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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가시 초가는 지금으로 말하면 서민이 살던 집으로 이전에 소개했던 기와집이나 다른 초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규모다. 한 칸 대청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 건넌방 옆에 사랑방이 놓였다. 안방 앞에는 부엌이 있어 안채는 자형을 이루고, 그 앞에 광과 대문으로 이뤄진 문간채가 한 자 정도 낮은 자 형태로 붙어 집은 완벽한 자 형태다. 우리나라에 몇 안남은 초가 중 하나로 평범했던 선조들의 삶을 짚어 볼 수 있는 소중한 곳이다.

 최성호   사진 홍정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진정한 한옥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초가라고 이야기한다. 그간 소개한 수많은 한옥의 대부분은 기와집이었다. 그러나 기와집은 평민들이 살던 집과는 전혀 관계없는 부자들이 살던 집이다. 우리네 선조 대부분은 초가에 살았다. 당시 집의 90% 이상이 초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초가는 우리에게 가장 흔한 집이었으나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된 몇채와 민속마을 내 몇몇 초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라져 오히려 초가는 기와집보다 더 귀한 집이 됐다. 모든 마을이 초가로 되어 있었던 것이 70년대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구태舊態로 치부돼 모두 사라지고 만 것이다.

90% 이상이 초가였을 정도로 선조들 대부분은 초가에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오히려 사대부 들이 살던 기와집보다 더 귀한 집이 됐다.

흔히 구할 수 있고 훌륭한 건축 재료인 볏짚
태백산맥 자락에서 살던 사람들은 너와나 굴피와 같은 나무를 활용해 지붕을 얹었고 천연슬레이트가 나오는 곳에서는 돌 너와로 지붕을 만들기도 했다. 태백산 중에 있는 집 지붕이 나무로 된 것은 나무가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 외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에 초가가 많은 것은 볏짚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벼농사를 짓는 곳이라면 가장 흔한 재료가 바로 볏짚이다.

볏짚은 단순한 땔감에서 시작해 퇴비로도 활용하지만 각종 생활도구를 만드는 데도 유용한 재료였다. 멍석, 새끼줄도 볏짚을 활용한 생활도구이며 공예품도 만들었다. 그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재료였기에 건축 재료로 활용하는 것은 당연했다. 볏짚의 장점은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 외에 파이프 같은 구조여서 보온성도 탁월해 지붕재료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볏짚은 건축 재료로 지붕에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초가집이나 기와집 기둥을 세워 도리를 얹고 나면 그 사이를 흙벽으로 채운다. 이때 흙벽은 수숫대 같은 것으로 기본 구조를 만들고 앞뒤로 진흙으로 발라 메우는데 그때 볏짚을 잘게 썰어 넣어 진흙이 트거나 갈라지는 것을 막는 보강재로 사용했다. 볏짚은 한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재료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초가라 하면 볏짚만 쓰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볏짚 외에도 억새 등도 사용됐다. 경남 창녕 술정리 하씨 고가에는 억새가 지붕 재료로 쓰였다. 억새는 볏짚과 같이 1, 2년마다 갈아주지 않아도 돼 번거로움을 덜어준다.
 
그리고 초가는 감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초가의 부드러운 곡선에는 다른 나라 건축물에서 느낄 수 없는 안온함이 있는데 이는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지붕 선은 산세와 잘 어울려 집이 자연과 합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초가는 자연과 인간과 호흡하는 건축물이다.

경기 고양시 정발산동에 위치한 밤가시 초가는 완벽한 ㅁ자 형태 평사량집이다.
안마당이라고 해야 한 뼘 크기다. 좁은 안마당 위로 구멍이 뚫려 있다..
작은 규모 대청으로 보이는 문을 열면 안방이다.
모든 공간이 훤히 보이는 구조다. 집이 작아 내외를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다.
대청 뒤 벽면으로 지붕 선에서 내려온 경사가 완만하다. 초가는 용마루가 높지 않고 경사가 완만해 종도리를 올리지 않는 평사량집이 많 다.
밤가시 초가가 문화재로 지정받은 이유는 보존이 잘 돼 있기 때문이다. 뒷간 모습이다.

내외 구분은 사치였던 당시 서민들의 삶
밤가시 초가(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정발산동,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8호)는 지금으로 말하면 서민들이 살던 집이다. 서민들이 살던 초가를 보기가 결코 쉽지 않은데, 우선 밤가시라는 이름은 예전 이 마을에 많았던 밤나무를 주요 생활용품과 건물의 재료로 사용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집은 이전에 소개했던 기와집이나 다른 초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규모다.

우리가 늘 쓰는 작은 집이라는 뜻의 '초가삼간'이라는 말이 있다. 신영훈 선생은 초가삼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과거 세 칸 집은 방과 대청과 같이 사람이 거주하는 방을 기준으로 했기에 세 칸이라는 의미에서 부엌과 헛간 등은 제외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집의 몸체는 네 칸으로 세 칸 집은넘어섰지만 규모로 본다면 '초가삼간'이라 해도 무리가 없는 집이다.

몸채를 보면 한 칸 대청좌우에 안방과 건넌방, 건넌방 옆에 사랑방이 있다. 안방 앞에는 부엌이 있어 안채는 ㄱ자형을 이루고, 그 앞에 광과 대문으로 이뤄진 문간채가 한자정도 낮춰 ㄴ자 형태로 붙어 집은 완벽한 ㅁ자 형태다.

일단 집이 작아 안채, 사랑채를 구분할 의미가 없다. 사대부 집에서는 내외를 한다고 해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경우도 어떤 방법으로든 사랑방과 안방의 출입을 구분하려고 했으나 그렇게 큰 집을 마련할 수 없었던 서민들에게는 이런 구분은 의미가 없다. 한 식구가 다 들어가 자기도 힘든 규모에서 내외를 한다는 것은 사치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남녀를 구분해 생활공간을 마련했다는 개념은 부자나 일정한 재산을 가진 사대부들에게나 적용되는 기준일 뿐이라는 것을 이런 집 구조를 통해 알 수 있다.

정면으로 좌측부터 사랑방, 대문, 창고 순으로 놓였다.
사랑방 앞. 출입구를 뒤로 밀고 앞에는 나무 기둥을 세워 햇빛을 막아주고 있다.
집 후면 장독대.

한 뼘 크기의 안마당, 원초적 집 구조 읽을 수 있어
작은 규모에 ㅁ자 집을 짓고 보니 안마당이라고 해야 그야말로 한 뼘 크기다. 대문을 통과해 집을 들어서면 좁은 안마당 위로 구멍이 뚫려 있다. 큰 집이라면 넓은 안마당이 있었을 것이다. 빠끔히 뚫어진 구멍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위에서 보면 지붕 형태가 마치 머리에 짐을 올릴 때 얹는 똬리 같이 생겼다.
 
ㅁ자 집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깔끔함은 없다. 이런 집을 지을 때 목수도 고급 목수를 쓸 수도 없을 형편이어서 아마도 동네 주변에서 솜씨 좋은 사람에게 맡겨 집을 지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문간채를 처리하는 방식도 직각으로 깨끗하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빗변으로 대충 마감했다. 문간채와 본채가 연결되는 부분도 나무를 적당히 걸어 결구했다.
 
집은 평사량집이다. 평사량집은 도리가 네 개인 집으로 종도리가 없다. 오량집에서 종도리를 빼버린 구조라고 생각하면 된다. 주심도리와 중도리 사이는 일반 서까래와 같이 걸고, 중도리와 중도리 사이는 수평으로 서까래를 건 다음 그 위 잡목 등을 이용해 높이고 용마루를 거는 구조다. 초가는 용마루가 높지 않고 경사가 완만하기에 굳이 종도리를 올리지 않고 평사량으로 지었다.

우측면으로 창고와 화장실이 위치한다.

초가는 볏짚의 보온성을 살려 지은 생활에서 체득한 지혜가 들어간 집이다.

이제 몇 안 남은 초가, 잘 보전해야
주변에 수없이 많았던 초가는 이제 몇몇 민속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한 건물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우리는 예전에는 그리 많지 않았던 기와집을 한옥이라고 열심히 돌아보고 있다. 기와집은 일부 부유층이 살았던 집이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많은 사람의 희노애락이 담긴 우리의 한옥이라고 할 수 없다.

선조들 대부분은 초가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렇게 많던 초가가 새마을운동의 광풍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과연 초가가 그렇게 형편없었던 집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 글을 쓰면서 김제 오영순 가옥을 답사했을 당시 집주인이 건넸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새마을사업을 한다면서 집을 고치려 덤비길래 문화재로 신청해 보전할 수 있었다"면서 "초가집가 오히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다"고 했다.

초가는 오랫동안 생활에서 체득한 지혜가 들어가 있는 집이고 볏짚의 보온성을 잘 살려 지은 집이다. 그리고 주변에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를 활용하고 다시 걷어 퇴비 등으로 재활용이 가능한 그야말로 현대인이 추구하는 자연 친화적인 집이다. 그런 집을 산업화의 잣대로 형편없는 퇴물로 취급해 초가의 장점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우리 손으로 팽개쳐 버렸다. 그리고 그 집에 붉게, 퍼렇게 칠한 슬레이트 지붕을 얹어 놓았다. 얻은 것은 공해뿐이고 나아가 강산의 풍광을 망쳐버렸다.

기와집에 대한 연구는 많아도 초가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가를 연구하려 해도 남아있는 초가가 없어 연구를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남겨지지 않은 것은 역사가 아니다. 현존하는 몇 안 되는 초가까지 사라지고 나면 역사에서 초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과거가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나 꾸준히 지켜야 할 것은 분명 있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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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일산 밤가시 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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