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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한개마을 첫 번째 이야기 -
선조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마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성주 한개마을(중요민속문화재 제255호/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은 그중 하나다. 2007년이 되어서야 문화재로 지정됐지만 마을 안에 있는 많은 고택들로 예전부터 주목을 받아왔던 곳이다. 한개마을을 총 3회에 걸쳐 싣는다. 이번 호에서는 한개마을에 대해 소개하고 이후 2회에 걸쳐 마을 속 여러 고택을 지면에 담는다.

 최성호   사진 홍정기

새마을 운동과 산업화의 광풍으로 농촌이 붕괴되면서 과거 우리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마을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옛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이라면 문화재로 지정된 마을 몇 곳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재로 지정된 전통 마을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지정된 낙안읍성(사적 제302호/1983)을 비롯해 잘 알려진 하회마을(중요민속문화재 제122호/1984), 양동마을(중요민속문화재 제189호/1984), 제주 성읍민속마을(중요민속문화재 제188호/1984), 고성 왕곡마을(중요민속문화재 제235호/2000), 외암마을(중요민속문화재 제236호/2000), 남평문씨본리세거지(대구광역시 민속문화재 제3호/1995) 등이다.
 
이 외에도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옛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경상북도에는 봉화 닭실마을, 김천 원터마을, 대구 옻골마을 등이 있고 전라남도에는 나주 도래마을, 보성 강골마을, 전남 담양 창평 삼지천마을 등이 있으며 경상남도에는 산청 남사마을 등이 있다. 이런 마을들도 이제는 집이 많이 개조돼 옛 정취를 온전히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아쉬운 대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

한개마을 주차장에서 바라 본 마을 전경. 2007년 문화재로 지정됐지만 이전부터 문화재 답사를 하려는 사람으로 붐비던 곳이다.

오래전부터 문화재 답사 발길 이어져
한개마을은 2007년에서야 문화재로 지정됐지만 마을 안에 있는 많은 고택들로 예전부터 주목을 받아왔던 곳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은 모두 8채다. 교리댁校理宅(민속문화재 제43호), 북비고택北扉故宅(민속문화재 제44호), 한주종택寒洲宗宅(민속문화재 제 45호), 월곡댁月谷宅(민속문화재 제46호), 진사댁進士宅(민속문화재 제124호), 도동댁道東宅(민속문화재 제132호), 하회댁河回宅(문화재자료 제326호), 극와고택極窩古宅(문화재자료 제354호)이다.
 
그중에서 교리댁, 북비고택, 한주종택, 월곡댁은 1983년에 이미 문화재로 지정됐고 이후 하회댁(1996), 극와고택(1998), 진사댁(2000), 도동댁(2004)이 차례로 지정됐다.
 
한 마을에서 이렇게 많은 가옥이 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는 흔치 않다. 한국전쟁 통에 많은 가옥이 파괴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예스러운 분위기가 살았을 것이다.
 
어쨌든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곳이겠지만 문화재 답사를 하는 사람에게는 오래전부터 고택이 많은 마을로 잘 알려진 곳이다. 어쩌면 옛 모습이 잘 남아 있는 마을로,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된 시기가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지금보다 이른 시간에 문화재로 지정됐더라면 옛 모습이 보다 잘 남아 있어 많은 일반인의 발길을 모으지 않았을까 한다.
 
대부분 건물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건립됐다고 한다. 연대 순으로 살펴보면 교리댁이 1760년, 한주종택은 1767년, 북비고택 1821년이고 기타 가옥들은 대부분 19세기 후반에 지어졌다. 월곡댁은 한참 후대, 일제 강점기인 1911년에 들어섰다. 하회댁 건립 연대에 대해 한필원은 망와望瓦(용마루에 세우는 암막새)에서 1745년의 명문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하회댁이 가장 오래된 집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근세 집 구조를 하고 있어 후대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북비고택 입구로 이석문이 사도세자를 그리는 마음으로 북쪽에 문을 내고 살았다 하여 북비고택이 됐다.
북비고택 내부. 잘 다듬은 잔디와 품격 높은건물이 당시 위세를 보여준다.

마을 안에 위치한 '돈재이공 신도비'로 돈재이공은 사도세자의 부당함을 고한 이석문을 일컫는다.

1450년 진주목사 이우가 입향해 마을 조성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1450년경에 입향入鄕해 자리 잡으면서 한개마을이 생겼다. 560여 년간 성주 이씨가 마을을 이루고 산 유서 깊은 마을이다. 이곳에 거주하는 성주 이씨는 모두 이우의 6대손인 정현李廷賢의 후손이다. 정현은 광해군 4년(1612)에 급제했으나 그 해 요절하고 만다. 수성壽星이라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네아들을 두었고 그들은 각각 백파伯派, 중파仲派, 숙파叔派, 계파季派의 파시조가 돼 모두 이곳에 정착해 가문을 일궜다. 따라서 이곳이 성산 이씨의 집성촌으로 발전하는 것은 수성 때부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한필원/한국의 전통마을을 찾아서).

정현이 대과에 급제한 이후로 마을에서는 모두 9명의 대과 급제자와 24명의 소과 급제자가 나와 성산 이씨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석구李碩九, 이석문李碩文(1713~1773), 이원조李源祚(1792~1882), 이진상李震相(1818~1886)이다. 교리댁을 지은 이석구는 영해부사를 거쳐 정3품인 사헌부 집의執義에 이르렀고 이석문은 북비댁의 주인으로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이었으며 사도세자가 들어가 있는 뒤주에 돌을 올려놓으라는 어명을 거절해 곤장을 맞고 파직됐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사도세자를 기리는 마음으로 북쪽에 문을 내고 살았다고해 집 이름이 북쪽 문이라는 뜻의 북비北扉고택이 됐다.

이원조는 호가 응와로 이형진의 아들이었으나 북비댁 양자로 입양됐다. 1809년 18세에 대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 정언, 경주부윤, 한성판윤, 대사간,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가문의 교육에 관심을 가져 자신의 조카인 이진상을 학문의 길로 이끌었다고 한다. 이진상의 호는 한주寒州다. 32세인 1849년에 소과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었지만 대과를 포기하고 학문의 길로 나섰다. 초기에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했으나 이원조의 교훈으로 성리학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했으며 조선 후기 기서 이항로, 노사 기정진과 함께 근세 3대 유학자로 꼽힌다(한필원 상기서/민족문화대백과사전/인터넷 조선왕조실록).

이진상이 중수한 한주종택은 한개마을 제일 안쪽 동쪽 산 위에 위치한다. 주위 풍광과 조화가 일품인 종택 내 한주정자
영해부사를 거처 사헌부 집의까지 이른 이석구의 교리댁

좌청룡 우백호 명당이 따로 없다
한개마을의 한개는 우리말로 큰 나루라는 뜻이다. 마을 조금 앞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의 지류인 백천에는 예전에 나루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그 흔적은 없어지고 이름만이 남아 옛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조선 시대 한개마을 앞은 칠곡과 김천을 잇는 중요 길목으로 역驛이 있어 매우 번창했던 곳이라고 한다(연세대학교/성주 한 개마을).
 
마을은 풍수적 명당이다. 뒤쪽 영취산을 주산主山으로 영취산 줄기가 좌청룡, 우백호로 감싸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앞으로는 낮은 언덕이 안산을, 뒤로는 성산星山이 조산朝山을 이루며 명당수에 해당하는 백천이 우백호에서 들어와 마을 앞에서는 직선으로 지나지만 마을을 지나서는 유연하게 휘돌아 나가는 것이 명당의 조건을 충분히 갖췄다. 입향조인 이우가 이곳에 정착할 때도 이런 지리적 여건을 어느 정도 고려한 것이 아닌가 한다(한필원, 연세대학교).
 
마을 뒷산인 영취산 감응사感應寺에서 바라보면 정확하게 볼 수 있다. 감응사 대웅전 앞마당에서 바라보면 안산과 멀리 조산까지 한눈에 보인다. 감응사에 대해서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 전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40대 애장왕이 여러 절을 돌아다니며 불공을 드려 낳은 왕자가 태어날 때부터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느 날 왕의 꿈에 내일 아침 나타나는 독수리를 쫓아가면 샘물을 찾을 것인데 그 샘물로 눈을 씻으면 눈이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날 독수리를 쫓아 도착한 곳이 감응사 자리이고 꿈에서 말한 샘물이 감응사 뒤쪽에서 나는 샘물이었다는 것이다. 그 샘물로 왕자의 눈이 보이게 되자 절을 지어 감응사라고 했고 이 산을 독수리 산이라는 뜻으로 영취산으로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전설까지 있는 것은 이렇게 영험한 산의 기를 받은 곳이 이 한개마을이고 풍수적으로도 더없이 좋은 명당이니 한개마을이 번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연세대학교).

건너편 고택 지붕이 담에 걸렸다.
꼬불꼬불 나지막한 담길을 걷는 것만으로 옛 마을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교리댁 입구에 알리는 큰 나무가 서 있다.

담에서 전통 문양 그림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어 또 다른 재미를준다. / 마을 입구 갈림길, 갈림길 사이에 주요 건물들이 위치해 있다.

한개마을은 현재 주차장으로 조성된 곳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좌우로 갈라지는 갈림길 사이에 중요한 건물들이 모두 위치해 있다. 특히 마을 중심이 되는 건물들은 바로 제일 안쪽에 위치해 위상을 달리한다. 그러나 이런 위상도 따지고 보면 그 집을 지을 당대에 얼마나 사회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일 늦게 지은 월곡댁을 보면 당대의 이룬 부를 가지고 마을을 지배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집을 지은 위치에서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집의 내력을 보면 크게 중수한 때가 당시 그 집안의 위세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저런 마을의 내력을 모르고 이곳을 찾아도 한개마을은 우리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시간을 잠시 묶어 두고 천천히 마을을 걷다보면 꼬불꼬불한 나지막한 담길만으로도 옛 마을의 정취에 빠지고 만다. 이곳에서는 마음도 잠시 내려놓고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걸어보길 바란다. 그러면 한개마을이 조근조근 말을 걸어올 것이다.

지금도 한개마을에는 많은 방문객들이 찾는다.

참고서적
성주 한개마을/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건축역사 · 이론연구실/연세대학교출판부
한국의 전통마을을 찾아서/한필원/휴머니스트
답사여행의 길잡이 8 (팔공산자락)/돌베개
성주 한개민속마을/성주군
문화재청 사이트
인터넷 조선왕조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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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모든 걸 내려놓고 천천히 걸으니 마을이 조근조근 말을 건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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