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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집, 구례 운조루(雲鳥樓)
- 구례에서 섬진강 줄기를 거슬러 하동으로 가는 길은 ‘울긋불긋 꽃 대궐’ 그 자체다. 도로 양 언저리에 만개한 벚꽃이 터널을 이루는데, 간간이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상춘객(賞春客)을 향해 꽃 세례를 퍼붓는다. 구례는 지리산과 섬진강이 빚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기름진 땅을 지닌 곳으로, 조선 중기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나라 안에서 가장 살기 좋은 땅”이라고 했다. 구례가 살 만한 곳이라는 사실이 두루 알려지자, 재산이 넉넉한 세력가들이 명당자리를 찾아들었다. 구례읍에서 하동 쪽 5킬로미터쯤에서 다시 북쪽 농로로 1.5킬로미터 들어서면 나오는 지리산 봉우리 밑에 자리잡은 토지면 오미리가 그러하다. 이 마을은 풍수지리상 천상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금환락지 : 金環落地)이어서 여기에 집을 지으면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하여 예부터 명당으로 손꼽힌다. 이 마을에 조선시대 양반가의 전형적인 민가로 호남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건물이 자리한다. 1776년(영조 52년) 당시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가 지은 운조루(雲鳥樓)다. 부지 1400평에 지은 건물의 건평이 100평(건립 당시 99칸, 현존 73칸)이 넘어 민가로는 대규모다. 조선시대 대군들도 60칸을 넘지 못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건물 배치는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品字形)으로, 주인이 거처하던 운조루 말고도 손님을 맞았던 귀래정과 사당, 별당 등이 딸려 있다. 운조루의 풍수지리는 한양의 축소판 류이주는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의 지명을 따서 호를 귀만(歸晩)이라 했으며, 이 집을 ‘귀만와’라고도 불렀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집의 본 이름은 중국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에서 따왔다고 한다. 아래 문구에서 첫머리 두 글자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는 게 정설이다. 구름〔雲〕은 무심히 산골짜기에서 피어오르고, 새〔鳥〕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 운조루가 자리한 마을 앞쪽 섬진강 건너편에는 안산격인 오봉산이 있고, 더 멀리 남쪽으로는 주작격인 계족산이 있다. 또 동쪽에는 왕시루봉이, 서쪽에는 천왕봉이 있어 좌청룡, 우백호로 불린다. 이러한 산세와 함께 운조루는 내수구(앞도랑)와 의수구(섬진강)가 제대로 갖추어진 명당 터에 자리잡고 있다. 집 앞의 오봉산은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다. 연당(蓮塘)은 남쪽의 오봉산 삼태봉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하려고 조성했다고 한다. 류이주의 8대손 류맹효(82세, 전 교장회장) 씨는 “이곳을 당시 한양의 도성에 비유하면 내수구는 청계천, 의수구는 한강, 오봉산은 남산에 해당”하고 “연당은 광화문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해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연당의 석가산(石假山)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금환락지형답게 어느 한쪽 터진 곳 없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조선의 풍수》를 보면 일제시대 사람들이 촌에서 도시로 빠져나갔는데 이 마을만은 도리어 인구가 늘었다고 한다. 풍수설을 좇아 들어온 것인데, 특히 운조루 앞 대나무 숲 사이에 숨겨진 집 한 채(곡전재)가 눈길을 끈다. 일제시대 이주해 온 박 부자 집으로 통하는데, 아예 담을 환형(環型)으로 쌓아 금환락지를 표상했을 정도다. 뒤에서 운조루의 목독을 통해 설명하겠지만 이 집은 유난히 담이 높다. 운조루는 이렇듯 명당 터를 고르고 골라 선택한 땅에 앉혀져 있다. 그런데 막상 명당 터를 골랐지만, 땅이 온통 돌무더기라 공사거리가 많아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류이주는 운조루의 건축 도면(가옥도)을 작성하여 아들 류덕호에게 그대로 축조할 것을 지시했는데, 터를 닦고 건물을 앉히기까지 무려 7년이나 걸렸다고 하니 그 어려움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돌무더기와 관련해 운조루를 짓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끈 일이 있다. 집터를 잡고 주춧돌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파는 도중 부엌자리에서 어린아이의 머리 크기 만한 돌거북이 출토됐는데, 당시 이는 운조루의 터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금귀몰니(金龜沒泥)의 명당을 입증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류이주는 이를 보고 “하늘이 이 땅을 아껴 두었던 것으로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린 것”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이 돌거북은 운조루의 가보로 전해 내려오다 지난 1989년 도난을 당했다. 음덕(陰德)을 행한 운조루의 철학 운조루로 들어서려면 앞도랑을 건너 좌우 행랑채 지붕보다 높이 솟은 솟을대문을 통과해야 한다. 솟을대문에 충신이나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내린 ‘홍살’이 달려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거기에 걸린 호랑이 뼈에 잠시 눈길을 빼앗기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류이주가 과거를 보러가던 중 세재에 이르러 호랑이를 만났다고 한다. 채찍으로 그 호랑이를 잡아 가죽은 영조대왕에게 바치고 뼈는 잡귀가 침범하지 못하게 운조루 홍살문에 걸어 두었던 것이 오늘날까지 전한다는 것이다. 이 일로 류이주는 영조대왕으로부터 박호장군이란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솟을대문 앞에는 말을 묶어 두는 하마석(下馬石)도 있다. 솟을대문 못지 않게 한 줄로 길게 늘어선 문간행랑채도 특이하다. 바깥 사랑과 안 사랑 마당을 가운데 두고 병렬로 마주 보면서 동서로 길게 배치된 ‘줄행랑’으로, 담 역할도 한다. 운조루의 행랑채는 강릉 선교장 다음으로 많다고 한다.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 사이의 답로(踏路) 옆 개나리 밑에는 낮게 깔린 굴뚝이 있다. 여기서 류이주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밥 짓는 연기가 멀리서 보이지 않도록 굴뚝을 낮게 설치해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배려한 것이다. 혹, 저들끼리 표나지 않게 음식을 해먹으려고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문에 놓인 통나무 원목의 속을 비워 내고 만든 목독(쌀 두 가마 반이 들어감)을 보면 그 생각이 그릇됐음을 알 수 있다. 목독의 하단에는 가로 5센티미터 세로 10센티미터 정도의 여닫이가 있는데, 여기에는 누구나 열어 쌀을 퍼갈 수 있다는 의미의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쌀을 얻어 가는 사람의 자존심까지 배려한 마음 씀씀이를 엿보게 한다. 이처럼 운조루의 굴뚝과 목독을 통해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가훈과 더불어 음덕(陰德)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최성호 교수(본지 한옥이야기 필자)는 운조루의 목독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러한 배려로 명문가들은 마을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면 집의 담이 높을 필요가 없으며, 담을 낮게 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편하다. 집의 담이 높다는 것이 오히려 마을 주변에 있는 자신의 전답을 관리하는 데 불편할 수 있다.” 앞에서 잠시 살펴본 박 부자의 집 담과 운조루의 담을 비교하면 최 교수의 설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한눈에 사랑채는 세 채가 있는데 바깥주인이 거처하던 큰 사랑채는 대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높이 약 1.2미터의 축대 위에 있다. 중문 쪽이 온돌방, 가운데가 마루방, 서쪽 끝이 누마루 형식으로 정면 5칸, 측면 1∼2칸의 ‘ㄴ’자형 평면 형태다. 큰 사랑채 옆에 딸린 누마루가 바로 운조루로, 삼면을 개방한 누마루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설치했다. 난간동자를 계자각으로 하고, 그 위에 원형의 두겁대(頭甲)를 설치해 짜임새가 돋보인다. 한편 운조루에는 바깥 사랑채, 안 사랑채, 아래 사랑채 등으로 각각 누마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안 사랑채와 아래 사랑채의 누마루는 남아 있지 않다. 마루방에는 1776년(조선 영조 52년)에 건립됐음을 확인하는 “龍龍崇禎紀元後三丙申秋九月己巳十六日甲戌辰時入樑鼎鼎”이라 적힌 상량문이 있다. 넓은 대청은 사랑방과 누마루에 출입하는 전실(前室)의 역할을 하며 여름철 거처하기에 이상적으로 보인다.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 사이의 중문으로 들어서면 높이 약 60센티미터의 활석을 쌓아 올린 기단 위에 안채가 자리한다. 전면 마루 끝에 선 기둥은 조선시대에 금했다는 둥근 모양이며, 다른 것은 모두 모나 있다. 안채 양쪽은 2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유맹효 씨의 부인 이만임(77세) 씨의 설명을 통해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동경에서 7년 6개월 유학하고 온 남편과 혼례를 치렀는데 시집온 지 3년 동안 바깥출입을 못했다. 당시 여자들은 2층에 올라가 놀기도 하고 쪽문으로 담 밖을 내다보며 위안을 삼았다. 그후 교직생활을 하는 남편을 따라 외지로 옮겨다녔다.” 운조루를 유심히 살펴보면 행랑채보다는 바깥 사랑채가, 또 바깥 사랑채보다는 안채가 높이 앉혀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답로가 15도 정도의 경사를 이루는데, 이 경사로는 물건을 옮기기에 편하도록 기능적으로 배려한 것이다. 현재 이 집은 전체적으로 ‘一’자형 행랑채와 북동쪽의 사당채를 제외하고, ‘T’자형의 사랑채와 ‘ㄷ’자형의 안채, 안마당의 곡간채가 팔작지붕, 모임지붕, 박공지붕으로 연결되어 있는 일체형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운조루는 명당 중의 명당에 집을 지었다는 점 외에도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충실하게 따른 역사적 유물로 그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편 전국적으로 150년 이상 된 30칸 이상의 고가는 19채 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운조루는 건물 재료에 단단함이나 문의 크기, 운조루에서 살았던 류 씨 집안의 생활용품 등 자료가 그대로 보존돼 있어 역사적인 가치를 더욱 높게 평가받고 있다. 田 글·사진 윤홍로 기자 도움말 류응교, 류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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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집, 구례 운조루(雲鳥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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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한국인의 삶을 결정한 온돌(2)
- 온돌, 방의 구분을 없애다 한옥에서는 안채나 사랑채처럼 남녀 구별에 따라 집을 나누는 경우가 있어도, 기능에 따라 방을 구분하지는 않는다. 크게 나누면 한옥에서 기능별로 나눌 수 있는 것이 방, 부엌, 창고 외에는 없다. 그러나 서양의 집을 보면 침실, 응접실, 거실, 가족실, 서재, 주방, 식당, 창고 등 기능에 따라 수없이 많은 방으로 발전했다. 중국에서도 사용하는 사람(남녀 및 주인과 자식 등)에 따라서 건물 단위로 구분하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면 방은 잠을 자는 곳(와실臥室)과 거실(당堂)로 명칭이 나뉘어 있다. 이러한 구분은 용도에 따른 것이지만, 그렇게 구분하도록 거든 것은 가구다.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네 한옥은 이렇다 할 가구가 없기 때문에 가구에 따라 방을 구분할 조건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침대가 있기 때문에 침실이라는 방으로 구분해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한옥의 방은 이불을 펴면 침실이요, 이불을 개어 다락에 넣으면 거실이고 응접실이다. 또한 밥상을 펴면 식당이고 밥상을 접으면 다시 거실이 된다. 이렇듯 한옥에서 방은 매우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한옥의 방은 서양에서 분화된 각 방의 기능을 한곳에서 모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옥에서 방의 이름은 안방, 사랑방처럼 사용자에 따라 부르거나 건넌방, 문간방처럼 어느 곳에 위치했는가에 따른 이름밖에 없다. 즉 온돌이라는 특수 구조와 그에 따른 가구의 변화가 서양하고 전혀 다른 가변성이 풍부한 주거를 만들어 냈다. 지금과 같은 한옥의 구조가 조선조 초기 이전에도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가구의 특성 때문에 온돌이 전면적으로 도입되기 전의 방은 최소한 중국하고 비슷하게 용도에 따라 구분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입식 생활을 하는 경우 기능에 따라 사용하는 가구가 필요하기 때문에, 고려시대 상류층의 집은 최소한 거실, 침실, 식당 그리고 응접실 정도는 구분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고려시대의 집 구조를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해 간다면 의외의 결과를 얻지 않을까 생각한다. 온돌로 달라진 집의 구조 이제 온돌이 들어오면서 집 구조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찾아보자. 우선 온돌이라는 특수 구조 때문에 바뀌는 것은 기단이다. 온돌을 깔자면 자연히 기단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초기의 구들은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어 기단이 그리 높지 않았으나 온돌이 발달함에 따라 더욱 높아졌다고 한다. 온돌이 발전하면서 부넘기 등의 구조가 추가되고, 온돌을 설치하기 위해 바닥이 점점 높아져 최종적으로는 현재의 높이가 됐다고 한다. 그러던 온돌이 현대에 와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예전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고래를 통해 열기를 공급하느라 기단이 높았지만, 지금은 외부에 보일러라는 열원을 두고 온수로 난방하는 방식으로 변하면서 예전과 같이 기단이 높을 필요가 없다. 충남 홍성의 조응식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98호) 외에도 모든 한옥을 보면 온돌을 들인 본채와 들이지 않은 광은 기단의 높이에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점을 보더라도 기단의 높이는 온돌의 설치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온돌 때문에 가장 많이 달라진 곳은 아마도 부엌일 것이다. 고구려 벽화의 예처럼 예전의 부엌은 반빗간 형식으로 집하고 별도로 구성했다. 이것은 부엌에서 이용하는 열기가 난방하고 관계 없기 때문이다. 한옥에서도 여름에는 부엌 뒷마당에 별도의 화덕을 설치해 음식을 만들었다. 이처럼 난방열과 취사열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따라 집의 구조가 달라진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안에 부엌이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난방과 취사가 분리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조의 집은 열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부엌을 집 안으로 들여왔다. 조선조에 부엌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거주하는 방에 바로 연결된 것은, 취사와 난방을 같이 하여 열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결과다. 우리나라의 날씨를 보면 사실 난방이 필요 없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특히 중부 이북 지방을 보면 여름 한철을 제외하고는 난방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취사열을 난방에 활용한다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부엌은 고구려에서 고려시대까지는 반빗간 형식으로 유지돼 왔을 것이다. 한옥에 대한 오해 온돌에서 난방과 취사를 같이 하다 보니 방과 부엌의 높낮이가 크게 달라졌다. 이 때문에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 방으로 옮기는 일이 편하지 않았다. 한옥의 부엌은 여성들을 가사에 묶어 두는 주범(主犯)이었다고 단정짓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한옥의 부엌 때문에 불편을 겪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의 사회구조가 해체(解體)되고 노비 등이 하던 가사노동을 안주인인 여성들이 직접 하게 된 이후다. 결과적으로 급격한 사회의 변화에 집이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기와집들은 조선조에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살았던 대갓집이다. 그러한 사회구조에서 안주인이 가사노동을 적극적으로 했을 까닭이 없다. 윤증 고택 맏며느리의 증언에 의하면 결혼 초기에 지금도 살아 계신 종부(宗婦)하고 마찰이 많았다고 한다. 어떤 일을 직접 하려고 하면 종부께서는 “왜 아랫것들을 불러 시키지 않느냐?” 라고 말씀하셨다. 종부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전에 하인을 부리던 습관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처럼 집안 노동의 대부분을 하인이나 노비가 전담했기 때문에 예전의 한옥은 사는 데 조금 불편해도 그리 문제되지 않았다. 20세기 초입을 전후해 노비가 방면되고 임금노동자로 전환되면서, 경제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 집은 이전과 같은 저렴한 비용으로 노동력을 구할 수 없게 됐다. 경제력에서 사람을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자 안주인들이 직접 가사에 참여하게 됐던 것이다. 지금의 사회상을 보고 예전의 집을 깎아내리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요즘 짓고 있는 집은 사회구조에 맞추어 개선된 집이다. 지금의 집을 보면 과거하고 아주 딴판이다. 예전하고 다른 점은 여성의 가사 활동에 배려를 많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집에 대한 연구 중 상당한 부분이 가사 노동의 최소화에 관한 거란 사실만 보더라도 여성에 대한 배려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주택을 설계하다 보면 집에 대한 의사 결정권이 대부분 안주인에게 있다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볼 때 현재의 집은 안주인의 영역이다. 아랫목과 윗목으로 구분한 상석 온돌이 우리 정서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자. 정서적인 문제는 주관적인 견해가 많이 가미되기 때문에 개인적인 판단이 많음을 전제로 한다. 지금의 온돌은 온수를 순환시켜 간접 난방을 하기 때문에 방 전체가 골고루 따듯하다. 그러나 예전의 온돌은 직접 불을 때어 난방을 했기에 불에 가까운 곳이 상대적으로 뜨겁다. 그래서 전통의 온돌에는 요즘은 희미해진 개념인 윗목과 아랫목이 있었다. 윗목과 아랫목의 온도 차이는 방 안에서도 상석과 하석의 구별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추운 겨울 윗사람이 방 안에 같이 있을 경우 우리는 당연히 따뜻한 아랫목을 윗사람에게 양보한다. 가뜩이나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유교적 개념이 강했던 조선조에서 방의 형편에 따라 상석과 하석을 구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모든 나라에도 상석과 하석의 개념이 있었으나, 우리하고 달리 상하의 구분이 가구의 배치나 입구의 방향에 따라 결정됐다. 우리나라처럼 난방의 문제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 중심 사고를 형성한 온돌 온돌은 가족 간의 유대를 높이는 데도 한몫을 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이불을 함께 덮고 옹기종기 모여서 하는 대화는 가족애를 키우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사회학적으로 대화의 거리는 그 사회 구성원 간의 친밀도를 의미한다고 한다. 연인 사이의 거리는 스킨십(Skinship)이 가능한 거리를 유지하고, 사이가 그리 가깝지 않으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화를 하게 된다. 그러나 추운 겨울의 온돌은 이러한 사회적 거리를 자연스럽게 좁히는 데 기여한다. 따뜻한 아랫목에 몰리는 자연스러운 상황을 통해 가족 간의 이해를 높여 가족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정서가 형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좌식 생활을 하게 된 것이 우리의 사고를 보수 성향으로 흐르게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조선조를 통해 나타나는 문예 우위의 성향은 성리학적인 사고에 영향을 받았겠지만, 온돌에서 연유한 정적인 문화에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신을 벗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움직임에 적극적일 수 없다. 행동하기보다는 사고하는 습관을 더욱 길러 주는 것이 바로 온돌이 아닐까. 田 글 최성호 한옥 이야기는 이번 5월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글과 사진을 제공해 주신 최성호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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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한국인의 삶을 결정한 온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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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한국인의 삶을 결정한 온돌(1)
- 우리는 한옥을 대표하는 특징으로 온돌을 손꼽는다. 온돌이 우리의 주생활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커서 체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온돌이 전면적으로 도입된 이후 주생활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삶 모든 면을 결정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온돌이 도입된 이래로 우리의 생활은 전면적으로 재편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온돌의 난방 특성 온돌을 다른 나라에 없는 우리 고유의 난방 시스템으로 아는 사람은 그것이 우리 삶에 끼친 영향의 극히 일부만을 이해하는 것이다. 온돌이라는 난방 시스템의 도입은 그 이전의 생활하고 전혀 다른 모습을 우리 삶에 가져왔다. 우리 생활에서 또 하나의 특징인 신을 벗는 생활도 온돌 때문에 나타난 습관이다. 온돌 이전에 대부분의 난방은 난로처럼 한 지점에서 발생하는 대류열로 실내를 덥혔지만, 온돌은 바닥 전체의 복사열을 이용한 난방이다. 온돌의 이 같은 난방 특성 때문에 열효율을 높이려면 바닥에서 방열(放熱)하는 면적을 최대한으로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 80년대 이후에 완공한 아파트 모두 온수 난방 시스템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난방을 위한 온수 배관을 할 때 붙박이장이 설치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가구의 배치를 고려해 특정 부분의 바닥 난방을 빼지 않는다. 온돌은 그 특성상 난방이 되는 곳과 되지 않는 곳은 느낌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방 전체가 충분히 따뜻하더라도 난방이 되지 않는 곳에 발을 대거나 앉았을 경우 매우 불쾌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 때문에 방바닥 전체에 골고루 난방을 하는 것이다. 바닥 전체가 난방이 되므로 가구로 바닥을 가리는 것은 열효율을 낮추는 원인이 된다. 특히 침대 같은 가구로 바닥을 가리면 목재로 만들어진 침대에도 좋지 않고 열효율 측면에서도 매우 비효율적이다. 온돌의 경우 바닥 면적이 가려진 비율만큼 열효율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면 된다. 과거 나무나 짚 등을 때어 난방을 했던 재래식 온돌에서는 지금보다도 더욱 연료를 절약해야 했다. 집의 기밀성이 좋지 않았던 탓에 제대로 난방을 하자면 열효율을 최고로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까닭이다. 그 때문에 바닥을 가리지 않도록 실내의 가구를 최소로 하는 방향으로 집의 구조를 개선해 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고려시대의 가구와 조선시대의 가구 특히 온돌이 완전히 정착된 뒤의 가구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고 본다. 현재 조선조 초기나 고려시대 가구를 살펴볼 수 있는 예가 없어서 단정할 수 없으나, 고려시대의 그림을 보면 분명 입식 생활로 묘사돼 있어 조선조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입식 생활은 특성상 여러 가구가 필요하다. 특히 탁자와 의자는 없어서는 안 될 가구다. 그러나 좌식 생활에서 탁자는 쟁반으로 대치할 수 있으므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고, 의자는 더욱 필요 없는 가구다. 조선조 초기까지 침상의 기구로 사용했던 와탑은 조선조 후기에 들어서 거의 사라지게 된다. 이렇듯 온돌의 도입은 집안의 가구에도 큰 변화를 가져온다. 한옥에 벽장이 많은 것은 온돌하고 관련이 있다. 온돌의 특성에 맞추어 난방에 지장이 없도록 하려고 수납 장소를 가구에서 벽장으로 옮겼다고 이해해도 무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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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한국인의 삶을 결정한 온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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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한옥에서 미래의 집을 꿈꾼다
- 한옥에서 미래의 집을 꿈꾼다 집의 변화가 크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생활에 변화가 없었다는 반증(反證)이다. 그러나 서양의 건축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우리나라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집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갔다. 거주 형식도 단독주택에서 공동주택인 아파트로 변했다. 또한 아파트의 연료는 연탄에서 기름, 가스 그리고 지역난방 등으로 바뀌었다. 난방 방식도 도입 초기에는 방에만 패널히팅을 했지만, 현재는 아파트 전체를 패널히팅으로 난방하고 있다. 아파트의 평면도 2베이(Bay) 아파트에서 최근에는 3베이, 4베이 아파트로 신속하게 변하고 있다. 아파트 건축에서 이러한 변화가 나타난 기간은 30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 생활과 사고가 빠른 속도로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참 논쟁의 중심이 되고 있는 아파트의 재개발(再開發) 문제도, 급격하게 바뀐 우리네 생활하고 관련이 깊다. 건물의 내구연한보다는, 집이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집의 가치가 떨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재건축을 제재하려고 무조건 내구연한만을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처럼 최근의 집은 사회의 변화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내구재인 집의 특성상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는 것이 원인이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몇 건축가들이 ‘건축의 가변성’에 대해 깊이 탐구했지만, 썩 좋은 성과는 얻지 못했다. 인간의 삶이 예측 불가능할 만큼 변화가 많은데 비해 건축의 가변성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건축에서 가변성을 향상시키는 문제는, 집을 지을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집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까 어쨌든 사람의 생각과 욕구가 바뀌는 이상 집은 변할 수밖에 없다. 김태일 교수는 미래의 주거 변화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관점에서 보고 있다. 첫 번째는 고령화 사회에의 대응, 두 번째는 IT(Information Technology)와 공학 기술에 의한 변화, 세 번째는 고층화 추세, 네 번째는 지역 문화와 자연환경 중심으로의 변화 등이다. 이러한 관점은 인류 사회의 급속한 고령화, 인구 증가, 기술의 발전 그리고 자연환경 파괴에 대한 자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해 예측해 볼 때 미래의 집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변할 것이다. 첫 번째 방향은 과학의 발전과 맞물려 보다 기능적이며 진화적인 성격이 강화될 것이고, 두 번째는 자원의 효율적인 사용과 환경 보전의 의미가 강조돼 자연친화적 성격이 높아질 것이다. 첫 번째로 기술적 측면에서의 발전은 예측하는 것이 쉽지 않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고령 사회로의 변화는 지금보다는 다른 종류의 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대처하자면 지금보다 더 집적된 고밀도의 공동주택을 다양한 방향으로 개발해야 할 것이다. 밀집화의 방향은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일차적으로는 고층화를 시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지하화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또한 노년층의 증가로 실버산업이 활성화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노인 주거 공간이 개발될 것이다. 그리고 미래에 짓는 집에는 지금보다는 더욱 고도화된 IT 기능이 더해져서 홈오토메이션 기능과 전자통신 기능을 훨씬 다채롭게 사용할 것이다. 두 번째로 앞으로의 집은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현재 많은 사람이 환경에 관심을 갖고 있다.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다. 최근 들어서 의식주에 관련된 모든 것을 자연환경과 잘 어울리고 지속 가능하도록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결국 인류 공멸(共滅)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다. 우리가 공존해야 할 대상을 사람에 국한하지 않고 자연환경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확대하고 있다. 서구에서는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집의 자연친화 문제를 활발히 연구하고 있으며 일부는 실험적인 형태로 구체화하고 있다. 독일의 예를 보면 생태계에 의한 자연 순환(Recycling)이 강화된 집이 개발돼, 환경친화적 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이제껏 우리가 생각했던 발전이 어떤 것이었는지 들여다보면 자연의 파괴를 전제로 했다. 산업혁명 이래로 눈부시게 이루어진 문명의 발전은 유한한 자원을 무제한으로 소비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우리가 짓는 집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와 같은 일방적 발전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분야에서 자연환경의 보전과 지속 가능한 발전에 중점을 두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한 시도는 건축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기술 발전과 자연환경 보전이라는 이 두 가지의 장점을 취해 탈바꿈하려는 노력을 시도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1998년, 디지털 기술과 환경 보전을 동시에 고려한 인티져하우스(Intelligent+ Greenhouse)가 완공됐다. 자연과 공존하는 발전을 추구해야 지구는 유한한 자원이다. 지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모든 사람에게 얼마만큼 균등하게 배분하며, 언제까지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사람들은 인간의 개발 능력을 과신하고 있는 모양이다. 또한 지구가 모든 자원을 필요한 만큼 무한히 제공해 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지금과 같이 소비 지향의 삶 또는 투쟁하듯 독식하려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인류가 공멸에 이르는 첩경(捷徑)임을 인식하고 새로운 삶의 방법을 탐구해야 한다. 자연과 공존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목표로 한다면 우리의 집도 탈바꿈하게 된다. 지금의 집은 소비 지향의 삶에 맞추어 짓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 주거인 아파트는 편안함과 에너지 소비 지향의 건축이다. 인간의 본성인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소비 지향의 건축은 반드시 재고(再考)해야 할 부분이다. 끝없는 고층화, 쾌적함을 만들어 내기 위한 인공 환경 등은 에너지 소비와 자연 파괴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파트의 구조체를 이루는 시멘트는 백두대간의 허리를 잘라내는 대가로 얻은 것이며, 아파트를 시원하게 하는 에어컨이나 고층을 오르내리기 위한 엘리베이터의 에너지원은 석유나 원자력 등에서 만드는 전기다. 집 안의 가구 대부분에 쓰이는 플라스틱은 석유에서 추출한 것이다. 이외에도 온수, 수세식 변기 등 우리가 사용하는 기구 어느 하나도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없다. 세면기, 변기, 개수대에서 나오는 생활하수가 하천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별도의 정화 시설을 건설하고 운영하는 데도 우리가 직접 보고 느낄 수 없는 많은 자원과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이러한 에너지나 자연 자원을 계속해서 공급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지구의 자원은 한계가 있다. 그간 지구상에서는 많은 문명이 부침을 거듭했다. “문명의 흥기(興起)는 인간이 주위의 자연환경을 이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의 증대에 발맞추어 진행됐다. 또한 문명의 몰락은 주위 자연환경하고 조화와 균형 상태를 유지하는 데 실패함에 따라 진행됐다.” 라고 한다. 자연환경의 파괴와 문명 발전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 결과, 황허 유역도 이전에는 나무로 우거진 곳이었고, 그리스의 산도 과거에는 숲이 무성한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사막이 된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지역도 과거에는 공중 정원을 자랑하는 숲으로 울창한 곳이었다고 한다. 또한 거대한 석상이 있는 이스터(Easter) 섬도 과거에는 숲이 우거졌으나 사람들이 숲을 파괴해 현재의 모습으로 변했다고 한다. 자연을 무분별하게 훼손하면 종내는 화살이 되어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 지금까지의 환경 훼손은 지역에 국한된 문제였지만, 이제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지구상 어디라도 사람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 전체의 나무를 순식간에 없애 버릴 수 있는 힘이 사람에게 있다. 이럴 때일수록 사람은 자연 앞에서 겸손해져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겸손’이다. 개인의 욕심을 채우려는 삶보다는 공존하려는 지혜가 절실한 시점이 온 것이다. 그 같은 관점에서 우리의 삶과 앞으로의 집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생각의 중심에 자연이 있어야 사람도 자연의 일부다. 사람은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인류가 환경에 따라 몸을 변화시켜 왔다는 증거가 과학에 의해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추운 지방에서 살아온 사람과 더운 지방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신체 구조에는 차이가 있다. 〈도전, 지구탐험대〉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에스키모의 생활을 체험하는 내용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영하 10도 정도의 추위에서 에스키모들이 웃옷을 벗고 순록의 털가죽만 덮고 자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은 두꺼운 털옷을 입고 털가죽을 덮고 자면서도 벌벌 떨고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더운 지방에서는 영상 18도 정도의 기온에서도 얼어 죽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이러한 예는 사람들이 주변 자연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는 가를 보여준다. 그것하고는 조금 다르지만 의학 자료를 통해 사람이 환경에 적응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독일의 한 의학자는 형제가 여럿이 있는 사람들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는 정도를 연구했다. 그 결과 형제가 여럿이 있는 사람들이 질병에 강하다는 결과를 밝혀냈다. 학자는 그 결과에 대해 ‘형제가 많은 사람들은 형제가 적은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오염된 환경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아 세균에 견디는 힘이 길러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방 접종으로 면역력을 키우는 것처럼, 깨끗한 환경에서 자라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세균에 노출되는 것이 건강을 지키는 데 효율적이라는 이야기다. 위의 예들은 사람도 생명체인 까닭에 어떠한 환경에서도 적응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과 집 그리고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편안함만을 추구한다면 집의 구조는 점점 환경에 부조화의 방향으로 변해 갈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은 과학의 발전을 향유하는 모습을 그리며 풍요로운 주거를 꿈꾸고 있다. 늘 활기가 넘치고 풍요가 우리를 감싸는 미래만이 펼쳐질 것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다. 건축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지금보다 팽창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수백 층 아니 수천 층 높이의 집을 구상하거나 지하에 만드는 집을 구상하기도 했다. 그와 같은 구상을 뒤집어 보면 자연환경을 훼손하는 다른 방법일 뿐이다. 지구는 하나다. 지구의 자원에도 한계가 있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만큼 풍족하게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미래의 모습은 영화 〈배트맨〉이나 〈로보캅〉 또는 〈블레이드 러너〉에서 묘사한 것처럼 ‘가진 자의 풍요와 못 가진 자의 빈곤’으로 표현되는 극단의 삶이 될 수도 있다. 우리네 삶의 모습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려면 욕심을 버리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한 생각에 많은 사람이 공감할 때 우리의 집은 다시 자연 친화의 모습으로 변신하게 될 것이다. 집과 자연환경 그리고 삶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가 절실한 상황이 되면, 한반도라는 자연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삶의 그릇이었던 한옥이, 우리 미래의 집에 매우 중요한 가이드가 될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한옥을 다시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역사를 공부하고 또 한옥을 공부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지식을 충족시키고 자기만족을 위한 것은 아니다. 굳이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거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 우리 미래의 일부분이 된다면 한옥은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다. 앞서 여러 부분에서 강조했듯이 한옥은 자연에 순응하는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한옥은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과거의 집이 현재의 집하고 다르듯이 미래의 집도 현재의 집하고 같을 수 없다. 지금까지 강조했듯이 생활과 생각이 달라지면 집도 변한다. 생활을 담는 그릇인 집도 우리의 생각과 기술의 변화를 반영한다. 그러나 그 변화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에 따라 집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이 달라진다. 지금과 같이 자원을 대량으로 소모하는 것은 후손이 사용할 미래 가치를 현재에 앞당겨 낭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후손, 가깝게 본다면 아이들에게 쓸 자원을 많이 남겨 주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집도 같은 방향으로 탈바꿈해야 할 것이다. 미래 주택의 중심에는 ‘자연’이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이 사고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면 집은 지금보다는 훨씬 자연친화적이면서도 에너지를 덜 소비하는 방향으로 개선될 것이다. 친환경적인 변화의 물결이 지구상에 확산될 때 인류 전체가 공존할 수 있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면서도 미래를 지향하는 사회 환경이 될 것이다. 田 글 최성호 글쓴이 최성호 님은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서 ‘산솔도시·건축’을 운영 중입니다. 주요 건축작품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유치원·박물관·인문관·약학관, 데이콤중앙연구소, 삼보컴퓨터사옥, 홍길동민속공원 마스터플랜, SK인천교환사 등이 있습니다. 산솔도시건축 02-516-9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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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한옥에서 미래의 집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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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집은 사람을 만든다 (II)
- 집은 사람을 만든다(Ⅱ) 집과 주변 환경 안에서 시각, 청각 그리고 그 밖에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체득되는 경험 하나하나가 모여 우리의 정서를 만들어 간다. 경험이 계속 쌓여가면서 구체화되고 형질화돼 한국인의 고유한 생활과 미감을 만들어 낸다. 우리의 한옥이나 그 안에서 사용하던 가구나 도구들에서 직선이나 예리하게 각이 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살아온 환경과 연관이 깊다. 집이 우리 정서에 영향을 미친 다른 예는 가족 간의 유대 관계다. 한옥은 잘 지어진 집이라도 어쩔 수 없이 외풍이 있게 마련이다. 외풍이 무조건 좋지 않다거나 한옥에만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과거의 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단열과 기밀성에서 현재의 집하고 많이 달랐다. 과거의 한옥이 지금보다 기밀성이 떨어진다는 의미이지, 당대 다른 나라의 집보다 못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외풍은 자연스러운 환기를 유도해 실내 공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이로운 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연스러운 환기는 건강에 많은 도움을 준다. 어쨌든 간에 추운 겨울에 방 안에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아랫목을 찾게 된다. 아랫목에 이불을 깔고 그 속에 발을 집어넣고 있노라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온돌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은다. 이렇게 모이다 보면 살결이 맞닿고, 얼굴을 마주하면서 가족 간에 대화가 오가는 살가운 풍경을 만든다. 나이가 드신 분들은 겨울이면 아랫목 이불 밑으로 발을 넣고 앉아 가족끼리 오순도순 이야기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가족끼리 유대가 깊어짐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는 다른 예지만 한국인의 정서를 만들어 가는 데 한옥의 분위기는 많은 영향을 미쳤다. 창호지에 비치는 달그림자의 정취는 한옥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옛 시조나 시에는 발소리에 관한 표현이 많다. 〈밤비〉라는 대중가요에 “님이 오시나 보다. 밤비 내리는 소리. 님이 오시나 보다. 님의 발자국 소리”라는 가사가 있고, 예리성(曳履聲)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런 단어는 한옥의 마당에 깔린 백토하고 관련이 있다. 한옥에서는 안마당에 화초나 잔디를 심지 않고 단순히 백토를 깔아 햇빛을 반사하게 하여, 집안 전체를 밝게 만들고 쓸데없는 곤충들이 집안에 서식하는 것을 방지한다. 백토는 모래에 석비레를 섞은 것으로, 입자가 굵어 그 위를 걸으면 소리가 난다. 사람이 누구를 기다리거나 긴장하고 있을 때는 소리에 민감하다. 특히 발소리에 예민해져서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백토를 깐 마당은 발소리가 나는데, 시인과 소설가는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발소리는 바닥의 흙 종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입자가 고운 흙이 깔린 땅에는 발소리가 나기 어렵다. 그런 환경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발소리는 그리움을 표현하는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일본 건축가인 니무라 카즈유키는 〈일본 전통 문화공간의 현대적 창조〉라는 글에서 일본의 전통 가옥에서 느낄 수 있는 비의 정취에 대해서 기술했다. 지붕과 처마가 있는 일본의 전통 가옥은 우리의 한옥하고 같은 공감대를 느낄 만한 부분이 많다. 그가 적은, 비가 만들어 내는 다양한 모습은 한국이든 일본이든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낯설기만 할 것이다. 비를 통해서 일어나는 다양한 정취를 느끼려면 처마가 있는 집이어야 한다. 처마가 없는 집에서는 들이치는 비를 막는 데 급급해 비를 즐길 만한 여유가 없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의 다양한 모습과 소리만으로도 혼자 시간을 즐기기에 넉넉하다. 장대비의 세찬 소리뿐만 아니라 비가 그쳐 갈 무렵 한 방울씩 떨어지면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낙숫물 소리까지, 비와 처마가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정경은 한참을 보고 듣고 있어도 지루한 줄 모른다. 그럴 때는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한옥의 머름대에 기대어 턱을 괴고 보는 것이 여운을 자아낸다. 그러나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빗소리는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단지 베란다에 있는 선홈통 속으로 떨어지는 공명 소리뿐 낙수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 이제 청각 외에 시각 정서를 살펴보자. 한옥에서 만들어지는 시각의 정서로는 장독대에 소복이 내린 눈과 저녁에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나지막이 깔린 마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초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의 전경 등 수없이 많다. 그 같은 모습은 아파트의 삶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광경이다. 특히 초가지붕의 선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만의 선이다. 완만한 산하와 함께 부드러운 초가의 곡선은 다른 곳에서는 체험할 수 없다. 또한 장독대와 초가에 소복이 내린 눈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선이다. 그러한 선에 대한 감각이 조선 백자에서 볼 수 있는 양감 있는 풍만함을 만들어 내는 근간이 된다. 부드러운 선에 익숙해지고 나면 경직돼 보이는 직선이나 날카로운 예각에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신고 벗기 편한 신발은 좌식 생활의 산물 집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 관습은 우리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것과 신고 생활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회사에서 근무할 때 실내화를 신는 경우가 많다. 서구에서는 집 밖에서 신발을 벗으면 예의에 어긋난다. 이것은 실내와 실외 생활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우리의 집과 그렇지 못한 서구 집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하루 중 신을 벗고 사는 시간이 대부분이라 신고 있는 것을 답답하게 여긴다. 또한 내외의 개념이 명확하기 때문에 실내인 사무실에서 신을 벗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서구인은 집에서조차 신발을 신고 생활하므로 발 냄새 등의 이유로 벗는 것을 꺼린다. 이 같은 환경은 신발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군대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옆에 지퍼를 달아 벗기 편하도록 개조한 군화를 많이 보았을 것이다. 군화는 발목을 보호하려고 사용하는 신발이므로 발목까지 올라온다. 그러므로 신고 벗는 데 매우 불편하여 신발을 벗고 침상에서 생활하도록 지은 우리 군대의 병영에는 맞지 않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려고 병사들이 병영 생활에 맞도록 개조하는 사례가 많다. 일반인들의 신발도 신고 벗는 상황이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는 집 구조 때문에, 수시로 신고 벗는 데 편리하도록 변화됐다. 옛날에 신던 고무신이나 짚신을 보면 그러는 데 편한 구조로 되어 있다. 또한 조선시대 관복의 신발을 보면 발목까지 올라오게 되어 있으나 발목 부분이 넓어 신고 벗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돼 있다. 일본인들의 전통 신발인 ‘게다(Geta)’나 ‘조리’도 좌식 생활을 하는 일본의 주거 환경에 맞추어 변화된 신발이다. 이처럼 집의 구조는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친다. 보수적 기질의 좌식 생활 또한 좌식 생활은 신체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좌식 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부좌를 틀고 앉지 못한다.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가부좌(跏趺坐)를 틀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대부분 어렸을 때부터 의자에 앉아 생활했던 사람들이다. 침대에 눕고 의자에 앉는 입식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요통(腰痛) 환자도 덩달아 증가하고 있다. 의사들은 푹신한 침대와 의자에 장시간 앉아 있는 것이 요통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외국인들 중에서도 좌식 생활을 추천하는 사람이 있다. 미국 버클리 대학의 교수인 갤런 크렌츠는 바닥에서 활동하는 좌식 생활과 온돌을, 의자에 앉아 지내는 입식 생활보다 더 좋은 것으로 추천하고 있다. 또한 마룻바닥이 사교를 위한 무대로 의자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실제적인 몸의 움직임이 의자에 앉아 있는 것보다 자유로워 폭넓은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이처럼 좌식 생활이 지닌 장점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기질을 보수적으로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기대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만큼 사람은 편안함을 추구하는 속성이 있다. 좌식 생활은 사람들의 활동성을 높이는 데 그리 좋은 생활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하기’에는 매우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동양의 ‘선(仙)’은 바로 앉는 데서 시작한다. 의자에 앉는 것보다는 생각을 집중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이것은 좌식 생활의 성격이 동적(動的)이라기보다는 정적(靜的)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정적인 생활은 활동성을 줄어들게 하며 사고의 개념도 보수적으로 회귀(回歸)하게 만든다. 얼굴을 마주하는 공동체 집과 집으로 형성되는 환경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우선 집의 배치가 우리의 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자. 공동주택인 아파트나 연립 주택의 각 동을 ‘ㅡ’자로 배치하는 경우와 ‘ㄷ’자나 ‘ㅁ’자로 배치하면서 각 동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중앙 광장으로 통하도록 설계한 아파트를 비교해 보자. 두 아파트의 경우 ‘ㅡ’자로 배치한 아파트보다는 ‘ㄷ’자나 ‘ㅁ’자로 배치한 아파트가 주민 사이의 유대가 돈독하다. 주민끼리 유대 관계가 돈독해지는 것은 자주 보기 때문이다. 집으로 가려면 아파트 단지 중앙에 있는 광장을 지나쳐야 하기 때문에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 눈에 익은 사람들이라면 눈인사라도 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남자끼리는 술자리로 이어지고 여자끼리는 차 모임으로 이어지게 되니 친근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ㅡ’자로 배치된 아파트 단지에서는 만남의 기회가 적기 때문에 서로를 알기 어려워, 의도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이상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없다. 차가 다니는 곳은 사람이 마음 놓고 지날 수 없다. 예전에 마을길과 골목길은 어린이들이 나와 뛰어 놀았던 마을의 마당이었다. 아이가 놀던 마당인 길에는 늘 할머니나 어머니가 따라 나와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렇게 하다 보면 아이들끼리 노는 동안 어른들은 가벼운 잡담과 한담으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예전에는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어느 곳에서든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제는 이러한 모습을 보기 힘들어졌다. 차가 도로를 점령하고 나서부터 동네의 골목길조차 안전한 곳이 되지 못한다. 자연히 아이들은 집으로 쫓겨 들어가게 되고, 어른들도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얼굴을 마주한 대화가 없는 곳에서는 공동체의 삶이 있을 수 없다. 도시의 삭막함이 더해 가는 것도 바로 그러한 환경 때문이다. 田 글 최성호 글쓴이 최성호 님은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서 ‘산솔도시·건축’을 운영 중입니다. 주요 건축작품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유치원·박물관·인문관·약학관, 데이콤중앙연구소, 삼보컴퓨터사옥, 홍길동민속공원 마스터플랜, SK인천교환사 등이 있습니다. 산솔도시건축 02-516-9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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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집은 사람을 만든다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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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생각이 변하면 생활이 달라진다(Ⅱ)
- 한옥이야기 생각이 변하면 생활이 달라진다(Ⅱ) 집 구조를 통해서 본 생활의 변화 ■ 글 싣는 순서 1. 집, 문화로서 과거 이해하기 -과연 전통은 존재하는가 2. 집은 문화 유기체다 3. 자연환경과 집 4. 기술 발전과 집 5. 사회환경과 집 6. 생활과 집 7. 사고변화와 집 8. 사람과 집 -사람이 집을 만들고 집은 사람을 만든다 사고의 변화는 미의식과 행동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사람의 행동에 변화가 생기면 집의 구조에도 반영된다. 우리가 집을 이해하려면, 먼저 ‘과거의 생활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이제 과거의 집과 현재의 집을 비교함으로써 사고의 변화가 집의 구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자. 조선조의 집과 현재의 집을 비교하면 아무리 문외한이라고 해도 많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당대의 부잣집인 양반가의 집과 현재의 부자들이 살고 있는 대형 평형의 아파트를 비교해 보고 우리의 생활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자. 조선시대 대가의 한옥과 현재 아파트의 차이는 분산과 집합이다. 이러한 차이의 출발점은 먼저 사회 구조의 변화에 있다. 조선시대의 집은 하인을 거느리고 살았으나 지금은 아니다. 조선시대는 농업을, 현대는 공업과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종교로 보면 조선시대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수직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고 했고, 현재는 인간의 평등을 지향하는 다원화 된 사회다. 사회적 기반은 곧 집의 구조에 반영돼 나타난다. 앞에서 말한 차이점이 집 구조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살펴보자. 조선조와 현재의 집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차이점은 각 공간 사이의 거리다. 조선조의 집은 매우 넓게 분산돼 있다. 반면에 아파트는 집약의 구조다. 조선조의 집 구조는 관리하는 데 매우 비효율적인 반면, 현재의 아파트는 각 방을 연결하는 데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가능하도록 계획한다. 이렇게 짓는 것은 땅을 소유할 수 있는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을 관리하는 사람의 숫자하고 관계가 있다. 과거에는 노비나 하인을 부려서 집을 관리했다. 이제는 집 관리의 일차적 책임이 주부에게 있다. 부잣집에서 파출부를 두거나 가정부를 고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주부가 관리한다. 늘 하인을 거느리던 집안에서는 집이 넓어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안채와 사랑채로 분리된 한옥의 구조는 하인이 있어 가능했다. 조선조가 유교 덕목의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남녀유별을 이유로 안채와 사랑채를 분리했지만, 집을 관리해 주는 노비나 하인이 없었다면 안채와 사랑채로 나뉠 수 없었을 것이다. 집을 누가 관리하는가에 따라 구조가 달라지는 예를 한 가지 더 살펴보자. 앞서 언급한것처럼 70년대까지만 해도 조금 잘 산다 싶으면 집에 ‘식모’를 두고 살았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때만 해도 일반화된 직업이었다. 식모라는 직업이 없어진 것은 인건비 상승이라는 문제도 있지만, 집안의 문제와 가족의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여긴 데 원인이 있다. 가족 외에 집안에서 먹고 자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 불편했기 때문에 식모 대신에 출퇴근하는 가정부로 바뀌었다. 그 같은 변화는 집의 구조에도 반영돼 있다. 70년대에는 30평대의 아파트에도 식모를 위한 조그마한 골방이 부엌 옆에 있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방이 없어졌다. 이제는 아주 대형 아파트가 아닌 경우 식모를 위한 방은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가정부가 도와준다고 해도, 가정부가 없는 시간에는 주부가 관리해야 하므로 많이 움직여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따라서 모든 시설을 집약시켜 적은 움직여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부부 공간에 드러난 서구화 두 번째로 부부 공간을 비교해 보면 사고 방식이 서구화됐다는 것이 명확히 드러난다. 예전의 집에서는 안방과 사랑채가 떨어져 있었다. 부부가 방을 따로 쓰는 것을 전제로 계획한 집이다. 부부 별거의 원칙은 조선조 초기부터 있었지만 잘 지켜지지 않은 모양이다. 〈미암일기〉를 보면 당시에는 아직 부부 생활에서 별거를 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오면서 점점 부부 별거의 원칙이 강조되었다. 이하복씨의 자서전(서천 이하복 가옥의 전 주인)을 보면 1915년에 결혼했는데, 초기에는 부부 간 합방도 할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이뤄질 정도로 부부 별거가 원칙이었다. 그러했던 부부 생활은 최근에 서구의 영향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부부만의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여기고 부부 생활을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 같은 변화를 반영해 이제는 부부의 전용공간이 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아졌다. 예전의 집에서는 안방과 사랑방으로 나뉘어 있던 부부 공간이 이제는 통합됐고, 부부만을 위해 안방과 침실, 드레스룸, 욕실 등을 배치하고 있다. 부부만 사용하도록 제공된 방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데, 특히 부부 침실은 안방과 드레스룸 등을 거쳐 들어가도록 하여 제일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부부 침실이 제일 안쪽으로 들어간 것은 부부 생활을 철저하게 보장하기 위함이다. 손님 접대 방식의 변화와 집 구조 세 번째로 손님을 치르는 방식을 살펴보자. 손님을 대접하는 방식의 차이도 집 구조에 잘 나타난다. 예전에는 남자 손님은 사랑방에서, 안손님은 안채에서 대접했다. 지금은 남녀를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상차림도 과거에는 독상을 원칙으로 했기에, 개인별로 소반에 음식을 차려냈다. 이 때문에 대가의 대청을 보면 횟대에 소반을 가득 얹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는 서양식의 접대 문화가 일반화돼 잘 사는 집에는 홈바(Home Bar)라는 것을 설치하기도 한다. 서양식으로 가볍게 칵테일을 하면서 대화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현재 짓는 집들 가운데 아주 큰 집의 경우, 응접실을 따로 두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거실이 손님을 맞이하는 주공간이다. 거실은 또한 가족이 공유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손님을 대접한다는 사실은, 손님의 성격도 이제는 가족 공동의 손님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도 사업을 하거나 정계에 있는 사람들은 손님의 성격에 따라 별도로 모셔야 하기 때문에 응접실이라는 독립된 공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집은 응접실을 따로 두지 않는다. 그것은 집에서 대외 활동을 목적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의 발달로 사라진 창고 네 번째로 창고에 대해서 살펴보자. 앞에서 언급한 김기응 가옥에서 보듯이 광이나 곳간으로 쓰는 부분은 집 전체 면적의 1/6을 차지한다. 반대로 요즘 집에서 창고 등과 같이 수납에 사용하는 면적은 매우 작다. 이 같은 상황은 다른 집도 마찬가지다. 옛날의 집에서 저장을 위해 사용한 면적이 많은 이유는 경제 체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시장경제가 그리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서 사용하는 일상 용품의 대부분을 광에 저장해 두고 일이 있을 때마다 꺼내어 썼다. 그러나 요사이는 시장에서 필요한 만큼만 사다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쌀도 예전에는 80킬로그램들이 가마 단위로 팔았다. 가구별 구성원 숫자가 줄어들고 외식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최근에는 2킬로그램들이 소포장 쌀도 판매하고 있다. 또한 간장, 된장 그 밖의 밑반찬도 시장에서 필요한 만큼 사다 먹는다. 옷도 예전에는 집에서 만들어 입었기 때문에 광에 옷감을 보관하고 있었다. 삼베의 경우는 조선조 후기까지 화폐와 버금가는 환금성을 가지고 있어 별도로 보관했을 것이다. 그러한 사회 여건 때문에 조선조에는 많은 생활 용품을 집에 저장해 놓고 필요할 때 꺼내 써야 했다. 부잣집 또는 종가의 경우 노비나 하인을 포함해 집에 거주하는 사람은 물론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 그에 따른 음식 수발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조선시대는 늘 장이 서는 환경이 아니어서, 필요한 물건을 시장에서 때마다 구입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 때문에 일정 수량은 항상 곳간에 보관해야 했다. 현재는 아무리 부잣집이라고 해도 집에서 손님을 치르는 경우는 드물다. 예전처럼 하인을 수십 명 거느리는 것도 아니고 식솔(食率)도 많지 않으므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 특히 식료품을 오래 보관해야 할 이유가 없다. 중요한 손님이라면 오히려 집 밖에서 대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집에서 손님을 치른다고 해도 그 때마다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기 때문에 일상에 필요한 용품들을 쌓아 두지 않아도 된다. 사회가 변하면서 최근에는 아파트를 설계할 때 수납 공간에 신경을 많이 쓴다. 식료품 수납은 별로 필요하지 않지만, 옷과 여가 활동 및 가사 활동에 사용하는 생활 용품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신발장을 봐도 예전에는 일인당 세 켤레 정도의 신발을 갖고 있어도 많다고 했는데, 지금은 각자가 평소에 신는 신발도 세 켤레를 넘는 집이 대부분이다. 이외에도 부엌에서 쓰는 각종 주방 용구도 다양해졌고, 레저 활동을 즐기는 인구가 늘면서 레저 용품도 많아졌다. 그러한 물품들 가운데 자주 사용하는 주방 기구 등을 제외하면 계절별로 사용하는 것이 많다. 그 때문에 새로 짓는 고급 아파트에서는 지하층 등에 가구별로 수납 시설을 설치해 주기도 한다. 과거의 한옥에서 창고를 주로 식생활 또는 소모성 생활 용품을 보관하려고 만들었다면, 이제는 내구성 생활 용품을 보관하는 창고가 필요하다. 田 글 최성호 ※ 글쓴이 최성호는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서 ‘산솔도시·건축’을 운영 중입니다. 주요 건축작품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유치원·박물관·인문관·약학관, 데이콤중앙연구소, 삼보컴퓨터사옥, 홍길동민속공원 마스터플랜, SK인천교환사 등이 있습니다. 산솔도시건축 02-516-9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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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생각이 변하면 생활이 달라진다(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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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생각이 변하면 생활이 달라진다(Ⅱ)
- 자연환경과 사고의 변화 자연환경은 모든 문화의 출발점이다. 그 지역의 자연환경이 어땠는가에 따라서 문화의 발전 방향이 달라진다.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는 집은 인공 환경이라는 점에서 행동뿐만 아니라 미감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뒷간에 앉아 대소변을 보는 것도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 글 싣는 순서 1. 집, 문화로서 과거 이해하기 -과연 전통은 존재하는가 2. 집은 문화 유기체다 3. 자연환경과 집 4. 기술 발전과 집 5. 사회환경과 집 6. 생활과 집 7. 사고변화와 집 8. 사람과 집 -사람이 집을 만들고 집은 사람을 만든다 자연환경은 모든 문화의 출발점이다. 그 지역의 자연환경이 어땠는가에 따라서 문화의 발전 방향이 달라진다.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는 집은 인공 환경이라는 점에서 행동뿐만 아니라 미감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뒷간에 앉아 대소변을 보는 것도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새마을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골은 초가집의 부드러운 곡선과 자연 풍광이 어우러지는 모습이었다. 지금의 슬레이트 지붕과 콘크리트 평지붕으로 이뤄진 모습하고 사뭇 달랐다. 70년대 이전의 시골에서 생활했던 분들은 고향 풍경을 부드러운 초가집 지붕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굴뚝의 연기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쌀의 품종이 달랐다면 초가집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나 느낌이, 우리가 지금 인식하는 것하고 큰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예전의 볏짚은 지금하고 다르기 때문이다. 요사이 재배하는 품종은 볏짚이 짧아 초가를 얹는 데 사용할 수 없다. 용인 민속촌에서도 초가를 얹을 때 사용할 벼를 따로 심고 있으며, 서천의 이하복(李夏馥)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97호)에서도 초가를 잇는 데 쓸 벼를 별도로 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만일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벼의 품종이 달랐다면 초가집도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초가의 곡선은 재래 품종의 볏짚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벼의 품종이 달랐다면 초가집은 지금과 같은 부드러운 곡선이 나오지 않고 직선을 이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매일 보는 산하는 우리의 미의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우리나라 산하는 강원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다. 기암절벽을 보려면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야 할 정도로 산세가 완만하다. 사람들은 자라면서 만난 자연환경을 자신의 미의식 기준으로 삼는다. 요즘에는 실내 조경을 할 때 대나무를 많이 심고 있다. 대나무는 중부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난대성 식물이다. 이렇게 대나무를 많이 심는 것은 음지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경에 대해서 일부 사람들이 왜색(倭色)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렸을 때 대나무를 보지 못했고 대나무라면 일본을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남쪽에서 대나무를 보고 자란 사람이라면 왜색이라는 비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주변 자연환경에 따라 사람의 미의식이 달라진다. 한·중·일 삼국의 뒷간 비교 개방형 화장실은 서양에서도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같은 책에서 소개한 일본인의 체험담에 따르면 1957년도 미국 대학의 뒷간도 칸막이 없이 좌우가 트인 형태였다고 한다. 또한 고대 로마 시대의 화장실도 성별의 구분은 있었으나 좌우의 칸막이가 없었다. 카투사로 근무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은 어떠한지 모르겠지만 옛날의 미군 화장실에 좌우는 칸막이가 있으나 앞에는 문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칸막이가 없는 화장실의 형태는 동서고금을 통해 오랜 역사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과 우리의 뒷간은 모양이 다르다. 일본의 경우는 폐쇄적인 구조를 했고,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의 중간 형태였다고 한다. 또한 중국은 좌식 변기가 많이 발전했지만 우리나라와 일본은 쪼그려 앉아 용변을 보았다. 변기의 형태가 그렇게 다른 것은 중국은 입식 생활을 했고 우리나라와 일본은 좌식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용변을 보는 방법에서도 차이가 있다. 일본은 벽을 보고 앉아 용변을 보고 중국과 한국은 문 쪽으로 앉아서 본다. 일본인이 용변을 볼 때 돌아앉는 것은 남이 실수로 문을 열었을 때 성기보다는 엉덩이가 보이는 것이 덜 부끄럽다는 일본인 특유의 관념 때문이다. 그 때문에 변기 앞에 가리개를 발명했다. 또한 여성들이 대소변을 보는 소리에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에 오줌을 눌 때는 하인이 뒷간 앞에서 항아리에 물을 푸는 소리를 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녀유별’의 유교 덕목에 따라 남자 변소는 사랑채에, 여자 변소는 안채에 별도로 두었다. 일본에서는 안과 밖에 변소를 따로 두었지만, 바깥 변소는 밖에서 일하는 사람이, 안의 변소는 밤에 사용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같은 이용 방법의 차이를 두고 김광언은 한국은 명분을 중요시했고, 일본은 실리를 중요시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남녀유별의 화장실 《동아시아의 뒷간》이라는 책을 통해 본 뒷간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기능성을 원칙으로 한다. 일본 역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일본에서 변소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대소변이 농사에 유용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다. 그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돼지우리에 이웃하여 화장실을 만드는 것도 변소의 기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변소도 생각에 따라 구조가 달라진다. 우선 변소에 칸막이가 있고 없고 하는 문제는 용변을 보는 것에 대한 생각하고 관계가 깊다. 대소변을 볼 때 성기가 노출되는 것을 부끄러워하든지 또는 대소변을 보는 것이 불결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칸막이를 설치하여 가리려고 할 것이다. 반대로 인간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자연적인 생리 현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칸막이가 없어도 거리끼지 않는다. 또한 일본 다이묘(大名)의 화장실은 매우 넓다. 그 이유는 갑작스러운 자객의 습격 때 칼을 사용하기 위함이다. 결국 생각의 차이가 화장실 구조를 다르게 하는 원인이 된다. 또한 한국은 남녀유별의 사고로, 일본은 실용적인 이유로 화장실을 구분했다. 같은 남녀유별이라도 일본은 여자를 천시했기에 귀족의 집에서는 화장실을 구분해서 사용했다. 이처럼 남녀유별을 어떻게 생각하는 가에 따라 화장실의 배치가 달라진다. 또한 일본의 소변용 화장실 가운데는 서로가 마주보고 누도록 한 곳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그러한 구조의 화장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이유는 성기 노출을 금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찮게 생각하는 변소도 생각에 따라 구조와 배치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田 ■ 글 최성호 ※ 글쓴이 최성호는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서 ‘산솔도시·건축’을 운영 중입니다. 주요 건축작품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유치원·박물관·인문관·약학관, 데이콤중앙연구소, 삼보컴퓨터사옥, 홍길동민속공원 마스터플랜, SK인천교환사 등이 있습니다. 산솔도시건축 02-516-9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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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생각이 변하면 생활이 달라진다(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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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의식주를 바꾼 종교의 힘
- 근세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사상의 변화를 국가가 주도한다는 원칙은 사라졌으나, 외세에 의해 강제된 변화는 국가가 주도했던 만큼이나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외세를 등에 업고 들어온 기독교가 우리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서구의 합리주의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면서 조선시대의 유교적 시설과 색채는 많이 사라졌다. ■ 글 싣는 순서 1. 집, 문화로서 과거 이해하기 -과연 전통은 존재하는가 2. 집은 문화 유기체다 3. 자연환경과 집 4. 기술 발전과 집 5. 사회환경과 집 6. 생활과 집 7. 사고변화와 집 8. 사람과 집 -사람이 집을 만들고 집은 사람을 만든다 종교는 생활의 변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주도하여 많은 불교 행사를 치렀고 절을 지었으며, 정신적 지주로 자리하도록 왕조가 끝날 때까지 왕사나 국사 제도를 유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모든 것이 불교하고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갑자기 변하기 시작하고 도시의 모습도 달라진다.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조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초기부터 유교적 이념에 의한 획일화된 원칙 아래 사회가 재편되는 과정을 겪었다. 유교 이념 아래 조성된 도시에는 관아, 객사 및 향교 등 통치에 관련된 건물이 동일한 원칙 아래에 조성됐다. 그리고 모든 도시는 행정 기능에 치우쳐 있어서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도시들은 활기를 잃고 침체된 상태에 있었다. 서울조차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 때문에 도성 안에는 유희 시설이 드물었고 또 도시경관에 변화나 화려함을 안겨 줄 수 있는 불교 사찰도 없어 매우 건조한 분위기였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다채로운 삶에서 조선시대의 건조한 삶으로 바뀐 중심에는 종교의 변화가 있었다. ※ 장례 제도에 미친 종교의 영향 장례 제도도 종교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장례 제도 자체가 갖는 보수성 때문에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삼국유사》를 보면 불교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에게 매우 다양한 장례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시신을 화장하는 것은 왕의 특권이라고 할 정도로 화장은 일반적인 장례법이 아니었다. 통일신라 말까지도 화장을 하지 않고 가매장한 뒤, 유골(遺骨)만을 모아 부도(浮屠)를 세운 경우가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야 불교식 장례법인 화장이 일반화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도 화장을 한 후 뼈만 다시 모아 매장하는 경우가 있었다. 매장이 일반화되고 시묘(侍墓)살이를 하는 것은 유교가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린 뒤다. 지금처럼 매장하고 조상을 모시는 것이 중요한 삶의 일부가 된 것은 전적으로 유교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교가 불교였다면 화장이 일반적이고, 불교의 예법에 따라 천도재(薦度齋)나 사십구재(四十九齋)를 지냈을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기독교가 대중화되고 나서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제사를 모시지 않는다. 조상에게 절하지 않는 것도 십계명 중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제1계명을 지키기 위함이다. 18세기 천주교 박해의 시발이 된 것도 천주교도가 제사를 모시지 않는다는 이유인 것을 보더라도 종교가 장례법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가묘 제도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보겠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유교를 종교라고 말하기에는 힘든 면이 있다. 유교의 목적은 ‘질서유지’에 있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 같은 생각에 동의한다. 유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사회질서를 원활하게 유지하려는 지도 이념이라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유교는 질서유지를 목적으로 했기에 ‘예’를 근본으로 생각하고 발전시켜 왔다. 그것에 대한 방편으로 관혼상제에 대한 예법, 특히 상례와 제례를 중요시했다. 상례와 제례의 중심에는 가묘 제도가 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유교적 이상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묘 제도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유교가 지도 이념으로 자리는 잡았지만 실생활에 구현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가묘의 설치도 원활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대부 계급에서도 가묘의 설치가 미미했던 것 같다. 세종 13년 기록에 의하면 “사대부들이 가묘를 설치하도록 계축년을 기한하여 고찰해서 죄를 과하게 하니, 그렇다면 죄를 범하는 사람이 많아져 이루 다 다스릴 수 없을 것이오니 청하건대 무오년으로 기한을 정하소서.” 라고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란을 지나면서 양반들은 가묘를 세우는 것에 열중하게 된다. 이것은 전쟁 후 농공행상의 결과 양인이 신분 상승을 하게 되는 등 사회 질서가 흔들리자, 유교라는 이념을 통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 조선, 집에 색칠하는 것을 금하다 개략적이나마 종교가 우리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이번에는 종교의 변화가 집에 어떠한 여파를 주었는지 알아보자.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로 대표되는 유교의 생활관은 자신을 끝없이 자제하고 다스려 나가는 것을 선비의 덕목으로 보았다. 또한 유교는 사회의 질서 유지를 근본으로 하는 사상이다. 따라서 분수(分數)에 맞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은 사회에서 지탄의 대상이 된다. 아무리 자신이 돈이 많다고 해도 드러내 놓고 사치를 즐긴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사회다. 임금조차도 나라가 우환에 빠졌을 때는 먹는 것까지도 삼가는 형편에 아무리 재물이 있다 한들 신하 또는 일반인이 사치를 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유암(流巖)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쓴 《산림경제山林經濟》 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좋은 집자리는 냇기슭에서 찾고 계류의 곁에 따로 3∼4칸 정자를 짓고, 가목유화(佳木幽花)를 심고, 재중(齋中)에 들여놓은 제구(諸具)는 마땅히 아담한 것을 쓰며 속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추울 때는 추운 맛을, 더울 때는 더운 맛을 알게 한다면 선비가 살 만한 곳이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선비들의 보편적인 사고였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화려한 집을 짓고 살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현재는 자신의 부가 정당하다면 드러내 놓고 사치를 해도 사회에서 눈 감아주는 편이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는 조선시대의 정서가 남아 있어서 외제차를 타는 사람이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절제하는 사회 분위기는 집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한옥을 보면 화려하게 장식한 집을 보기 어렵다. 이것은 조선조 초기부터 집에 색을 칠하지 못하게 했던 까닭이다. 세종 때는 부모로부터 물려받거나 기존의 집을 구입한 경우 그리고 사당 등 외에는 색을 칠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것은 유교의 덕목이 집의 구조까지 좌우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어찌하였든 그러한 원칙이 조선조 내내 살아 있었다. 그와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화려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조의 집은 자신의 재산하고 관계없이 크게 짓거나 화려하게 치장할 수 없었다. ※ 다층 누각에 화려한, 고려 귀족의 집 그렇다면 고려시대의 집은 어떠했을까. 세종 때 집에 색칠을 못하도록 규제한 것을 뒤집어 해석하면, 세종조 이전의 집은 색을 칠해도 되었고 또한 그렇게 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집은 매우 화려하고 다양한 모습이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교였다는 것을 생각하며 되돌아 보자. 불교에서는 자신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해탈의 경지에 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깨달음을 얻었거나 얻기 위해 노력하는 스님들은 자신의 행동을 자제하고 정결하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일반 대중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불교에서는 자비를 강조하되 유교처럼 개개인의 생활을 일일이 규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의 획득을 죄가 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고려시대는 건국 초기부터 호족(豪族) 또는 귀족들이 대토지를 소유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중앙의 정계에 진출했기에, 생활 기반이 한꺼번에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귀족의 삶은 조선시대와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또한 조선조 초기까지 사병(私兵)을 거느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꽤 많은 귀족은 자신의 집에 사병을 두었을 것이다. 적으면 수십 명에서 많으면 수백 명까지 거느렸을 거라고 생각할 때, 집의 규모가 지금 남아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집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그 정도라면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이 거처할 방이 있어야 하며, 훈련할 장소도 있어야 하고 또 장수들이 모여서 회의할 장소가 있어야 한다. 지금의 한옥하고 비교할 때 구조나 크기에 있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전형적 군사시설인 여수(麗水) 진남관(鎭南館)(국보 제304호)과 통영(統營) 세병관(洗兵館)(국보 305호)의 구조를 보면 일반 건물하고 다름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자료를 보면, 한나라 때 사합원에는 사방을 감시하는 누각이 있었다. 중국의 예로 미뤄 짐작해 볼 때 서로를 견제했던 귀족의 집에는 감시를 위한 망루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사병을 거느리던 귀족의 집 구조는 일반 집하고 현저하게 달랐을 것이다. 창검과 갑옷을 입고 움직이는 집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협소하거나 낮아서는 행동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으므로 집이 작으면 곤란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집의 구조가 변하게 된 주요 원인 중의 하나가 조선조 초 태종이 이루어 낸 사병혁파(私兵革罷)라고 생각한다. 사병을 혁파하면서 귀족의 집에서 군사적 면이 없어지고 순수한 주거의 성격만이 남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고려시대 귀족의 건물은 매우 화려하고 규모도 대단했던 것 같다. 《고려사》에 있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무신시대의 대표적 인물인 최충헌(崔忠獻)의 경우 집에 격구장(擊毬場)을 만들기 위해 주변의 집 수백 채를 허물었다는 기록이 있고, 호족이 지은 집이 궁궐보다 화려해 왕이 빼앗아 궁궐로 만들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리고 왕이 행차할 때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것이 싫어 큰길가에 높은 집을 짓지 못하게 했고 길가의 누각까지도 부수게 했다. 그런가 하면 정세유(鄭世裕)라는 사람은 최충헌의 아들을 사위로 삼고 그 세력에 의지해 저택을 몇 리에 가득하게 지었다고 한다. 담에도 화려한 치장을 하고 큰 다락을 지었으며, 벽에 금을 칠하고 붉은 옻칠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만큼 고려시대 귀족의 집은 다층 누각에 화려한 정도가 매우 심했던 것 같다. 그러나 조선조에 지어진 집을 보면, 만석을 거둬들였다는 선교장을 보아도 규모가 크지 않으며 화려하지도 않다. 필자가 본 자료 중에서 조선시대에 가장 호화로운 집은 정조 때 거상인 김한태(金漢泰)(1762∼?)의 집 정도다. 그러나 김한태의 집도 겉보기에는 대단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밖에서 보면 몇 채가 있는 것 같았으나 안이 통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한다. 어쨌든 조선시대의 집은 재산을 크게 모았다고 해도 사치스럽지 않은 것은 유교에 영향을 받은 사고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남녀유별의 집 구조 유교적 질서가 우리의 생활에 미친 영향을 한 가지 더 살펴보자. 유교의 성리학적 질서는 남녀의 구별을 엄하게 요구했다. 조선조는 초기부터 이 같은 남녀유별(男女有別)의 유교적 질서를 지키도록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 내려온 관습이 일시에 변할 수는 없다. 여러 자료를 볼 때 최소한 조선조 중기까지는 과거의 관습이 이어져 왔던 것 같다. 대부분 사람들은 조선조에는 부부가 안방과 사랑방에서 별거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미암일기〉를 보면, 당시만 하더라도 부부가 따로 방을 쓰는 것이 일반은 아닌 모양이다. 그리고 여성은 집안 대소사 결정에 있어 어느 정도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 〈미암일기〉를 보면 집을 짓는 데 안채를 먼저 짓고 사랑채는 나중에 증축했다. 이러한 집짓는 순서를 볼 때 16세기까지만 해도 남녀 구별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같은 시대에 지어진 관가정을 보면 안채로 들어가는 문에 내외벽(內外壁)에 대한 고려가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조 후기에 지어진 집들에는 예외 없이 내외벽이 설치된 것하고 비교해 본다면, 조선조 중기까지만 해도 집 구조를 통해 볼 때 내외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집에서 내외의 개념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 남녀유별의 사고가 자리 잡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집의 형태가 사고의 변화를 따라가기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집을 새로 짓는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고, 이미 생활하던 관습이 있어 집을 마음대로 뜯어고치는 것 또한 쉽지 않기 때문에, 집은 항상 생각의 변화를 뒤쫓아 가기 마련이다. 집의 보수적인 성질은 온돌이 정착하는 데 거의 천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집 구조에서 내외의 구별이 강조되는 형태가 나타나는 것은 조선조 후기에 들어서다. 이러한 변화는 17세기 이후 예학(禮學)이 발전하고 남녀 유별이 심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남녀 차별의 집 구조는 조선조 후기에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 사고를 바꾸는 가장 강력한 힘은 종교 다음으로 기독교가 전래된 뒤에 나타난 우리 생활의 변화를 살펴보자. 수백 년을 내려온 전통적인 좌식 생활이 서양식 입식 생활로 급격하게 바뀐 것은 기독교 때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사람의 성격은 대개 보수적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집의 구조가 변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은 사람들의 보수성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그 같은 보수성을 한 번에 없애는 것이 있으니 바로 종교다. 생활의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 때문이다. 만일 종교를 통한 문화 이입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변화가 그리 빠르게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전래라는 상황에 덧붙여 당시 서구 열강의 힘에 대한 동경이 서구 문화의 이입을 쉽게 했다. 이처럼 종교는 우리의 사고를 바뀌게 하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다. 종교가 바뀌었을 때 나타나는 생활의 변화는 다른 어느 것보다도 강력하고 신속하다. 종교를 바꾼 경우 개종(改宗)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생활 전반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구한말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로 우리의 생활은 급격하게 달라졌다. 구한말의 기독교는 단순히 종교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국제 환경 때문에 서구식 사고 및 생활 방식 전반을 옮겨오는 역할을 했다. 종교의 이입移入은 해당 종교를 위한 건물 신축 외에도 관혼상제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과거하고 전혀 다른 생활환경을 강요했다. 田 ■ 글 최성호 ※ 글쓴이 최성호는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서 ‘산솔도시·건축’을 운영 중입니다. 주요 건축작품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유치원·박물관·인문관·약학관, 데이콤중앙연구소, 삼보컴퓨터사옥, 홍길동민속공원 마스터플랜, SK인천교환사 등이 있습니다. 산솔도시건축 02-516-9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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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의식주를 바꾼 종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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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의식주를 바꾼 종교의 힘
- 사람의 사고를 좌우하는 것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다. 19세기말 이후 종교의 의미가 퇴색하면서 종교라는 단어보다는 ‘이데올로기(이념)’가 사고를 지배하는 것으로 대두했지만, 이데올로기라는 것도 넓은 관점에서 보면 종교하고 별로 다를 게 없다. 모든 민족 또는 국가에는 미신(迷信)이건 종교이건 간에 무엇인가 의지하고 믿는 대상이 있었다. 그만큼 역사에서 종교의 영향은 아주 큰 것이어서 의식주 모든 부분에 나타났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는 고려청자이고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는 백자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두 도자기를 보면 완전히 다른 미감을 보이고 있다. 고려청자는 매우 화려하면서도 정치(情致)한 미를 자랑하고, 조선백자는 투박하지만 단아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 같은 차이는 도자기가 만들어진 사고의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생각이 지배하는 미감 고려시대는 귀족사회의 화려함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그러한 고려시대의 특징은 고려불화, 특히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하고 달리 조선시대는 매우 검박(儉薄)함을 존중하는 시대였다. 조선 사회에서 화려함은 지양해야 할 덕목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선비들은 순백색의 백자를 선호했던 것이다. 같은 백자라고 해도 중국의 백자와 조선의 백자는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중국의 청화백자를 보면 백자라도 화려하고 정치한 모습이지만 조선의 백자는 그렇지 않다. 그런 것은 바로 생각의 차이에서 나온다. 수더분한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정치한 것은 오히려 부담이 된다. 이처럼 어떠한 생각을 갖는가에 따라 미감까지도 지배를 받는 것이 사람이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수더분하면서도 투박한 현대그룹의 사옥과 화려하면서도 정갈한 삼성그룹의 사옥을 비교해 보면 두 창업주의 가치관, 기업관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변소에서 화장실로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는 우스개 소리로 ‘화장실과 처가는 멀면 멀수록 좋다’고 했다. 그러나 요사이는 ‘화장실과 처가는 가까울수록 좋다’고 한다. 그간 우리의 생각이 많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화장실 문제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우리의 생각이 변한 것이고, 처가의 멀고 가까운 문제는 여성에 대한 인식 변화와 그에 따른 여성의 사회활동 증가 때문이다. 우선 변소의 변화를 이야기해 보자. 재래식 변소를 개선하여 수세식 변기를 설치하면서, 변소에 대한 인식이 급격히 바뀌었다. 과거에는 변소를 더럽고 냄새가 나는 곳으로 인식해 되도록 집에서 멀리 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과거의 변소는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설치했다. 그러나 구한말에 서양식 건물을 도입하고 일제 강점기(强占期)에 일본식 건물이 지어지면서 변소가 실내로 들어오는 것에 익숙해졌다. 설비의 발달로 수세식 변소가 도입되면서 변소에 대한 생각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수세식 변소가, 변소는 냄새나고 더러운 곳이라는 이미지를 씻어 주면서 변소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화장실’이라는 새로운 이름도 인식 개선에 일조를 하면서 집안으로 변소가 들어오는 것이 급속도로 진행됐다. ‘변소’라는 이름 대신 ‘화장실’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자리 잡으면서, 과거의 냄새나고 파리가 들끓는 곳에서 우아하게 몸단장을 하는 곳으로 변신한 것이다. 생각의 변화는 화장실에 대한 관념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나갔다. 이제 화장실은 생리적인 문제만을 해결하는 곳이 아니라 충전(充電)을 위한 장소로 인식하게 됐다. 따라서 화장실을 보다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만들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이런 변화는 개인의 집에서뿐만 아니라 기업, 최근에는 고속도로 화장실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삼성그룹에서는 화장실을 ‘재창조의 장소’로 인식해 최고급의 시설로 개조하기도 했다. 생각이 삶의 방식을 결정지어 화장실 문제가 기술의 발전에 따라서 바뀐 것이라고 한다면, 처가하고의 문제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여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서 발생된 현상이다. 여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사회 활동이 늘어났다. 이런 변화는 필연적으로 육아에 관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관습상 시부모가 아이들을 키워 주는 것이 아직은 낯설고, 그렇다고 아이를 믿고 맡길 만한 곳이 없으니 결국 친정에 맡기게 된다. 딸을 시집보낸 죄를 보상해 주겠다는 친정어머니의 모성애가 더해져 새로운 사회 풍토를 만들어 낸다. 그러한 변화는 우리네 생활을 달라지게 한다. 예전 같으면 결혼해서 시부모님하고 같이 살거나 자신의 직장 가까운 곳에 집을 얻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은 애를 낳을 때가 다가오면 처가에 가까운 곳으로 이사 가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으로 볼 때 조선시대 전기 또는 고려시대에 가까운 삶의 방식이다. 최근 들어 홀로 거주하는 원룸을 많이 짓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유학이나 직장 때문에 다른 지방으로 나가지 않는 한, 결혼해서 분가하기 전까지는 부모하고 함께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제는 많은 사람이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려고 일찍 독립해서 사는 것을 원한다. 한 사람이 거주하는 소규모의 주거 공간을 많이 짓는 요즘의 추세도 그러한 사고 변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 가에 따라 삶의 방식이 결정되고, 그에 따라 삶을 담는 주거 방식에도 변화가 생긴다. 의식주를 바꾼 종교의 힘 사람의 사고를 좌우하는 것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다. 19세기말 이후 종교의 의미가 퇴색하면서 종교라는 단어보다는 ‘이데올로기(이념)’가 사고를 지배하는 것으로 대두했지만, 이데올로기라는 것도 넓은 관점에서 보면 종교하고 별로 다를 게 없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교라는 개념보다는 자신이 믿는 이념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유교도 종교라기보다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어쨌든 19세기까지 종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를 이끌어 가는 가장 대표적인 사고 체계였다. 모든 민족 또는 국가에는 미신(迷信)이건 종교이건 간에 무엇인가 의지하고 믿는 대상이 있었다. 그만큼 역사에서 종교의 영향은 아주 큰 것이어서 의식주 모든 부분에 나타났다. 조선조 선비들이 많이 입었던 심의(深衣)나 유건(儒巾)도 유교하고 함께 전파된 일종의 예복이다. 종교가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문화재 관련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물 이상으로 지정된 문화재 가운데서 60퍼센트 정도가 불교 문화재이고, 그밖의 문화재도 유교하고 관련 있는 것이 많다. 그리고 세계의 많은 문화유산 가운데 대부분이 종교와 관계돼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종교가 인간의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종교관은 곧 인생관이다 사람이 종교를 믿게 되면 종교의 모든 것을 자신의 행동 원칙으로 삼는다. 그 원칙의 기본은 종교의 경전에 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반야심경般若心經》 《화엄경華嚴經》 《금강경金剛經》 《법화경法華經》 등을 독송(讀誦)하며 그 가르침을 생활의 근본으로 삼는다. 유교를 믿는 사람들은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읽으며 그 내용을 생활의 지침으로 삼는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성경을 읽으며 생활의 좌우명으로 삼는다. 최근에는 서구 세계에서 종교의 힘이 미약해지고 있다. 특히 서구 사상을 지배해 왔던 기독교의 쇠퇴(衰退)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는 과학의 발전으로 신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이 과거하고 같지 않다는 데 원인이 있는 것 같다. 반대로 요즘의 서구에서는 동양의 종교 특히 불교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불교가 기독교와 같은 의타적인 종교가 아닌 자신에 대한 성찰(省察)에서 비롯한 종교라는 특징 때문에 기독교에 만족하지 못하는 지식층의 관심을 끌고 있다. 다른 나라의 불교보다는 미미하지만 한국의 불교도 미국이나 유럽에 진출해 포교(布敎) 활동에 열심이다. 이렇게 믿는 종교가 바뀌면서 서구에는 그로 인한 많은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이미 우리의 불교도 포교를 위해 미국에 절을 짓고 있다. 만일 한국의 불교가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다면 서구의 마을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던 교회나 성당 대신 한국의 절이 자리 잡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종교의 영향력은 어떤 이데올로기보다도 강력하다. 믿음의 차이는 곧 인생관의 차이로 나타난다.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기독교도들이 선교에 열심인 것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로 나오는 성경 구절에 충실하기 위함이다. 유교는 질서의 구축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상하 간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예(禮)의 비중이 높다. 예를 지키기 위해서 유교는 절차를 중요시하고 그에 대한 방법을 기술한 책을 높이 평가한다. 《예기禮記》와 《주자가례》가 그 대표적인 저술이다. 그러한 책은 유교를 국교로 정한 조선의 법률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보면 그 영향을 쉽게 알 수 있다. 종교적 이상을 구현하는 종교 시설 종교의 특성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건축물은 종교 시설이다. 종교 시설은 다른 어떤 건물보다도 종교적 신념이 구체화되는 시설이기 때문에 종교에 따른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종교 시설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첫 번째로 불교가 가져온 변화를 살펴보자. 불교의 국교화는 이전의 샤머니즘을 종교로 받아들여 유지해 온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 우리나라의 종교였던 샤머니즘 또는 토착 신앙의 건물과 불교의 건물은 전혀 다른 형태였을 것이다. 지금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해져 고유의 문화유산으로 인식하고 있는 탑도,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진신사리를 가지고 들어온 643년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에 없던 건축물이다. 불교가 국교로 지정되고 불전과 탑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게 되면서 한반도의 도시 구조는 이전하고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원종흥법·염촉멸신原種興法·厭觸滅身〉 조에는 경주를 묘사하면서 ‘절이 별처럼 많았고 탑이 기러기처럼 늘어섰다(寺寺星張 塔塔雁行)고 표현했다. 불교가 공인되기 전의 경주하고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을 것이다. 아무리 불교가 국교로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문화의 고유한 성격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외래문화는 토착 문화와 갈등을 겪으면서, 일부는 변형되거나 토착 문화를 수용하면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렇게 변형된 예가 현재 절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산신각(山神閣), 칠성각(七星閣) 등이다. 이들 건물은 불교가 도입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토착 신앙이 불교 안으로 들어와 융화된 흔적이다. 근대에 들어 일어난 불교정화운동 가운데는 본래의 불교하고 관계없는 산신각 등을 없애자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운동이 결국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은 그만큼 토착 신앙의 생명력이 끈질기다는 것을 보여준다. 산신각 등 토착 신앙의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해도, 불교가 전래된 뒤에 삼국시대의 삶은 그 이전하고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종교 건물은 종교적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유산인 불국사를 보면, 불국사 자체가 현세에 불국토(佛國土)를 구현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국사의 대웅전 영역은 《법화경》의 세계를 현재화하려는 열망의 표현이다. 《법화경》 〈견보탑품見寶塔品〉의 내용을 보면 “내 이제 사바세계의 석가모니불 계신 곳에 가서 석가모니불과 다보여래의 보배탑에 공양하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사바세계는 곧 청정하게 변하니…….” 라고 써 있다. 석가모니불이 《법화경》을 설하는 곳이 곧 불국토가 된다는 내용을 보여준다. 불국사는 현세의 불국토화를 위해 지은 공간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만큼 모든 종교 건물은 종교적 이상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불교가 들어온 이래로 조선이 건국하기까지 1000여 년 동안 수많은 건물이 불교의 세계관에서 지어졌다. 불교적 세계관은 유교가 도입되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유교를 바탕으로 한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는 노력이 시도된다. 조선왕조는 불교의 세력을 억누르고 유교의 정신을 고양하기 위해, 도성 안에 있던 절을 밖으로 추방하고 유교의 성현을 모시는 대성전을 전국에 세우기 시작한다. 또한 개인에게는 가묘의 건립을 의무화하고 사대부의 제사를 법으로 정한다. 그 같은 변화의 결과로 도성은 과거하고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뒤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불교 건물이 도성 밖으로 쫓겨남으로써 활기찬 모습은 사라지고 적막(寂寞)한 도시로 변하게 된다. 조선시대의 거리 모습은 나중에 기독교가 들어옴으로써 다시 한 번 일대 변화를 맞이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가져온 변화의 첫 번째는 교회라는 서구풍 건축물의 신축이다. 과거의 건물하고 전혀 다른 교회는 우리네 도시 색깔을 바꿔 놓았다. 성공회 강화도성당(사적 제424호)처럼 우리의 건축에 서양의 종교를 접목시키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건축물에는 서양 건축양식을 그대로 도입했다. 명동성당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건물은 그간 수직적 요소를 찾아 볼 수 없었던 우리의 건축 환경에 새로운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구한말에 찍은 명동성당 주변의 사진을 보면 교회 건물이 얼마나 이질적이었는가를 쉽게 느낄 수 있다. 田 ■ 글 최성호 ∴ 글쓴이 최성호는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서 ‘산솔도시·건축’을 운영 중입니다. 주요 건축작품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유치원·박물관·인문관·약학관, 데이콤중앙연구소, 삼보컴퓨터사옥, 홍길동민속공원 마스터플랜, SK인천교환사 등이 있습니다. 02-516-9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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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의식주를 바꾼 종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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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달라진 우리 생활, 달라진 집(4)
- 침대, 텔레비전으로 달라진 생활 요즈음 같이 텔레비전을 향해 배치되는 응접세트처럼 천편일률(千篇一律)적인 배치는, 우리의 생활을 텔레비전 중심으로 고정시켜 버리고 만다. 응접 세트가 텔레비전을 향해 고정돼 있는 모습은 중산층 아파트의 거실 풍경을 찍은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을 보면 모든 아파트 가구의 중심에 텔레비전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반대쪽에 소파가 놓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배치는 여러 가지 방향으로 모임을 갖는 것을 힘들게 할 뿐 아니라, 대화의 다양성을 제약하게 된다. 1. 집, 문화로서 과거 이해하기 -과연 전통은 존재하는가 2. 집은 문화 유기체다 3. 자연환경과 집 4. 기술 발전과 집 5. 사회환경과 집 6. 생활과 집 7. 사고변화와 집 8. 사람과 집 -사람이 집을 만들고 집은 사람을 만든다 침대가 높여 준 프라이버시 우리 생활에서 최근 들어 많은 변화가 생긴 부분이 침구다. 요즘 사람들은 침구로 침대를 선호한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 ‘이불 개기가 싫어서’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침대를 선호하는 것은 은연중 서구의 삶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침대가 들어오게 되면서 달라지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방의 용도가 제한된다는 점이다. 한옥에서는 방의 용도가 확정돼 있지 않았다. 한옥의 방은 거실과 응접실, 식당, 침실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됐다. 따라서 방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이불만 깔려 있지 않으면 편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침대가 들어선 방은 개인의 사생활이 앞서는 곳이다. 침대가 있는 아이의 방은 부모들도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한다. 이렇게 사생활이 중요하게 된 것은 가구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전과 같이 창호지 문으로 구획된 방은 창호지의 차음(遮音) 효과만큼 사생활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완전하게 닫힌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도 그만큼 사생활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양에서 들어온 집 구조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닫혀 있다. ‘군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행동을 조심한다.’고 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행동을 조심하기가 쉽지 않음을 뜻한다. 닫힌 방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서로 얼굴 붉히는 꼴을 당하지 않으려고 남의 방에 들어갈 때는 조심하게 된다. 폐쇄적인 방에 침대까지 들여놓으면 이곳은 더욱 사적인 영역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침대가 있는 안방은 부부만의 공간으로 인식해 어느 누구도 감히 들어갈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향해 앉은 생활 새로 갖추어지는 각종 가구는 생활에 또 다른 변화를 가져온다. 가정의 거실에는 대부분 응접세트와 텔레비전이 설치돼 있다. 소파와 탁자가 들어서고 나면 가구가 없는 거실하고 비교해서 행동이 많이 달라진다. 32평형 아파트인 필자의 집에는 응접세트라는 것이 없다. 우리 집에는 손님이 적게는 서너 명에서 많게는 열댓 명까지 자주 오는 편이라 손님 접대용으로 쓰는 ‘응접세트’가 있으면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만일 집안에 응접세트가 있다면 많은 손님을 초대할 수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대여섯 명 정도다. 그 이상의 손님이 온다면 탁자와 소파를 옮기느라 번거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구가 거실을 차지하고 나면 손님을 초대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과거처럼 집에 손님을 자주 모시지 못하는 것은 사생활을 중요시하는 경향도 있지만, 많은 사람이 왔을 때 맞이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한 것도 이유가 된다. 요즈음 같이 텔레비전을 향해 배치되는 응접세트처럼 천편일률(千篇一律)적인 배치는, 우리의 생활을 텔레비전 중심으로 고정시켜 버리고 만다. 응접 세트가 텔레비전을 향해 고정돼 있는 모습은 중산층 아파트의 거실 풍경을 찍은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을 보면 모든 아파트 가구의 중심에 텔레비전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반대쪽에 소파가 놓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배치는 여러 가지 방향으로 모임을 갖는 것을 힘들게 할 뿐 아니라, 대화의 다양성을 제약하게 된다. 우리나라 아파트의 가구 배치가 획일적으로 구성돼 있다는 것은 중산층의 생활이 얼마나 단순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가정에서 여가 생활의 대부분을 오락성이 강한 텔레비전 중심으로 보내기 때문에 가구의 배치를 다르게 하거나 일부를 없앤다는 것은 어렵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서 가구의 배치를 바꾸거나 아예 응접 세트를 없애 버린다면 과거하고 전혀 다른 행위가 발생함을 알게 될 것이다. 텔레비전의 대형화, 장식장 키를 낮추다 텔레비전에 관한 이야기를 한 가지 더 해보자.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아파트 거실에 놓인 장식장의 높이는 60센티미터 정도였다. 그 높이로 장식장을 만드는 이유는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20인치 대의 텔레비전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장식장 높이를 문갑하고 비슷한 30센티미터 정도로 낮출 경우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할 때 내려다보게 된다. 그런 자세가 그리 편하지 않으므로 장식장을 일부러 높인 것이다. 이렇게 높던 장식장이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30센티미터 정도로 낮아졌다. 이것은 텔레비전의 대형화 때문이다. 텔레비전이 40인치 이상으로 커지면서 기존의 높은 장식장 위에 텔레비전을 놓으면 올려다보게 되므로 방송을 시청하는 데 불편하다. 거실의 장식장도 이러한 변화에 맞추어 낮아진 것이다. 이렇게 가구의 변화에 따라 집의 내부가 바뀌는 예는 안방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 안방의 바닥 마감재에도 변화가 왔다. 예전 같으면 안방만은 한실 분위기를 내려고 대부분 민속 장판 같은 한옥풍의 장판류를 깔았으나 요사이는 마루 무늬 장판으로 바뀌고 있다. 마루 무늬로 꾸민 것은 이제 안방의 성격이 달라졌음을 뜻한다. 침대가 안방으로 들어오면서 안방도 서구식으로 변하게 된다. 의자에 앉아 화장하기 편하도록 화장대가 높아지는 것처럼 안방에서 모든 활동이 입식 생활로 바뀐 것이다. 그런 변화에 맞추어 안방의 마감재도 과거하고 달리 거실과 같은 마루 무늬 장판으로 바뀌었다. 田 ■ 글 최성호 ∴ 글쓴이 최성호는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서 ‘산솔도시·건축’을 운영 중입니다. 주요 건축작품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유치원·박물관·인문관·약학관, 데이콤중앙연구소, 삼보컴퓨터사옥, 홍길동민속공원 마스터플랜, SK인천교환사 등이 있습니다. 02-516-9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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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달라진 우리 생활, 달라진 집(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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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달라진 우리 생활, 달라진 집(3)
- 조선시대는 농업사회를 기반으로 정착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귀소본능이 강해, 밖에서 죽는 것은 불행한 일로 생각했다. 이러한 풍습 때문에 8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이 운명할 때가 되면 병원에 있던 환자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90년대 초를 기점으로 사람이 운명할 때가 되면 병원으로 옮겨지게 됐다. 그러한 변화가 나타나는 이유는 아파트 같은 공동주거의 비율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집 구조가 달라져서 발생한 것이다. ■ 글 싣는 순서 1. 집, 문화로서 과거 이해하기 -과연 전통은 존재하는가 2. 집은 문화 유기체다 3. 자연환경과 집 4. 기술 발전과 집 5. 사회환경과 집 6. 생활과 집 7. 사고변화와 집 8. 사람과 집 -사람이 집을 만들고 집은 사람을 만든다 정성을 들여 장례를 치른 흔적이 있는가에 따라 인간 문명의 시작을 판가름한다고 한다. 죽은 자에게 예의를 표하는 행위는, 반대로 살아 있음에 대한 가치를 알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갖는 관심은 장례에 대한 특별한 의례로 표현된다. 요즘의 장례를 보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게 된다. 장례 절차가 점점 단순해지고 기간도 짧아져 가고 있다. 이것은 생활의 변화에서 비롯한 것이다. 생활이 점점 복잡해지고 시간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이제는 돌아가신 분을 추모할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어졌음을 느끼게 한다. 조선시대의 장례 절차를 보면 양반의 경우 가례(家禮)에 따라서 진행하는데, 삼년상을 치른 뒤에도 4대에 걸쳐 제사를 모시는 것이 일상화돼 있었다. 사대부(士大夫)의 생활은 그야말로 제사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상제(喪祭)가 이렇게 발전하게 된 것은 유교 국가를 표방했기 때문이다. 국가에서 가묘(家廟)를 짓는 것을 권장했고, 그렇지 못할 경우 집안에 위패를 모시도록 했다. 상제의 강요는 사회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일상사에서 상제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상제를 위한 공간이 필요해졌다. 강제에 따른 것이든 아니든 간에 유교가 집안의 덕목으로 자리 잡으면서 모든 생활이 그에 맞추어 바뀌었다. 가세가 허락하는 집은 별도의 가묘를 모셨고, 그렇지 못한 집은 대청에 자리를 마련해 위패를 모실 만큼 상제는 매우 중요한 일상사가 됐다. 생활의 모든 것을 바꾼 종교 그랬던 장례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이후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이 변화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종교는 생활의 모든 것을 바꾼다.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인습조차 순식간에 바꾸어 버릴 만큼 강력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것 자체가 사회구조 변화의 시작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장례의 격식을 보면 기독교의 장례는 조선시대의 장례 제도보다 매우 단순하다. 절차도 간단하고 추모의 의미로 하는 제사도 지내지 않기 때문에 그리 복잡하지 않다. 별도의 재실(齋室)이나 위패를 모시는 장소도 필요 없다. 기껏해야 집안에 돌아가신 어른의 영정(影幀)이나 사진을 걸어 놓은 것으로 대체하며 기일(忌日)에도 가족끼리 모여 예배를 하는 것으로 제사를 대체한다. 사대봉사(四代奉祀)라는 개념조차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이전과 같이 제사 음식을 장만하는 번거로움이 없고, 대가족이 모이는 번잡함이 사라지고 가묘도 필요 없게 된다. 장례 제도는 자연환경의 산물 자연환경과 사회 환경도 장례 제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티베트에는 조장(鳥葬)이라는 장례법이 있다. 이것은 사람의 시신을 새에게 먹이로 주는 장례법이다. 사람의 시신을 잘 다져서 새가 살점을 하나도 남김없이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영혼이 새의 몸을 빌려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고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장법(葬法)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장례 제도를 종교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자연환경의 조건에서 나온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불교 국가인 티베트에도 매장이나 화장이 있지만, 그것은 부자나 승려만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된 것은 자연환경하고 깊은 관련이 있다. 티베트의 자연환경에서는 나무를 구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화장을 할 만큼의 나무를 구하는 것은 부자만이 가능하다. 또한 땅을 파는 것이 쉽지 않은 토질(土質)이어서 매장은 일반인들에게 어려운 일이다. 기후가 우리하고 같지 않아 시신이 잘 썩지 않는 것도 조장이라는 특별한 장례 제도를 발전시킨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요사이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어느 지역의 유목민은 노인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게 되면 약간의 음식을 남겨 두고 떠났다가, 나중에 찾아갔을 때 살아 계시면 다시 모신다고 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개념으로는 고려장(高麗葬) 같은 비인간적인 장례법으로 느낄 수 있고, 그 매정함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 일이다. 그들의 생활을 이해하면 그리 매정한 것도 아님을 이해하게 된다. 유목민은 움직여야만 산다. 그들에게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부담이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버려진 노인이 스스로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그같은 선택이 전통으로 남아 독특한 장례법이 형성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달라진 생활 환경과 장례 문화 자연현상과 문화 현상은 장례법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영향을 받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의 삼일장이니 오일장이니 하는 장례는 사회의 변화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조선시대의 장례 의식은 농업사회를 기반으로 교통과 통신이 발달되지 못한 시대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사회규범이다. 예를 들어 장례 기간이 2개월로 되어 있는 것도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알맞은 기간이다. 장례 절차를 살펴보면 시신을 집 뒤뜰에 가매장했다가 장지(葬地)가 마련되면 다시 모신다. 가매장하는 것은 장례 기간이 길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신의 부패를 고려한 것이다. 지금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해 부음을 쉽게 알릴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전국 어디에서도 당일로 장지에 도착할 수 있다. 예전처럼 여유를 가지고 상례(喪禮)를 할 수 있는 사회구조가 아니란 것도 장례 일정과 절차가 단순해지는 이유가 된다. 조선시대는 농업사회를 기반으로 정착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귀소본능이 강해, 밖에서 죽는 것은 불행한 일로 생각했다. 떠돌이 생활을 하다 죽었거나 사고를 당해 집밖에서 죽었을 때는 불길하다고 하여 집에서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이러한 풍습 때문에 8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이 운명할 때가 되면 병원에 있던 환자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90년대 초를 기점으로 사람이 운명할 때가 되면 병원으로 옮겨지게 됐다. 그러한 변화가 나타나는 이유는 아파트 같은 공동 주거의 비율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공동주택에서 생활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집에서 대소사를 치를 경우 주변 사람들에게 폐가 되기 때문에 점점 집 밖에 별도로 마련한 장소에서 치르게 됐다. 예전에 많았던 함(函)을 파는 전통이 근래에 사라진 것도 소음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제는 집에서 장사 지내는 모습을 점점 볼 수 없게 되고, 장례식장을 우리의 대표적인 장례 장소로 인식하게 됐다. 결혼식을 결혼식장에서 하듯 대부분의 장례를 장례식장에서 치르게 됐다. 앞에서 이야기한 변화는 근본적으로 집 구조가 달라져서 발생한 것이다. 과거에는 농업을 기반으로 했기에 집에는 작업을 위한 넓은 마당이 있었다. 이 마당은 단순히 작업 공간으로만 이용한 것이 아니다. 집안의 대소사를 치르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혼상제를 집안에서 치를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집에 마당이 없었다면 관혼상제는 다른 모습으로 발달했을지도 모른다. 집의 구조가 가구의 높이를 결정 예전하고 비교해 우리의 일상생활 중에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던 부분은 의복이다. 이제 정장을 입는다고 하면 서양에서 들어온 ‘양복’을 생각할 정도로 우리의 의생활은 완전히 서구화됐다고 할 수 있다. 오죽하면 우리네 옛 옷을 ‘한복’이라고 부르게 됐을까. 구한말까지도 옷이라고 하면 당연히 한복을 생각했다. 그래서 서양에서 들어온 옷을 ‘양복’이라고 한 것이다. 이제는 역전돼 ‘한복’이 특별한 옷으로 전락했다. ‘개량 한복’이라고 하여 한복의 대중화를 시도하는 노력도 있지만, 이것조차도 어떻게 보면 ‘한복’이라기보다는 ‘한복’에 접근하려는 ‘양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한복과 양복은 수납 방법에서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한복은 평면 구조를 하고 있다. 따라서 한복의 수납 역시 평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네 옷장에서 수직 구조를 가진 옷장은 없다고 하는 것이 맞다. 옷을 수직으로 걸도록 만든 의걸이장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도 조선조 말기에 생긴 장이다. 조선시대에 옷을 수납하는 가구는 농이나 장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 가구는 수평으로 수납하는 구조를 갖는 것이 원칙이다. 옷을 수직으로 보관하는 것과 수평으로 보관하는 것은 가구의 구조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조선조 가구의 수납 방법에서 수직적 요소가 발전하지 못한 것은 옷의 구조가 주원인이겠지만 집의 구조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난방 방식이 온돌로 변하면서 앞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천장이 낮아진다. 그런 집에 높은 장이 들어온다는 것은 집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다. 가뜩이나 낮은 천장에 높은 장이 들어오면 더욱 낮아 보이고 답답하게 된다. 그래서 가구도 그에 맞추어 바뀌었다. 앞에서 말한 의걸이장도 조선 후기에 서양의 의복이 보급되기 시작하고, 부자들이 이전 시대보다 큰 집을 지을 수 있게 되면서 비로소 등장한 것이다. 대한제국 시절에 지어진 아산의 윤보선 생가(중요민속자료 제196호, 1907년)의 사랑채(1920년경)나 19세기말에 지어진 윤보선가(서울민속자료 제27호)를 보면 집이 크고 높다. 그 정도 규모의 집에서 의걸이장은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갓집이라고 해도 윤증 고택, 하회의 대가 등과 같이 지방에 지어진 대부분의 집에는 의걸이장이 어울리지 않는다. 田 ■ 글쓴이 최성호는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서 ‘산솔·도시건축’을 운영 중입니다. 주요 건축작품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유치원·박물관·인문관·약학관, 데이콤중앙연구소, 삼보컴퓨터사옥, 홍길동민속공원 마스터플랜, SK인천교환사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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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달라진 우리 생활, 달라진 집(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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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자연환경과 집
- 집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에서 지붕과 벽, 난방시설 등이 자연에 어떻게 적응했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나타낸다. 지붕의 경사나 처마가 나온 정도는 강수량이 얼마나 되는가에 따라 결정되고, 벽은 외기로부터 실내를 보호하기 위해 두께, 창문의 크기 등이 결정된다. 또한 난방시설은 추위에 견디기 위해 필수로 설치하는 것인데, 열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취사와 난방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화로와 난로, 벽난로 그리고 우리의 온돌 등과 같이 난방 방식에 따라 집의 구조가 결정된다.■ 글 싣는 순서1. 집, 문화로서 과거 이해하기-과연 전통은 존재하는가2. 집은 문화 유기체다3. 자연환경과 집4. 기술 발전과 집5. 사회환경과 집6. 생활과 집7. 사고변화와 집8. 사람과 집-사람이 집을 만들지만 집은 사람을 만든다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도구는 기능적인 것을 해결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기능적인 내용은 줄어들고 대신 의미론적인 요소가 덧붙여졌다. 그 변화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과거의 유물을 기능적인 면은 도외시한 채 의미론적으로만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연환경은 모든 문화의 출발점이다. 문화는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발전했다. 자연환경이 달라지면 문화의 발전 방향도 바뀐다. 바닷가에서 살던 사람들은 먹고사는 것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얻기에 바다에 대한 생각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산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산에 대한 생각이 남다를 것이다.이러한 생각의 차이가 서로 다른 문화를 만들어 낸다. 곰과 호랑이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어찌 곰과 호랑이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할 것이며, 상어나 고래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어찌 상어나 고래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할 것인가. 그런가 하면 바다에서 배를 타고 다니던 사람들은 일찍 바다를 이용해 다른 문화와 접촉했을 것이고, 육지의 사람들은 말이나 기타 운송 수단을 이용해 다른 문화와 접촉했을 것이다. 이처럼 자연환경은 사람의 사고와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생활과 문화 환경이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자연환경과 경제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먹을 것이 풍부한 지역에서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급자족이 이루어졌기에 다른 종족과 교역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땅이 척박한 곳에서는 교역을 통해 물자를 조달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전쟁을 일으켜 다른 부족의 것을 취하거나 일찍부터 상업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비교만으로도 문화가 결국 자연환경에서 비롯됨을 쉽게 알 수 있다.집 역시 문화를 이루는 한 갈래라고 보았을 때 자연환경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집은 자연환경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각 지역의 전통 가옥에서는 자연에 적응하는 모습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일본의 다다미를 보면 여름에 고온다습하고 겨울에 그리 춥지 않은 기후에 알맞은 구조라고 생각한다. 다다미 속에는 짚을 넣고 겉은 왕골 등으로 짠 돗자리로 감쌌다. 보온성이 뛰어나 그리 춥지 않은 곳에서는 다다미만 깔고도 지낼 만하다. 특히 여름에 습한 곳에서 좋은 촉감을 유지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름에는 바닥에 화문석 같은 깔개를 깔아 밑에서 올라오는 냉기와 눅눅함을 방지하고 있다. 따라서 다다미는 여름이 고온다습한 일본에 적당한 재료라고 생각한다.이렇게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한옥도 마찬가지다. 지역마다 집의 특징이 있는데, 철저하게 지역의 자연조건에 맞추어 발전했기 때문이다. 자연조건은 단순히 춥거나 더운 기후로 시작해 자연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와 자연으로 인한 재해를 어떻게 방어하는가의 문제까지를 포함한다.한옥의 구석구석을 보면 자연에 어떻게 적응하고 발전해 왔는지를 알 수 있다. 자연에 적응한 대표적인 예는 기단, 기초, 온돌과 대청, 지붕과 처마, 굴뚝, 부엌 등이다. 자연에 적응하는 모습은 앞에 예로 든 집의 구성 요소들뿐만 아니라 건축 재료, 집의 형태, 평면 구조 등 집의 모든 요소에 골고루 나타난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오히려 사회·문화적 요소가 더 강조된 것도 많다. 그러나 이런 부분도 출발점은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것이었으므로 먼저 자연환경의 요소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집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에서 지붕과 벽, 난방시설 등이 자연에 어떻게 적응했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나타낸다. 지붕의 경사나 처마가 나온 정도는 강수량이 얼마나 되는가에 따라 결정되고, 벽은 외기로부터 실내를 보호하기 위해 두께, 창문의 크기 등이 결정된다. 또한 난방시설은 추위에 견디기 위해 필수로 설치하는 것인데, 열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취사와 난방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화로와 난로, 벽난로 그리고 우리의 온돌 등과 같이 난방 방식에 따라 집의 구조가 결정된다.자연을 품은 한옥온돌, 한국 문화의 원류온돌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친근한 단어다. 이미 여러 책에서도 상세하게 소개했기에 여기에서는 일반적인 설명은 생략하고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관심하게 넘어가는 몇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째는 언제부터 온돌이 완전하게 자리 잡았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난방의 효율에 대한 문제이고, 셋째는 온돌과 부엌 구조와의 상관관계다. 넷째는 온돌이 한옥의 2층 구조에 끼친 영향, 마지막으로 온돌이 우리 생활 문화와 정서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다.우선 온돌이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난방 시스템이라고 하는 것은 오해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온돌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우리보다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는 바닥 난방만을 하는데 비해 로마 시대의 온돌은 벽에도 난방을 하고 있다. 이것은 집을 짓는 재료가 우리와 달랐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는 벽돌이나 돌로 집을 지어 벽을 이중으로 만들 수 있었기에 벽 사이로 열기를 보내 난방을 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난방 시스템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중세까지 명맥을 이어오다가 그 후 사라졌다. 어떻게 보면 문화가 퇴보한 것이다. 문화란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에 쉽게 고유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무리다.온돌의 전파 시기다시 우리 얘기로 돌아와서, 첫 번째로 언제부터 온돌이 우리의 대표적 난방 시스템이 되었는가를 살펴보자.고구려의 쪽구들에서 시작된 온돌이 바닥 전체에 설치되는 것은 고려시대 중엽부터라고 한다. 학자에 따라 온돌의 전파시기에 대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신영훈 씨의 견해로는 고려시대까지는 한강 이북까지 전파되었고,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는 문경새재까지 남하했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란을 전후해서 남부 해안 지방으로 전파됐다고 하며 제주도에는 17세기경에서야 전파됐다고 했다. 또한 온돌은 고구려에서 발달한 문화이므로 고구려의 영향이 강했던 영동 지방에서는 더 일찍 남하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 어쨌든 온돌이 우리나라 전체에 완전히 정착하는 것은 제주도를 제외하고 16세기에 이르러서다.온돌의 전파시기에 대한 간접 증거는 사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 시설도 건축물이므로 당대의 생활상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온돌의 전파는 생활이 좌식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조 1430년(세종 12년) 전라남도 강진에 세워진 무위사 극락전(국보 13호)을 보면 바닥 마감이 전(塼)으로 되어 있다. 현재의 마루 바닥은 후대에 다시 설치한 것이다. 전으로 바닥을 마감했다는 것은 그 당시 전라남도 지역에서 좌식 생활이 일반화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이처럼 전으로 바닥을 마감한 것은 불교 의식상의 문제도 있지만 사찰 건축도 생활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15세기 초만 해도 전라남도 지방까지는 온돌이 일반화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새로운 변화가 온전하게 자리 잡으려면 오랫동안의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주거 방식으로 완전하게 자리 잡은 아파트도 온돌이 바닥 난방으로 완전히 정착한 것은 1980년대 중반으로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초기의 아파트는 방만 바닥 난방이었고 기타의 부엌, 화장실 등은 라디에이터를 사용한 온수난방이었다. 이러한 혼합 난방 방식에서 전체를 온돌로 바꾸기까지는 2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처럼 하나의 새로운 체계가 정착하기에는 난관이 있어 우리의 것으로 삼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고유 전통으로 생각하는 온돌도 고구려시대로부터 전국에 보급되는 데 1000여 년 이상의 기간이 걸렸다.온돌의 난방 효율두 번째로 난방의 효율 문제를 살펴보자. 사람들은 옛날 집은 춥고 불편하여 살기 힘들다고 한다. 한옥에서 살면서 추운 겨울 코가 찡하게 시려 오는 외풍에 시달려 본 경험이 있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많은 사람은 불편한 것은 놔두고라도 너무 추워 집으로써 가치가 없다는 듯 말한다. 그러면 과연 우리나라의 집만 유독 추워서 집 구실을 못했다는 이야기인지 또는 현대의 집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춥다는 것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선 다른 나라의 집과 비교할 때 한옥이 특별히 추웠는가 하는 점이다. 정확하게 과학적 수치까지를 들먹이며 비교 검토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해 보자.집이 따뜻하려면 우선 단열 성능을 확보해야 하고 다음으로 난방 연료를 풍족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서구 여러 나라도 이러한 점에 만족해했던 시기는 그리 오래지 않다. 더욱이 단열이라는 개념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반을 넘어서 이야기다. 동서고금을 통해 많은 사람이 지금처럼 따뜻한 집에서 살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단열 성능을 높이자면 기술의 발전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때 단열 성능을 좌우하는 것은 단열재와 기밀성이다. 목재와 흙을 주재로 심벽구조(心壁構造)로 만들어진 한옥은 단열 성능은 우수하나 상대적으로 기밀성이 많이 떨어진다. 그것은 창문과 문의 틈새, 벽의 틈새가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결정된다. 심벽구조라는 한옥의 특징은 기밀성에서 매우 취약한 구조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최근 기술의 발전으로 거의 해결되고 있다. 최근에 지어지는 한옥은 현대적 기술을 응용해 단열 성능과 기밀성을 대부분 해결했기에 결코 춥지 않다. 집의 따뜻함은 난방 연료를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가와 단열 성능을 얼마만큼 높일 수 있는가의 문제다. 따라서 특정한 양식을 지닌 한옥만의 문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기밀성이 사람들에게 무조건 좋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공기가 움직이지 않고 환기가 되지 않는 공간이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인가는 따져 볼 문제다. '움직임과 흐름이 없는 공기는 고인 물처럼 깨끗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자주 환기를 시키라고 권유하는 것이 아닌가. 약간은 춥지만 늘 맑은 공기가 실내에 흐른다면 흐르는 물처럼 우리에게 쾌적하고 맑은 환경을 제공해 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화석 연료의 남용으로 공기는 이제 맑지가 않다. 결국 현대에 사는 사람들은 따뜻함을 얻은 대신 쾌적함을 잃었다.온돌과 부엌의 관계세 번째로 살펴볼 문제는 온돌과 부엌의 관계다. 가끔 여성들이 한옥은 여성들을 힘들게 하려고 만든 집인 양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한옥에서 여성이 움직이는 동선만으로 보면 문제가 있는 집이라는 것이 맞는 말로 생각된다. 그러나 집을 단순히 여성의 움직임만으로 보는 것은 단편적으로 보는 시각이다.부엌의 문제는 자연환경에 맞춰서 집 구조를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에 달린 문제다. 온돌을 들이려면 그 구조에 적합한 집으로 만들어야 한다. 온돌은 불을 때는 아궁이와 방바닥 면이 최소한 3∼4자(약 90∼120cm) 정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아궁이가 있는 부엌과 방은 당연히 높이가 다르다. 또한 부엌이 방과 붙게 된 것은 연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난방과 취사를 같이 해결하려는 지혜에서 생겨난 구조다. 난방이 필요 없는 지역에서는 취사를 위한 장소가 생활하는 집과 별도로 설치돼 있다.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 이전의 부엌은 건물과 관계없이 반빗간(찬간; 饌間) 형식의 별도 구조로 독립돼 있었다. 당시의 생활은 온돌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지 않아 난방과 취사가 별도로 이뤄졌던 것이다. 또한 온돌의 원조인 쪽구들은 걸터앉도록 돼 있어 주로 생활하는 건물의 바닥은 외부와 높이 차이가 없다. 이러한 집이 연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난방과 취사를 같이 해결하는 구조로 발전하면서 부엌이 건물에 붙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온돌의 구조 문제로 부엌과 방 사이에 높이 차이가 생긴 것이다. 그 변화는 몇 달 가까이 난방을 해야 하는 우리나라 기후에서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무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 연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취사와 난방의 겸용이라는 선택은 매우 합리적인 결정인 것이다.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하는 우리의 자연환경에서 난방의 효율을 위해 불편을 선택했던 것뿐이다.부엌에 대한 다른 불만 가운데 하나는, 통풍이 너무 잘되어 겨울을 지나는 데 불편하다고 한다. 이 문제는 옛 살림을 맡아본 여인의 증언을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겨울 추위보다는 음식이 쉬 상하는 여름나기가 더욱 힘들었다."라고 한다. 여름에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통풍이 잘되는 부엌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부엌에서 불을 때기에 연기를 배출하려면 환기가 필수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로 부엌에 환기가 잘 되도록 한 것이다. 옛 한옥의 부엌을 현재도 사용하는 집에 가보면 창문을 대부분 유리 또는 비닐로 막아 놓고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변화가 있는 집은 취사 연료로 가스나 기름 등을 사용한다. 취사를 위한 연료와 도구가 바뀌면서 이제 아궁이의 활용도가 낮아져 예전과 같은 환기가 필요 없게 된 결과다. 결국 부엌의 구조 역시 생활 방식에 있어 자연환경의 조건에 따라 어떠한 선택을 하는가에 대한 문제다.온돌은 2층 건물이 왜 없을까네 번째로 온돌이 한옥의 2층 구조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자. 많은 사람은 한옥에는 왜 2층 건물이 없는지 의문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옛 건물에 2층 이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로 누각의 건물과 성문 등이 2층 이상으로 구성돼 있다. 개인 집에서는 일반적으로는 2층 이상의 건물을 보기 힘들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2층 건물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살림집에 2층 이상의 건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살림집으로 2층인 건물은 상주의 '양진당'(養眞堂), 경주의 '수봉정'(秀峯亭 ; 현재는 개조되어 단층임) 정도일 것이다. '화수루'(花樹樓 ; 경북 영덕)가 있지만 이곳은 살림집이 아니고 문중의 공부방으로 쓰인 재사(齋舍)다. 따라서 순수한 2층 건물은 양진당 정도가 맞을 것이다. 이렇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중층의 건물이 사라진 이유 중에 하나가 온돌의 보급이라고 생각한다. 온돌을 들인 상태에서 중층의 건물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화수루도 중층의 건물이고 2층에 온돌을 들였지만 온돌을 들인 아랫부분은 방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엄밀하게 중층 건물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2층에 온돌을 들이기 위해서는 1층의 층고가 높아야 하는데 온돌 자체가 돌과 흙으로 구성돼 있어 무게가 만만치 않아 목구조로 받치기에는 문제가 있다. 또한 불을 때는 것도 쉽지 않기에 2층 방을 온돌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온돌의 보급으로 2층 이상의 집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게 됐다.온돌이 우리네 생활에 끼친 영향마지막으로 온돌이 우리의 생활에 끼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온돌의 선택은 우리의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입식 생활에서 좌식 생활로의 변화는 모든 면에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생활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이나 중국의 집을 보면 입식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집에서 생활하려면 갖가지 가구가 필요하다. 바닥에 앉을 수 없다 보니 의자가 필요하고 물건을 올려놓거나 손님을 대접할 그릇들을 놓기 위한 탁자도 있어야 한다. 또한 바닥에서는 잘 수 없으므로 침대를 들여놓는다. 이처럼 의자와 탁자, 침대 등은 입식 생활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구도 유목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이기에 이들에게는 이러한 가구들이 없다. 따라서 가구라는 것은 정착한 민족이 필요에 따라 만든 도구일 뿐이다.집의 기능이 분화 발전함에 따라 그에 필요한 가구를 만들고, 가구가 어느 곳에 놓이는 가에 따라 방의 기능이 나뉜다. 손님을 맞이하는 곳에서는 탁자와 의자가 필요하고 잠을 자는 곳에서는 침대가 필요하다. 이렇기에 침대가 있는 곳은 잠을 자는 공간으로 인식해, 침실은 사람들에게 개인적 공간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부부 침실인 경우 그곳은 내실의 개념이 돼 함부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방의 기능 분화는 집의 규모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가구를 많이 들여놓는 경우 가구가 차지하는 면적과 그 주위로 사람들이 통행할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만큼 당연히 방이 커지게 된다.이러한 생활에 비해 한옥에서는 침대가 비효율적이다. 바닥 전체를 난방하기 때문에 침대를 설치할 경우 설치되는 곳의 면적만큼 열이 낭비된다. 또한 침대에서 자는 것보다 바닥에 요만 깔고 자면 오히려 따뜻한 온기를 그대로 느끼게 되어 쾌적한 수면을 취할 수 있다. 온돌의 특성 때문에 열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잡다한 가구를 들이지 않는 구조로 변했다. 이러한 변화로 한옥에서는 가구보다는 벽장이 발전했다. 가구가 없는 한옥의 방은 보다 다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손님 접대, 식사, 취침, 오락 등 모든 생활에 필요한 기능이 한 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서구의 방과는 전혀 다른 다목적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서양의 방은 그 목적에 따라 침실과 거실, 응접실, 식당, 서재 등으로 나뉘지만 한옥에서는 사용하는 사람 또는 위치에 따른 방의 명칭이 있을 따름이다. 사랑방과 안방, 건넌방, 문간방 윗방, 아랫방 등의 이름에서 보듯이 기능에 따른 구분은 없다.온돌로 인해 일어나는 생활의 변화는 가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온돌에서는 예전과 같이 신을 신은 채 방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온돌이 설치된 방에서는 신을 신고 들어가던 생활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신을 신고 벗는 것은 매우 불편하다. 이러한 불편이 하루에 수없이 일어나기에 신는 신발도 형태가 바뀌게 된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일상의 신은 발목까지 오는 장화와 같은 형태였다. 이러한 형태의 신은 기마 민족의 경우 거의 같다. 그러나 목이 긴 신발은 신고 벗는 데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 따라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을 타지 않는 경우 신발은 벗기 편한 형태로 변화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좌식 생활을 하면서 신발을 신고 벗는 불편을 없애기 위해 신발의 형태가 달라진 것이라고 생각한다.이러한 습관은 일상의 예절에도 영향을 미친다. 서양에서는 아직도 실내에서 신을 벗는 것은 결례라고 한다. 이러한 예절이 생긴 것은 신을 자주 벗을 수 없어 신을 벗을 때 냄새가 심하게 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신을 벗는 것이 일상화되어 신고 있는 것을 오히려 불편하게 느낀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이 사무실에서도 별도의 실내화를 비치하고 근무하는 동안 신을 벗고 실내화를 신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온돌을 들인 뒤에 일어나는 변화의 극히 일부분이다. 온돌 때문에 일어나는 변화 중 중요한 것은 정서의 변화다. 온돌 문화는 우리의 정서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온돌로 인한 가구와 같은 외형적 요소의 변화보다는 정서적 요소의 변화가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서의 변화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田글 최성호<산솔 도시·건축연구소 대표, 전주대 건축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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