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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는 농업사회를 기반으로 정착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귀소본능이 강해, 밖에서 죽는 것은 불행한 일로 생각했다. 이러한 풍습 때문에 8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이 운명할 때가 되면 병원에 있던 환자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90년대 초를 기점으로 사람이 운명할 때가 되면 병원으로 옮겨지게 됐다. 그러한 변화가 나타나는 이유는 아파트 같은 공동주거의 비율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집 구조가 달라져서 발생한 것이다.

■ 글 싣는 순서
1. 집, 문화로서 과거 이해하기
-과연 전통은 존재하는가
2. 집은 문화 유기체다
3. 자연환경과 집
4. 기술 발전과 집
5. 사회환경과 집
6. 생활과 집
7. 사고변화와 집
8. 사람과 집
-사람이 집을 만들고 집은
사람을 만든다


정성을 들여 장례를 치른 흔적이 있는가에 따라 인간 문명의 시작을 판가름한다고 한다. 죽은 자에게 예의를 표하는 행위는, 반대로 살아 있음에 대한 가치를 알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갖는 관심은 장례에 대한 특별한 의례로 표현된다. 요즘의 장례를 보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게 된다.

장례 절차가 점점 단순해지고 기간도 짧아져 가고 있다. 이것은 생활의 변화에서 비롯한 것이다. 생활이 점점 복잡해지고 시간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이제는 돌아가신 분을 추모할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어졌음을 느끼게 한다.

조선시대의 장례 절차를 보면 양반의 경우 가례(家禮)에 따라서 진행하는데, 삼년상을 치른 뒤에도 4대에 걸쳐 제사를 모시는 것이 일상화돼 있었다. 사대부(士大夫)의 생활은 그야말로 제사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상제(喪祭)가 이렇게 발전하게 된 것은 유교 국가를 표방했기 때문이다. 국가에서 가묘(家廟)를 짓는 것을 권장했고, 그렇지 못할 경우 집안에 위패를 모시도록 했다. 상제의 강요는 사회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일상사에서 상제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상제를 위한 공간이 필요해졌다.

강제에 따른 것이든 아니든 간에 유교가 집안의 덕목으로 자리 잡으면서 모든 생활이 그에 맞추어 바뀌었다. 가세가 허락하는 집은 별도의 가묘를 모셨고, 그렇지 못한 집은 대청에 자리를 마련해 위패를 모실 만큼 상제는 매우 중요한 일상사가 됐다.

생활의 모든 것을 바꾼 종교

그랬던 장례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이후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이 변화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종교는 생활의 모든 것을 바꾼다.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인습조차 순식간에 바꾸어 버릴 만큼 강력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것 자체가 사회구조 변화의 시작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장례의 격식을 보면 기독교의 장례는 조선시대의 장례 제도보다 매우 단순하다. 절차도 간단하고 추모의 의미로 하는 제사도 지내지 않기 때문에 그리 복잡하지 않다. 별도의 재실(齋室)이나 위패를 모시는 장소도 필요 없다.

기껏해야 집안에 돌아가신 어른의 영정(影幀)이나 사진을 걸어 놓은 것으로 대체하며 기일(忌日)에도 가족끼리 모여 예배를 하는 것으로 제사를 대체한다. 사대봉사(四代奉祀)라는 개념조차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이전과 같이 제사 음식을 장만하는 번거로움이 없고, 대가족이 모이는 번잡함이 사라지고 가묘도 필요 없게 된다.

장례 제도는 자연환경의 산물

자연환경과 사회 환경도 장례 제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티베트에는 조장(鳥葬)이라는 장례법이 있다. 이것은 사람의 시신을 새에게 먹이로 주는 장례법이다. 사람의 시신을 잘 다져서 새가 살점을 하나도 남김없이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영혼이 새의 몸을 빌려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고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장법(葬法)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장례 제도를 종교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자연환경의 조건에서 나온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불교 국가인 티베트에도 매장이나 화장이 있지만, 그것은 부자나 승려만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된 것은 자연환경하고 깊은 관련이 있다. 티베트의 자연환경에서는 나무를 구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화장을 할 만큼의 나무를 구하는 것은 부자만이 가능하다. 또한 땅을 파는 것이 쉽지 않은 토질(土質)이어서 매장은 일반인들에게 어려운 일이다. 기후가 우리하고 같지 않아 시신이 잘 썩지 않는 것도 조장이라는 특별한 장례 제도를 발전시킨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요사이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어느 지역의 유목민은 노인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게 되면 약간의 음식을 남겨 두고 떠났다가, 나중에 찾아갔을 때 살아 계시면 다시 모신다고 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개념으로는 고려장(高麗葬) 같은 비인간적인 장례법으로 느낄 수 있고, 그 매정함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 일이다. 그들의 생활을 이해하면 그리 매정한 것도 아님을 이해하게 된다. 유목민은 움직여야만 산다. 그들에게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부담이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버려진 노인이 스스로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그같은 선택이 전통으로 남아 독특한 장례법이 형성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달라진 생활 환경과 장례 문화

자연현상과 문화 현상은 장례법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영향을 받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의 삼일장이니 오일장이니 하는 장례는 사회의 변화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조선시대의 장례 의식은 농업사회를 기반으로 교통과 통신이 발달되지 못한 시대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사회규범이다. 예를 들어 장례 기간이 2개월로 되어 있는 것도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알맞은 기간이다.

장례 절차를 살펴보면 시신을 집 뒤뜰에 가매장했다가 장지(葬地)가 마련되면 다시 모신다. 가매장하는 것은 장례 기간이 길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신의 부패를 고려한 것이다.

지금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해 부음을 쉽게 알릴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전국 어디에서도 당일로 장지에 도착할 수 있다. 예전처럼 여유를 가지고 상례(喪禮)를 할 수 있는 사회구조가 아니란 것도 장례 일정과 절차가 단순해지는 이유가 된다.

조선시대는 농업사회를 기반으로 정착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귀소본능이 강해, 밖에서 죽는 것은 불행한 일로 생각했다. 떠돌이 생활을 하다 죽었거나 사고를 당해 집밖에서 죽었을 때는 불길하다고 하여 집에서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이러한 풍습 때문에 8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이 운명할 때가 되면 병원에 있던 환자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90년대 초를 기점으로 사람이 운명할 때가 되면 병원으로 옮겨지게 됐다. 그러한 변화가 나타나는 이유는 아파트 같은 공동 주거의 비율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공동주택에서 생활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집에서 대소사를 치를 경우 주변 사람들에게 폐가 되기 때문에 점점 집 밖에 별도로 마련한 장소에서 치르게 됐다. 예전에 많았던 함(函)을 파는 전통이 근래에 사라진 것도 소음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제는 집에서 장사 지내는 모습을 점점 볼 수 없게 되고, 장례식장을 우리의 대표적인 장례 장소로 인식하게 됐다. 결혼식을 결혼식장에서 하듯 대부분의 장례를 장례식장에서 치르게 됐다.

앞에서 이야기한 변화는 근본적으로 집 구조가 달라져서 발생한 것이다. 과거에는 농업을 기반으로 했기에 집에는 작업을 위한 넓은 마당이 있었다.

이 마당은 단순히 작업 공간으로만 이용한 것이 아니다. 집안의 대소사를 치르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혼상제를 집안에서 치를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집에 마당이 없었다면 관혼상제는 다른 모습으로 발달했을지도 모른다.

집의 구조가 가구의 높이를 결정
예전하고 비교해 우리의 일상생활 중에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던 부분은 의복이다. 이제 정장을 입는다고 하면 서양에서 들어온 ‘양복’을 생각할 정도로 우리의 의생활은 완전히 서구화됐다고 할 수 있다. 오죽하면 우리네 옛 옷을 ‘한복’이라고 부르게 됐을까.

구한말까지도 옷이라고 하면 당연히 한복을 생각했다. 그래서 서양에서 들어온 옷을 ‘양복’이라고 한 것이다. 이제는 역전돼 ‘한복’이 특별한 옷으로 전락했다. ‘개량 한복’이라고 하여 한복의 대중화를 시도하는 노력도 있지만, 이것조차도 어떻게 보면 ‘한복’이라기보다는 ‘한복’에 접근하려는 ‘양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한복과 양복은 수납 방법에서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한복은 평면 구조를 하고 있다. 따라서 한복의 수납 역시 평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네 옷장에서 수직 구조를 가진 옷장은 없다고 하는 것이 맞다. 옷을 수직으로 걸도록 만든 의걸이장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도 조선조 말기에 생긴 장이다.

조선시대에 옷을 수납하는 가구는 농이나 장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 가구는 수평으로 수납하는 구조를 갖는 것이 원칙이다. 옷을 수직으로 보관하는 것과 수평으로 보관하는 것은 가구의 구조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조선조 가구의 수납 방법에서 수직적 요소가 발전하지 못한 것은 옷의 구조가 주원인이겠지만 집의 구조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난방 방식이 온돌로 변하면서 앞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천장이 낮아진다. 그런 집에 높은 장이 들어온다는 것은 집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다. 가뜩이나 낮은 천장에 높은 장이 들어오면 더욱 낮아 보이고 답답하게 된다. 그래서 가구도 그에 맞추어 바뀌었다.

앞에서 말한 의걸이장도 조선 후기에 서양의 의복이 보급되기 시작하고, 부자들이 이전 시대보다 큰 집을 지을 수 있게 되면서 비로소 등장한 것이다.

대한제국 시절에 지어진 아산의 윤보선 생가(중요민속자료 제196호, 1907년)의 사랑채(1920년경)나 19세기말에 지어진 윤보선가(서울민속자료 제27호)를 보면 집이 크고 높다. 그 정도 규모의 집에서 의걸이장은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갓집이라고 해도 윤증 고택, 하회의 대가 등과 같이 지방에 지어진 대부분의 집에는 의걸이장이 어울리지 않는다. 田

■ 글쓴이 최성호는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서 ‘산솔·도시건축’을 운영 중입니다. 주요 건축작품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유치원·박물관·인문관·약학관, 데이콤중앙연구소, 삼보컴퓨터사옥, 홍길동민속공원 마스터플랜, SK인천교환사 등이 있습니다. <02-516-9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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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달라진 우리 생활, 달라진 집(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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