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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仁村 김성수는 1891년 김경중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3살 되던 해 큰아버지인 김기중의 양자로 들어가 일제강점기에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다. 집안 재산으로 중앙학원 및 경성방직을 인수하고 동아일보를 설립해 근대사 교육, 산업, 문화 전반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인촌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인촌 생가(시도기념물 제39호/전북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는 1907년 가족이 줄포로 이사한 후 위탁 관리해 오다 1977년 복원돼 현재에 이른다.
 
최성호
사진 홍정기

인촌 생가는 1907년 가족이 줄포로 이사한 후 1977년 복원돼 지금에 이른다. 안내문에 화적으로 고창 생가를 떠났다고 나와있지만 실상은 다른 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넓은 들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언덕을 등지고 앉아있는 인촌 생가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배치다. 각각 독립된 두 집이 앞뒤로 연이어 자리 잡은 것은 처음 집을 지은 후 인촌 아버지 형제가 같은 곳에서 살려 했기 때문이다. 뒤에 배치된 큰집이 먼저, 아랫집이 나중에 지어졌다. 이렇게 앞에 집을 증축하다 보니 동쪽 옆에 세워진 큰집 솟을대문은 출입이 불편할 정도로 옹색해졌다.

바로 앞이 작은집 안채고 뒤로 보이는 게 안문간채다. 북향집이다 보니 전면보다 후면에 더욱 신경 쓴 모습.

지어진 시기별로 부 축적 과정 한눈에
다른 고택과는 달리 집을 지은 시기가 건물별로 정확히 밝혀져 있다. 맨 뒤로부터 큰집 안채가 1861년, 큰집 사랑채가 1879년, 작은집 안채가 1881년, 큰집 사랑채 · 문간채가 1893년, 작은집 사랑채가 1903년에 지어졌다. 이를 따라가면 집안의 부 축적 과정을 알게 된다. 지은 솜씨들이 제각각이라 한 목수가 순차로 집을 지은 것이 아닌 그때그때 다른 목수를 고용해 지었는데 당시 재력에 따라 자재와 목수 솜씨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1903년 올린 작은집 사랑채는 난간을 두른 누마루도 보이고 목재도 넉넉하게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규모도 제일 크다. 또 다른 집들이 민도리집인데 비해 이 사랑채는 직절익공집으로 집을 지은 목수 솜씨도 다른 건물보다 뛰어나다. 한눈에 봐도 다른 건물과는 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제일 나중에 지어진 작은집 사랑채가 다른 건물에 비해 품위와 권위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집을 지을 당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부를 축적했기에 그렇다. 

오른쪽이 큰집 사랑채고 왼쪽이 큰집 안문간채다. 인촌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큰집 사랑채 후면.
큰집 안채. 인촌 생가 안채 정면은 돌려 앉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면이라는 느낌이 강하지 않다. 북향집 영향 때문이다.
작은집 안채 측면. 부엌 살강 부분은 45도 꺾어 처리했는데 깔끔하진 않다. 길을 따라 들어가면 큰집을 연결하는 중문이 나온다.
뒤로 보이는 기둥에 비해 바로 앞 기둥은 동그란 모양으로 보수 중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

소박하게 지으려 했던 노력이 곳곳에
특징을 살펴보면 첫 번째는 안채와 사랑채 등과 같이 중요한 건물과 부속 건물 사이에 여러 면에서 수준 차가 난다는 점이다. 안채와 사랑채 같은 중요 건물에는 그런대로 좋은 부재를 사용하려는 흔적이 보이는데 부속 건물은 부재가 튼실하지 못하고 다른 집에 사용했던 부재들을 다시 사용한 경우도 많다. 또한 현재는 행랑채나 곳간채 지붕이 모두 기와지만 이전에는 억새로 덮었다. 이는 목재가 풍족하지 못했던 시절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되도록 적은 비용으로 집을 지으려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집 전체가 조선 후기에 발전한 전후퇴집 형식으로 지어졌으며 집 안 구석구석 알뜰하게 활용하려는 의지가 보인다. 부속 건물을 포함한 모든 건물이 전후퇴집이어서 평면이 복잡하다. 이런 복잡한 평면 형태는 외관에도 반영돼 매우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부잣집이다 보니 수장 공간을 되도록 많이 확보하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천장 속 더그매 공간을 적극 활용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보이는데 이런 수장 공간의 환기창을 입면에 반영한 결과 일반 한옥과 같은 차분한 느낌은 없지만 다채롭고 재밌는 입면이 나타나게 됐다.
세 번째 특징은 안채 정면이 다른 집에 비해 정면이라는 느낌이 강하지 않다. 오히려 돌아앉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일반적으로 후면에 놓는 벽장을 전면에 배치했기 때문으로 이러한 벽장들 때문에 안채의 정면성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벽장을 북쪽 전면을 향하도록 한 것은 남쪽인 후면에 창을 내 빛을 많이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전반적으로 집은 큰 창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청 창호도 이 정도 규모 집에서 보기 힘든 작은 크기다. 추운 겨울 찬바람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왼쪽 큰집 안채가 놓였고 오른쪽으로 곳간채, 안문간채, 사랑채가 차례대로 보인다.
인촌 생가는 집뿐만 아니라 정원도 관리가 잘 돼 있는 편이다.
뒤편에서 본 큰집 안채와 사랑채.

북향집이 만들어 낸 여러 특이한 모습
집은 북쪽을 보고 앉았다. 북향집은 여러 면에서 단점을 보이는데 이를 극복하려 했던 노력은 큰집 안채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큰집 안채 대청 창호는 일반 방에 설치하는 창호 크기 정도로 소박하다. 이 정도 규모 집 대청 창호는 들어열개로 해 여름에 시원하게 개방하도록 하는 것이 보통이나 이곳에서는 일반 창호와 같은 크기로 만들어 옆에 붙어있는 판장벽이 아니었다면 일반 방이라고 착각할 만하다. 이 역시 더운 여름보다는 추운 겨울 찬바람이 들이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이외에도 각 건물별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징이 더 있다. 첫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이 작은집 사랑채 서쪽 퇴칸에 사용된 퇴보다. 언급했듯이 사랑채가 직절익공으로 된 것도 그렇지만 퇴보가 굴도리도 민도리도 아닌 팔각형 도리라는 것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경우다. 큰집 사랑채 퇴보도 재밌다. 일반 집에서 퇴보는 부재가 곧아 고주 중간에 걸리는데 큰집 사랑채 퇴보는 우미량식으로 뒷부분이 고주 대들보 바로 밑에서 연결돼 있다. 작은집 안채 부엌 형태 또한 특이하다. 부엌 전면 모서리 부분을 45˚로 모를 죽였는데 이런 모습을 한 것도 이곳뿐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부엌 밖으로 살강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꺾어짐 없이 직선으로 처리하기 위해 이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깔끔하지는 않다.
 
또 다른 특징은 큰집 바깥 문간채가 이중문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 집에서 대문을 이중문으로 한 경우는 거의 없다. 이중문으로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솟을대문, 행랑채, 중문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문을 거쳐 들어가므로 굳이 이중으로 대문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 특히 안채로 들어가는 문도 아닌 사랑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을 이중으로 설치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대문이 원래 그런 모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문에는 국화정 등과 같은 쇠장석을 붙여 화려하게 꾸미고 뒷문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처음 지었을 때 솟을대문 없이 이 문을 대문으로 썼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바깥에 대문이 없기 때문에 안전을 고려해 이중문으로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동쪽 옆 큰집 솟을대문. 후에 작은 집이 들어서면서 쓸모 없어지게 돼 옹색하게 됐다.
큰집과 작은집 사잇길. 멀리 큰집 솟을대문이 보인다.
큰집 안채에서 바라본 곳간채.

인촌이 고창 생가를 떠난 이유는
인촌이 이 집 고창 생가를 떠나 부안 줄포로 이사한 것은 1907년이다. 안내문에서 이유를 화적 횡포와 도깨비불이 출몰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종가를 보면 최근에는 직장 등의 이유로 종손이 옮겨 살기는 하지만 근세까지도 집을 옮긴 적은 거의 없다. 근세가 격변기였음에도 종가를 옮기지 않은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가로서 베푸는 삶을 살았기에 주변이 어지러울 때마다 마을 사람이 종가를 지켜준 경우가 많았다.
 
인촌이 이사한 줄포는 군산항이 개항하기 전까지는 전라북도에서 제일 큰 포구였다. 따라서 일본은 항구를 보호하고자 군인을 주둔시켰다. 적어도 줄포 읍내만큼은 치안이 확보됐을 것이다. 즉 치안이 불안한 이곳 고창을 떠나 줄포로 이사한 것이다. 안내판에는 화적이라 했지만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여서 화적은 의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집을 버리고 줄포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면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그들은 혹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덕목을 실천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창 인촌 생가와 줄포에서 인촌이 살았다는 김상만 가옥, 두 집이 많은 차이를 보이는 이유를 당시 시대상과 연관 지어 살펴보면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행간을 읽을 수 있다.

1903년 올린 작은집 사랑채로 목재를 넉넉히 쓰고 난간을 두른 누마루로 설치해 다른 건물보다 웅장하다. 재산이 넉넉했던 시기, 제일 나중에 지어져 품위와 권위를 느낄 수 있다.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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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검박함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고창 인촌선생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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