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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온鄭蘊(1569∼1641/선조 2∼인조 19) 선생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서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본관은 초계草溪다. 선생은 정구鄭逑를 본받아 공부하고 정인홍鄭仁弘을 스승으로 모셨다. 1614년(광해군 7년) 부사직으로 재직 시, 영창대군을 살해한 강화부사江華府使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도에 유배당했다. 인조반정 뒤 석방돼 헌납·대사간·부제학 등을 역임했고, 병자호란 때는 이조참판으로서 조선과 명나라의 의리를 내세워 척화斥和를 주장했다. 청에 항복이 결정되자 자결을 기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후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은거했다. 선생은 남명 조식曺植의 학풍을 이어 받아 강직한 처신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追贈됐다.
 
최성호
사진 윤홍로 기자

나지막한 뒷산을 배경으로 평지에 고즈넉하게 앉아 있는 정온 선생 고택은, 선생이 살던 집은 아니다. 솟을대문에 인조仁祖 임금이 내린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의 정려旌閭 현판이 걸려 있고 현재도 이곳에 정온 선생의 불천위不遷位가 모셔져 있어 그렇게 부르고 있다. 사랑채 마룻대의 ‘숭정기원후사경진삼월崇禎紀元後四庚辰三月’이라는 상량문을 볼 때 1820년(순조 20년)에 지은 것이다.
 
이 고택에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사랑채의 누마루 지붕이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겹지붕이다. 이러한 지붕 형태는 한 마디로 초기 계획의 오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겹지붕이 없던 원래의 누마루는 기둥 높이에 비해 처마가 깊지 않았다. 또한 누마루 앞부분의 지붕을 날아오르는 느낌을 주고자 치켜올렸다. 이것이 빗물이 들이치게 하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 게다가 계자난간鷄子欄干을 설치한 툇마루까지 설치하다 보니 빗물의 들이침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보완하고자 눈썹지붕을 추가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즉 눈썹지붕은 건물을 완공한 후 보첨補添한 것이다.
 
둘째는 용마루가 다른 곳과 형태가 다르다는 점이다. 용마루 아래에 설치한 부고, 착고 밑에 암막새와 수막새를 다시 설치했다. 이러한 용마루는 안채와 사랑채에만 설치했다. 부고, 착고 밑에 다시 기와를 설치했기에 용마루는 일반 지붕보다 훨씬 더 높아 보인다. 이렇게 다시 설치한 막새의 쓰임새는 용마루 틈으로 스며든 물이 천장으로 새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용마루가 높게 보여 건물에 위용을 더하는 부수적 효과도 얻어지고 있다.
 
셋째는 사당의 위치다. 사당의 일반적인 위치는 동쪽, 즉 들어가는 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안채의 우측이다. 주자가례에 의해 사당은 동쪽에 위치한다. 그러나 가끔 왼쪽에 위치하기도 한다. 이렇게 안채 뒤쪽의 정중앙에 위치하는 경우는 이곳이 유일하다. 아마도 불천위를 모시면서 격을 높이고자 이러한 모습으로 배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온 선생 고택은 겹집으로, 솟을대문의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남향한 사랑채가 있다.

집에 권위를 입힌 기단과 누마루
정온 선생 고택의 사랑채와 안채는 겹집 구조이면서 앞뒤에 퇴를 두었다. 겹집은 추운 북쪽 지방에서 추위를 피하기 위해 발달한 구조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 남쪽 지방에서도 겹집의 구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것은 살림의 규모가 커지면서 방을 다양하게 쓸 수 있는 장점 때문이다. 즉 기후보다는 실용성의 문제로 겹집의 평면을 채택한 것이다. 안채의 대청은 4칸 규모인데 뒷마당 쪽 두 칸을 한 자 정도 높였다. 대청에서 행하는 제사를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구조도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식이다.
 
사랑채는 ‘ㄱ’자형으로 우측 전면에 누마루를 두었다. 이것은 함양 정여창 가옥의 방식과 유사하다. 경상남도 지역에는 정여창 가옥 말고도 합천의 묵와 고가나 거창 무릉리 고가 등의 누마루가 이러한 형식이다. 인근에 비슷한 형식의 집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의 문화적 특성이라고 보인다. 건립 연대순으로 보면 합천의 묵와 고가가 제일 오래됐는데 이곳 사랑채가 새로운 규범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랑채는 기단도 두 단으로 높이고 마루도 높여지었다. 평지에서 기단과 마루를 낮추면 집이 낮아 보여 자칫 권위가 없어 보일까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집을 억지로 높이다 보니 전반적으로 불안해 보인다.
 
정온 선생 고택의 사랑채와 안채는 지은 시기가 다르다. 종부의 말에 의하면 안채는 일제강점기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안채는 목재를 넉넉하게 사용했다. 당시의 목재 사정을 고려하면 대단한 사치다. 이러한 목재 사용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했더니 덕유산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정온 선생이 말년을 보낸 곳에 쓸 만한 목재가 많았다고 한다. 어쨌든 당시로서는 목재를 넉넉히 써서 잘 지은 집이다.

ㄱ자형 평면이며 정면 6칸, 측면은 전퇴 있는 2칸 반이고 ㄱ자로 꺾이어 나온 내루 부분이 칸반 규모다.
두줄박이 겹집으로 전퇴를 두었다.
누마루.
사랑채 내부.
내루에 눈썹지붕이 별설되어 있다.

한국 음식 문화의 맥을 잇는 정온 선생댁
정온 선생 고택은 집보다는 음식으로 유명하다. 종부는 유명한 경주 최 부잣집 첫째 딸이다. 종부의 음식은 친정에서 배워 온 경주 최 부잣집의 음식으로 그 솜씨가 대단해서 여러 차례 잡지와 매스컴에 소개됐다. 필자도 종부가 만든 수란, 전복찜, 돔장, 고추소박이를 먹은 적이 있다. 한 마디로 이제까지 먹은 어떠한 음식보다 맛이 한 차원 높았다. 단순히 맛있다는 차원을 넘어서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음식 맛의 기본은 장맛에서 나온다. 종부가 준 간장으로 국을 끓여 먹었는데 이 역시 맛이 대단했다. 쇠고기나 멸치를 넣은 것보다 맛이 더 깊었다. 경주 최씨 집안의 술도 유명하다. ‘교동법주’라고 알려진 이 술의 진짜 맛은 안동의 충효당으로 시집간 둘째 딸에 의해서 명맥을 잇고 있다. 예전 안동에 갔을 때 마신 적이 있는데 시중에서 파는 경주법주와는 맛이 전혀 달랐다. 종부도 법주를 담글 줄 알지만 종손이 너무 술을 좋아해서 결혼 초에 조금 담갔을 뿐 종손의 건강을 위해 이후에는 술을 담그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이러한 음식이 전승될 것 같지 않다. 현재까지 이러한 음식을 배우려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유문화가 많은 홀대를 받아 왔지만 그중에서도 음식 문화에 대한 홀대는 더 심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먹는 많은 한식 중 제대로 된 것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요리서를 보면 술과 음식의 종류가 매우 다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와 한국전쟁 이후 어려운 시기를 겪으며 많은 한국 음식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고난의 시기를 지나고 남은 몇 음식만 보고 한국 음식의 가치를 폄하하고 있다. 이러한 홀대 때문에 좋은 우리의 음식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정온 선생댁 종부의 음식도 곧 사라질 것이다. 사라져 가는 우리 문화 중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채로 통하는 사랑채 좌측의 중문과 3칸 중문채.
안채도 남향했는데 정면 8칸, 측면 3칸반의 전후퇴 있는 두줄박이 겹집이다.
바깥사랑과 안채 사의의 뜰아래채.
뒷마루 쪽 두 칸을 한 자 높인 안채 대청.
안채 누마루.
안채 후원에 자리한 가묘.
글쓴이 최성호
1955년 8월에 나서,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정림건축에 근무했으며, 1998년부터 산솔도시건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한옥으로 다시 읽는 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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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 실용성에 권위를 더한 거창 정온 선생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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