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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 2년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사용하다 20여 년 후 박종우가 공부방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도곡재陶谷齋(시유형문화재 제32/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692)로 불리고 있다. 용도와 주인이 바뀌면서 모습을 달리했는데 살림집이 재실로 그리고 다시 살림집으로 쓰인다. 연못을 지으면서 누마루를 달았는데 이것이 건물전체 외관을 해치고 있다.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다.

 최성호   사진 홍정기

문화재청 소개에 의하면 도곡재는 "처음에는 조선 정조 2년(1778)에 대사성인 서정공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세운 건물이나, 정조 24년(1800)경에 도곡 박종우의 공부방으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도곡재 근처에 사는 문중 사람 말에 의하면 "서정공西亭公박문현朴文鉉(1789~1875)이 살림집으로 지었다고 되어 있으나 정확히 언제 지었는지는 밝혀진 것이 없다"고했다. 그리고 "19세기 중엽부터 도곡공陶谷公박종우朴宗佑(1587~1654) 후손들이 공의 재실로 사용하면서 도곡재로 불렸다"고 전했다.
 
여기서 문화재청 자료에 나타난 1778년이라는 건립 연대를 보면 박문현이 태어난 해보다 먼저이므로 박문현이 지었다는 것은 잘못됐거나 박문현이 지었다면 건립 연대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문중 사람의 말로 추정할 때 아마도 건립 연대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도곡의 공부방으로 썼다는 것도 문중 사람의 증언과 다르므로 다시 살펴봐야 할 부분이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도곡 박종우가 공부방으로 쓰면서 도곡재라 불렀다고 하는데 문중 사람 말은 다르다. 다시 살펴봐야 할 부분이다.

우리 한옥에서 재실齋室은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제사를 위한 부속 시설이라는 것이고 다음으로 유생이 공부하는 방이라는 뜻이다. 공부하는 재실과 비슷한 뜻을 가진 건물로는 재사齋舍가 있는데 서원이나 향교에서 유생들이 기숙하던 곳 또는 공부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을 말한다. 재사의 대표적인 예가 영덕 화수루花樹樓(경북 유형문화재 제82호)로 안동 권씨 집안에서 집안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만들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도곡 박종우는 한강寒岡정구鄭逑에게서 수학했고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북향해 통곡하고, 평생 지은 글을 모두 태워 버렸다고 한다. 또한 자칭 숭정처사崇禎處士라 해 종신토록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달성 10현 중 한 사람이고 문음文蔭으로 부사과副司果(조선시대 오위五衛의 종6품 관직)가 됐으며 사후 사헌부지평(조선시대 사헌부의 정오품正五品관직)에 추증됐다.

홍살을 설치하고 위에 엄나무를 올린 대문. 엄나무는 귀신을 쫓는다 하여 민간에서 자주 썼다고 한다.

용도와 주인이 바뀌면서 모습을 달리한 도곡재
도곡재는 그간 용도와 주인이 바뀌면서 집의 구조도 일부 바뀐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살림집으로 지었던 것이 재실로 바뀌고 다시 주인이 바뀌면서 살림집으로 사용됐다. 앞선 문중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현재 집주인의 증조부 때 이 집을 구입했다고 하는데 이때 재실에서 다시 살림집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개조한 부분이 누마루다. 달성군청 자료를 보면 앞에 있는 누마루식 대청은 후대에 설치했다고 한다. 현재 가구의 짜임새로 볼 때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고 후대 덧붙여 지은 것이 맞는 것 같다. 도곡재와 뒤쪽으로 담을 같이 하고 있는 태고정에서도 덧대어 방을 늘린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태고정의 부엌 쪽 한 칸은 후대에 늘린 것을 참고해 다시 늘린 것이 아닌가 한다.
 
대부분 건물이 남향으로 배치돼 있다. 도로가 서쪽에 있어 건물 진입은 사랑채 측면에서 이뤄지고 중문으로 가려면 사랑채 앞을 지나야 한다. 안채 배치는 ㄱ자형의 안채, 중문칸, 헛칸채가 안마당을 둘러싼 형상인데 일반적인 경상도 집과는 달리 전혀 폐쇄적이지 않다.
 
ㄱ자형 안채는 몸채 다섯 칸 날개채 두 칸으로 구성했는데 전퇴가 없는 삼량집으로 소박하다. 안방은 두 칸이고 뒤쪽과 옆쪽에 개흘레(건물 기둥을 이용해 벽 위쪽 바깥에 조그맣게 달아낸 간살. 벽장이나 반침 등과 같이 방 안에서 사용하는 격납 시설)를 뒀다. 건넌방은 비록 한 칸이지만 간살을 넓게 잡아 살림살이를 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넉넉하게 계획했다. 안채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부엌과 건넌방 옆 아궁이를 설치한 칸이다. 아궁이를 설치한 칸 위는 건넌방에서 사용하는 다락이, 아래는 건넌방을 위한 함실아궁이가 설치됐다.
 
아궁이를 설치한 한 칸은 사랑채 누마루처럼 부섭지붕(벽이나 물림간에 기대어 만든 지붕)을 달았다. 다른 곳과 다른 점은 옆 기둥에 바짝 붙여 나지막한 담장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왜 이런 벽을 설치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마도 아궁이 쪽으로 직접 바람이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앞쪽에서 바람이 세게 불면 아궁이에 불이 너무 잘 들기 때문이다.

내삼문과 붙어 있는 중문칸.
오른쪽이 부엌이다. 규모가 작아 부섭지붕을 달아 공간을 늘렸다.
전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인 사랑채. 중문을 가려면 사랑채 앞을 지나야 한다.

안사람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부엌
도곡재 부엌은 이제까지 본 부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집 형태로 볼 때 부엌이 한 칸인 경우는 그야말로 초가삼간 집에서나 볼 수 있다. 한 칸 부엌이 집에 어울리지 않게 좁은 것은 분명하다. 부엌 날개채 쪽 지붕을 보면 맞배지붕으로 돼 있어 이를 봐도 처음부터 한 칸으로 계획됐던 것은 분명하다. 현재 지붕은 부엌 기둥에 보아지 형태의 부재를 붙이고 그 위에 도리를 얹고 그 도리와 앞에 있는 담에 걸쳐 서까래를 걸쳐 지붕을 얹었다. 현재 지붕 구조로 볼 때도 후대에 새롭게 늘린 것이다. 처음에는 한 칸 부엌으로 계획했던 것인데 실제 생활하면서 불편하자 초가로 부섭지붕을 설치하고 한 칸 늘린 것으로 보인다.
 
안채에 전퇴가 없고 부엌이 한 칸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아 이 집을 계획할 때 안사람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바깥주인 뜻대로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는 전퇴집이 일반적이었음에도 사랑채에는 퇴칸을 두고 안채에는 퇴칸을 두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부엌을 한 칸으로 지었다는 것에서 그렇다.
 
헛간채는 네 칸 초가다. 최근 고택을 수리하면서 원래 초가지붕이었던 광채나 헛간채를 기와집으로 고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곳은 원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 반가웠다. 헛칸채는 두 칸은 마루를 깐 광이고 두 칸은 아래는 헛간, 상부는 다락이다. 헛간채에 다락을 두는 경우는 가끔 있지만 이렇게 다락방으로 완전히 구획하는 경우는 이곳이 처음이다. 건물 형태를 고려하면 아래쪽은 외양간으로 사용한 듯하다.

사랑채 옆으로 연못을 조망하고자 후대에 누마루를 늘려 달았다
안채는 다른 경상도 지역 고택처럼 폐쇄적이지 않다.
ㄱ자형 안채는 몸채 다섯 칸 날개채 두 칸으로 구 성됐다

건물 전체 외관을 망친 누마루 아쉬워
사랑채는 전면 다섯 칸 측면 두 칸 규모지만 누마루를 포함한 네 칸은 전퇴를 둔 구조이고 중문칸 쪽 한 칸은, 사랑방 쪽 한 칸 반 규모를 두 칸으로 나눠 앞쪽에는 수복방을, 뒤쪽에는 아궁이를 뒀다. 아궁이 상부는 사랑채를 위한 다락으로 꾸몄고 사랑방에는 게흘레를 설치해 편의를 도모한 것이 특징이다. 누마루는 사랑채 대청 기둥으로 삐져나온 장혀 뺄목 아래에서 도리를 걸어 앞에 세운 기둥과 연결하고 이 도리 위에 기존 처마를 받치는 부재를 놓은 후 그 앞으로 다시 별도 서까래를 추가로 설치해 부섭지붕을 만들었다.
 
이렇게 기존 지붕 처마 아래 다시 지붕을 덧대어 설치하다 보니 내부가 매우 낮고 답답하다. 그렇지만 앉아서 주변을 살펴보기에는 그런대로 쓸 만하다. 이렇게 마루를 덧댄 것은 앞에 있는 연못 때문이다. 연못을 조성했지만 그에 걸맞은 시설이 없었기에 후에 누마루를 덧대어 낸 것이다. 그러나 이 누마루로 인해 건물의 아름다움이 사라져 아쉽다.
 
연못이 대청 앞쪽에 위치했다면 사랑채 어느 곳에서도 연못을 편하게 조망할 수 있어 누마루를 새로 설치할 필요가 없다. 연못을 서쪽 구석에 만들어 놓고 보니 누마루의 필요성이 강하게 느껴졌고 그로 인해 건물 전체 외관을 망쳐가면서 누마루를 지었던 것이다. 연못을 조성한 사람의 안목이 두고두고 아쉽다.
 
솟을대문에는 홍살을 설치하고 그 위에 엄나무를 올려놓았다. 엄나무의 정확한 명칭은 음나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엄나무라 부른다.
 
엄나무는 가지에 커다란 가시들이 있어 민간에서는 귀신을 쫓을 수 있다고 믿어 집 안에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 위쪽에 걸어 두거나 무당이 굿을 할 때 귀신을 물리치는 도구로 쓰였다. 모든 나쁜 기운의 침입을 막으려 했던 소박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서쪽에 조성한 작은 연못. 뒤로 보이는게 화장실이다.
네 칸 초가인 헛간채. 원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흔치 않은 건물이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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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연못이 건물 전체를 망쳤다? 달성 도곡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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