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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사람을 만든다(Ⅱ)







집과 주변 환경 안에서 시각, 청각 그리고 그 밖에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체득되는 경험 하나하나가 모여 우리의 정서를 만들어 간다. 경험이 계속 쌓여가면서 구체화되고 형질화돼 한국인의 고유한 생활과 미감을 만들어 낸다.  우리의 한옥이나 그 안에서 사용하던 가구나 도구들에서 직선이나 예리하게 각이 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살아온 환경과 연관이 깊다.







집이 우리 정서에 영향을 미친 다른 예는 가족 간의 유대 관계다. 한옥은 잘 지어진 집이라도 어쩔 수 없이 외풍이 있게 마련이다. 외풍이 무조건 좋지 않다거나 한옥에만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과거의 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단열과 기밀성에서 현재의 집하고 많이 달랐다. 과거의 한옥이 지금보다 기밀성이 떨어진다는 의미이지, 당대 다른 나라의 집보다 못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외풍은 자연스러운 환기를 유도해 실내 공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이로운 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연스러운 환기는 건강에 많은 도움을 준다.







어쨌든 간에 추운 겨울에 방 안에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아랫목을 찾게 된다. 아랫목에 이불을 깔고 그 속에 발을 집어넣고 있노라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온돌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은다. 이렇게 모이다 보면 살결이 맞닿고, 얼굴을 마주하면서 가족 간에 대화가 오가는 살가운 풍경을 만든다. 나이가 드신 분들은 겨울이면 아랫목 이불 밑으로 발을 넣고 앉아 가족끼리 오순도순 이야기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가족끼리 유대가 깊어짐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는 다른 예지만 한국인의 정서를 만들어 가는 데 한옥의 분위기는 많은 영향을 미쳤다. 창호지에 비치는 달그림자의 정취는 한옥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옛 시조나 시에는 발소리에 관한 표현이 많다. 〈밤비〉라는 대중가요에 “님이 오시나 보다. 밤비 내리는 소리. 님이 오시나 보다. 님의 발자국 소리”라는 가사가 있고, 예리성(曳履聲)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런 단어는 한옥의 마당에 깔린 백토하고 관련이 있다. 한옥에서는 안마당에 화초나 잔디를 심지 않고 단순히 백토를 깔아 햇빛을 반사하게 하여, 집안 전체를 밝게 만들고 쓸데없는 곤충들이 집안에 서식하는 것을 방지한다. 백토는 모래에 석비레를 섞은 것으로, 입자가 굵어 그 위를 걸으면 소리가 난다. 사람이 누구를 기다리거나 긴장하고 있을 때는 소리에 민감하다. 특히 발소리에 예민해져서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백토를 깐 마당은 발소리가 나는데, 시인과 소설가는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발소리는 바닥의 흙 종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입자가 고운 흙이 깔린 땅에는 발소리가 나기 어렵다. 그런 환경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발소리는 그리움을 표현하는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일본 건축가인 니무라 카즈유키는 〈일본 전통 문화공간의 현대적 창조〉라는 글에서 일본의 전통 가옥에서 느낄 수 있는 비의 정취에 대해서 기술했다. 지붕과 처마가 있는 일본의 전통 가옥은 우리의 한옥하고 같은 공감대를 느낄 만한 부분이 많다. 그가 적은, 비가 만들어 내는 다양한 모습은 한국이든 일본이든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낯설기만 할 것이다.



비를 통해서 일어나는 다양한 정취를 느끼려면 처마가 있는 집이어야 한다. 처마가 없는 집에서는 들이치는 비를 막는 데 급급해 비를 즐길 만한 여유가 없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의 다양한 모습과 소리만으로도 혼자 시간을 즐기기에 넉넉하다. 장대비의 세찬 소리뿐만 아니라 비가 그쳐 갈 무렵 한 방울씩 떨어지면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낙숫물 소리까지, 비와 처마가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정경은 한참을 보고 듣고 있어도 지루한 줄 모른다.



그럴 때는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한옥의 머름대에 기대어 턱을 괴고 보는 것이 여운을 자아낸다. 그러나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빗소리는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단지 베란다에 있는 선홈통 속으로 떨어지는 공명 소리뿐 낙수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







이제 청각 외에 시각 정서를 살펴보자. 한옥에서 만들어지는 시각의 정서로는 장독대에 소복이 내린 눈과 저녁에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나지막이 깔린 마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초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의 전경 등 수없이 많다. 그 같은 모습은 아파트의 삶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광경이다.



특히 초가지붕의 선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만의 선이다. 완만한 산하와 함께 부드러운 초가의 곡선은 다른 곳에서는 체험할 수 없다. 또한 장독대와 초가에 소복이 내린 눈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선이다. 그러한 선에 대한 감각이 조선 백자에서 볼 수 있는 양감 있는 풍만함을 만들어 내는 근간이 된다. 부드러운 선에 익숙해지고 나면 경직돼 보이는 직선이나 날카로운 예각에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신고 벗기 편한 신발은 좌식 생활의 산물



집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 관습은 우리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것과 신고 생활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회사에서 근무할 때 실내화를 신는 경우가 많다. 서구에서는 집 밖에서 신발을 벗으면 예의에 어긋난다. 이것은 실내와 실외 생활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우리의 집과 그렇지 못한 서구 집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하루 중 신을 벗고 사는 시간이 대부분이라 신고 있는 것을 답답하게 여긴다. 또한 내외의 개념이 명확하기 때문에 실내인 사무실에서 신을 벗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서구인은 집에서조차 신발을 신고 생활하므로 발 냄새 등의 이유로 벗는 것을 꺼린다.



이 같은 환경은 신발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군대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옆에 지퍼를 달아 벗기 편하도록 개조한 군화를 많이 보았을 것이다. 군화는 발목을 보호하려고 사용하는 신발이므로 발목까지 올라온다. 그러므로 신고 벗는 데 매우 불편하여 신발을 벗고 침상에서 생활하도록 지은 우리 군대의 병영에는 맞지 않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려고 병사들이 병영 생활에 맞도록 개조하는 사례가 많다.







일반인들의 신발도 신고 벗는 상황이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는 집 구조 때문에, 수시로 신고 벗는 데 편리하도록 변화됐다. 옛날에 신던 고무신이나 짚신을 보면 그러는 데 편한 구조로 되어 있다. 또한 조선시대 관복의 신발을 보면 발목까지 올라오게 되어 있으나 발목 부분이 넓어 신고 벗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돼 있다. 일본인들의 전통 신발인 ‘게다(Geta)’나 ‘조리’도 좌식 생활을 하는 일본의 주거 환경에 맞추어 변화된 신발이다. 이처럼 집의 구조는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친다.







보수적 기질의 좌식 생활



또한 좌식 생활은 신체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좌식 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부좌를 틀고 앉지 못한다.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가부좌(跏趺坐)를 틀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대부분 어렸을 때부터 의자에 앉아 생활했던 사람들이다.



침대에 눕고 의자에 앉는 입식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요통(腰痛) 환자도 덩달아 증가하고 있다. 의사들은 푹신한 침대와 의자에 장시간 앉아 있는 것이 요통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외국인들 중에서도 좌식 생활을 추천하는 사람이 있다. 미국 버클리 대학의 교수인 갤런 크렌츠는 바닥에서 활동하는 좌식 생활과 온돌을, 의자에 앉아 지내는 입식 생활보다 더 좋은 것으로 추천하고 있다.



또한 마룻바닥이 사교를 위한 무대로 의자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실제적인 몸의 움직임이 의자에 앉아 있는 것보다 자유로워 폭넓은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이처럼 좌식 생활이 지닌 장점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기질을 보수적으로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기대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만큼 사람은 편안함을 추구하는 속성이 있다. 좌식 생활은 사람들의 활동성을 높이는 데 그리 좋은 생활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하기’에는 매우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동양의 ‘선(仙)’은 바로 앉는 데서 시작한다. 의자에 앉는 것보다는 생각을 집중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이것은 좌식 생활의 성격이 동적(動的)이라기보다는 정적(靜的)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정적인 생활은 활동성을 줄어들게 하며 사고의 개념도 보수적으로 회귀(回歸)하게 만든다.







얼굴을 마주하는 공동체



집과 집으로 형성되는 환경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우선 집의 배치가 우리의 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자. 공동주택인 아파트나 연립 주택의 각 동을 ‘ㅡ’자로 배치하는 경우와 ‘ㄷ’자나 ‘ㅁ’자로 배치하면서 각 동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중앙 광장으로 통하도록 설계한 아파트를 비교해 보자. 두 아파트의 경우 ‘ㅡ’자로 배치한 아파트보다는 ‘ㄷ’자나 ‘ㅁ’자로 배치한 아파트가 주민 사이의 유대가 돈독하다. 주민끼리 유대 관계가 돈독해지는 것은 자주 보기 때문이다. 집으로 가려면 아파트 단지 중앙에 있는 광장을 지나쳐야 하기 때문에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 눈에 익은 사람들이라면 눈인사라도 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남자끼리는 술자리로 이어지고 여자끼리는 차 모임으로 이어지게 되니 친근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ㅡ’자로 배치된 아파트 단지에서는 만남의 기회가 적기 때문에 서로를 알기 어려워, 의도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이상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없다.







차가 다니는 곳은 사람이 마음 놓고 지날 수 없다. 예전에 마을길과 골목길은 어린이들이 나와 뛰어 놀았던 마을의 마당이었다. 아이가 놀던 마당인 길에는 늘 할머니나 어머니가 따라 나와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렇게 하다 보면 아이들끼리 노는 동안 어른들은 가벼운 잡담과 한담으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예전에는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어느 곳에서든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제는 이러한 모습을 보기 힘들어졌다. 차가 도로를 점령하고 나서부터 동네의 골목길조차 안전한 곳이 되지 못한다. 자연히 아이들은 집으로 쫓겨 들어가게 되고, 어른들도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얼굴을 마주한 대화가 없는 곳에서는 공동체의 삶이 있을 수 없다. 도시의 삭막함이 더해 가는 것도 바로 그러한 환경 때문이다. 田







글 최성호<산솔도시건축 대표>



글쓴이 최성호 님은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로서 ‘산솔도시·건축’을 운영 중입니다. 주요 건축작품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유치원·박물관·인문관·약학관, 데이콤중앙연구소, 삼보컴퓨터사옥, 홍길동민속공원 마스터플랜, SK인천교환사 등이 있습니다.



산솔도시건축 02-516-9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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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집은 사람을 만든다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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