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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충주시 살미면 용천리에 자리한 최함월 崔涵月 고택(시도유형문화재 제87호)은 조선 숙종 때 문장가인 최응성의 생가이다. 1978년 충주댐 착공으로 1983년 충주에서 수안보로 가는 국도 옆에 옮긴 집이다. 터가 도로보다 낮아 조금 궁색하지만, 제 자리에 있을 때는 당당한 집이었을 것이다. 집 전면은 완전히 폐쇄된 형식이고 앞마당에 조그마한 정자와 연못이 있다. 사랑채, 안채, ㄱ자형 광채를 일렬로 배치한 구조이고, 광채 옆 담 밖에 사당인 무릉사 武陵祠가 있다. 이처럼 일렬로 배치한 집이다 보니 부지도 장방형이다.

함월 고택은 조선 숙종 때 문장가인 최응성이 살던 집이다. 서재로 사용했다는 ‘염선재’와 ‘함월정’이라는 정자가 남아 있다

랑채와 행랑채 그리고 담으로 막힌 함월 고택은 앞에서 보면 작지만 튼튼한 성처럼 느껴진다. 전면 행랑채와 사랑채가 ㄴ자를, 안채가 ㄱ자를 이루기에 담만 없다면 튼 口 자 구조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집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외관상 사랑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앞쪽으로 난 창이 거의 없고 일반 사랑채 같은 창호 분위기도 나지 않는다. 전면 대문은 전형적인 중문 형식으로, 대문을 열면 사랑채 측면이 나타나고 안채는 돌아 들어가야 한다. 현재의 대문은 아마도 예전에는 중문이었을 것이다.

집 좌측 광채 쪽으로 드나드는 협문, 현재 대문보다 협문을 주로 이용한다.

염선재 念善齋, 늘 선 을 생각한다
사랑채는 전면과 직각으로 배치하여 측면만 보인다. 안채 쪽은 배면과 같고 반대쪽 전면에 툇마루를 만들어 대청 문도 퇴칸 쪽으로 들어 열어야 한다. 이전하기 전 전면은 현재 방향이 아닌 사랑채에서 바라보는 쪽으로 보인다. 즉 사랑채를 바라보며 들어와 그 옆을 돌아 중문으로 들어가는 배치인데,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진입 형식이 바뀌었다.
 
사랑채는 이 집에서 태어난 최함월 선생이 서재로 썼다는 염선재이다. '늘 선을 생각한다'는 당호에서 최함월 선생의 풍모를 느끼게 한다. 구조는 정면 4칸에 측면 2칸인 전후퇴집이다. 그러나 정확한 전후퇴집에서 조금 더 발전하여 구조가 다른 집보다 매우 복잡하다. 일반적 구조라면 전후 퇴칸까지 3칸에 기둥이 4개 서는데, 이 집은 기둥이 5개다. 측면에서 보면 작은 기둥이 촘촘히 서 있어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방을 나눌 때는 매우 유용하다. 퇴칸을 잘게 나눈 기둥으로 방의 용도에 따라 규모를 달리하여 4칸으로 나눈 각 방은 규모가 모두 다르다. 칸칸이 방 구조가 다르다 보니 4칸 작은 집임에도 이리저리 한참 따져보아야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집을 지은 까닭은 방을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려는 욕구 때문이다. 사랑채는 작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어떠한 집보다 흥미를 유발하는 재밌는 구조이다.
 
현재 사랑채는 방이 3칸이고 제일 안쪽은 광이다. 창문 형태를 보면 제일 바깥쪽 방은 대청을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맨 끝 방에는 반의반 칸을 내달아 살강(그릇을 얹어 놓기 위해 벽 중턱에 드린 선반)을 만들었다. 원래는 대청이었고 고종 11년(1874)에 무릉사라는 사당을 만들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예전에는 이 살강에 위패를 모셨을 것이다.

최함월 선생이 서재로 썼다는 사랑채, 염선재.
사랑채는 담에 가리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함월 고택은 전면 행랑채와 사랑채가 ㄴ자를, 안채가 ㄱ자를 이루기에 전체적으로 튼 口 자 구조다.
안채는 툇마루조차 없는 매우 단출한 구조다.

안채, 소박한 맞배지붕 삼량집
안채는 ㄱ자형으로 좌측에서부터 광, 부엌, 방, 대청 2칸, 여기에 안방과 부엌을 돌출시켰다. 일반적인 집이라면 격을 생각하여 최소한 우진각지붕으로 만들지만, 이 집은 그보다 격이 낮은 맞배지붕이다.
맨 좌측 1칸은 변형하여 현재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건넌방을, 우측 돌출 부분에 안방을 배치했다. 목구조의 기본인 삼량집으로, 대공도 매우 소박한 동자 대공이다. 또한 대부분의 기와집에 설치한 툇마루조차 없는 매우 단출한 구조이다. 집을 지은 사람의 검박함을 알 수 있다.
 
재밌게도 건넌방과 1칸 부엌 사이를 1칸 공간으로 처리했다. 이 1칸을 목수는 매우 교묘하게 잘 이용했다. 다른 칸보다 좁게 칸을 반으로 나누어 건넌방을 키우고 나머지 반 칸 하부는 부엌으로, 상부는 건넌방 다락으로 구성했다. 기능적인 면을 해결하면서 건넌방의 규모와 쓰임새를 증대시킨 것이다. 건넌방과 부엌에 필요한 창은 대각선으로 배치했다. 건넌방 창은 높은 곳에, 부엌 창은 낮은 곳에 배치하여 입면에 경쾌한 변화를 주었다.

사랑채는 방이 3칸이고 제일 안쪽은 광이다. 창문 형태를 보면 제일 바깥쪽 방은 대청을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 툇마루, 원래는 이 부분이 전면이었을 것이다.

함월 정 涵月亭, 연못에 달이 드리우다
집 앞 정자는 방이 1칸으로, 그 앞에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규모가 작은 연못이지만 가운데 조그마한 섬까지 만들어 구색을 갖추었다. 정자는 1720년경에 지었다는데, 현재 모습은 그때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정자 이름은 함월정 涵月亭인데 함월은 이 집을 지은 최응성의 호로 같이 공부한 수암 遂庵 권상하權尙夏가 지어주었다. 젖을 함 涵과 달 월月로 '달에 젖는다'또는 '달에 잠긴다'는 뜻이다. 매우 아취 雅趣가 풍기는 이름이다. 이곳에 앉아 연못에 드리운 달을 보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겼을 것이다.

방은 1칸이지만, 그 주변에 퇴칸을 두어 2칸 규모이다. 뒤쪽 툇마루는 누마루처럼 들어 올렸는데, 이는 마루 아래 아궁이를 두었기 때문이다. 툇마루에는 난간을 둘렀는데 현재 도로 쪽에는 설치하지 않았다. 팔작지붕 박공 면은 연못 쪽으로 향하고 지붕면은 도로 쪽으로 향한다. 지붕과 난간으로 볼 때 도로 쪽을 정면으로 계획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루를 높게 설치한 뒷면을 제외하고 삼면의 문을 모두 개방하게 한 점을 보면 경관을 고려하여 지은 정자이다. 따라서 원래 정자가 있던 곳은 경관이 좋았을 것이다.

광채 옆 담밖에 사당인 무릉사가 있다.
집 앞 정자는 방 1칸이고, 그 앞에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정자 함월정은 젖을 함涵과 달 월月로‘달에 젖는다’또는‘달에 잠긴다’는 뜻이다.
충주호 건설로 함월 고택을 도로보다 한참 낮은 터에 이전했기에, 집의 품격이 느껴지지 않는다.

함월 고택은 충주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을 피하여 이전했기에 원형에서 얼마간 변형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형은 바로 집 주변을 둘러싼 환경이다. 집터를 잡을 때 좌향 坐向과 바라보이는 풍광을 고려했을 것이다. 집을 옮길 집터를 정할 때, 그것을 고려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 상황으로 볼 때 전혀 그렇지 않다.
 
집의 전체 모습과 함월정 구조로 보아, 원래는 풍광 좋은 터에 자리했음이 분명하다. 지금과 같이 도로보다 낮은 곳이 아닌, 조금 높은 곳에서 주변을 내려다보는 위치였을 것이다. 현재는 집이 도로보다 한참 낮아 품격이 느껴지지 않는다. 집을 옮기면서 조금이나마 이러한 것을 되살리려 노력했다면 더욱 집이 돋보였을 것이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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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자연과 벗하며 선善을 생각한다 충주 함월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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