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메뉴보기
 

한개마을 가장 위쪽 산기슭에 위치한 한주종택(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5)은 영조 43(1767)에 이민검이 지었으며 성리학자인 한주寒洲 이진상이 고종 3(1866)에 고쳤다고 한다. 이 집은 경상 감사를 지낸 문방동 소재 권 감사 집을 해체한 후 옮겨 와 지었다.
    
최성호    사진  홍정기 기자

한주종택은 한주정사라는 별서를 두고 있어 한개마을에서 가장 격식을 갖춘 집이라 할 수 있다. 한개마을에서 별서를 가진 곳은 한주종택이 유일하다(그러나 하회댁 사랑채 담장 아래에 연못과 함께 정원의 흔적이 있는데, 이곳을 하회댁 또는 교리댁의 별서로 이용했을가 능성이 있어 한개마을에는 한주종택 말고도 한 곳 더 별서를 가진 집이 있었던 듯하다).

한주정사 동쪽에 위치한 연못. 직사각형으로 위아래로 나뉘고 凹형태로 연결된다.

방화장을 담장과 기와로 대신한 이유는
대문에 들어서면 사랑마당이 나오고 그 우측에 안채에 딸린 행랑채와 사랑채가 일직선으로 배치돼 있다. 안채 쪽으로 점점 높아지는 사랑마당에 맞춰 사랑채 기단을 놓다 보니 사랑채 기단이 매우 높아져 권위를 한껏 드러내고 있다. 사랑채는 전면 네 칸 반, 측면 두 칸 반 규모로 방은 원래 깊이가 한 칸이고 뒤쪽에 반 칸 고방이 있고 그 밖에 다시 툇마루가 있었으나 최근 툇마루까지 방을 늘려 두 칸 깊이로 만들었다. 안채쪽 반 칸에는 안채로 통하는 통로가 설치돼 사랑채에서 바로 안채로 연결된다.
    
사랑채 측면은 다른 곳과 다른 모습이다. 측면 하부는 대부분 흙벽으로 마감하거나 화재 예방을 위한 방화장防火墻으로 처리하는데 이곳은 담장처럼 쌓았다. 북비고택 안채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한필원(한림대 교수, 건축학 박사)은 사랑채 옆 마당이 사당과 같은 공간임을 암시하려고 벽체 대신 담으로 쌓았다고 설명했다. 일면 일리 있는 말이나 이런 상징적인 해석보다는 전후툇집으로 깊이가 깊어지면서 맞배지붕으로는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는 것이 힘들어 아예 하부를 기와를 얹은 벽체 형식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안채는 튼 ㅁ자형이다. 일곱 칸 안행랑채를 앞에 두고 좌우에 찬광채와 아래채가 마당을 ㄷ자형으로 감싸면서 ㅁ자를 만들었다. 안채는 정면 다섯 칸 반인 전후툇집이다. 전퇴는 툇마루로 각방을 연결하고 후퇴는 고방이나 툇마루로 구성했는데 최근 반 칸을 늘려 크기를 키웠다.
삼량집 안채는 기둥에 첨차를 설치한 것으로 보아 꽤 오래된 집임을 알수 있다. 한주종택이 다른 집을 옮겨와 지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가 아닐까 한다. 안채는 얼마 전 화재로 지금은 방문객 관람이 불가능한상태다.

사랑채에서 한주정사로 통하는 문.
한주정사. 한개마을에서 별서를 지닌 곳은 한주종택이 유일하다.
한주 정사에서 본 전경으로 누마루에 앉으면 이보다 더 좋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사랑채 뒤에 위치한 사당.

한주종택의 자랑거리, 한주정사
종택 옆에는 별서인 한주정사가 있다. 한주정사는 별도로 드나드는 문이 있지만 사랑채 쪽에서도 일각문으로 통하게 했다. 한주정사 동쪽에는 산에서 흐르는 개울물을 이용해 연못을 파 놓았다. 연못은 직사각형으로 위아래 둘로 나뉘고 凹형태로 연결된다. 연결 부위에는 돌다리를 놓아 위와 아래를 구분하는데 작은 섬이 있는 위쪽이 크고 상대적으로 아래쪽이 작다. 아래 연못보다 위 연못을 먼저 만들었다고 한다.
    
한주정사는 연못을 잘 볼 수 있는 쪽에 두 칸 방과 그 앞으로 한 칸 반 누마루를 배치했으며 연이어 두 칸 대청과 방 하나를 놓음으로써 전체적으로 T자형 평면이다. 큰방 문을 열면 연못을 포함한 정원 경관을 볼 수 있으며 누마루는 방보다 한 자 높게 만들어 바깥 경치를 앉아서도 잘 조망할 수 있다. 한주정사에는 '조운헌도제祖雲憲陶齊'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祖雲은 호가 운곡雲谷인 주자를 조종으로 모신다는 뜻이고 憲陶는호가 도웅陶翁또는 퇴계退溪인 이황의 학문을 받든다는 뜻이다. 집을 지은 한주 이진상의 학문세계를 한마디로 압축해 표현한 것이다.

사랑채 측면으로 하부를 담장을 쌓고 기와를 얹은 특이한 모습이다.
대문에서 본 내부로 오른쪽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나란히 놓였다.
정면이 사랑채, 우측이 문간채다.

변화를 거듭한 한주종택
한주종택에는 몇 차례 변화가 있었다. 한주가 이 집을 중수할 때는 현재 사랑마당 앞에 바깥행랑채가 대문채와 나란히 배치돼 사랑마당을 위,아래로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대문도 문과 마방으로 구성한 두 칸이었고 지붕도 초가였으며 현재 한주정사 뒤편 언덕에는 별묘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배치에서 가장 큰 변화가 온 때는 1910년이다.
    
한주정사를 짓고 연못을 조성한 시기로 한주정사를 지을 당시는 ㄱ자 형태로 네 칸 규모인 재지기(재실을 관리하는 사람) 집이 지금과 같이 한주정사 아래 위치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었다. 재지기 집 자리에 연못이 들어서면서 아래로 이동한 것이다. 이후 20년이 지나 다시 변화가 있었다. 아래쪽 연못을 더 파고 재지기 집을 현재 위치로 옮긴 후 대문을 설치하고 담을 쌓아 한주정사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집을 돌아보고 나니 담을 쌓고 앞에 대문간을 설치한 게 오히려 조망을 많이 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처음 한주정사를 지을 때처럼 대문간이 없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시원한 조망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의 변화는 바깥행랑채 철거와 대문간채 증축이다. 말을 관리하는 하인의 거처로 썼던 바깥사랑채를 1920년대 들어 말을 사용하지 않자 헛간으로 바꿨는데 이후 건물이 퇴락해 헐어버렸다. 또한 하인이 거처하는 방이 필요하게 돼 문간채를 한 칸 늘려 지으면서 초가를 기와로 바꿨다. 이때까지만 해도 별묘(종묘에 들어갈 수 없는 신주를 모시기 위해 따로 지은 사당)는 한주정사 뒤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지막 변화는 사회구조가 변화됨에 따른 것이다. 이전까지 한주종택은 성산 이씨 종가로 별묘와 사당이 함께 존재했다. 그러나 친족들이 멀리 떨어져 살게 되면서 한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게 되자 1955년을 마지막으로 별묘 제사가 사라졌다. 이때를 즈음해 별묘를 철거했고 1970년 지관(묘지나 택지를 선정할 때 지질과 길흉을 판단하는 사람)의 충고에 따라 사당을 지금 위치에서 북쪽 담장 쪽으로 옮겼다. 이런 모습은1990년대 초까지 이어졌으나 이후 사당을 원래 위치인 현재의 위치에 옮겨 지었다.
이렇게 집의 변화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연세대학교 건축 역사·이론 연구실의 연구결과이다.

배치도

집은 시대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다
집을 돌아보면서 집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의 변화를 알기란 쉽지 않다. 배치나 구조의 변화로 대강 추정하거나 운이 좋을 경우 집주인 면담을 통해 개략의 변화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집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집이 변화한다는 것은 생활이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족이 늘어나거나, 종교가 바뀌거나, 사회 환경이 변하면 집도 변화한다.
    
처음 한주가 이 집을 지었을 당시 바깥행랑채는 문하생이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 후에는 앞서 언급한 말을 돌보는 하인의 거처였다. 그리고 말이 교통수단으로서의 역할이 사라지자 광으로 변경됐고 그 후 쇠락해 철거됐다. 문간채도 바깥행랑채가 없어지자 하인이 거처할 방이 필요해 한 칸 더 늘린 것이고 초가에서 기와지붕으로 변한 것도 검약을 강조하던 선비정신이 쇠퇴하면서 가문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오랫동안 존재해왔던 별묘도 사회 변화에 따라 제사 개념이 변화되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특히 문간채가 초가에서 기와지붕으로 변화한 것은 바로 담을 면하고 있는 월곡댁 신축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11년 건축한 월곡댁은 1930년에 사당을, 1940년에 별당을 지었다. 근대에 들어 부를 쌓은 월곡댁은 당시 사회 규범을 파괴한 건축형태를 보였다. 농업을 기반으로 했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상업활동으로 부를 축척한 월곡댁은 종택이 아님에도 사당을 세 칸으로 짓고 첩을 위한 별당까지 뒀다. 이는 당시 한개마을의 질서를 깨는 행위이다. 이런 모습에 자극받은 한주종택이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문을 초가에서 기와로 바꿨고 한주정사 영역도 확대한 것이다.
    
이처럼 집은 시대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집에 대한 연구를보면이와관련한심도있는분석을본적이별로없다. 이런 점에서 연세대학교 건축역사·이론 연구실의 시대 흐름에 따른 한개마을의 대표적인 집의 변천을 연구한 자료는 매우 귀중한 것이 아닌가 한다.

대문 밖으로 난 길,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한주정사 출입구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원주택라이프 보기
www.countryhome.co.kr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고택을 찾아서, 시대 흐름에 따른 집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 성주 한개마을 한주종택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