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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 조길방 가옥達城趙吉芳家屋(중요민속문화재 제200, 대구 달성군 가창면 정대1350)은 가화를 당한 조광국이 이주해 정착하면서 안채를 지었고 나머지 건축물은 그의 아들, 손자 대에 올렸다. 싸리 기둥에 칠기봇장(칠기나무로 된 집)인 특이한 곳으로 소박한 안채와 사랑채, 방앗간채, 헛간채로 이뤄졌다.

 최성호   사진 홍정기

조길방 가옥은 이런 깊은 산골에 집이 있나 할 정도로 산골에 위치한다. 가화를 당한 조길방의 9대조 조광국이 홀로 들어와 정착하고자 집을 지었다.

민속문화대백과사전(이하 백과사전)에 의하면 대구 동촌비행장 근처에 살던 조광국匡國(조길방의 9대조)이 가화家禍를 당해 홀로 이곳, 달성군 가창면 정대1리에 들어와 정착했다고 한다. 이곳은 매우 깊은 산골이다. 마을에서 계곡으로 한참 들어와서도 또 산을 타고 올라야 한다. 이런 곳에 집이 있나 할 정도다. 이렇게 깊은 산골에 정착한 것으로 보아 가화 때문에 도망쳐 정착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현재 초가 4채가 있는데 안채와 사랑채는 예전에 지은 것이고 아래채와 입구에 있는 집은 최근 복원했다. 달성군이 제공한 배치도와 한국의 전통가옥 기록화보고서(달성 조길방 가옥/이하 보고서)에는 입구 건물을 헛간채로 표기하고 있으나 지금은 일반 살림집으로 쓴다.

원래 인근에 15가구가 모여 있었다고 하는데 1984년 조사에는 6가구만이 파악됐고, 지금은 주변에 얼마나 사는지 모르겠으나 아래 음식점 외에는 사람이 산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능선과 어우러져 아담하게 놓인 아래채.

대청 기둥을 소나무가 아닌 싸리나무로
상량문에는 '聖上在位九年甲굪二月十九日卯時竪柱未時上樑'라고 쓰여 있다. 갑진년은 정조 재위 8년인 1784년으로 실제 건축연도는 1784년 또는 1785년으로 추정된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사랑채는 60년 전에 확장했고 아래채는 30여 년 전 무너진 것을 개조했다. 백과사전이 1984년 작성된 문헌을 참고했으므로 사랑채는 1925년 무렵, 아래채는 1955년 무렵 확장·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조길방 가옥 안채는 높은 축대 위에 남서향으로 놓였다. 전면 다섯 칸 측면 한 칸의 一자형이다. 대청은 두 칸으로 간 살이 다른 칸보다 좁아 두 칸이지만 한 칸인 안방과 건넌방보다 조금 더 클 뿐이다. 대청 기둥은 원기둥으로 소나무가 아닌 싸리나무를 썼는데 백과사전에 의하면 조길방의 부친이"싸리 기둥에 칠기봇장(칠기나무로 된 집)"이라고 늘 자랑했다고 한다.

현재 원기둥 하부는 다른 나무로 이었다. 백과사전에서도 이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오래전에 이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삼량집으로 소박하다. 안방 전면에는 작은 창을, 건넌방 전면에는 문을 설치했는데 예전에는 건넌방 앞쪽도 안방과 같았다고 한다. 부엌 측면과 후면은 1/4칸 정도 늘여 넓게 했으며 후면으로 늘린 부분은 선반을 달아 식기 등을 놓았을 것이다.

사랑채는 아래 두 칸은 방, 안채 쪽 한 칸은 헛간이다. 입구 쪽에 쪽마루를 둬 드나들기 편하게 한 것으로 보아 출입은 주로 안마당 반대편 쪽에서 이뤄진 것 같다. 바깥 한칸에 위치한 아궁이는 안마당 쪽에 둬 불을 땔 때 연기가 사랑채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으며 같은 이유로 아궁이가 설치된 방향이 아닌 측면과 입구 두 곳에 문을 설치했다. 한편 우측 기둥에 상방과 하방을 걸었던 흔적이 있어 사랑채 옆에 대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 앞으로 넓게 자리한 안마당.
안채에서 본 전경으로 얼마나 높은 곳에 위치한지 짐작이 간다
좌측 안채와 정면 사랑채. 사랑채는 1925년 무렵 확장, 개조했다.
걸터앉을 수 있도록 낮은 툇마루를 둔 헛간채. / 새로 지은 건물로 기존 건축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사랑채와 헛간채 사이공간.

변소를 건물에 붙여 지은 특이한 사례
조길방 가옥에서 눈길을 끄는 곳은 아래채다. 현재 백과사전의 평면, 달성군청에서 제공한 평면, 보고서의 평면 그리고 지금 건물 모습을 비교해 보면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우선 보고서의 평면과 현재 평면은 비슷하다. 기본 구성은 가운데 방을 중심으로 안채 쪽에는 외양간을, 반대쪽에는 곳간을 배치했다.
 
보고서 평면과 실제 평면의 차이는 외양간 뒤편을 1/4칸 정도 더 내달았고 화장실 부분을 보고서보다 창고 쪽으로 1/4칸 정도 더 키웠다. 그리고 예전에는 곳간 옆 처마 밑에 디딜방아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어떤 것이 원형인지 판단할 길이 없다. 그리고 2005년 발간한 보고서 사진은 문화재청 사진과 같으므로 현재 아래채는 2005년 이전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래채는 세 칸 규모밖에 안 되는 작은 집이지만 다양한 구성을 보여 흥미를 끈다. 변소에는 별도로 문을 만들지 않고 뒤쪽에서 돌아 들어가게 했는데 이렇게 변소를 건물에 붙여 짓는 경우는 강원도 산간에 있는 집 외에는 보지 못했다.
 
조길방 가옥에서 아쉬운 부분은 옛 헛간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예전에 찍은 문화재청 사진에서도 지금과 같은 건물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지었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보고서에 있었던 헛간이 예전 시골 농촌 살림살이로 보아 더 어울린다. 한옥 체험이나 농촌 체험을 위해 새로 집을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전혀 환경에 맞지 않는 건물임은 분명하다.
 
현재 조길방 가옥 대청에는 6장의 교지를 전시해 놓았다. 초가집이지만 자기 집안이 양반이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내용을 보면 위 3장은 조시번과 조중기가 받은 교지로, 두 장은 벼슬을 내린다는 내용이고 한 장은 품계를 올린다는 내용이다. 아래 3장은 부인에 대한 것으로, 남자가 일정한 품계를 받으면 부인도 그에 상응하는 내명부 품계를 받기에 같이 내린 것이다.
 
교지 중 제일 빠른 것이 건륭 21년이다. 건륭 1년이 1736년이니 건륭 21년은 1756년이다. 이때는 조시번이 종2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했고 17년 뒤인 건륭38년(1773년)에는 조중기가 정삼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가자加資(조선 시대 관원들의 임기가 찼거나 근무 성적이 좋은 경우 품계를 올려 주던 일. 또는 그 올린 품계)돼 종2품 품계인 가선대부로 올랐다. 이 정도면 명망 높은 집안이라 할 수 있다.

아래채 후면으로 좌측이 외양간이고 우측이 곳간이다
축대 위에 남서향으로 앉은 안채. 대청 기둥을 소나무가 아닌 싸리나무를 쓴 특이한 경우다. 삼량집으로 안방 정면으로 작은 창을 냈다.
초가와 빼곡한 숲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문화재청자료에는 조광국이 가화를 당해 총각의 몸으로 이곳에 들어와 안채를 건립했다고 나오는데, 상량문에 쓰인 1784년은 조광국 사후이므로 이 집은 아마도 조광국의 아들 또는 손자 대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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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싸리기둥에 칠기봇장 달성 조길방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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