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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사상의 변화를 국가가 주도한다는 원칙은 사라졌으나, 외세에 의해 강제된 변화는 국가가 주도했던 만큼이나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외세를 등에 업고 들어온 기독교가 우리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서구의 합리주의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면서 조선시대의 유교적 시설과 색채는 많이 사라졌다.

■ 글 싣는 순서
1. 집, 문화로서 과거 이해하기
-과연 전통은 존재하는가
2. 집은 문화 유기체다
3. 자연환경과 집
4. 기술 발전과 집
5. 사회환경과 집
6. 생활과 집
7. 사고변화와 집
8. 사람과 집
-사람이 집을 만들고 집은
사람을 만든다

종교는 생활의 변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주도하여 많은 불교 행사를 치렀고 절을 지었으며, 정신적 지주로 자리하도록 왕조가 끝날 때까지 왕사나 국사 제도를 유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모든 것이 불교하고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갑자기 변하기 시작하고 도시의 모습도 달라진다.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조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초기부터 유교적 이념에 의한 획일화된 원칙 아래 사회가 재편되는 과정을 겪었다.

유교 이념 아래 조성된 도시에는 관아, 객사 및 향교 등 통치에 관련된 건물이 동일한 원칙 아래에 조성됐다. 그리고 모든 도시는 행정 기능에 치우쳐 있어서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도시들은 활기를 잃고 침체된 상태에 있었다. 서울조차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 때문에 도성 안에는 유희 시설이 드물었고 또 도시경관에 변화나 화려함을 안겨 줄 수 있는 불교 사찰도 없어 매우 건조한 분위기였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다채로운 삶에서 조선시대의 건조한 삶으로 바뀐 중심에는 종교의 변화가 있었다.

※ 장례 제도에 미친 종교의 영향
장례 제도도 종교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장례 제도 자체가 갖는 보수성 때문에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삼국유사》를 보면 불교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에게 매우 다양한 장례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시신을 화장하는 것은 왕의 특권이라고 할 정도로 화장은 일반적인 장례법이 아니었다. 통일신라 말까지도 화장을 하지 않고 가매장한 뒤, 유골(遺骨)만을 모아 부도(浮屠)를 세운 경우가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야 불교식 장례법인 화장이 일반화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도 화장을 한 후 뼈만 다시 모아 매장하는 경우가 있었다.

매장이 일반화되고 시묘(侍墓)살이를 하는 것은 유교가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린 뒤다. 지금처럼 매장하고 조상을 모시는 것이 중요한 삶의 일부가 된 것은 전적으로 유교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교가 불교였다면 화장이 일반적이고, 불교의 예법에 따라 천도재(薦度齋)나 사십구재(四十九齋)를 지냈을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기독교가 대중화되고 나서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제사를 모시지 않는다. 조상에게 절하지 않는 것도 십계명 중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제1계명을 지키기 위함이다. 18세기 천주교 박해의 시발이 된 것도 천주교도가 제사를 모시지 않는다는 이유인 것을 보더라도 종교가 장례법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가묘 제도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보겠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유교를 종교라고 말하기에는 힘든 면이 있다. 유교의 목적은 ‘질서유지’에 있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 같은 생각에 동의한다.

유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사회질서를 원활하게 유지하려는 지도 이념이라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유교는 질서유지를 목적으로 했기에 ‘예’를 근본으로 생각하고 발전시켜 왔다. 그것에 대한 방편으로 관혼상제에 대한 예법, 특히 상례와 제례를 중요시했다. 상례와 제례의 중심에는 가묘 제도가 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유교적 이상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묘 제도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유교가 지도 이념으로 자리는 잡았지만 실생활에 구현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가묘의 설치도 원활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대부 계급에서도 가묘의 설치가 미미했던 것 같다.

세종 13년 기록에 의하면 “사대부들이 가묘를 설치하도록 계축년을 기한하여 고찰해서 죄를 과하게 하니, 그렇다면 죄를 범하는 사람이 많아져 이루 다 다스릴 수 없을 것이오니 청하건대 무오년으로 기한을 정하소서.” 라고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란을 지나면서 양반들은 가묘를 세우는 것에 열중하게 된다. 이것은 전쟁 후 농공행상의 결과 양인이 신분 상승을 하게 되는 등 사회 질서가 흔들리자, 유교라는 이념을 통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 조선, 집에 색칠하는 것을 금하다
개략적이나마 종교가 우리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이번에는 종교의 변화가 집에 어떠한 여파를 주었는지 알아보자.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로 대표되는 유교의 생활관은 자신을 끝없이 자제하고 다스려 나가는 것을 선비의 덕목으로 보았다. 또한 유교는 사회의 질서 유지를 근본으로 하는 사상이다. 따라서 분수(分數)에 맞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은 사회에서 지탄의 대상이 된다.

아무리 자신이 돈이 많다고 해도 드러내 놓고 사치를 즐긴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사회다. 임금조차도 나라가 우환에 빠졌을 때는 먹는 것까지도 삼가는 형편에 아무리 재물이 있다 한들 신하 또는 일반인이 사치를 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유암(流巖)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쓴 《산림경제山林經濟》 <청재위치조淸齋位置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좋은 집자리는 냇기슭에서 찾고 계류의 곁에 따로 3∼4칸 정자를 짓고, 가목유화(佳木幽花)를 심고, 재중(齋中)에 들여놓은 제구(諸具)는 마땅히 아담한 것을 쓰며 속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추울 때는 추운 맛을, 더울 때는 더운 맛을 알게 한다면 선비가 살 만한 곳이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선비들의 보편적인 사고였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화려한 집을 짓고 살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현재는 자신의 부가 정당하다면 드러내 놓고 사치를 해도 사회에서 눈 감아주는 편이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는 조선시대의 정서가 남아 있어서 외제차를 타는 사람이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절제하는 사회 분위기는 집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한옥을 보면 화려하게 장식한 집을 보기 어렵다. 이것은 조선조 초기부터 집에 색을 칠하지 못하게 했던 까닭이다. 세종 때는 부모로부터 물려받거나 기존의 집을 구입한 경우 그리고 사당 등 외에는 색을 칠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것은 유교의 덕목이 집의 구조까지 좌우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어찌하였든 그러한 원칙이 조선조 내내 살아 있었다. 그와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화려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조의 집은 자신의 재산하고 관계없이 크게 짓거나 화려하게 치장할 수 없었다.

※ 다층 누각에 화려한, 고려 귀족의 집
그렇다면 고려시대의 집은 어떠했을까. 세종 때 집에 색칠을 못하도록 규제한 것을 뒤집어 해석하면, 세종조 이전의 집은 색을 칠해도 되었고 또한 그렇게 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집은 매우 화려하고 다양한 모습이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교였다는 것을 생각하며 되돌아 보자. 불교에서는 자신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해탈의 경지에 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깨달음을 얻었거나 얻기 위해 노력하는 스님들은 자신의 행동을 자제하고 정결하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일반 대중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불교에서는 자비를 강조하되 유교처럼 개개인의 생활을 일일이 규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의 획득을 죄가 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고려시대는 건국 초기부터 호족(豪族) 또는 귀족들이 대토지를 소유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중앙의 정계에 진출했기에, 생활 기반이 한꺼번에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귀족의 삶은 조선시대와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또한 조선조 초기까지 사병(私兵)을 거느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꽤 많은 귀족은 자신의 집에 사병을 두었을 것이다. 적으면 수십 명에서 많으면 수백 명까지 거느렸을 거라고 생각할 때, 집의 규모가 지금 남아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집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그 정도라면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이 거처할 방이 있어야 하며, 훈련할 장소도 있어야 하고 또 장수들이 모여서 회의할 장소가 있어야 한다. 지금의 한옥하고 비교할 때 구조나 크기에 있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전형적 군사시설인 여수(麗水) 진남관(鎭南館)(국보 제304호)과 통영(統營) 세병관(洗兵館)(국보 305호)의 구조를 보면 일반 건물하고 다름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자료를 보면, 한나라 때 사합원에는 사방을 감시하는 누각이 있었다. 중국의 예로 미뤄 짐작해 볼 때 서로를 견제했던 귀족의 집에는 감시를 위한 망루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사병을 거느리던 귀족의 집 구조는 일반 집하고 현저하게 달랐을 것이다. 창검과 갑옷을 입고 움직이는 집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협소하거나 낮아서는 행동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으므로 집이 작으면 곤란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집의 구조가 변하게 된 주요 원인 중의 하나가 조선조 초 태종이 이루어 낸 사병혁파(私兵革罷)라고 생각한다. 사병을 혁파하면서 귀족의 집에서 군사적 면이 없어지고 순수한 주거의 성격만이 남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고려시대 귀족의 건물은 매우 화려하고 규모도 대단했던 것 같다. 《고려사》에 있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무신시대의 대표적 인물인 최충헌(崔忠獻)의 경우 집에 격구장(擊毬場)을 만들기 위해 주변의 집 수백 채를 허물었다는 기록이 있고, 호족이 지은 집이 궁궐보다 화려해 왕이 빼앗아 궁궐로 만들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리고 왕이 행차할 때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것이 싫어 큰길가에 높은 집을 짓지 못하게 했고 길가의 누각까지도 부수게 했다. 그런가 하면 정세유(鄭世裕)라는 사람은 최충헌의 아들을 사위로 삼고 그 세력에 의지해 저택을 몇 리에 가득하게 지었다고 한다.

담에도 화려한 치장을 하고 큰 다락을 지었으며, 벽에 금을 칠하고 붉은 옻칠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만큼 고려시대 귀족의 집은 다층 누각에 화려한 정도가 매우 심했던 것 같다.

그러나 조선조에 지어진 집을 보면, 만석을 거둬들였다는 선교장을 보아도 규모가 크지 않으며 화려하지도 않다. 필자가 본 자료 중에서 조선시대에 가장 호화로운 집은 정조 때 거상인 김한태(金漢泰)(1762∼?)의 집 정도다.

그러나 김한태의 집도 겉보기에는 대단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밖에서 보면 몇 채가 있는 것 같았으나 안이 통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한다. 어쨌든 조선시대의 집은 재산을 크게 모았다고 해도 사치스럽지 않은 것은 유교에 영향을 받은 사고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남녀유별의 집 구조
유교적 질서가 우리의 생활에 미친 영향을 한 가지 더 살펴보자. 유교의 성리학적 질서는 남녀의 구별을 엄하게 요구했다. 조선조는 초기부터 이 같은 남녀유별(男女有別)의 유교적 질서를 지키도록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 내려온 관습이 일시에 변할 수는 없다. 여러 자료를 볼 때 최소한 조선조 중기까지는 과거의 관습이 이어져 왔던 것 같다.

대부분 사람들은 조선조에는 부부가 안방과 사랑방에서 별거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미암일기〉를 보면, 당시만 하더라도 부부가 따로 방을 쓰는 것이 일반은 아닌 모양이다. 그리고 여성은 집안 대소사 결정에 있어 어느 정도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

〈미암일기〉를 보면 집을 짓는 데 안채를 먼저 짓고 사랑채는 나중에 증축했다. 이러한 집짓는 순서를 볼 때 16세기까지만 해도 남녀 구별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같은 시대에 지어진 관가정을 보면 안채로 들어가는 문에 내외벽(內外壁)에 대한 고려가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조 후기에 지어진 집들에는 예외 없이 내외벽이 설치된 것하고 비교해 본다면, 조선조 중기까지만 해도 집 구조를 통해 볼 때 내외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집에서 내외의 개념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 남녀유별의 사고가 자리 잡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집의 형태가 사고의 변화를 따라가기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집을 새로 짓는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고, 이미 생활하던 관습이 있어 집을 마음대로 뜯어고치는 것 또한 쉽지 않기 때문에, 집은 항상 생각의 변화를 뒤쫓아 가기 마련이다. 집의 보수적인 성질은 온돌이 정착하는 데 거의 천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집 구조에서 내외의 구별이 강조되는 형태가 나타나는 것은 조선조 후기에 들어서다. 이러한 변화는 17세기 이후 예학(禮學)이 발전하고 남녀 유별이 심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남녀 차별의 집 구조는 조선조 후기에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 사고를 바꾸는 가장 강력한 힘은 종교
다음으로 기독교가 전래된 뒤에 나타난 우리 생활의 변화를 살펴보자. 수백 년을 내려온 전통적인 좌식 생활이 서양식 입식 생활로 급격하게 바뀐 것은 기독교 때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사람의 성격은 대개 보수적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집의 구조가 변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은 사람들의 보수성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그 같은 보수성을 한 번에 없애는 것이 있으니 바로 종교다. 생활의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 때문이다.

만일 종교를 통한 문화 이입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변화가 그리 빠르게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전래라는 상황에 덧붙여 당시 서구 열강의 힘에 대한 동경이 서구 문화의 이입을 쉽게 했다.

이처럼 종교는 우리의 사고를 바뀌게 하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다. 종교가 바뀌었을 때 나타나는 생활의 변화는 다른 어느 것보다도 강력하고 신속하다. 종교를 바꾼 경우 개종(改宗)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생활 전반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구한말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로 우리의 생활은 급격하게 달라졌다. 구한말의 기독교는 단순히 종교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국제 환경 때문에 서구식 사고 및 생활 방식 전반을 옮겨오는 역할을 했다. 종교의 이입移入은 해당 종교를 위한 건물 신축 외에도 관혼상제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과거하고 전혀 다른 생활환경을 강요했다. 田

■ 글 최성호<산솔도시건축 대표>

※ 글쓴이 최성호는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서 ‘산솔도시·건축’을 운영 중입니다. 주요 건축작품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유치원·박물관·인문관·약학관, 데이콤중앙연구소, 삼보컴퓨터사옥, 홍길동민속공원 마스터플랜, SK인천교환사 등이 있습니다. 산솔도시건축 02-516-9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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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의식주를 바꾼 종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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