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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 사대부가의 진면목을 한눈에

윤증고택 尹拯故宅



윤증(尹拯 : 1629-1711) 선생은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호가 명재(明齋)이다. 선생은 과거시험에 합격하지는 않았으나, 그 학문이 높아 조정에서 수많은 출사 권고를 받았지만 한번도 조정에 출사하지 않았다. 우의정에까지 제수(除授)됐으나 결국 거절했다. 이로써 선생은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선생은 당시 서인의 수장이던 송시열과 아버님의 묘지명 문제로 사이가 나빠진 후 정치적 대립을 했다. 당시 송시열을 따르던 파를 ‘노론(老論)’이라 하고, 윤증 선생을 지지하던 소장학자를 ‘소론(少論)’이라고 불러 서인의 분열을 가져왔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의 집을 ‘윤증고택’이라 부르지만, 사실 윤증 선생은 이곳에서 거처하지 않았다. 선생의 13세손 윤완식(한국효문화원 이사, 50세) 씨의 설명이다.

“선생은 매우 검박하게 생활했다. 이 집은 선생의 자제들과 제자들이 힘을 합하여 지은 것인데, 선생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들어오지 않았다. 선생이 살던 실제 고택은 현재 유봉영당(酉峯影堂)자리이며,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윤증 선생이 이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소박한 삶의 태도 때문이다. 선생은 돌아가실 때 제사도 간단히 지내라 하고, 평소 때도 반찬이 두 가지 이상을 넘지 않도록 할 정도로 검박한 생활을 했다. 이러한 선생의 유지는 지금까지 내려와 현재도 제사상을 매우 소박하게 차리고 있다.”



집안 자존심 지키려 솟을대문을 없애


윤증고택은 선생의 후손과 제자가 지었지만, 선생의 생각을 많이 반영했을 것이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품위 있으며, 집이 밝고 아늑한 것도 선생의 뜻을 반영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러한 점에서 ‘사람이 사는 집은 어떠했으면 좋을까’ 하는 느낌을 느끼고자 한다면 윤증고택에 가서 보기를 권한다.



집은 사람이 살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밝은 햇살이 비치고 포근해야 한다. 이러한 집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윤증고택은 이러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안채는 밝고 포근하며, 사랑채는 늘 밝고 좋은 전망을 갖추고 있다.



윤증고택은 열린 입구자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러한 집은 자칫 폐쇄되어 답답하기 쉽고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음침하다. 햇빛이 들지 않는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마음이 넓지 못하고 괴팍하다. 그러나 윤증고택은 늘 밝고 명랑하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두 차례 만난 차종부(신정숙, 60세)의 마음은 넓고 포근했다.



윤증고택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첫째 모든 한옥에 있는 솟을대문이 없다. 둘째 향교와 담을 같이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우리나라 어느 곳에도 없는 윤증고택 만의 특징이다.



솟을대문이 없는 집도 많지만 그 대부분은 전쟁 때, 또는 관리 소홀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러나 윤증고택의 경우는 일찍부터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누군들 사랑채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집에서 사는 것을 좋아할 것인가. 윤완식 씨는 현 위치로 향교를 이전한 것과 솟을대문 없어진 것이 관련이 있다고 한다.



“원래 향교는 노성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극심하던 19세기 초 궐리사(공자의 영정을 모신 곳)를 노론의 주도로 윤증고택에서 멀지 않은 현 위치로 옮기더니, 20∼30년 후 향교도 윤증고택의 바로 옆으로 옮겨버렸다. 이것은 소론 영수 집안의 동태를 감시하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노론의 속셈을 알아챈 웃어른께서 그럴 바에는 모든 것을 보여주자는 차원에서 솟을대문을 없애버렸다.”



19세기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정녕 그렇게 나온다면 모든 것을 다 보여주겠다’는 오만과 자부심에서 나온 것으로, 자존심만은 지키려는 노력의 발로다. 그만큼 윤씨 집안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없어진 솟을대문으로 사랑방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매우 시원하고 아름답다. 사랑채에서 바라다보는 마당 앞 둔덕 위에 있는 소나무가 아름답고, 향교와 사랑채 사이에 있는 연못을 바라보는 경관도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경관은 솟을대문이 있었다면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집안 곳곳 살아 숨쉬는 집


우리의 집은 손님을 위한 집이 아니라 주인을 위한 집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한옥의 즐거움을 느끼려면 안에서 밖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즐거움을 모른 채 사진 몇 장만을 찍고 돌아가 버린다. 주인의 입장에서 집을 느끼려면 안채나 사랑채에 앉아 주변을 돌아보아야 한다. 앞에 있는 언덕에 소나무가 너무 성글어 나무로 좀더 가려졌으면 했는데, 윤완식 씨는 ‘예전에는 대추나무가 많이 있어 지금보다는 많이 가려졌다’고 한다.



모든 점에서 윤증고택은 참 사는 맛을 느끼게 하는 집이다. 사랑채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런 곳에서 술을 한 잔 걸치고 거나해진다면 시 한 수가 절로 나올 것만 같다. 편안하게 앉아 주변을 바라보며 먹는 음식 맛은 어떠했을까. 집주인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다.



윤증고택에는 직설적인 표현보다는 은유가 가득하다. 모든 옛집이 그렇듯이 이곳에서도 은유적 표현인 ‘도원인가(桃源人家)’라는 당호로부터 사랑채 앞의 ‘석가산(石假山)’까지 작지만 모든 것을 포용하려는 넓은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사랑채 누마루 바로 아래 한 뼘 크기의 작은 연못을 파고 주변을 몇 개의 돌로 감싸놓고는 석가산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크기가 문제이겠는가. 작음 속에서 큰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로써 족할 뿐, 그러한 마음이 곧 세상을 바라보는 힘이 될 것이다.



윤증고택의 안채는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시원함과 아늑함이 있다. 이러한 느낌을 보여주는 안채가 그리 많지 않다. 윤증고택의 안채는 시원함을 주기 위하여 대청을 다섯 칸으로 간살잡이를 했다. 평면상으로 안방과 건넌방에서 한 칸씩 잡아먹어 실제 규모는 8칸이지만 10칸의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옛말에 부잣집을 6칸 대청집이라고 했다. 6칸 대청도 큰데 10칸 같은 8칸 대청이니 얼마나 넓게 느껴지겠는가. 이러한 개방된 분위기 때문에 대청에 앉아 있어도 답답함이 전혀 없다. 또한 뒤뜰의 장독대와 대나무 숲도 자연스러운 분위기와 함께 시원함을 더해 준다.



윤증고택의 또 다른 맛은 다른 집과 달리 집이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돌아보면 모든 곳이 새롭다. 정성을 들여 잘 가꾼 집임을 알 수 있다. 집을 돌아보는 쏠쏠한 맛이 있다. 구석구석 모두 정겨우면서도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보다 큰 집도 이렇게 다채로운 맛을 보여주지 못한다. 윤증고택의 참 맛은 지금까지 사람이 아직 살고 있기 때문에 집 구석구석 손때가 묻어 있어 집이 숨쉬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윤증고택 만의 매력이다.田




최성호<산솔·도시건축연구소 소장, 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

사진 윤홍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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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향촌 사대부가의 진면목을 한눈에 윤증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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