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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후기 대표적 양반 집인 강릉시 운정동의 아흔아홉 칸짜리 선교장(船橋莊). 민가로는 가장 넓다는 이곳의 이야기 실타래를 풀려면 대관령과 경포호를 빼놓을 수 없다. 강한 높새바람을 등지고 대관령 고갯마루에 서면, 짙푸른 동해바다가 시야에 꽉 차게 펼쳐지고 발 아래로 강릉시가 굽어보인다. 예전 강릉으로 부임하던 벼슬아치 치고 이 고개를 넘으면서 울지 않은 이가 없었고, 또 넘어 와서는 웃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소박한 인심을 지닌 살기 좋은 고장이기 때문이다.

강릉은 대관령에 기댄 채 관동팔경 중 첫손에 꼽는 거울처럼 맑은 경포호를 안고 바다를 향해 열려 있다. 달밤에 술잔을 기울이면 달이 하늘뿐만 아니라 호수에도, 바다에도, 술잔에도 그리고 마음에도 떠서 다섯 개가 된다는 경포호. 그 서쪽 죽헌동에는 신사임당의 친정이자,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이 있다.

선교장은 오죽헌과 경포대 사이, 강릉시내에서 경포호로 나가는 도로 왼편 나지막한 산에 평온하게 둘러싸여 있다.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빼어난 풍치를 지닌 곳으로 활래정, 아랫사랑, 열화당, 서별당, 연지당, 안채, 동별당 등의 독립 가옥으로 잘 짜여져 있다.



재화가 늘고 자손이 번창하는 땅


경포호 둘레가 30리로 지금(4㎞)보다 훨씬 넓었을 때에는 선교장은 물론, 그 서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오죽헌 앞에까지 달했다. 지금은 강릉시 운정동에 속하나 배를 타고 서쪽의 초당 쪽으로 건너다녔던 때의 지명은 ‘배다리(船橋里)’다.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11세손인 이내번(李乃蕃)이 1700년대에 지어 살기 시작해 현재까지 9대째 종가를 이루며 살고 있다. 이내번은 충주에서 살다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 안동 권씨와 함께 외가 근처인 강릉 저동으로 왔다. 그후 가산이 넉넉해지자, 좀더 넓은 터를 찾던 어느 날 족제비를 쫓아가다가 배다리에 이르러 명기(名基 : 살기 좋은 땅)를 발견했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선교장의 자리는 시루봉에서 뻗은 그리 높지 않은 산줄기가 평온하게 장풍(藏風)을 하고, 남으로 향해 서면 어깨와도 같은 부드러운 곡선이 좌우로 뻗어 왼쪽으로는 약동 굴신하는 생룡(生龍)의 형상으로 재화가 증식할 만하고, 약진하려는 듯한 호(虎)는 오른쪽으로 내려 자손 번식을 보이는 산형” 이라고 한다. 그 때문일까, 전주 이씨 일가는 강원도 영동 일대의 땅을 소유할 만큼 부를 이루었다.

좌향은 전망으로 적합하지 않은 경포호(현재는 뭍임)를 피해 배다리골 내부로 돌려 앉혔다. 반면 안채 전망은 골짜기 내부에서 벗어나 넓은 시야를 확보했다.



한국 전통 주거문화를 한눈에


선교장 어귀 우측에 있는 인공 연못 한가운데에는 장방형으로 섬〔當洲〕을 만들고 소나무를 심어 운치가 빼어나다. 그 건너편 선교장의 외별당인 활래정은 1816년 이 후가 지은 것으로, 연못 안쪽으로 나온 마루를 돌기둥이 받치는 누각 형식의 ‘ㄱ’자형 팔작지붕 겹처마 납도리 집이다. 주로 남자의 사교 공간이자 손님의 장기 숙소로 사용했다. 활래정이라는 이름은 주자의 시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내려오는 물이 있음일세〔爲有源頭活水來〕”에서 따왔다. 그 뒤는 풍수상 좌청용에 해당하는 구릉으로 아름드리 나무숲이 배경을 이룬다. 활래정은 당초 연못 가운데 섬에 있었는데,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청룡의 부리를 눌러 가세가 예전보다 기울었다고 한다. 연못은 선교장 북쪽의 태장봉에서 쉼 없이 내려오는 맑은 물로 채워진다. 지금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연(蓮)이 꽃망울을 터트리는 여름철이면 선교장의 전체 분위기를 이끈다.


활래정에서 좀더 안쪽으로 들어서면 정면 23칸, 측면 1칸으로 줄지어 선 박공지붕의 행랑채(?) 사이에 선교유거(船橋幽居)라는 현판이 걸린 솟을대문과 안대문이 나온다. 솟을대문은 서쪽 사랑채의 접객용 공간으로, 내외벽이 있는 안대문은 동쪽 가족용 공간으로 통한다. 선교장의 거주자들은 대문채를 아랫사랑 또는 작은사랑이라고 부른다. 이유인즉, “선교장에는 행랑채가 없다. 양반 기술자들이 주로 머물렀고 하인들은 바깥에서 살았다. 어떻게 양반과 하인이 같은 높이의 마당에서 함께 머무를 수 있겠냐”는 것이다. 기록에는 선교장 앞의 30여 초가집에서 하인과 소작농이 머물렀다고 한다.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좌측으로 기단 위에 높직이 선 22평 규모 팔작집인 열화당이 자리한다. 차양을 드리운 계단을 오르면 처마 밑에 열화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친척과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기뻐하고〔悅親戚之情話〕”라는 데서 따왔다.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손님을 맞거나 가족을 포함한 친척들이 사용한 남성만의 공간이다. 구조는 큰 대청과 온돌방 셋, 작은 대청으로 짜여져 있다. 동판을 너와처럼 이은 차양은 러시아 양식으로 러시아 공사관에서 선물로 지어 줬다고 한다.


열화당이 남성 공간이라면, 옆의 서별당은 완충 공간이다. 본채인 서별당과 그 앞의 ‘ㄴ’자형 행랑채인 연지당(硏知堂)으로 짜여져 있는데, 예전에는 열화당 쪽의 서고 하나는 남성 공간으로, 여타는 여성 공간으로써 내외담으로 분리돼 있었다고 한다. 안쪽 깊숙이 자리한 서별당이 가족을 서로 연결시켜 줬다면, 연지당은 주로 여자 하인이 기거했다. 즉 연지당에서 서별당에 머무는 집안 아이들을 돌보면서 사랑채인 열화당을 찾는 손님들의 움직임을 엿보며 시중을 들었을 것이다.


서별당 우측 중문으로 들어서면 깊숙한 곳에 안채와 가족만의 휴식처인 동별당이 자리한다. 높은 기단 위에 자리잡은 안채는 넓은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으로 공간을 나누고 툇마루를 둘렀다. 방마다 예전의 세간을 잘 보관하고 있어 전통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안채보다 한 단 낮은 위치의 동별당은 안주인과 가족을 포함한 여자 친척이 사용하는 휴식처다. 안채의 ‘ㄱ’자 평면을 반복하여 동쪽에 두 개, 서쪽에 한 개의 온돌방으로 공간을 분리하고, 전면에는 넓은 툇마루를, 후면에는 좁은 툇마루를 돌렸다.



선교장은 행랑채와 바깥사랑채, 안채로 이어지는 집중형 배치가 분산형 배치를 하고 있다. 한 세대에 지은 건물이 아니라 주어진 대지 상황에 맞추어 대를 이어 각각의 건물을 앉혔기 때문이다. 혹자는 통일감이 없는 산만하기까지 한 공간 배치를 두고 인간미 넘치는 공간구조라고도 한다. 한편 전주 이씨 일가가 영동은 물론 강원도 일대의 막대한 땅을 소유할 만큼 부를 이룬 것에 비하면, 선교장은 상류 귀족의 집으로는 검소한 편에 속한다. 정인국 교수는 《한국건축양식론》에서 선교장을 일러 “구조도 모든 장식이나 유회적 조작은 쓰지 않고 쉽게 납도리로 순박하게 다루고 있어 더욱 호감이 가며, 다른 주택에서 느끼는 허세와 유생적 고루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처럼 강릉의 선교장은 조선 후기의 주택과 세간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전통 주거문화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田




글·사진 윤홍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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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사계의 장원, 강릉 선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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