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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이 하도 고와 창을 여니 고운 햇살과 함께 은은한 향기가 살금살금 내 곁에 다가왔습니다. 철없이 뛰놀던 나의 어린 시절이 아련히 생각나는 향기입니다. 반갑고 신기해 얼른 천리향으로 다가가 허리 굽혀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올망졸망한 꽃봉오리 사이에서 아주 귀여운 꽃 한 송이가 피었습니다.

연하디연한 아기 피부 같은 꽃잎이 얼마나 고운지 만지기도 겁이 납니다. 천리향의 아련한 향기에 이 순간 힘든 일 복잡한 일 모두 잊어버리고 고운 향기에 내 몸과 마음을 맡겨봅니다. 그야말로 행복해져 오는 순간입니다.

꽃향기가 천리를 간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천리향의 정식 이름은 서향으로 무성하게 잘 자라는 나무가 아닙니다. 아담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는 아주 천천히 자라는 수형이 단정한 나무입니다. 일 년 내내 짙은 녹색 광택이 있는 도톰한 잎을 지닌 상록수로 늦가을부터 서서히 꽃망울을 맺어 이를 겨우내 달고 있다가 따듯한 봄기운이 주변을 감도는 겨울 끝자락에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동백과 함께 겨울에 피는 꽃으로 늦은 겨울에서 이른 봄까지(1~4월) 꽃이 피며 향기가 아주 좋습니다.
 
학명은 Daphne로 약 50여 종이 있습니다. 낙엽성(deciduous), 약간의 상록성(semiever green), 상록성(ever green) 관목으로 유럽, 아프리카, 아열대와 온대성 기후의 아시아 지역 일부 삼림지대 낮은 곳에서 산 위까지 분포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서향(학명: Daphne odora Thumb)은 백서향과 무늬 서향으로 모두 상록성 관목입니다.
 
암수 따로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주로 화원에서 취급하는 천리향은 숫나무라서 열매는 볼 수 없습니다. 남쪽 지방에서는 정원에 심어 정원수로 활용하지만 북쪽 지방에서는 월동이 되지 않아 화분용으로 많이 씁니다.
 
아주 가끔은 서울에서도 정원에서 월동이 된다고 하지만 천리향의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하기엔 부족함이 많습니다.
 
집을 떠나 결혼, 육아 등으로 천리향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25~26년 전 정원이 있는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왔을 때 어린 시절 이후 다시 만났습니다. 꽃을 좋아하는 친정 부모님이 딸이 정원이 있는 집으로 이사 온 것을 축하해주고자 저 멀리 울산 친정집에서 자라고 있던 조그만 천리향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행여나 다칠까 흙으로 감싼 채 아주 소중하게 데려왔습니다. 그때 그 만남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아직도 기억이 선합니다. 약 3년간 키웠지만 녀석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처음 올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가만히 있어 내 마음을 애태웠습니다. 그러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가눌 수 없어 이 화원 저 화원 천리향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그때는 천리향을 일반 화원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귀하고 (나에겐) 몸값이 높은 녀석이었지요. 그러던 중 참하고 건강하게 생긴 조그만 것을 만났습니다. 참 잘 자랐습니다. 아담하고 예쁜 모습으로 무성한 녹색 잎들과 함께 초겨울에는 가지 끝에 예쁜 꽃망울도 많이 맺었습니다. 그러나 이 녀석도 동백과 같이 추위를 이기는 힘이 부족해 겨울이 오기 전 힘들게 거실에 옮겨 놓으면 잎과 꽃망울이 서서히 떨어져 버렸습니다. 두고 보기가 안쓰러웠습니다. 결국은 이 천리향과 동백을 위해 온실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집 천리향은 수형이 아담한 게 참했습니다. 예쁜 모습의 천리향을 온실 속에서 돋보이게 하고자 눈요기에 좋은 곳을 찾아 이리저리 자리 옮기기를 3번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해 겨울 아름답고 정이 듬뿍 들은 천리향이 떠나버렸습니다. 어리석은 자신감과 과한 욕심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내 행동이 어쩌면 그렇게 무모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천리향은 자리를 옮기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땅에 아주 민감한 녀석이라 옮겨 심을 땐 흙이 뿌리에서 가능한 분리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꼭 용기에 옮겨 심은 후 원하는 장소로 데려가야 합니다. 용기에 심어 뿌리가 흙과 밀착해 적응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고 용기에서 잘 자라는 것이 확인되면 이식할 시기를 기다립니다. 이식 시기는 천리향 휴면기로 꽃을 피우지 않는 때입니다.
 
너무 덥거나 추운 것을 싫어합니다. 강한 햇볕을 좋아하지 않기에 더운 여름, 뿌리 위에 햇볕이 들면 보호 장치를 마련해 시원하게 유지해 줘야 합니다. 건조한 곳도 습한 곳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온종일 햇볕이 드는 곳보다 햇볕과 그늘이 있는 곳이 알맞습니다. 약간 걸러진 밝은 빛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어느 원예 사전에는 5℃ 이상에서 월동이 가능하다고 적어 놓았지만 경험한 바로는 꼭 그렇지마는 않습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 가끔은 얼기도 하지만 영상으로 올라가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싱그러운 제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더운 것보다 조금 춥게 키워야 더욱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상록 활엽수 대부분은 배수가 잘되고 건조하지 않으며 적당한 거름을 지닌 비옥한 흙(약산성 흙)을 좋아하는 데 반해 천리향은 약알칼리성 흙에서 잘 자랍니다. 병충해에는 강한 편이어서 우리 집에서 키우는 천리향은 아직 병충해에 시달린 적이 없습니다. 씨를 포함한 모든 부분들을 섭취하면 강한 독성을 일으키며 나무 수액이 피부에 닿으면 피부를 상하게 할 수 있으므로 먹거나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됩니다.
 
또다시 천리향 찾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에게 맞는 천리향은 만나지 못하고 그때 남겨진 자식들(삽목으로 번식한)만 남아 온실에서 잘 자라고 있습니다.

천리향과 인연을 맺으면서 다른 꽃나무들과 달리 여러 번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천리향의 특성과 습성, 꽃을 키우는 이의 자세 등을 아주 유익하게 서술한 조선 시대 강희안의 화훼花卉, 원예園藝서적 ≪양화소록≫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서향瑞香은 푸른 잎과 붉은 꽃으로 된 것이 가장 좋다. 오뉴월에 가지를 한 치 길이로 잘라서 분에 심되 드물게 꽂아 음지에 두면 곧잘 산다. 또 아랫가지 굽혀 놓고 그 굽힌 곳을 살짝 깎아서 흙 속에 묻어 두면 깎은 데가 붕퉁해지고 그 자리에서 가는 뿌리 돋아나니 이것을 지접이라 하는데 모두 잘 산다. 만약 너무 일찍 땅굴 안에 들여놓으면 더워서 잎이 모두 져버린다. 모름지기 대여섯 차례 서리를 겪은 뒤에 거두어들여놓을 것이다. 분盆은 와기瓦器를 쓴다.
 
시골에서 꽃을 가꾸는 사람들이 서향의 운치가 고상함을 모르고 또한 배양하는 법도 몰라 심은 지 수년도 안 되어 말라죽게 하고는 이 꽃이 잘 죽으니 그리 귀한 것이 못 된다고 한다. 내가 이 꽃을 얻은 뒤 심히 사랑하여 옛법에 비습한 곳과 뜨거운 햇볕을 꺼린다는 말을 듣고서 재배하는 법을 알았다.
 
물주는 일, 거둬들이는 일, 햇볕에 내놓는 일들을 종아이에게 시키지 않고 내 손수하였다. 그렇게 했더니 꽃이나 잎의 무성함이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한 송이 꽃이 터져 나오면 향기가 온 뜰에 가득하고 꽃이 활짝 피면 그윽한 향기가 십 리나 멀리까지 퍼진다. 꽃이 지고 열매를 맺으면 앵두알처럼 빨간 것이 파란 잎 사이로 알롱알롱 번득이니 참으로 한적한 가운데 좋은 벗이 될 만하다. 이른바 쉽게 죽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모든 물건이 각각 임자를 만나야 한다. 진실로 임자를 만나지 못하면 공산空山속에서 제 홀로 피고 진들 마참내 아는 이가 없으리니 이 어찌 슬프고 원통하지 않으랴."
 
천리향은 참 특이하게 성숙한 나무라도 원인도 모르게 죽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혹시 죽더라도 원인을 찾으려 너무 애쓰지 마세요. 식물도 사랑해주면 보답이라도 하듯 잘 자랍니다. 하지만 너무 애착을 가지면 독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참고문헌   강희안 ≪양화소록≫ The American horticultural society ≪ Encyclopedia of Garden Plants ≫

글. 사진 이명희
숙명여자대학교 가정 대학 졸업 후 평소 관심 분야인 정원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조경학과에 입학. 졸업논문'서민주택 정원 활성화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 취득. 평생 꽃을 가까이하여 얻은 경험과 대학원에서 연구한 이론적 체계를 바탕으로 아름다운 마을 가꾸기(담장 허물기 등)에 참여하고 있으며, 버려진 공간 속에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심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데 노력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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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이야기, 아담하고 안정된 수형 꽃향기가 천리를 가는 천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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