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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동래 정씨 동래군파종택軍浦東來鄭氏東來君派宗宅(경기도 문화재자료제95호/경기 군포시속달동 24-4)은 현재 자리에서 500년을 이어온 유서 깊은 집이다. 이곳에 자리 잡은 사람은 동래군파 파시조인 정란종鄭갿宗(1433~1489)의 큰아들 정광보鄭光輔(1457~1524)로 정란종 묘소가 있는 이곳에 집을 지었다. 종택은 역사적 가치로 말미암아 현재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관리 중 이다.

 최성호   사진 홍정기

종택을 지은 정광보 부친 정란종은 이시애 난 등을 평정한 공로로 동래부원군으로 봉해지면서 동래정씨의 파시조가 됐다. 동래 정씨 가문은 14대 난종부터 종손의 5대 조부인 26대 때까지 13대가 이어오는 동안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군君으로 봉해졌을 정도로 명문가였다. 집주인 말에 의하면 5대조도 조선이 망하면서 시호를 받지 못했을 뿐이라고 한다.

안채 대청에서 본 안마당. 고택은 관리가 아주 잘 되고 있는 편이다.

안채에서 사당으로 돌아가는 길. 오른편이 부엌, 왼쪽이 광채다. / 작은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문.
고즈넉한 풍경을 한 고택 입구. / 암키와와 수키와로 치장한 부엌 벽면으로 흙벽에 막혀 환기가 어렵기에 기와를 이용해 환기구를 만들었다.

집은 서향, 사랑채는 남향
주변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묘터도 좋지만 나중에 자리 잡은 집터 역시 매우 좋은 자리다. 묘소는 남향이고 집터는 묏자리 건너편에 자리 잡았다. 묘를 바라보는 곳에 집터를 잡고 나니 향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집이 서쪽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 집의 향은 크게 둘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안채의 향이고 하나는 사랑채의 향이다. 안채는 서쪽을 보고 사랑채는 남쪽을 본다. 집을 지을 때 향의 중심점은 안채 대청이고 안채 대청의 향이 집의 주 향이 되는 것을 고려하면 이 집은 서향이다. 대지 여건상 서향이 오히려 좋은 풍광을 지녔음에도 사랑채를 남쪽으로 놓은 것은 겨울을 더욱 따뜻하게 나고 여름에 강한 서쪽 햇볕을 차단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집은 현재 안채와 사랑채, 광채가 몸채를 이루고 주변에 작은 사랑채, 중문바깥에 마방채가 있다. 그리고 뒷마당에 새로 지은 사당, 광채가 있다. 원래 안채 뒤에 별당이 있었고 연못 앞에 솟을대문 행랑채가 있었는데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집은 전체적으로 ㄴ자 안채와 사랑채가 마주 보며 튼 ㅁ자 형태를 이룬다.
 
전퇴집 안채는 전면 네 칸이고 날개채는 두 칸 반이다. 날개채는 아래 두 칸이 부엌이고 나란한 두 칸은 안방이다. 이 집의 재미있는 특징은 부엌에 있다. 부엌은 현재 입식으로 개조됐지만 과거 집 구조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대부분 집에서 그릇을 보관하는 찬장 등의 공간은 전면에 있지 않고 후면에 둔다. 그러나 이곳은 안채 퇴칸을 부엌 수납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런 구조는 다른 곳에서 본 기억이 없다. 전퇴는 대부분 각 실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하고 뒤에 있는 퇴칸은 여러 용도를 위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활용법이다.

묘를 바라보고 앉은 안채 대청으로 남향인 묏자리로 인해 서향이 됐다.
외부 마방채. 현재 이곳은 전국귀농운동본부가 쓰고 있다.
화려한 꽃들로 물들은 안채 후면.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공간, 행사청
사랑채는 전후퇴집, 2고주 5량집으로 전후퇴집은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지어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홑집에서 출발해 조선 중기에는 전퇴집으로 후기에는 전후퇴집으로 발전해간다. 이런 평면의 발전은 살림집 규모와 용도가 늘어나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사랑채가 전퇴집인 안채와 다른 구조를 보이는 것은 지은 시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안채는 1783년, 사랑채는 19세기 말인 1877년에 지으면서 구조상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이다.
 
사랑채 후퇴칸은 수복방, 책방, 광, 행사청을 위한 전실 등과 같이 다양한 공간으로 분할해 사용하고 있다. 사랑방으로 드나드는 뒷문도 이후 퇴칸을 활용해 만들어 놓았다.
 
사랑채는 안채와 직각으로 배치된 남향이다. 사랑채에서 문간채 방향 한 칸에는 높게 올린 누마루가 돌출돼 있는데 누마루에 올라서면 경관이 좋은 남서쪽을 내다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앞에 있는 연못도 즐길 수 있다. 지금 연못 뒤에 있는 집은 예전에는 없던 것이라 한다. 주인 말에 의하면 위 집터까지 정원이었으며 연못 주변에 꽃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경관이 좋았다고 한다. 과거에 이곳에 앉으면 주변 좋은 경관이 내려다보이고 연못 주변 화초가 가득해 술 한 잔하면서 풍류를 즐기기에 정말 좋은 곳이었을 것이다.
 
사랑채에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사랑채 맨 끝에는 행사청이라는 방이 그것이다. 내부는 우물마루(마룻귀틀을 짜서 세로 방향에 짧은 널을 깔고 가로 방향에 긴 널을 깔아서 '井'자 모양으로 짠 마루. 대부분 고택에서 채용하는 방식이다)가 아니라 장마루(장귀틀과 동귀틀을 놓아서 짜지 않고, 긴 널로 죽죽 깔아서 만든 마루)다. 집주인은 예전부터 장마루였으며 서고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행사청이라는 단어로 볼 때 제사를 위한 제기를 보관하고 제사 준비를 위한 장소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장마루는 사랑 대청에 붙어 있는 광, 중문 옆에 붙어있는 광에서도 보이는데 아마도 중문을 포함한 사랑채를 새로 지으면서 물건을 쌓아두는 광은 간략하게 지으려 했던 의도로 보인다.

대청에서 본 안마당.
대청에서 본 후면.
평면도
주변 풍광이 매우 아름다워 집터로는 제격이다. 서향이라는 단점이 있지만 경관을 고려했을 때는 좋은 자리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으로 사라진 사당
사당은 현재 한 칸으로 복원돼 있으나 원래는 두 칸이었다. 당시 사당은 전면 두 칸, 측면 두 칸으로 구성하고 전면 한 칸은 마루였다. 두 칸 중 한 칸은 불천위인 동래공 위패를, 다른 한 칸은 사대조를 모셨다고 한다. 사당은 한국전쟁 전까지 있었으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더 이상 제사를 치르기 어렵다고 판단해 어른께서 위패를 땅에 묻어버리면서 사라졌다. 두 칸이었던 사당이 한 칸이 된 것은 복원할 당시 담당 공무원이 두 칸으로 된 사당이 없다는 이유로 한 칸으로 복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문 옆에는 사랑방을 위한 부엌이 있다. 부엌 바깥 벽면은 암키와와 수키와로 예쁘게 쌓아 치장해 놓았다. 무심코 보면 그냥 담에 장식을 한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이것은 사랑채 부엌을 위한 환기구다. 사랑채 부엌 바깥에는 사랑채 누마루가 있고 모든 벽이 판장벽이 아닌 흙벽으로 삼면이 막혀 환기가 잘 되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벽에 환기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옆에 연이어 위치한 광채는 1930년대에 지었다. 돌저귀나 쇠장석들을 보면 분명 조선 시대에 지은 게 아니다.

현재는 한 칸이나 원래는 두 칸이었던 사당. 한국전쟁으로 사라진 것을 복원했다.
문간채 방향으로 한 칸 돌출한 사랑채 누마루. 남서쪽 경관을 맘껏 즐길 수 있다.
2011년 5월 3일 종손은 종택을 포함한 대지 및 전답(18176㎡)을 문화유산국민신탁에 무상 증여했다. 종택이 위치한 속달동이 군포시 도시개발사업에 포함되자 종손과 가족은 이곳이 영구히 보존돼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아 종택과 주변 땅 모두를 문화유산국민신탁에 기증했다.

토지가 당시 공시지가로 35억 원에 이른다고 하니 가족 간 갈등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래공파문중은 수십억원이라는 현실적 가치보다는 18대, 500년 이상을 이곳에 뿌리내리고 살았던 그 역사적 가치를 보전한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간 문중재산을 놓고 이전투구하는 모습만을 보아온 나로서는 생소하기만하다.

문화의 가치를 무시하고 보전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은 과거란 돈벌이 수단으로밖에 인식하지 않는다. 그것을 떨쳐버리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우리는 문화후진국일 수밖에 없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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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후손들의 애착이 대단한 군포 동래 정씨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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