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메뉴보기
 

19세기 초에 지은 정원태 가옥 鄭元泰家屋은 초가집에 어울리지 않는 규모와 부재를 자랑한다. 특히 사랑채는 규모나 구조로 본다면 다른 어떤 기와집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또한 정원태 가옥은 집은 보이는 것이 아닌 느낌으로 말한다는 것을 대변하는 곳이다. 살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느낌 있는 집이다.

 최성호   사진 홍정기

제천 정원태 가옥(중요민속자료 148호/충북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은 19세기 초에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안채와 사랑채 모두 초가지만 《민속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사랑채는 원래 기와였고 안채도 기와를 얹으려 했으나 돈이 부족해 기와를 얹지 못했다는 집주인의 증언이 있었다.
 
집에 쓰인 목재는 웬만한 기와집보다 튼실해 일반적인 초가에 비해 과하게 부재를 사용했다는 느낌이다. 정원태 선생이 한때 제천에서 계림재단桂林財團을 설립해 계림중학교를 운영했다는 것을 보아 이전부터 상당한 재력을 가졌던 것이 분명해 원래 모습은 기와였을 것이다.

ㄱ자형 안채로 단순한 배치가 개방감을 살리는데 일조한다.
도로변에 위치한 사랑채는 전면 여섯 칸, 측면 한 칸 반 규모다. 예전에는 앞으로 행랑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초가에 어울리지 않는 구조와 부재
지금은 사랑채까지 모두 초가이다. 사랑채에 기와가 얹어져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음에도 왜 초가로 고쳐 지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가세가 기울면서 집을 보수할 때 기와로 얹지 못하고 초가지붕으로 고쳐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제자 김재갑이 쓴 정원태 선생의 이력에 1973년 여의치 않은 사정으로 학교에서 떠나 서울로 이주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때 가세가 기울어져 많은 돈을 들여 기와를 얹을 여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채와 사랑채를 제외하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83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현재 안채로 들어가는 문은 없었고 사랑채 건넌방 쪽 좌측 앞쪽에 변소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사랑채 앞에 문간채가 있었다고 하니 집 분위기가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하게 ㄱ자 안채 앞에 —자 형태의 사랑채가 배치돼 한눈에 집 전체를 읽을 수 있다. 어쩌면 가장 특징 없는 배치일 수도 있으나 오히려 이런 단순함이 넓은 마당과 어울리면서 편안하고 시원한 느낌을 배가한다. 이것이 바로 이 집의 특징이다.
 
개방감은 밖에서도 전해진다. 남향한 높은 언덕에 모든 경치를 내려 볼 수 있는 좋은 곳에 위치했기에 사랑채 앞 경관도 탁월해 절로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다. 예전에는 사랑채 앞으로 문간채가 있었다 하니 그 느낌이 지금과 같지는 않았겠지만 넓은 대지를 안고 있어 모든 건물이 시원시원하게 배치된 점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집을 돌아보면서 이보다 넓은 마당을 가진 곳은 간혹 본 적은 있으나 전해지는 이와 같은 시원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어디도 어두운 구석이 없고 경쾌하다.
 
안채는 몸채 전면이 여섯 칸, 측면이 한 칸 반 규모인 ㄱ자 형태로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안채 우측으로 네 칸 규모 날개채가 뻗어있다. 날개채는 안방 두 칸, 부엌 두 칸 그리고 맨 위쪽은 골방이다. 몸채는 좌측 한 칸이 아래는 부엌, 상부는 다락이고 그 옆에 건넌방 두칸, 대청 두 칸이다.

전퇴를 둔 사랑채는 전망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안채 뒤쪽 모서리에 놓인 화장실. 다른 곳과 어울리게 초가다.
담 너머로 본 안채 측면.
오른쪽이 사랑채 좌측면이고 정면이 안채로 향하는 문이다.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든 부엌 배기 방식
굴뚝은 다른 집에서 보기 힘든 형태로 진흙으로 감싸 만들었다. 굴뚝은 높이가 높을수록 배기가 잘되는 반면 쉽게 식는다는 단점이 있다. 이 때문에 굴뚝 보온을 위해 볏짚으로 감싸는 등 여러 방식이 있으나 이곳에서는 진흙을 사용한 것이다.
 
굴뚝의 또 다른 특이한 점은 원래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지관으로 이중관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진흙으로 감쌌다는 것도 이채로운데 이렇게 이중관을 만든 사례를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새로 고친 굴뚝은 원래 모습을 무시하고 플라스틱 관으로 굴뚝을 만든 후 진흙으로 감싸 눈속임을 한 것이 너무 아쉽다.
 
안채에서 보는 또 다른 특징은 부엌 배기 방식이다. 부엌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에 연기가 많이 나기 마련이어서 원활한 배기를 위해 창을 많이 내고 까치구멍 집처럼 지붕에 구멍을 내 연기를 배출한다. 그러나 이곳은 지붕에 다른 집과는 다른 방식으로 연기 배출 시설을 만들었다.
 
안채가 위치한 날개채는 삼량집이다. 삼량집은 보 위에 동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치는 단순한 구조로 벽면에 삼각형 구멍이 생긴다. 대부분 이 구멍을 흙으로 메워 외풍을 막는데 이 집에서는 막지 않고 터서 부엌 배기구로 활용하고 있다.

안채 우측면으로 뚫린 곳이 부엌이다. 앞에서부터 부엌, 안방, 윗방, 골방 순으로 놓였다
안채 측면과 후면. 예전에는 굴뚝을 오지관으로 이중관을 만든 후 보온을 위해 진흙으로 감쌌지만 지금은 플라스틱 관으로 바뀌었다.

기교 없이 단아한 모습의 사랑채
안채는 삼평주로 전퇴집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삼량집이다. 전퇴를 가진 집은 일고주 오량집으로 꾸미는 것이 일반적이고 안채와 사랑채의 위계를 고려해 평주를 보통 안채와 사랑채가 같게 하거나 안채를 늘리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사랑채가 삼량집이라면 안채는 삼량집 혹은 오량집으로 짓는다. 하지만 이곳은 사랑채는 일고주 오량집이면서 안채는 삼평주 전퇴집이다. 역시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사례다.
 
전면 여섯 칸 측면 한 칸 반 규모인 사랑채는 맨 좌측 끝에 있는 건넌방 뒤쪽으로 광이 한 칸 돌출해 있어 전체적으로는 ㄴ자 형태다. 사랑채가 지금은 초가지만 규모나 구조로 본다면 다른 곳과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고 쓰인 부재들도 초가보다는 기와에 어울린다.
 
좌측에서부터 건넌방 한 칸, 대청 두 칸, 사랑방 두 칸, 곁방 한 칸으로 돼 있으며 일자형 입면으로 평면적이지만 단아함을 보여준다. 기단이 높지 않고 기교 없는 구조가 단아한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킨다. 지붕가구는 전퇴를 둔 일고주 오량집이다. 지금은 사랑채 바로 앞에 길이 있어 어수선하고 초가라 고고한 맛이 없지만 예전에는 넓은 앞마당을 가진 당당한 기와집이었을 것이다.

사랑채 대청마루에서 본 전경. 마을 전체가 한눈에 잡힐 만큼 시원한 풍광이 압권이다.
배치도
정원태 가옥으로 돌아보면서 집에도 집주인과 궁합이 맞는 곳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사람 대부분은 '기와, 초가'하면서 집이 가지고 있는 격식으로 살고 싶은 집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정원태 가옥은 집은 보이는 것이 아닌 느낌으로 말한다는 것을 대변하는 곳이다.

풍수가들이 자주 찾아와 지세를 살핀다고 한다. 그만큼 풍수상으로도 괜찮은 곳이다. 뒷부분에 대한 허전함은 비보 개념으로 바람막이가 돼 줄 나무를 심는다면 나아질 것이다. 풍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랑채에서 보는 풍광은 장관이다.

필자에게는 살고 싶다는 느낌이 절로 드는 집이었다. 나무까지 심어 진다면 살고 싶은 마음이 배가될 것이다. 수많은 옛집을 보면서 선교장이나 운현궁과 같은 엄청난 규모와 고고한 취향을 가진 곳도 이처럼 살고 싶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 정원태 가옥은 그간 돌아본 곳들 중에서 가장 살고 싶은 집이다.

참고문헌 
계산 정원태桂山鄭元泰(1913-1993)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가 한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조부인 정운호(1862~1930) 선생은 화서의 고제자인 성재 유중교省齋柳重敎(1832~1893)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조부가 화서학파였으니 정원태 선생의 학문 연원도 화서학파였다고 할 수 있다. 이항로-최익현으로 이어지는 화 서학파는 당시 척화의 선봉에 서서 나라를 지키려 온 몸을 바쳤다. 많은 화서학파 사람이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정원태 선생 조부도 의병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의 행적을 보면 아마도 직접 전투에 참가하기보다는 풍부한 재력으로 의병활동에 많은 지원을 했을 것이다. 한편 정원태는 축척한 부로 한때는 제천에 계림중학교를 세워 육영사업을 하기도 했으나 가세가 기울면서 학교 운영에서 물러나 1973년 서울로 이주했다. 그 후 한학과 고전문집 번역에 참여해 수많은 고전문집을 발표했다(현재 집을 관리하며 살고 있는 분의 말에 의하면 동생들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고 한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 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보기
www.countryhome.co.kr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고택을 찾아서, 이처럼 살고 싶은 집이 있을까, 제천 정원태 가옥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