할 수 없어 다시 터를 잡은 곳이 이 곳 복포리다. 이제 그는 이곳에서 마침표를 찍으려 한다. 태어난 지 돌도 못되어서 어머니를 여의고, 한국전쟁으로 가족과 생이별을 했다. 집도 절도 연고도 없이 오로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텨오던 젊은 시절. 그나마 그림이 있어 그는 ‘외톨박이 노인의 한풀이 굿’을 벌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늘 아내가 있었다. 그는 현재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한다. “산 좋고 물 좋은 이곳에서 편안히 훨훨 날개 펴 날으라고, 좋은 친구, 많은 후배들 보내 주시니 지금은 외톨박이가 아닌 어디에서나 대환영이다. 어머니 품과 같은 넓고 따스한 양평땅에서 사랑 나누어가며 깨끗하게 살다가 황혼의 저쪽 하늘 붉게 물들이리라.” 그들만의 세상 7~8년 전, 그가 처음 이곳 복포리에 왔을 때만 해도 마을은 ‘시골’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마을 앞 성황당이며, 멀리 보이는 산 능선들이며, 흐르는 강이며, 나무들이며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다른 곳과는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좋았다. 당장 이주를 결심하고, 직접 집을 설계했다. 지하는 갤러리로, 1층은 거실과 침실, 식당 등의 필요실로, 2층은 화실로 꾸몄다. 각각의 재료들도 직접 선택했다. 특히 새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가 원주 철도청에서 직접 구입한 침목은 외부 계단과 덱 등에 적절히 사용돼 집의 분위기를 완성하고 있다. 특히 이 집을 더욱 멋스럽게 만드는 것은 집 자체보다는 곳곳에 포진한 그의 작품과 수집품들이다. 어느 한 장소를 잡아 떡하니 전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계단참이며, 창틀이며, 시선가는 곳곳에 자연스럽게 놓아두었다. 이들은 집안 구석구석에 스며 있는 그와 아내의 애착이고, 삶이다. “흙이 좋아 흙냄새 나는 시골을 택했다. 어차피 흙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선 우리가 아닌가. 그래서인지 이곳 생활이 싫지 않다.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열면 어느새 일어났는지 산새들이 나를 반기듯 지저귀며 울어댄다. 그야말로 상쾌한 아침이다. 저 들판에는 아침안개가 보기 좋게 끼어 있어 더욱 상쾌하다.” 고양리에서 살았을 적에는 그야말로 흙이, 자연이 너무 좋고 신기해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잔디를 손질하고, 닭도 먹이고, 산책도 나가면서. 이들 부부는 그 때를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 회고한다. 그러나 몸이 세월의 녹을 먹게 되면서 매일 나가던 산책도 줄이고, 닭을 먹이는 것도 그만 두었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은 그의 그림 작업과 아내의 배려. “조용하면 잘 되는 거고, 잘 안되면 막 찢어지는 소리가 나고 그래요.” 아내는 청력이 약한데도 불구하고 화실 쪽에서 나는 소리에는 민감하다. 이동표 화백이 그림 작업을 할 때는 일절 간섭을 하지 않지만, 무언가 조짐이 이상하면 소주 한 병 슬그머니 밀어 넣어준다. 이런 아내 덕에 이동표 화백은 그 외로운 길을 걸어올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제 외톨박이가 아니다. 평생을 몸부림치며 함께해 온 그림이 있고, 늘 곁에서 지켜보고, 성원하는 아내가 있다. 또 지금은 장성해서 해외로 도시로 분가한 자식들이 때가 되면 찾아오고, 제자나 후배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게다가 그의 세계를 인정해주는 사람도 여럿 생기고, 근방의 지인들이 마실 와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하니 이제는 남부러울 것이 없다. 70여 년을 치열하게 살아온 그에게 한풀이 굿의 끝판으로 다가온 어울림의 자리. 그의 바람대로 이곳 복포리에서 즐겁게 노닐다가 마지막 에너지를 불태우고 스러진다면 서쪽 하늘 물들이는 황혼처럼 모자람 없이 아름다우리라. 田 ■ 글· 사진 이민선 기자 ■ 프로필 이동표. 1933년 황해도 해주 벽성 출생. 해주미술학교 회화과에서 수학하다 1·4후퇴 때 피난민과 함께 혈혈단신으로 남하했다. 그 때 나이 열아홉.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출판 일러스트레이션, 신문 삽화, 소설 컷, 포스터 등 생활에 보탬이 되는 일이면 가리지 않고 다 했다. 나이 40이 넘어 도불,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1982년 신세계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주요 작품으로는 탈의 원초적인 색채와 탈춤의 활동적인 춤사위가 어우러져 신명을 자아내는 ‘탈춤’시리즈, 축복과 행복의 설렘이 피어오르는 ‘사랑’시리즈, ‘어머니 초혼전 그 이후(모자상)’ 등이 있다. 주요 전시회로는 ‘한국현대미술 100인 초대전(전경련개관특설, 1986)’, ‘어머니 초혼 고양리전(임진강변에서 고양리까지, 1994)’, ‘대한민국 원로작가 초대전(서울시립미술관, 1997)’, ‘한국미술 '99, 인간·자연·사물(국립현대미술관. 1999)’, ‘우리시대 삶과 해학전(세종문회회관, 2003)’ 등이 있다. 이 중 ‘어머니 초혼 고양리전’은 80년대 이후부터 ‘어머니’라는 주제로 일관된 작업을 해오던 그의 예술세계가 정점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점이 인정되어 2001년 경기도지사 문화예술상과 2003년 제8회 가톨릭미술상 회화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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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하는 청춘, 아름다운 황혼을 맞다 -이동표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