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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돌, 방의 구분을 없애다

한옥에서는 안채나 사랑채처럼 남녀 구별에 따라 집을 나누는 경우가 있어도, 기능에 따라 방을 구분하지는 않는다. 크게 나누면 한옥에서 기능별로 나눌 수 있는 것이 방, 부엌, 창고 외에는 없다. 그러나 서양의 집을 보면 침실, 응접실, 거실, 가족실, 서재, 주방, 식당, 창고 등 기능에 따라 수없이 많은 방으로 발전했다. 중국에서도 사용하는 사람(남녀 및 주인과 자식 등)에 따라서 건물 단위로 구분하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면 방은 잠을 자는 곳(와실臥室)과 거실(당堂)로 명칭이 나뉘어 있다. 이러한 구분은 용도에 따른 것이지만, 그렇게 구분하도록 거든 것은 가구다.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네 한옥은 이렇다 할 가구가 없기 때문에 가구에 따라 방을 구분할 조건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침대가 있기 때문에 침실이라는 방으로 구분해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한옥의 방은 이불을 펴면 침실이요, 이불을 개어 다락에 넣으면 거실이고 응접실이다. 또한 밥상을 펴면 식당이고 밥상을 접으면 다시 거실이 된다. 이렇듯 한옥에서 방은 매우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한옥의 방은 서양에서 분화된 각 방의 기능을 한곳에서 모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옥에서 방의 이름은 안방, 사랑방처럼 사용자에 따라 부르거나 건넌방, 문간방처럼 어느 곳에 위치했는가에 따른 이름밖에 없다. 즉 온돌이라는 특수 구조와 그에 따른 가구의 변화가 서양하고 전혀 다른 가변성이 풍부한 주거를 만들어 냈다.

지금과 같은 한옥의 구조가 조선조 초기 이전에도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가구의 특성 때문에 온돌이 전면적으로 도입되기 전의 방은 최소한 중국하고 비슷하게 용도에 따라 구분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입식 생활을 하는 경우 기능에 따라 사용하는 가구가 필요하기 때문에, 고려시대 상류층의 집은 최소한 거실, 침실, 식당 그리고 응접실 정도는 구분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고려시대의 집 구조를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해 간다면 의외의 결과를 얻지 않을까 생각한다.

온돌로 달라진 집의 구조

이제 온돌이 들어오면서 집 구조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찾아보자. 우선 온돌이라는 특수 구조 때문에 바뀌는 것은 기단이다. 온돌을 깔자면 자연히 기단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초기의 구들은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어 기단이 그리 높지 않았으나 온돌이 발달함에 따라 더욱 높아졌다고 한다. 온돌이 발전하면서 부넘기 등의 구조가 추가되고, 온돌을 설치하기 위해 바닥이 점점 높아져 최종적으로는 현재의 높이가 됐다고 한다. 그러던 온돌이 현대에 와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예전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고래를 통해 열기를 공급하느라 기단이 높았지만, 지금은 외부에 보일러라는 열원을 두고 온수로 난방하는 방식으로 변하면서 예전과 같이 기단이 높을 필요가 없다. 충남 홍성의 조응식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98호) 외에도 모든 한옥을 보면 온돌을 들인 본채와 들이지 않은 광은 기단의 높이에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점을 보더라도 기단의 높이는 온돌의 설치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온돌 때문에 가장 많이 달라진 곳은 아마도 부엌일 것이다. 고구려 벽화의 예처럼 예전의 부엌은 반빗간 형식으로 집하고 별도로 구성했다. 이것은 부엌에서 이용하는 열기가 난방하고 관계 없기 때문이다. 한옥에서도 여름에는 부엌 뒷마당에 별도의 화덕을 설치해 음식을 만들었다. 이처럼 난방열과 취사열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따라 집의 구조가 달라진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안에 부엌이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난방과 취사가 분리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조의 집은 열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부엌을 집 안으로 들여왔다. 조선조에 부엌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거주하는 방에 바로 연결된 것은, 취사와 난방을 같이 하여 열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결과다. 우리나라의 날씨를 보면 사실 난방이 필요 없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특히 중부 이북 지방을 보면 여름 한철을 제외하고는 난방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취사열을 난방에 활용한다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부엌은 고구려에서 고려시대까지는 반빗간 형식으로 유지돼 왔을 것이다.

한옥에 대한 오해

온돌에서 난방과 취사를 같이 하다 보니 방과 부엌의 높낮이가 크게 달라졌다. 이 때문에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 방으로 옮기는 일이 편하지 않았다. 한옥의 부엌은 여성들을 가사에 묶어 두는 주범(主犯)이었다고 단정짓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한옥의 부엌 때문에 불편을 겪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의 사회구조가 해체(解體)되고 노비 등이 하던 가사노동을 안주인인 여성들이 직접 하게 된 이후다. 결과적으로 급격한 사회의 변화에 집이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기와집들은 조선조에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살았던 대갓집이다. 그러한 사회구조에서 안주인이 가사노동을 적극적으로 했을 까닭이 없다. 윤증 고택 맏며느리의 증언에 의하면 결혼 초기에 지금도 살아 계신 종부(宗婦)하고 마찰이 많았다고 한다. 어떤 일을 직접 하려고 하면 종부께서는 “왜 아랫것들을 불러 시키지 않느냐?” 라고 말씀하셨다. 종부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전에 하인을 부리던 습관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처럼 집안 노동의 대부분을 하인이나 노비가 전담했기 때문에 예전의 한옥은 사는 데 조금 불편해도 그리 문제되지 않았다. 20세기 초입을 전후해 노비가 방면되고 임금노동자로 전환되면서, 경제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 집은 이전과 같은 저렴한 비용으로 노동력을 구할 수 없게 됐다. 경제력에서 사람을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자 안주인들이 직접 가사에 참여하게 됐던 것이다.

지금의 사회상을 보고 예전의 집을 깎아내리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요즘 짓고 있는 집은 사회구조에 맞추어 개선된 집이다. 지금의 집을 보면 과거하고 아주 딴판이다. 예전하고 다른 점은 여성의 가사 활동에 배려를 많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집에 대한 연구 중 상당한 부분이 가사 노동의 최소화에 관한 거란 사실만 보더라도 여성에 대한 배려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주택을 설계하다 보면 집에 대한 의사 결정권이 대부분 안주인에게 있다는 것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볼 때 현재의 집은 안주인의 영역이다.

아랫목과 윗목으로 구분한 상석

온돌이 우리 정서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자. 정서적인 문제는 주관적인 견해가 많이 가미되기 때문에 개인적인 판단이 많음을 전제로 한다. 지금의 온돌은 온수를 순환시켜 간접 난방을 하기 때문에 방 전체가 골고루 따듯하다. 그러나 예전의 온돌은 직접 불을 때어 난방을 했기에 불에 가까운 곳이 상대적으로 뜨겁다. 그래서 전통의 온돌에는 요즘은 희미해진 개념인 윗목과 아랫목이 있었다. 윗목과 아랫목의 온도 차이는 방 안에서도 상석과 하석의 구별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추운 겨울 윗사람이 방 안에 같이 있을 경우 우리는 당연히 따뜻한 아랫목을 윗사람에게 양보한다. 가뜩이나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유교적 개념이 강했던 조선조에서 방의 형편에 따라 상석과 하석을 구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모든 나라에도 상석과 하석의 개념이 있었으나, 우리하고 달리 상하의 구분이 가구의 배치나 입구의 방향에 따라 결정됐다. 우리나라처럼 난방의 문제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 중심 사고를 형성한 온돌

온돌은 가족 간의 유대를 높이는 데도 한몫을 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이불을 함께 덮고 옹기종기 모여서 하는 대화는 가족애를 키우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사회학적으로 대화의 거리는 그 사회 구성원 간의 친밀도를 의미한다고 한다. 연인 사이의 거리는 스킨십(Skinship)이 가능한 거리를 유지하고, 사이가 그리 가깝지 않으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화를 하게 된다. 그러나 추운 겨울의 온돌은 이러한 사회적 거리를 자연스럽게 좁히는 데 기여한다. 따뜻한 아랫목에 몰리는 자연스러운 상황을 통해 가족 간의 이해를 높여 가족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정서가 형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좌식 생활을 하게 된 것이 우리의 사고를 보수 성향으로 흐르게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조선조를 통해 나타나는 문예 우위의 성향은 성리학적인 사고에 영향을 받았겠지만, 온돌에서 연유한 정적인 문화에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신을 벗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움직임에 적극적일 수 없다. 행동하기보다는 사고하는 습관을 더욱 길러 주는 것이 바로 온돌이 아닐까. 田


최성호 <산솔도시건축 대표>

한옥 이야기는 이번 5월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글과 사진을 제공해 주신 최성호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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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이야기] 한국인의 삶을 결정한 온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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