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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라고 다 같은 목수가 아니다. 집이라고 다 같은 집이 아니듯……. 특히 한옥, 목구조 뼈대 방식 흙집에서는 목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절대적이다. 때문에 우리가 몇 년에 걸쳐 지어온 흙집의 구조와 유형, 맛이 변화해 온 데는 목수 팀의 점진적 교체가 필연적이었다.
목수라고 통칭되는 직업에서 안을 들여다보면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일명 거푸집 목수로 아파트나 상가, 빌라 등의 철근콘크리트 집을 짓는 ‘형틀 목수’가 있다. ‘내장 목수’는 주로 인테리어 일을 담당한다. 아파트나 주택, 상가의 리모델링이나 가구도 제작한다. 서구 목조주택의 유입으로 형틀 목수나 내장 목수들이 전업(轉業)을 하거나 병행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들을 서구 목조주택의 구조체 방식을 따서 ‘2″×4″ 목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음이 ‘한옥 목수’로 주로 사찰 신축이나 궁궐 보수 등 문화재 관리 차원의 일을 하고, 나름의 계보가 있어 법식을 따지는 엄격한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한옥 목구조 방식의 현대 흙집이 틀을 잡아가면서 민간에서는 현대 한옥의 실험이 진행 중이다.


현대 한옥의 완성을 위하여

1999년 현대 흙집 단지로 기획한 이천 솟대전원마을 4개 동은, 일명 형틀 목수라고 불리는 팀에 의해 진행됐다. 골조를 형성하는 뼈대와 처마 서까래는 한옥의 느낌만 따오고, 지붕은 서양식 트러스 방식으로 처리했다. 아스팔트 슁글이라는 서양식 지붕 재료로 마감하고, 최대한 현대주택의 기능을 담당하도록 구성했다. 그후 한옥(뼈대집의 특성으로 한옥으로 불려졌다)에는 지붕 마감재는 기와가 제격이라는 수요자들의 주문으로 개량형 한식기와로 지었지만 전통 한옥으로는 턱없이 모자라다는 느낌이다.

이를 돌아보며 한옥 공부를 시작했고, 그것을 계기로 2002년에는 사찰과 한식 창호 제작을 주로 한 나이 많은 한옥 목수 팀으로 전격 교체했다. 명달리 주택의 신축 과정에서 이 팀을 긴급 투입하여 거실(대청) 공간만은 별도의 오량천장이라는 유형을 완성했다. 지붕 모양도 초가를 닮은 우진각 지붕과 전통 한식 팔작지붕으로 제 모양을 갖추어 갔다.
실전을 통해 조금씩 한옥 건축의 법식을 알아가면서 흙집으로서 현대 한옥이라는 정형 찾기에 부심(腐心)했다. 결국 집을 짜는 가구 방식과 지붕 모양이라는 큰 틀이 눈에 들어왔고, 구들방과 마루의 적용, 창호 문제와 더불어 현대 한옥의 큰 그림을 완성했다.


2004년부터는 한옥 구조의 법식을 전수한 정통 한옥 목수와 현대 한옥의 실험을 시도할 젊은 목수들을 결합하면서 집의 구성과 모양을 다양화했다. 문제는 팀의 지속성이었다. 한결같은 작업의 결과를 낳으려면 한옥 목수 팀의 안정이 최우선 과제였으나, 이는 회사가 어쩌지 못하는 결정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회사는 목수 도편수(일명 목수 오야지)와 시공 계획 및 시공 단가를 협의하기 때문에 일의 증감에 따라 목수 도편수와의 긴장 관계는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정에 따라 일하는 사람들의 교체가 빈번할 수밖에 없었다. 일거리가 계속 이어지지 않으면 목수 팀의 안정적 수급은 불가능하다. 일거리를 찾아 이합집산(離合集散)할 수밖에 없는 건축 현장의 속성상 회사 직할의 목수 팀을 유지하지 않는 한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무엇보다 기술이 뛰어난 목수는 시공사 머리 위에서 가르치려 하거나 단가 협상에만 혈안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품성은 좋은데 기술이 못 미치면 원하는 집을 이룰 수 없었다. 품성도 좋고 기술력을 갖춘 인간 관계를 맺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전통 한옥의 계승물 오량 천장

4월 15일 밤, 목수 팀이 숙소에 짐을 풀었고, 그 다음날 합천 치목장(治木場)장에서 가공한 목재가 현장에 도착했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지난겨울 인제 현장에서 보고 올해 들어 처음 보는 것이니 얼마나 갈증나는 세월이었던가. 지난겨울 내가 어려웠던 만큼이나 목수들도 힘겨웠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번 만남은 더욱 특별했다. 더욱이 목수 공정 처음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함께 한다는 것은 나에게나 목수들에게 있어서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팀원 여섯 명 중 한 명은 사찰 신축 공사에 들어갔고, 또 한 명은 농사일로 이번에는 참여치 못했다. 일을 배우는 막내를 빼고는 같은 시대를 살아 온 서른 살 후반의 또래들이었다. 실력도 서로 견줄 만큼 비등비등했다. 그러니 누구 하나가 독단적으로 도편수(오야지) 행세를 하지 않았고, 일에 있어서나 돈의 분배에 있어서도 의논하고 협의하는 풍토가 자리잡았다. 품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쏟지 않아도 되는 일의 진행은 구성원 각자 실력을 발휘하게 만들고, 그것을 통해 다시 기술력을 배가하는 기회로 삼는 듯했다. 어떤 문제에 부딪치면 해결 방안을 내고 토론을 통해 합의에 이르렀다. 서로를 배려하면서 공동으로 만들어 가는 작업 과정은 바로 내가 그리던 현장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일반 건축 현장에서 이런 모습을 본다는 건 그야말로 꿈같은 일일 것이다.

콘크리트 기초 면에 기둥이 앉을 먹 선을 놓고 간이 주추가 자리잡았다. 기둥이 서고 크레인으로 도리와 보를 옮겼다. 빡빡하게 홈을 딴 사개에 나무망치인 떡메로 내리꽂아 맞춤을 했다. 못 하나 박지 않는데도 서로가 짱짱히 물려 있는 ‘이음’과 ‘맞춤’의 구성이 가히 경이로웠다. 이 과정 모두 이틀을 넘기지 않았다. 하루면 집을 짜고, 그 다음 날은 수직 수평을 맞추는 교정 작업에 들어갔다.

이렇듯 뼈대 방식의 짜임은 한옥의 민도리집과 다름없다. 장비를 이용하면서 일이 빨라졌다는 것뿐… 차이는 내부 천장 형태에서 나타난다. 집을 짜는 오량구조 방식을 거실(대청)이나 중심 공간(진부 현장에서는 성당)에 천장 형태로 독립시켜 적용한 것이 현대 한옥의 가장 큰 성과이다. 그래서 더욱 신경이 쓰이는 작업이기도하다.

외부 모습을 보고는 그냥 흙집이거니 했던 사람들도 집 안으로 들어와 거실의 오량천장을 보고서는 너나없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우리 살림집의 대청마루 정서를 자극하는 계승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량천장은 천장이 만들어질 공간의 길이와 폭, 건축물 내의 위치에 따라 그 모양이 천차만별로 나타난다. 때문에 정형화 된 틀에 꿰어 맞추기보다는 외부로 향하는 느낌, 다른 공간과의 조화에 더욱 중점을 두어야 하는 일이다.

처음 별도의 오량천장을 시도했을 때는 외부 서까래 처마와 연결되게 오량천장을 구성했으나 외풍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외부의 한기를 차단하는 다른 대안이 필요해진 것이다. 결국 내부에서 별도의 오량천장을 만든 것이 2004년부터이다. 때문에 오량천장이 완성되고서야 외부 서까래가 걸릴 중도리와 용마루 선인 종도리가 덧지붕으로 만들어졌다. 계산이 정확하지 않으면 내부 오량천장과 중도리가 부딪치는 경우(높낮이 문제로)가 발생하는데, 이 문제야말로 목수들의 실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오량천장의 구성을 완료하고 중도리에 서까래가 걸리기까지, 맞배지붕일 경우 출목한 도리에 박공판이 걸리는 순간까지 목수들도 마음의 긴장을 놓지 못한다.

그렇게 많은 집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량천장 형태가 정말 ‘그때 그때 다른 까닭’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오량천장도 팔작지붕 형태의 천장이 존재하고, 우물 반자 형태를 응용한 오량천장도 있었던 것이다. ‘목수들이 이번엔 이렇게 맛을 냈구나’ 속으로만 생각했지 그 이유를 잘 몰랐다. 대들보를 얹는 자리에는 기둥을 받쳐야 하는데, 공간 구성이 그렇게 되지 않아 그 자리에 기둥이 서지 않으면 별도의 보강이 필요해지기 마련이다. 기둥을 받치지 않는 길이만큼 대들보 위로 중도리와 종도리를 돌출시켜 반자 형태로 길이를 연장하고 오량천장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 그래… 기둥 구조물이 없으면 지금 당장은 문제가 아니지만 세월이 가면 처질 수 있지, 기둥을 세울 수 없으니 반자 형태로 만들었구만.’ 이렇듯 변화무쌍한 것이 집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수녀원 성당의 천장은 또 달라야 했다. 성당이라는 종교적 특성을 감안할 때, 주택의 거실에서 응용했던 팔작 형태의 오량천장은 맞지 않았다. 외형이 그렇듯, 천장이 높고 경사진 맞배 형태의 오량천장이어야 벽면에 종교적 상징물을 설치할 수 있으며 성당다운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맞배 오량천장이구만’ 목수들과의 합의에 이르자 전체 그림이 잡혔다.

목수, 생일상 없는 상량식

현장에서 집 짜기 공정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인 4월 22일 상량식이 진행됐다. 옛 살림집의 상량은 집의 뼈대가 갖추어져 집을 지켜주는 성주신을 모시는 날이며, 고생한 목수들의 생일잔치이기도 했다. 현대는 상량 후에 더욱 할 일이 많은 복잡한 건물이 됐음에도 이 의식만은 그대로 남아 있다. 목수들이 가장 기대하는 날이기도 하다.

“수녀님. 상량식은 어떻게 할까요.”
“서울에서 손님들이 내려오기는 어렵고 우리끼리 하지요. 뭐―, 간단히 예배만 드릴 게요. 점심은 수녀원에서 하면 어때요.”

그런 터라 상량식 일반 관례를 설명하지 못했다. 전날 밤 마룻대를 들어올릴 천을 준비하고, 한옥 목수들이 생전 처음 경험하는 경건한 상량이 치러졌다.

“예배 후에 아멘…, 하면 들어 올려 주세요.”

수녀님의 주문에 따라 긴장한 목수들이 ‘아싸 -’하는 순간 번쩍 들어올려졌다. 여느 때 같으면 엮은 천 줄에 만 원짜리 지폐가 줄줄이 매달려야만 올라가던 마룻대가 ‘아멘’ 한 마디에 번쩍 올려진 것이다. 긴장하고 서 있는 목수들을 보면서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더 많은 상량비를 얻어내려 흥정(?)에 애쓰는 목수들의 모습을 많이 보아온 터였다.

“좋습니다. 새로운 경험일 것 같네요. 식사도 고기나 술 같은 거 준비하시지 말고 수녀님들 드시는 것과 똑같은 반찬으로 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목수 팀이 의젓해 보였다. 예배를 지켜보던 나는 ‘어찌 저리 당당하고 의연할 수 있을까’,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수녀복을 입은 수녀님들은 더 이상 한 사람의 여성이 아니었다. 믿음으로 고행을 받아들이는 수행자, 선지자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마룻대를 고정하고 내려 온 목수들의 얼굴도 긴장한 낯빛이 역력했다. 나 또한 그러했으리라. 아마도 집은 사상과 종교, 문화적 차이를 뛰어 넘어 사람의 모습으로 부활하는 생명체가 분명했다. 살아가며 이 감동은 오래도록 계속될 것 같다.

문제는 처마 완성 후 덧지붕을 만들면서 박공판을 걸어야 하는 순간 발생했다. 서구 목조주택의 박공지붕과 달리 한식의 맞배지붕 박공은 사각 서까래 형태의 목기연이라는 부재가 박공판 위에 얹어져 맛을 낸다. 넓은 박공판은 건물 양 쪽 끝의 도리와 중도리 종도리에 고정돼야 한다. 지붕 경사도가 30도 정도 야트막한 지붕이거나 팔작지붕일 경우에는 문제가 없는데, 성당의 천장 또한 맞배 오량천장으로 구성 된 데다 경사도가 35도, 40도에 이르기에 폭 두 자 정도의 박공판이 중도리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난감한 상황이었다.

사찰이나 제실처럼 풍판을 달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내용은 한국 국적의 수녀원이지만, 그 외형의 느낌은 성당 본연의 느낌을 살리기로 했기에 창조성이 더욱 요구됐다. 긴급 소집한 토의에서 몇 가지 안이 나왔는데, 중도리에 걸리도록 반원형 모양의 박공판을 조각하여 원 박공판과 이음하자는 것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으로 조각한 폭 두 자 이상의 박공판을 완성했다.
경사 심한 지붕에 웅장한 모양을 갖춘 박공의 완성은 한국 국적의 수녀원으로서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완성된 박공처마를 지켜본 수녀님의 반응이 곧바로 전달됐다.

“중도리와 중도리 사이 박공 가운데에 성상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마루를 놓아주실 수 있나요.”
“아, 예. 가능합니다.”

그렇게 답을 하면서 수녀님의 빠른 감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창조적인 한국적 수녀원의 모습은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했던 것처럼 하나하나 완결성을 띄어갔다.
삶을 담을 ‘주인’과 전체 과정을 집행하는 ‘기획 관리자’, 집을 집답게 만드는 ‘일꾼’들이 하나가 될 때 집은 아름다운 선율로 답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집을 짓는 일은 아름다운 업을 짓는 일임을 가슴으로 깨닫게 된다.田


이동일 <(주)행인흙건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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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집 이야기] 내 생에 최고의 집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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