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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묘산 자락 높은 언덕에 위치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 여경구 가옥 榛接겾卿九家屋(중요민속자료 제129호)은 여경구의 장인인 이덕승의 8대조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집은 180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산을 배경으로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놓였다. 서쪽으로 진입이 가능하며 전체적으로 누운 日 형 배치다.
 
최성호
사진 홍정기

광채에서 본 대문채와 사랑채로 진접 여경구 가옥은 전체적으로 누운 日 형 배치다.

안채와 사랑채의 병렬 배치는 경기도 화성 정용채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24호)과 유사하다. 그러나 세부 배치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첫 번째는 출입 방향이다. 정용채 가옥은 동쪽, 여경구 가옥은 서쪽으로 진입한다. 또 여경구 가옥은 건물이 별동으로 이뤄져 안채가 열린 ㅁ자 구조인데 반해 정용채 가옥은 완벽하게 폐쇄된 ㅁ자 형태다.

가옥 동쪽 입구에서 본 모습으로 현재는 이곳으로도 출입이 가능하다. 경관을 위해 마을 제일 높은 곳에 자리 잡았다.

마치 정자에 올라온 듯 전망 좋은 사랑채
가옥은 사랑방과 안방을 마을을 향해 길게 배치하고 직각으로 문간채, 중문채, 부엌을 놓았다. 그 앞으로 광들이 안방과 사랑방과 같은 방향으로 배치됐다. 사랑채 앞 곳간채는 현재 사라지고 없다. 사랑채와 안채가 앞뒤로 놓이는 일반적인 형태를 버리면서까지 이러한 집 자리를 고집한 것은 시원한 전망 때문이다. 사랑채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아랫마을뿐만 아니라 마을 앞 왕숙천 너머 넓게 펼쳐진 들판까지 향한다. 꽉 막혔던 가슴이 확 트이는 경관이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하니 가히 명당이다. 이런 경관을 얻고자 오르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집을 배치한 것이리라.
 
솟을대문을 지나 사랑마당으로 들어서면 좌측이 사랑채다. 높은 기단 위에 우뚝 선 사랑채는 전면 네 칸 반 측면 두 칸 규모인 일고주 오량집으로 반 칸 규모의 전퇴와 뒤로는 1/4칸 규모 광과 툇마루를 뒀다. 우측부터 건넌방, 대청 각 한 칸, 사랑방 두 칸, 벽장 반 칸으로 구성됐으며 대지 경사 때문에 사랑채 기단이 높아졌다. 이로 인해 사랑채에 올라서면 마치 정자에 올라온 듯한 느낌이다.
 
사랑채 건넌방과 대청을 가르는 툇마루 기둥에 문을 설치한 흔적이 보인다. 툇마루도 큰 사랑방과 건넌방 사이를 구분했던 것이다. 사랑채 건넌방과 며느리가 기거했을 안채 건넌방이 바로 연결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건넌방을 사용하는 사람을 배려해 문을 달았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랑채 앞에 초가로 된 헛간채가 있었는데 70년대에 헐렸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모습을 보이는 사랑채에서 꾸밈없이 집을 지으려 한 주인의 검소함을 전해 받는다.

관리가 잘 돼 깔끔한 건넌방 내부.
사랑방에 앉아 바라본 전경. 마을뿐만 아니라 마을 앞 왕숙천 너머 들판까지 시야에 잡힌다.

가옥의 볼거리, 사당
사랑채 뒤쪽 언덕 위로 놓인 사당은 전면 2칸 측면 한 칸 반 규모의 맞배지붕 집이다. 가옥에서 눈여겨볼 곳이 바로 이 사당이다. 사당 평면은 다른 집과 별다를 것이 없지만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품이 있다. 사당은 위패를 모시는 공간 한 칸과 전퇴 반 칸으로 구성됐으며 삼면은 다른 사당처럼 벽이다. 그러나 다른 사당과 달리 측면 벽이 아름답다. 방화장에서 중방까지는 자연석을 쌓고 화장줄눈으로 마감했으며 그 위에 위아래로 뒤집어진 수키와를 엇갈려 쌓아 구분했다. 수키와 위에는 다시 기다란 방전을 엇갈려 쌓은 후 화장줄눈으로 마감한 것을 도리 밑까지 붙였다. 이 같은 지금 모습도 다른 곳과는 차별되지만 남아 있는 자료를 보면 더욱 아름답고 기품 있는 모습이었다.
 
문화재청 사진에서 보이는 예전 모습은 중방까지 자연석을 쌓되 하부는 큰 자연석 막쌓기를 하다가 상부에 올라오면 작은 돌을 가지런히 쌓아 변화를 줬고 수키와는 지금보다 더 가지런히 쌓았으며 그 위는 지금과는 달리 암키와를 비스듬히 올려 문양을 만들었다. 문양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부드럽고 온화하면서도 격조가 있다.
 
또 암키와 문양을 넣은 곳은 위, 아래 및 좌, 우를 전돌로 사각형을 만들어 구분했다. 전돌로 구획된 직사각형 화면 때문에 암키와 문양은 더욱 안정된 형상을 갖추게 됐다. 이 암키와 문양 위로 다시 기와를 석 장 엎어 쌓고 그 위로 지붕 용마루 부고처럼 세워 마감해 벽면 전체에 변화를 줬다. 이와 똑같은 문양을 안채 동쪽 부분에 새로 만들어 놓았지만 격조가 사당과 비할 바 못된다.
 
형태뿐만 아니라 구조도 지금과 다르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반오량가 半五樑架(삼량집에 퇴칸을 붙여 전면은 오량집이고 후면은 삼량집인 구조)인 것은 같은데 보수 전 사당 종도리는 용마루와 위치가 빗겨나 맞지 않았고 앞뒤 지붕 물매도 다르다. 그러나 고쳐진 집은 일반 집처럼 종도리와 용마루 위치가 맞고 지붕 물매도 맞춰 놓았다. 예전 집이 왜 일반적인 구조 방식과 다른지 모르겠지만 고치면서 과거 모습을 무시해 버렸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솟을대문을 설치한 서쪽 대문채.
대지 경사로 기단이 높아진 사랑채. 사랑채 앞에 곳간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특이하게 T자 형태를 보이는 안채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대문간채와 마주하는 광채 아래 끝에 배치했다. T자형 안채와 ㄴ자형 광채가 엇갈린 형태를 이루는데 이렇게 안채가 T자 형태로 된 집은 그리 흔치 않다. 주로 충청도 북쪽 지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형태지만 그렇다고 지역적 특성이라 보기 힘들 만큼 그 예가 많지 않다.
 
안채는 안방 앞으로 돌출된 부엌을 중심에 두고 좌우로 나뉜다. 안방 몸채 깊이는 칸 반 규모고 일고주 오량집으로 대청은 고주 없이 대들보를 가로질러 놓아 넓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대청 높이가 다른 집에 비해 낮아 조금 답답해 보이는 데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집을 검소하게 지으려 했던 의도로 보인다. 좌측으로부터 건넌방 두 칸, 대청 두 칸으로 구성됐다. 안방은 두 칸 규모이고 앞으로 두 칸 부엌이 돌출됐으며 뒤쪽으로는 골방과 뒷방, 광이 붙어 있다. 입구가 서쪽이다 보니 안방이 서쪽에 위치하는 전형에서 벗어나 동쪽에 위치한다. 광은 ㄴ자 형태로 사랑채 쪽은 사랑채에서, 아래쪽은 안채에서 사용하도록 계획됐다. 지금은 모두 광으로 개조된 광채는 원래 중문칸에서부터 외양간, 광 두 칸, 뒷간으로 구성됐다.

특이하게 T자형 구조를 보이는 안채. 건넌방, 대청, 안방, 골방, 뒷방, 광, 부엌으로 짜여졌다.
사랑채 툇마루 기둥에 문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큰 사랑방과 건넌방을 구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 한 것만 못한 보수, 이제라도 제대로 해야
여경구 가옥은 최근 전체적으로 보수작업을 진행해 기존 모습에서 많이 변형됐다. 앞서 말한 사당도 안채 마당 기단도 고쳐졌다. 원래 3단인 안채 기단은 마당에서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구조였는데 현재 한 단으로 고쳐져 적잖이 불편하다. 복원를 제대로 하지 않아 사당 외벽이 가지고 있던 품격이 사라졌고, 안채기단이 지니고 있던 기능성이 사라졌다. 문화재를 보전한다는 것은 예전 모습 그대로 살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 모습을 살리는 것도 장인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능력이 없으며 원래 것에 훨씬 못 미치게 복구되고 만다. 현재 금속공예나 미술품 복원 부문에는 정성을 많이 들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건축 부문 특히 한옥에 대해서는 장인 정신을 가지고 임하는 사례를 거의 보지 못했다. 때문에 최근 보수되는 한옥이 예전보다 수준이 더 떨어지는 경우를 수없이 보아왔다. 능력이 되지 않으면 차라리 하지 말 것이지 솜씨가 부족한 사람이 손을 대 원래보다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보수하도록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줬으면 한다.

여경구 가옥은 오랜만에 보는 관리가 잘 돼 있는 집이다. 당장 사람이 살아도 될 만큼 집안 구석구석 정돈이 잘 됐고 정결하지 않는 곳이 없다. 방문한 당시 안방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었다. 관리인 말로는 이틀에 한 번은 불을 땐다고 한다. 그러나 큰 사랑방은 이전에 온수보일러를 설치하면서 아궁이를 폐쇄 했다고 한다. 아쉬운 부분이다. 집을 잘 관리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집 생명은 길어진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문화재 보수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두 번째 관리가 잘 된 집은 보는 즐거움도 있어 문화재를 활성화하는데 도움을 준다. 당대 생활상을 알 수 있도록 관리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사당 원래 모습. 사당 벽면 암키와 문양이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격조가 높다.
보수 후 현재의 사당 모습.
근래 전체적으로 보수 작업한 가옥. 제대로 보수하려는 노력이 아쉽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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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높은 격조와 기품 있는 사당을 간직한 남양주 여경구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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