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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생각이 변하면 생활이 달라진다(Ⅱ)
집 구조를 통해서 본 생활의 변화

■ 글 싣는 순서
1. 집, 문화로서 과거 이해하기
-과연 전통은 존재하는가
2. 집은 문화 유기체다
3. 자연환경과 집
4. 기술 발전과 집
5. 사회환경과 집
6. 생활과 집
7. 사고변화와 집
8. 사람과 집
-사람이 집을 만들고 집은
사람을 만든다


사고의 변화는 미의식과 행동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사람의 행동에 변화가 생기면 집의 구조에도 반영된다. 우리가 집을 이해하려면, 먼저 ‘과거의 생활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이제 과거의 집과 현재의 집을 비교함으로써 사고의 변화가 집의 구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자. 조선조의 집과 현재의 집을 비교하면 아무리 문외한이라고 해도 많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당대의 부잣집인 양반가의 집과 현재의 부자들이 살고 있는 대형 평형의 아파트를 비교해 보고 우리의 생활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자.

조선시대 대가의 한옥과 현재 아파트의 차이는 분산과 집합이다. 이러한 차이의 출발점은 먼저 사회 구조의 변화에 있다. 조선시대의 집은 하인을 거느리고 살았으나 지금은 아니다. 조선시대는 농업을, 현대는 공업과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종교로 보면 조선시대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수직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고 했고, 현재는 인간의 평등을 지향하는 다원화 된 사회다.
사회적 기반은 곧 집의 구조에 반영돼 나타난다. 앞에서 말한 차이점이 집 구조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살펴보자.
조선조와 현재의 집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차이점은 각 공간 사이의 거리다. 조선조의 집은 매우 넓게 분산돼 있다. 반면에 아파트는 집약의 구조다. 조선조의 집 구조는 관리하는 데 매우 비효율적인 반면, 현재의 아파트는 각 방을 연결하는 데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가능하도록 계획한다. 이렇게 짓는 것은 땅을 소유할 수 있는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을 관리하는 사람의 숫자하고 관계가 있다.
과거에는 노비나 하인을 부려서 집을 관리했다. 이제는 집 관리의 일차적 책임이 주부에게 있다. 부잣집에서 파출부를 두거나 가정부를 고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주부가 관리한다. 늘 하인을 거느리던 집안에서는 집이 넓어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안채와 사랑채로 분리된 한옥의 구조는 하인이 있어 가능했다. 조선조가 유교 덕목의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남녀유별을 이유로 안채와 사랑채를 분리했지만, 집을 관리해 주는 노비나 하인이 없었다면 안채와 사랑채로 나뉠 수 없었을 것이다.
집을 누가 관리하는가에 따라 구조가 달라지는 예를 한 가지 더 살펴보자. 앞서 언급한것처럼 70년대까지만 해도 조금 잘 산다 싶으면 집에 ‘식모’를 두고 살았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때만 해도 일반화된 직업이었다. 식모라는 직업이 없어진 것은 인건비 상승이라는 문제도 있지만, 집안의 문제와 가족의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여긴 데 원인이 있다. 가족 외에 집안에서 먹고 자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 불편했기 때문에 식모 대신에 출퇴근하는 가정부로 바뀌었다.
그 같은 변화는 집의 구조에도 반영돼 있다. 70년대에는 30평대의 아파트에도 식모를 위한 조그마한 골방이 부엌 옆에 있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방이 없어졌다. 이제는 아주 대형 아파트가 아닌 경우 식모를 위한 방은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가정부가 도와준다고 해도, 가정부가 없는 시간에는 주부가 관리해야 하므로 많이 움직여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따라서 모든 시설을 집약시켜 적은 움직여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부부 공간에 드러난 서구화
두 번째로 부부 공간을 비교해 보면 사고 방식이 서구화됐다는 것이 명확히 드러난다. 예전의 집에서는 안방과 사랑채가 떨어져 있었다. 부부가 방을 따로 쓰는 것을 전제로 계획한 집이다. 부부 별거의 원칙은 조선조 초기부터 있었지만 잘 지켜지지 않은 모양이다. 〈미암일기〉를 보면 당시에는 아직 부부 생활에서 별거를 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오면서 점점 부부 별거의 원칙이 강조되었다. 이하복씨의 자서전(서천 이하복 가옥의 전 주인)을 보면 1915년에 결혼했는데, 초기에는 부부 간 합방도 할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이뤄질 정도로 부부 별거가 원칙이었다.
그러했던 부부 생활은 최근에 서구의 영향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부부만의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여기고 부부 생활을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 같은 변화를 반영해 이제는 부부의 전용공간이 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아졌다. 예전의 집에서는 안방과 사랑방으로 나뉘어 있던 부부 공간이 이제는 통합됐고, 부부만을 위해 안방과 침실, 드레스룸, 욕실 등을 배치하고 있다. 부부만 사용하도록 제공된 방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데, 특히 부부 침실은 안방과 드레스룸 등을 거쳐 들어가도록 하여 제일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부부 침실이 제일 안쪽으로 들어간 것은 부부 생활을 철저하게 보장하기 위함이다.

손님 접대 방식의 변화와 집 구조
세 번째로 손님을 치르는 방식을 살펴보자. 손님을 대접하는 방식의 차이도 집 구조에 잘 나타난다. 예전에는 남자 손님은 사랑방에서, 안손님은 안채에서 대접했다. 지금은 남녀를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상차림도 과거에는 독상을 원칙으로 했기에, 개인별로 소반에 음식을 차려냈다. 이 때문에 대가의 대청을 보면 횟대에 소반을 가득 얹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는 서양식의 접대 문화가 일반화돼 잘 사는 집에는 홈바(Home Bar)라는 것을 설치하기도 한다. 서양식으로 가볍게 칵테일을 하면서 대화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현재 짓는 집들 가운데 아주 큰 집의 경우, 응접실을 따로 두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거실이 손님을 맞이하는 주공간이다. 거실은 또한 가족이 공유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손님을 대접한다는 사실은, 손님의 성격도 이제는 가족 공동의 손님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도 사업을 하거나 정계에 있는 사람들은 손님의 성격에 따라 별도로 모셔야 하기 때문에 응접실이라는 독립된 공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집은 응접실을 따로 두지 않는다. 그것은 집에서 대외 활동을 목적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의 발달로 사라진 창고
네 번째로 창고에 대해서 살펴보자. 앞에서 언급한 김기응 가옥에서 보듯이 광이나 곳간으로 쓰는 부분은 집 전체 면적의 1/6을 차지한다. 반대로 요즘 집에서 창고 등과 같이 수납에 사용하는 면적은 매우 작다. 이 같은 상황은 다른 집도 마찬가지다. 옛날의 집에서 저장을 위해 사용한 면적이 많은 이유는 경제 체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시장경제가 그리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서 사용하는 일상 용품의 대부분을 광에 저장해 두고 일이 있을 때마다 꺼내어 썼다. 그러나 요사이는 시장에서 필요한 만큼만 사다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쌀도 예전에는 80킬로그램들이 가마 단위로 팔았다. 가구별 구성원 숫자가 줄어들고 외식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최근에는 2킬로그램들이 소포장 쌀도 판매하고 있다. 또한 간장, 된장 그 밖의 밑반찬도 시장에서 필요한 만큼 사다 먹는다. 옷도 예전에는 집에서 만들어 입었기 때문에 광에 옷감을 보관하고 있었다. 삼베의 경우는 조선조 후기까지 화폐와 버금가는 환금성을 가지고 있어 별도로 보관했을 것이다.
그러한 사회 여건 때문에 조선조에는 많은 생활 용품을 집에 저장해 놓고 필요할 때 꺼내 써야 했다. 부잣집 또는 종가의 경우 노비나 하인을 포함해 집에 거주하는 사람은 물론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 그에 따른 음식 수발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조선시대는 늘 장이 서는 환경이 아니어서, 필요한 물건을 시장에서 때마다 구입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 때문에 일정 수량은 항상 곳간에 보관해야 했다.
현재는 아무리 부잣집이라고 해도 집에서 손님을 치르는 경우는 드물다. 예전처럼 하인을 수십 명 거느리는 것도 아니고 식솔(食率)도 많지 않으므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 특히 식료품을 오래 보관해야 할 이유가 없다. 중요한 손님이라면 오히려 집 밖에서 대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집에서 손님을 치른다고 해도 그 때마다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기 때문에 일상에 필요한 용품들을 쌓아 두지 않아도 된다.
사회가 변하면서 최근에는 아파트를 설계할 때 수납 공간에 신경을 많이 쓴다. 식료품 수납은 별로 필요하지 않지만, 옷과 여가 활동 및 가사 활동에 사용하는 생활 용품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신발장을 봐도 예전에는 일인당 세 켤레 정도의 신발을 갖고 있어도 많다고 했는데, 지금은 각자가 평소에 신는 신발도 세 켤레를 넘는 집이 대부분이다. 이외에도 부엌에서 쓰는 각종 주방 용구도 다양해졌고, 레저 활동을 즐기는 인구가 늘면서 레저 용품도 많아졌다. 그러한 물품들 가운데 자주 사용하는 주방 기구 등을 제외하면 계절별로 사용하는 것이 많다. 그 때문에 새로 짓는 고급 아파트에서는 지하층 등에 가구별로 수납 시설을 설치해 주기도 한다.
과거의 한옥에서 창고를 주로 식생활 또는 소모성 생활 용품을 보관하려고 만들었다면, 이제는 내구성 생활 용품을 보관하는 창고가 필요하다. 田

글 최성호<산솔도시건축 대표>
※ 글쓴이 최성호는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서 ‘산솔도시·건축’을 운영 중입니다. 주요 건축작품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유치원·박물관·인문관·약학관, 데이콤중앙연구소, 삼보컴퓨터사옥, 홍길동민속공원 마스터플랜, SK인천교환사 등이 있습니다. 산솔도시건축 02-516-9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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