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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 제대로 알기(5)-2] 황토집 짓고 귀촌한 최명규, 박순남 부부
- 충남 서산시 금학리 최명규 박순남 부부는 37세 동갑내기다. 남편인 최명규 씨가 흙집을 보고는 '저 집 참 예쁘다'라고 했을 때 부인 박순남 씨는 '뭐, 그러네' 하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갓 20세에 미용에 발 딛은 남편, 17년 한길을 걸어왔기에 제법 탄탄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남부럽지 않은 소득도 올리고 있는 터였다. 남편이 처음 귀촌이야기를 꺼냈을 때에도 '설마 그 기술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가겠어?'했다. 그런데 설마가 사람을 잡고야 말았다. 글·사진 홍정기 기자서울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면서 제법 돈도 만졌다. 손재주 좋다는 입소문은 나이 불문 그를 찾게 만들었고 그는 이런 하루하루가 마냥 즐겁기만 했다. 미용에 입문한 지 15년. 도심생활은 그를 지치게 만들었고 즐겁기만 했던 일들이 점점 짐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시를 벗어나 무엇인가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은 욕구가 스믈스믈 올라오고 있을 때 명규 씨는 흙집을 만났다."예쁘다, 저런 집에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전부였어요."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저 집에 살면 세상 피곤이 싹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일상에 돌아왔지만 그의 뇌리에는 그때 본 집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 마침내 부인에게 운을 뗐다. "우리 흙집 짓고 살래?"비와 씨름한 집 짓기 이는 곧 귀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서울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었는데. 순남 씨가 주변에 상의라도 구할라 치면 상대방의 돌아오는 첫마디는 늘 이런 식이었다. "아니 그 좋은 기술을 놔두고 왜 내려가?" 평소 허튼 소리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순남 씨는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흐트러진 모습 한 번 보인 적 없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아온 남편 아니었던가. 쉼 없이 이어진 가위질에 인대가 늘어나 병원 신세를 질 정도로 자기 일에 열심이었던 남편 아니었던가. 그런 남편이 다 버리고 귀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가자." 대답은 했지만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주위에서도 만류하지, 왜 걱정이 없었겠어요. 처음 흙집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시골에 살아본 적이 없어 두려운 점도 있었어요. 그래도 그나마 아직 애라도 없으니…." 부인의 허락을 얻은 명규 씨는 2006년 9월 흙집 짓기 과정에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귀촌의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해가 바뀐 1월, 집에 쓸 나무를 준비하고 흙을 공수해오기 시작했다. 대패로 서까래를 밀고 기둥과 보에 쓰일 나무를 자르고 다듬었다. 그러기를 일곱 달여, 부부는 2007년 8월 25일 입주했다. 명규 씨는 처음 짓는 집이었지만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했다. 할 수 있다는 도전 정신과 인내만 있으면 집을 올리는 일 자체는 즐거움의 연속이라고. 중간 중간 닥치는 예기치 못한 상황만 잘 대처해 낼 수 있다면 말이다. "유난히 비가 많이 왔어요. 잘 아시겠지만 흙의 상극이 물이잖아요. 하루 공사가 마무리되면 비닐을 덮어 놓고 철수하는데 잠자고 있으면 집터 부근에 사는 주민에게서 종종 전화가 걸려 와요. '비바람에 비닐이 날리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않느냐'면서. 부리나케 달려 나가죠. 처음에는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것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니 이게 다 집 짓는 과정의 하나 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순남 씨가 말한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날 창가에 앉아 남편과 차 한 잔 마시면서 그때를 떠올리곤 해요. 고생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는데 지나고 보니 다 이야깃거리가 되고 집을 소중하게 여기는 계기가 되더라고요.""공기가 틀려도 너무 틀려요"서울에서 자란 부부의 귀촌 생활은 수고로울 수밖에 없었다. 문 밖만 나서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곳이 아니다. 맘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4개월이 조금 모자란 시간, 그래서 부부는 '포기'를 배웠다고 했다. 당장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아야하고 사고 싶은 것이 있어도 다음으로 미뤄야 한다. 부부는 없으면 없는 대로 조금씩 부족하게 사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포기할 줄 아는 지혜가 생기니 조급함이 사라졌다. 부부는 삶의 여유가 생기고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진 기분이란다. "흙이 좋아 흙집 짓고 살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수고로움이 있어요. 처음에는 여러모로 불편하지만 이 수고로움을 즐기게 되면 삶이 달라집니다. '빨리 빨리'가 없어지거든요. 이것만으로도 삶이 얼마나 여유로워지는데요."이제는 흙집 예찬론자로 돌아선 순남 씨의 말을 들어보자. "아파트에 살 때에는 잠을 깊게 자질 못했어요. 조금만 시끄러워도 깨기 일쑤였지요. 여기 오고 나서는 그런 게 없어요. 눈 뜨면 아침이예요. 몸도 개운하고. 참, 냄새도 안나요. 아무리 냄새가 심한 음식을 해도 조금만 지나면 신기하게 사라지더라고요. 그리고 살다 보면 이것저것 고쳐야 할 것도 많고 손 봐야 할 것도 많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딱히 불편하다고 느낀 적이 없으니까요."최명규·박순남 부부 집은 이곳 명물이다. 집 짓는 과정부터 소문을 듣고 구경 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제는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오는 이들까지 생겼다. 집을 보고는 금학리에 진행 중인 테마마을 조성사업과 관련 명규 씨에게 흙집 민박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농촌진흥청의 권유도 있었다. 거기다 흙집을 짓는 이들을 도와주는 일도 계속해야 한다. 농사는 물론이다. 이래저래 서울에서 만큼 바쁜 나날이 부부를 기다리고 있음에도 부부는 환한 웃음을 잃지 않는다. 내 손으로 지은 세상에 둘도 없는 집이 부부의 노곤한 몸을 감싸줄 것이기 때문이다.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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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 제대로 알기(5)-2] 황토집 짓고 귀촌한 최명규, 박순남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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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흙건축
- 우리 살림집의 역사를 다시 쓰다㈜행인흙건축 한 민족의'집'을 표현하는 데 있어 기준이 되는 요소는 무엇일까. 행인흙건축 이동일 대표는 그 첫째는'집의 배치와 공간 구성'이라는 내용적 측면이고, 둘째는 그 내용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틀 즉,' 뼈대와 지붕 모양'이라는 형식적 측면이고, 셋째는'난방 및 건축 소재'로서의 기능적 측면이라고 답한다. 한마디로 현대 우리 살림집의 내용과 형식, 기능은 어떠해야 할까라는 정형을 찾아가는 일이다. 바로 1999년 설립한 행인흙건축이 만들어 가는'현대 한옥', '현대 흙집'이다. 외형은 우리 살림집(한옥)이되 내부 공간은 현대 주택이고 기능은 황토집이다. 정리 윤홍로 기자 행인흙건축 10년 … 몸살림, 마음살림, 이웃살림의'살림집'행인흙건축은 1999년 설립이래 다양한 건축주들의 요구를 수렴하며 현대 한옥·현대 흙집을 지어왔다. 이 기간 현대 한옥의 뼈대와 지붕 모양이 정형화되어 현대 우리 살림집의 모습을 갖추었다. 여기에 전통 창호와 현대식 창호가 결합하고 건강 주택으로서의 완결성을 갖추었다. 올해 회사 설립 10주년을 맞은 행인흙건축은 실험기에서 진보와 발전의 단계인 도약기로 접어들었다.이동일 대표는'집이란 인간의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생각으로, 건축주와 시공사, 현장 일꾼이 하나가 되는 행복한 집 짓기를 추구한다. 좋은 사람들이 만나 함께 하는 집 짓기는 사람과 인연을 소중하게 만드는 인연의 고리라고 한다. 이 대표는 집을 짓는 일은 단순히 건축물을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동산적 가치를 증식하는 일만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몸을 살리고 자연과 이웃에 열려 있는 함께 사는 터전을 닦는 일이리라 믿는다. 몸살림, 마음살림, 이웃살림의'살림집', 행인흙건축이 꿈꾸는 집이다. 행인흙건축은 ▲한옥 목구조 현대 한옥 신축 ▲경량 목구조 현대 흙집 신축 ▲한옥마을 및 황토 펜션 조성 ▲솟대흙건축연구소 운영 및 출판 ▲한옥문화센터 조성 및 운영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HISTORY 회 사 연 혁행인흙건축은 1999년 솟대흙건축 연구소로 출발하여 10여 년간 50여 동의 현대 한옥, 현대 흙집을 완공했다. 2009년 현재의 시공 기술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외형은 한옥이되, 내부 공간은 현대주택이고, 기능은 황토집인 현대한옥을 중심으로 경량 목구조 현대 흙집 등 현대인의 정서에 맞춘 대중화를 이끌어 냈다. 건축주와 시공사, 현장 일꾼의 공동 집 짓기를 강조하며, 2009년 현재 현대 한옥과 현대 흙집 50여 동을 신축했다. 이동일 대표는 《새 집 줄 게 흙집 다오》《황토집 바로 짓기》등의 저서를 냈으며 홈페이지에 흙집 이야기 및 수필과 시를 연재하고 있다. 집에 대한 단상斷想맞선을 보듯 터를 고르고 그곳에 집을 짓는 일은 대지와 인간이 만나 생명을 잉태하는 일이다. 유전자가 새 생명의 씨앗이듯 삶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자각이'집'이 될 때 가족을 담고 이웃을 담고 사회를 담아낼 수 있다.집은 인간의 형상을 한 생명체다. 기둥을 세우고 도리와 보로 뼈대를 만들어 처마를 내고 지붕을 얹어서 머리를 만든다.뼈대에 살을 붙이고 창과 문을 내면 몸이 되고, 눈이 되고, 귀가 된다. 전기 배선과 설비 배관이 동맥과 정맥처럼 피를 돌게 한다. 벽을 바르고, 칠을 하여 피부를 살찌운다. 여름엔 마루가 있고, 겨울엔 구들방이 있어 계절의 옷을 갈아입는다. 그래서 집은 자신을 닮은 또 다른 영혼이다.한옥은 우리 살림집이다. 시대가 바뀌고 생활이 바뀌면 집도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전통에 뿌리를 둔 현대 한옥이다. 잔뿌리가 원뿌리를 보호하고 해마다 나이테를 늘려 대공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가지를 뻗어 잎을 달고 꽃을 피워야 열매가 맺히는 법. 산 나무는 그렇게 자신의 뿌리를 빛내는 것이리니… 살아 있는 전통으로서의 현대 한옥은 이 시대'우리의 집'이다.집은 삶을 담을'주인'과 주인처럼 생각하고 관리하는'시공자', 내 집 짓듯 일하는'일꾼'들이 하나가 될 때 아름다운 선율로 답하는 것이다. 그래서 집을 짓는 일은 아름다운 업을 짓는 일임을 가슴으로 깨닫게 된다. 109.1㎡(33.0평) 서산 목구조 황토집이 집은 기둥과 보와 도리를 사개맞춤으로 짜서 맞추고 부연附椽(며느리서까래) 없이 처마 서까래만 뽑은 홑처마에, 위의 절반은 박공( '∧'모양)이고 아래 절반은 네모꼴인 팔작지붕이다. 대청 격인 거실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누마루를 뽑고, 그 뒤에 드레스룸과 욕실이 딸린 안방과 주방/식당·다용도실을, 좌측에는 건넌방과 공용 욕실을 배치했다. 이동일 대표는 건축주가 15년간 터를 잡고 살아온 살림집 옆에 지은 집이라 늘 그곳에 있던 것처럼, 또한 주변 자연 경관에 폭 안긴 것처럼 디자인했다고 한다. 홑처마 팔작지붕 양식을 따른, 이 집의 특징으로 황토벽돌 이중 쌓기와 외벽 창틀 하단부의 전돌 방수벽 구성, 공간별 다양한 형태의 창문 사용을 꼽을 수 있다. 185.1㎡(56.0평) 횡성 목구조 황토집비교적 규모가 큰 데다 고가 높기에 외관에서 육중함이 느껴지는 집이다. 건축주는 사대부 대갓집처럼 팔작지붕에 한식 기와를 얹으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에 책을 펼쳐 놓은 듯한 맞배지붕에 양식 기와를 선택했다. 공간 배치를 보면 1층은 135.5㎡(41.0평)로 대청 격인 거실을 중심으로 우측에 안방과 구들방을, 좌측에 주방/식당과 건넌방을 드렸다. 거실 전면 즉, 안방과 주방/식당 사이에는 걸터앉기에 편안하도록 6.6㎡(2.0평) 남짓한 툇마루를 뽑고 천장을 우물반자로 마감했다. 거실에선 전면 툇마루와 새시(외부)와 불발기창(내부)으로, 후면 쪽마루와 세살 목창으로 소통한다. 2층은 49.6㎡(15.0평)로 가족실과 방·화장실을 배치했는데, 가족실의 천장을 고미서까래로 마감한 것이 특징이다. 142.2㎡(43.0평) 홍천 목구조 황토집'ㄴ'자형 한옥형 목구조 황토집이다. 중부지방 한옥은 대개 ㄱ자 형태를 띠는데, 이 집은 산과 호수 조망을 염두에 두고 ㄴ자로 틀어 앉혔다. 좌향坐向은 현관을 기준으로 하면서 남향이지만, 조망권은 동남향이다. 구조체는 자연석 외벌 기단에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형 기둥을 세우고 도리와 보를 사개맞춤하여 가구架構를 짰다. 또한 홑처마 팔작지붕에 한식 기와를 얹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중인방을 설치하고 하단에는 황토벽돌과 치장벽돌을, 상단에는 황토벽돌을 이중으로 쌓았다. 이 과정에서 황토벽돌과 접하는 원형 기둥을 가공했다. 하단은 치장벽돌 줄눈으로, 상단은 황토 모르타르로 마감했다. 행인한옥문화센터 조성과 회사 이전행인흙건축 이동일 대표는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삼거리에 [행인한옥문화센터]를 조성하고 있다. 4628㎡(1400평) 부지에 살림집 전시관, 교육·연구시설-행인서원, 연구소 및 공방, 근린생활시설(주막)으로 구성할 계획이다. 현재는 살림집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올해 안에 교육·연구시설 및 사무소(교육장 및 공방) 건축물을 신축할 예정이다.행인한옥문화센터는 우리 살림집 건축의 전시장이자 연수, 캠프, 소모임, 체험학습 등 소통과 연대의 문화공간인 셈이다. 이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행인흙건축은 2009년 3월 중순 용인시 양지면 사무실을 행인한옥문화센터 내 살림집 전시관으로 이전했다.문의 ㈜행인흙건축 033-344-0983 www.hang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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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흙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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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집 이야기] 죽임집이 아닌 세상 살림집, 흙집
- 이곳 저곳에서 흙집에 대한 얘기가 참 많다. 건강 때문이겠다. 지구도 건강해지고 사람도 건강해지는 그런 방법의 하나로 흙집을 얘기하는 그런 때이다. 죽어 가는 지구를 살려내고, 그 속에 사는 사람을 살려내고, 사람들 간의 관계를 살려내는 흙집은 죽임집이 아니라 ‘살림집’이다. 실제로 실험을 하면 시멘트집에서는 실험쥐들이 서로 싸우다가 얼마 못 가서 죽는데 비하여, 흙집에서는 아주 오래도록 잘 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습도 조절이나 탈취, 공기 정화 능력 등이 아주 좋아서 흙집에 들어가면 기분이 참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에서 가장 오른쪽의 것은 일반 물에서 자란 양파의 모습인데 뿌리의 생육이 왕성하다. 또한 가장 왼쪽의 것은 흙물에서 자란 양파인데 뿌리와 줄기의 생육이 왕성한데 비하여, 가운데 시멘트 물에서 자란 양파는 썩어서 부풀어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시멘트 모형집과 흙모형집을 만들어 쥐가 어디를 더 선호하는가 하는 실험을 처럼 하였다. 쥐들이 흙집으로 이동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흙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더 선호하는 것이다. 또한 시멘트 모형집과 흙 모형집을 만들어 처럼 쥐들을 키워 보면, 처럼 생육에 현저한 격차를 보인다. 흙집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흙집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먼저 좋은 흙을 사용해야한다. 우리나라는 흙이 좋아서 웬만한 흙은 모두 좋은 효과가 있다. 주위에 가까이 있고 구하기 쉬운 흙이 가장 좋은 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흙은 굽지 않아야 한다. 일단 구우면 흙의 많은 특성을 잃어버리므로 굽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흙을 구우면(Fusing), 흙의 결합을 이루는 구조가 변하여 흙이 아닌 전혀 새로운 물질로 변한다. 참고로 시멘트도 흙과 석회석을 원료로 하여 만드는데, 높은 온도로 구워서 만들어 흙이 아닌 새로운 물질이 되는 원리와 유사하다. 그리고 시멘트나 화학수지를 섞어 쓰지 않는 게 좋다. 흙에 시멘트를 섞어 쓰면(Cementation), 시멘트끼리 결합하여 처음에는 강도가 높고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결합이 흙을 둘러싸 흙 고유의 특성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든다. 또한 장기적인 강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화학수지를 흙과 섞어 쓰면(Impervious-ness) 화학수지의 작용으로 균열이 발생하지 않는 장점이 있으나, 이 화학수지가 흙을 둘러싸 흙의 특성을 발휘할 수 없게 함으로써 무늬만 흙인 상태가 된다. 또한 화학수지에서 VOCs 등 유해물질이 방출됨으로써, 차라리 흙을 안 쓰는 것만 못하게 된다. 자연에서 흙을 가져와서 집을 짓고 살다가 집을 허물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흙이 좋은 흙집 재료이다. 다시 그 흙에 배추를 심어 재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흙집 재료이다. 이러한 재료로 여러 가지 공법으로 흙집을 지을 수 있다. ●흙벽돌 공법(Adobe)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서 쓰는 재래식 흙벽돌 공법이다. 나무틀을 원하는 벽돌 크기로 만들어 놓고 거기에다 흙을 다져 넣은 후 틀을 빼고, 성형된 흙을 말려서 벽돌로 사용한다. ●흙막쌓기 공법(Bogue) 흙을 손으로 호박돌 만한 크기로 만들어서 차곡차곡 쌓는 방법이다. 흙이 마르기 전에 쌓으므로 아랫단의 흙이 완전히 마른 다음에 윗단의 흙을 쌓아야 하므로, 하루 작업 높이는 40∼50센티미터 정도이다. ●흙자루 공법(Roll Bag) 자루에다 흙을 넣어서 쌓는 흙자루 공법이다. 이때 자루는 다양한 형태와 크기가 가능하다. ●심벽 공법(Plaster) 외를 엮거나 바탕틀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바르는 심벽 공법이다. 전통 건축물에 많이 사용하는 공법으로 바탕을 나무로 짜고 그 위에 흙을 발라서 마무리한다. 경우에 따라서 회반죽 바름을 하기도 한다. ●볏단 공법(Straw Bale) 볏단을 쌓은 후 그 위에 흙을 바르는 볏단 공법이다. 볏단을 쌓아서 벽체를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발라서 마무리한다. 볏단으로 인해 단열이 잘 되며, 흙은 볏단을 물이나 불로부터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 공사 기간이 짧고 공사비가 저렴하나, 볏단이 가을에 집중적으로 나오므로 미리 준비해야 한다. ●흙다짐 공법(Pise) 아예 흙을 다져서 큰 벽을 만드는 흙다짐 공법이다. 거푸집을 짠 후, 그 안에 흙을 넣고 공이나 다짐기로 다져서 벽체를 만드는 것이며, 튼튼하고 아름다운 벽체를 구성할 수 있으나 공사 기간이 긴 게 단점이다. 습기에 강하고 강도 높은 현대 흙 재료 요즈음에는 비에도 강하고 강도도 뛰어난 흙 재료들이 개발되어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이러한 재료들은 흙의 단점으로 꼽혀 온 강도가 낮고, 비에 약한 문제점들을 해결했다. 시멘트나 화학수지를 사용하지 않고 높은 강도와 강한 내수성을 갖추어서, 건물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에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고강도 흙벽돌, 고강도 흙 모르타르, 고강도 흙 미장재, 흙 뿜칠재 등 다양한 제품이 출시되고 있다. 큰 집이라면 전문가에게 맡겨야겠지만, 작은 흙집이라면 직접 짓는 것이 좋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정성으로 집이 무엇인지, 내가 왜 지으려고 하는지 새록새록 다가오게 될 것이다. 독일에서 한 가족이 주말과 휴가를 이용해서 흙집을 몇 년에 걸쳐 짓는 것을 보면서, 천지만물인 우주를 왜 집을 의미하는 우(宇)자와 주(宙)자로 만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현재의 집을 흙집처럼 바꾸자 지금 사는 집을 흙집처럼 바꾸는 방법은 없는가 하는 질문을 받곤 한다. 흙은 약 1센티미터 이상만 바르면, 흙이 가지는 웬만한 특성을 다 발휘하므로 좋은 흙으로 발라 주면 된다. 시중에 여러 가지 흙 재료가 나와 있다. 손쉽게 좋은 재료를 판단하는 방법은 흙 재료에다 라이터 불을 대 보면 비닐 타는 듯한 역한 냄새가 나는 것은 화학수지가 섞인 것이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실내 오염 물질이 다량 포함돼 있어서, 이런 재료는 차라리 사용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또한 물을 뿌려 보아서 시멘트 냄새가 나는 것도 좋지 않다. 더운 여름날 흙 마당에 물을 뿌렸을 때 나는 그런 흙 냄새가 나는 것이 좋은 재료다. 지금 세계 여러 나라에서 흙집에 대한 관심이 높다. 유럽 같은 경우는 2050년경 대부분의 집을 흙으로 지을 것을 염두에 두고 연구하고 있고, 미국은 건강주택으로써 흙집을 활발하게 짓고 있다. 전 세계 인구의 30퍼센트 15억의 인구가 흙집에서 살고 있다. 국내에서도 재래식 흙집뿐만 아니라 미래형 흙집에 대한 연구가 있고, 선진 제국을 넘어서는 연구성과의 축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좋은 흙이 많다. 이태리 대리석이나 호주의 구운 벽돌 같이, 우리의 흙을, 또 그 흙을 다루는 기술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든다면, 우리의 최대 자원으로 부각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처참하게 파괴되어 가는 지구 환경을 보존하고, 인류의 참다운 발전을 구현하는 길 위에 흙이 자리하고 있다.田 글 황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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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집 이야기] 죽임집이 아닌 세상 살림집, 흙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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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집 이야기] 내 생에 최고의 집 III
- 서양 목조주택의 한국화를 위하여 한옥 목구조 방식은 사개맞춤과 처마·지붕공사가 복잡하여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우며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흙집의 기능을 잘하면서도 건축비가 저렴했으면 좋겠다’는 수요자의 요구는 현대 흙건축의 중요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마평리 수녀원 공사 중 부속 채인 ‘손님의 집(피정의 집)’은 바로 그러한 고민의 산물이다. 구조(뼈대)와 지붕공사를 단순화하여 건축비를 줄이되 현대 흙집의 느낌을 살리고 그 기능을 잘하도록 완성하는 것이 중요했다. 구조는 기둥과 도리, 보로 연결하는 한옥 목구조 방식의 사개맞춤이 아니라, 서구식 경량 목구조 공법을 차용했다. 2″×4″나 2″×6″라는 건조목을 사용하여 집의 틀(구조)을 짜는 구조 방식을, 2″×8″(폭 약 18.5㎝)을 사용한 샛기둥 방식으로 변형했다. 창의 개구부를 미리 계산에 넣고 약 1미터 간격으로 샛기둥을 세우는 방식인데, 바닥 장선과 처마 받이 장선(도리 기능)으로 고정했다. 한옥 형태의 흙집 느낌을 살리고자 공간 구분이 되는 지점에 2″×8″의 넓은 면으로 샛기둥에 기둥처럼 고정하고, 하방과 상방(도리 느낌)은 2″×10″(폭은 약 23㎝)으로 띳장을 돌렸다. 중방은 하방과 상방의 폭보다 좁은 2″×6″(폭은 약 14㎝ 정도)로 변화를 주면서도 균형감을 유지하도록 했다. 처마는 원형 서까래 대신에 서구 목조주택에서처럼 2″×6″ 각재로 처리했다. 내부 공간은 평 트러스로 보강한 후, 한옥 지붕에 덧지붕을 내듯이 지붕을 만들었다. 처마는 한옥 목구조 방식의 흙집처럼 서까래를 노출하지 않고, 서구 목조주택에서처럼 루바만 보이도록 마감했다. 지붕 마감도 서구 목조주택에서 일반화된 아스팔트 슁글로 했다. 늘 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도한다는 것은 언제나 모험을 동반한다. 지난겨울 중저가형 현대식 흙집에 대한 구조 공법을 치열하게 토론했지만, 한옥 목구조 방식의 안정성과 그동안의 성과에 안주하면서 변화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마평리 수녀원의 전체 기획과 현장관리까지 책임지고 들어가면서, 서구 목조주택의 한국화와 현대 흙집의 새로운 모델을 실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물론 내 자신이 온전하게 져야 하는 책임도 뒤따랐다. 수녀원 본채의 한옥 목구조 뼈대공사를 완성하고 처마·지붕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손님의 집 구조공사를 시작했다. 서구 목조주택 공사에 대하여 잘 알고, 그동안 내장·목창공사를 전담했던 목수 팀장 한 사람만을 불러들였다. 몇날며칠 머리를 싸맸던 샛기둥 방식의 기둥과 하방·중방·상방의 띳장 처리 문제를 한낮의 토론 속에 말끔히 해결했다. 샛기둥을 세우는 일은 문제가 아니었는데, 집 외부의 전체 느낌을 좌우하는 기둥과 하방·중방·상방의 목재가 덧댄 듯 가짜 느낌이 드는 것을 최소화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가 창틀과 흙벽돌을 쌓은 후 황토 미장을 했을 때 나타날지도 모를 하자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후속 팀이 합류하고 본격적인 뼈대공사를 시작한 후 약 9일 만에 지붕공사까지 모두 끝을 냈다. 한옥 목구조 공사에 비하면 절반 정도 기간이 걸린 셈이다. 때맞추어 본채 수녀원 지붕공사를 끝냄과 동시에 지붕공사를 진행했다. 전체 공정의 안배가 자로 잰 듯 딱 떨어졌다. 조적팀은 이미 창고 조적공사를 필두로 본채 수녀원 흙벽돌 쌓기 작업을 시작했다. 각기 다른 구조 공법상의 3채 건물이 따로 또 같이 하나의 큰 그림으로 윤곽을 드러내자, 내 마음속에도 따듯한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겨울의 끝자락 황량했던 강원도의 4월은 어느덧 5월의 초여름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일은 하다 보면 느는 것이 당연지사다. 이제 각 공정별 협력 업체들은 공법과 자재 사양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역량을 갖추기 시작했다. 기초 노출 콘크리트 면을 고려하여 흙벽돌 쌓기를 진행했다. 인제 현장부터는 전돌(검정색 적벽돌)을 사용하여 토방 형태로 마감했다. 수녀원 본채 토방은 별도의 막돌 쌓기로 토속성과 안정감을 주되, 노출 콘크리트 면에 붙여서 전돌을 쌓기로 했다. 이는 간이 주추와 흙벽체의 방수턱 높이(전돌 2장 높이)를 정확히 계산하여 줄눈을 맞춰야 하는 감각적 판단이 필요하다. 미리 이렇게 쌓으라고 표시했는데 협의해 보니 더 좋은 방법들이 나왔다. 머릿속의 생각을 실전에 적용하려면 역시 전문가들이 한 수 위인 것이다. 반대로 기존 방식보다 더 쉬운 일인데도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면 어렵게 생각하는 것이 또한 전문가들이다. 자신들이 해본 영역에선 전문가지만, 새로운 상황에 처하면 겁을 먹는 것도 또한 전문가란 생각에 웃음이 나올 때도 있다. 손님의 집 유형을 우리는 경량 목구조 흙집이라고 불렀다. 한옥 목구조 흙집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손님의 집 뼈대공사를 보고는 조적팀은 난감해했다. 샛기둥 사이에 폭 20센티미터인 작은 흙벽돌을 쌓으라고 하자, 칸칸이 벽돌을 쌓아야 하므로 품이 더 든다고 난리가 났다. 내가 볼 때는 외벽의 샛기둥 사이에 판재를 대고 면을 맞추어 쌓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내벽과 외벽에 모두 황토 미장을 할 것이기에 틈만 없게 튼튼히 쌓으면 됐다. 한참 큰 소리가 오가고 나서야 막상 해보니 별일이 아니었다. 거실 천장만큼은 한옥 목구조 방식의 오량 천장은 아니더라도 경사 천장 형태로 마감했으면 좋으련만, 정해진 건축비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다. 창호 틀을 끼우고 내장공사를 마친 후 내·외벽의 황토 미장을 시작했다. 집 전체 느낌을 결정하는 순간이다. 언덕배기 위에 올라서서 순간순간을 지켜보았다. 해 놓고 보면 별거 아닌 일이겠지만, 새로운 시도의 결과를 기다리는 그 순간만큼 가슴 벅찬 순간이 있을까. 의도한 바대로 옛 살림집의 소박한 민가 모습을 한 흙집이 내 눈에 들어왔다. 비록 띳장 형태이긴 하지만 기둥과 하방·중방·상방을 갖춘 흙집이 경량 목구조 방식이라는 서구식 뼈대 방식을 원형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서구 목조주택의 한국화, 서구식 유형의 집을 짓더라도 건강주택인 흙집이면서 한국의 민가를 닮은 표정을 만들어 내는 일. 이제부터 시작이야…….’ 벅찬 발걸음으로 집 앞에 섰을 때 언제 오셨는지 책임자 수녀님이 환한 표정으로 다가오셨다. “좋아요. 이 집은 이 집대로 아주 좋아요. 처음 뼈대만 세워 놓았을 때는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는데 황토 미장까지 하고 보니… 아, 이렇게 마감을 하려고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나는 흡족한데, 한옥 목구조 방식에 익숙한 협력업체 시공팀들은 한옥 목구조 방식의 팔작지붕인 한옥형 흙집이 났다고 한마디씩 한다. 한옥은 한옥다워야지 좀 이상하다고. 하지만 익숙한 것들의 고정 관념을 깨고 나갈 때 비로소 창조적 행위는 빛을 발할 것이다. 개인의 정서, 건축비를 포함하여 다양한 형태의 현대 흙집들이 각각의 색깔로 완성되어질 때 현대 흙집의 대중화는 앞당겨질 것이다. 눈물 콧물 섞어 불을 지피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이다. 집 한 채를 지을 때 우리는 주변의 수많은 사람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작게는 집을 짓는 공정 하나 하나에도 이런 자재를 쓰면 좋겠다. 저렇게 시공하면 좋겠다… 말이 많은 법이다. 같은 일을 함께 하는 일꾼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다. 문제는 그 많은 사공의 말들 중에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하고, 내린 결정은 현장 책임자가 지는 것이 마땅하다. 구들을 놓는 일이 특히 그랬다. 구들 놓는 원리는 이곳 저곳에서 학습할 수 있지만, 실전에서 불 잘 들이고 따듯한 구들방을 만드는 일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재래 방식으로 구들을 놓았다는 시공자들 여럿에게 구들을 맡겼지만 아궁이와 굴뚝의 위치에 따라, 고래를 놓는 방식에 따라 차이가 났다. 불 잘 들이고 따듯하면 다행인 것이고, 불을 들이고 효용이 없으면 애물단지로 변하는 일도 있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구들방은 작은 것이 관례다. 구조 방식에 따른 이유도 있겠지만, 열 효율을 감안하면 작으면 작을수록 효과가 높은 이치다. 옛 살림집에서 보면 방이 두 칸이나 그 이상일 경우 아궁이 수를 늘리는 방식을 채택하곤 했다. 수녀원의 구들방은 방의 규모가 큰 공동 방에 설치키로 했기에, 특히 신경이 쓰였다. 또한 아궁이와 굴뚝의 위치가 앞뒤로 나 있으면 연기가 쑥 빠져나가니 불이 잘 들이는데 ‘ㄱ’자 형태인데다 굴뚝도 처마 밖으로 빼야 한다. 여간 긴장되는 일이 아니었다. 작년에 구들을 전문으로 놓는 선생님을 모셔다 그 원리와 방식을 체득한 터라 재래 공법과 응용 공법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새롭게 마련했다. 다양한 형태의 구들 놓는 법을 보조로 참여하면서 익혀오기도 했거니와 현대 구들 방식의 정형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직접 구들을 놓기로 했다. 아궁이는 낮게, 아궁이 안쪽 장작 지피는 곳은 넓게, 굴뚝의 위치는 아궁이 보다 적어도 1자(30㎝) 이상의 위치에 좁고 길게… 원리를 되뇌며 고래둑을 만들었다. 고래는 재래 방식의 터진 고래(일자형)나 흩어진 고래(부채살 형) 방식이 아니라, 방 전체의 열효율을 높이도록 방 벽 테두리로 폭 20센티미터 정도 되는 연기 길목을 깊은 고래로 만들었다. 방 가운데는 치장 벽돌로 약 30센티미터 정도 높이로 흙 다짐 후 콩자갈을 깔았다. 보통 구들은 판돌을 놓아 만드는 법인데, 아궁이 쪽 불이 직접 닿는 면만 판돌을 이중으로 덮고 나머지 공간은 흙벽돌로 바닥을 만드는 방식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흙벽돌의 폭을 30센티미터 정도로 계산하여 치장 벽돌 두 장 높이로 고임을 했다. 습기로 인한 흙벽돌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치장벽돌 고래받침에 슬레이트를 깔았다. 슬레이트 골에 황토로 수평을 잡은 후 높이 14센티미터 정도 되는 흙벽돌을 바닥에 깔았다. 벽과 흙벽돌 사이는 황토와 시멘트를 섞은 모르타르로 채워 고정했다. ‘쿵쾅쿵쾅’ 뛰어도 이상이 없었다. 흙벽돌 구들 위에 일반 난방 배관을 한 후 황토 미장으로 방바닥을 마감했다. 보통 판돌을 놓는 구들방은 열전도가 빨라 스테인리스 배관으로 연결하지만 흙벽돌은 열전도가 급속하지 않다는 점과 두께마저 충분하여 엑셀 난방으로도 충분하다는 판단을 했다. 처음 구들을 놓고 피어 보는 불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하지만 한참 잘 들어가던 불길이 연기를 토해 낼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잘난 체 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건 아닌가 불안이 엄습했다. 방바닥 미장까지 마감한 후 시간만 있으면 불을 지폈다. 고래가 잘못되었나, 굴뚝이 조금 낮은가, 왜 연기가 계속 낼까 고민하면서 반나절을 눈물 콧물 썩어 불을 지피고 난 후에야 굴뚝의 연기가 하늘 높이 피어올랐다. 다행히 방은 골고루 따듯했다. 새로운 방식은 한 번 불을 지피면 적어도 이틀은 따듯하다는 말이 헛말은 아닌 듯싶었다. 주변에선 강제 환풍구를 달자고 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처음에 강제로 환풍기를 돌리면 연기가 잘 빠져 그 다음엔 자연스럽게 불이 드는 원리인 것이다. 하지만 화기로 인해 환풍기의 수명은 고작 2년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면피가 되겠지만 영구적이지 못하다는 아쉬움이 늘 있어 왔다. 하지만 바람의 방향이 일정치 않은데다 뒷산을 고려하여 삼면만 굴뚝 구멍을 뚫었던 터라 현대 벽난로 굴뚝에서 사용하는 역풍 방지기를 설치하면 보완이 될 듯싶었다. 굴뚝 위를 털어 내고 역풍 방지기를 설치한 후로도 구들방은 여전히 마음에 걸쩍지근하게 남는 숙제였다. 수녀님들이 입주하고 한참이 지난 후 연기 때문에 고생했다는 말을 뒤로 작정하고 반나절 불을 지폈더니 이제 아주 불이 잘 들인다고 한다. ‘아이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감자 꽃 필 무렵이면 아침 7시 30분부터 저녁 6시경까지 그 긴 하루가 너무 짧았다. 새로운 팀들이 들어오면 작업 과정을 지시하고, 수시로 점검하는 일은 필수이다. 하지만 진행되는 작업에 일일이 관여하지는 않는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무엇이 문제인지, 바로 눈에 띄게 마련이다. 그 나머지 시간은 잡부다. 공정별 팀들이 어질러 놓은 주변을 청소하고, 다음 공정을 위한 자재 준비에다, 딱히 누구에게 시키기도 어려운 일들을 주섬주섬 하고 나면 벌써 저녁이 된다. 일을 하면서 전체 공정을 장악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다. 늘 함께 일을 하기 때문에 공정별 팀과도 동질성을 얻는 이중 효과도 작용하기 마련이다. 책임자 수녀님이 그러했다. 4월이 가고 5월 초에 수녀원 터 앞의 밭에는 감자와 고추가 심겨졌고, 산자락 땅에는 오가피나무가 심겨졌다. 콩과 배추에 옥수수까지… 현장 일꾼들이 도착하기도 전 새벽녘에 현장을 한 바퀴 돌아보곤 밭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내가 도착하면 천천히 다가와서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게 가능한가 묻는데 전체 마감을 꿰뚫은 듯했다.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고, 또 필요한 것들에 대한 세부적인 요구들이 이어졌다. 주문에 걸린 듯 ‘예, 그렇게 하지요’ 하면, 밭으로 향하면서 말의 끝은 항상 ‘고맙습니다’였다. 직접 관여하지 않으면서도 훤히 꿰뚫고 있는, 주변의 밭에서 늘 노동으로 함께 하는 그 모습이 나의 현장 운영 방식과 너무도 닮았다. 언제부턴가 내 입에서도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베어 나왔다. 6월 말 수녀님들이 입주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하루하루는 시간과의 싸움일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도왔다. 장마가 시작됐음에도 현장의 하늘은 쾌청했다. 외부에서는 경사면 돌쌓기와 토방공사, 울타리공사, 주변 정리공사가 한창이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수녀원의 특성상 외부 덧창공사가 추가됐고, 수녀님들 각 실에 들어갈 책상이며, 책꽂이, 문갑공사가 뒤를 이었다. 그래도 끝은 나게 마련인가 보다. 건축 준공 후 하우스 창고공사와 미진한 부분들을 조금 남기고 일차 철수를 시작했다. 본격 장마가 시작된다는 일기 예보를 들으며 이사 예정일보다 3일을 앞당겨 드디어 2005년 6월 26일 이삿짐이 들어온 것이다. 만 3개월… 감회가 새로웠다. 잡 자재며, 쓰레기들을 한데 모아 트럭 가득 싣고 철수를 준비하는데 ‘투-둑 투-둑’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진다. 만감이 교차했다. 진부에 머물면서도 인제 현장을 무사히 마무리했고, 양평 현장이 또한 진행 중이었다. 한 순간 한 순간 얼마나 많은 날들이 가슴 조이는 순간이었던가. 눈을 들어 앞을 보니 그 새 감자 꽃이 절정이다. “사장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고맙습니다. 쓰레기만 싣고 가게 해서 어떡하나…….” 수녀님 말씀에 백색으로 피어난 감자 꽃이 겹쳐진다. 아마도 감자 꽃이 피는 6월이면 수녀님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화려한 색깔로 치장하지 않은 감자 꽃은 실한 감자를 영글게 하는 ‘백색의 영혼’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리고 이야기 할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이루어 낸 진부 마평리 수녀원은 내 생에 최고의 집이었음을…….田 글 이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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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집 이야기] 내 생에 최고의 집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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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집 이야기] 내 생에 최고의 집 II
- 목수라고 다 같은 목수가 아니다. 집이라고 다 같은 집이 아니듯……. 특히 한옥, 목구조 뼈대 방식 흙집에서는 목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절대적이다. 때문에 우리가 몇 년에 걸쳐 지어온 흙집의 구조와 유형, 맛이 변화해 온 데는 목수 팀의 점진적 교체가 필연적이었다. 목수라고 통칭되는 직업에서 안을 들여다보면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일명 거푸집 목수로 아파트나 상가, 빌라 등의 철근콘크리트 집을 짓는 ‘형틀 목수’가 있다. ‘내장 목수’는 주로 인테리어 일을 담당한다. 아파트나 주택, 상가의 리모델링이나 가구도 제작한다. 서구 목조주택의 유입으로 형틀 목수나 내장 목수들이 전업(轉業)을 하거나 병행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들을 서구 목조주택의 구조체 방식을 따서 ‘2″×4″ 목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음이 ‘한옥 목수’로 주로 사찰 신축이나 궁궐 보수 등 문화재 관리 차원의 일을 하고, 나름의 계보가 있어 법식을 따지는 엄격한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한옥 목구조 방식의 현대 흙집이 틀을 잡아가면서 민간에서는 현대 한옥의 실험이 진행 중이다. 현대 한옥의 완성을 위하여 1999년 현대 흙집 단지로 기획한 이천 솟대전원마을 4개 동은, 일명 형틀 목수라고 불리는 팀에 의해 진행됐다. 골조를 형성하는 뼈대와 처마 서까래는 한옥의 느낌만 따오고, 지붕은 서양식 트러스 방식으로 처리했다. 아스팔트 슁글이라는 서양식 지붕 재료로 마감하고, 최대한 현대주택의 기능을 담당하도록 구성했다. 그후 한옥(뼈대집의 특성으로 한옥으로 불려졌다)에는 지붕 마감재는 기와가 제격이라는 수요자들의 주문으로 개량형 한식기와로 지었지만 전통 한옥으로는 턱없이 모자라다는 느낌이다. 이를 돌아보며 한옥 공부를 시작했고, 그것을 계기로 2002년에는 사찰과 한식 창호 제작을 주로 한 나이 많은 한옥 목수 팀으로 전격 교체했다. 명달리 주택의 신축 과정에서 이 팀을 긴급 투입하여 거실(대청) 공간만은 별도의 오량천장이라는 유형을 완성했다. 지붕 모양도 초가를 닮은 우진각 지붕과 전통 한식 팔작지붕으로 제 모양을 갖추어 갔다. 실전을 통해 조금씩 한옥 건축의 법식을 알아가면서 흙집으로서 현대 한옥이라는 정형 찾기에 부심(腐心)했다. 결국 집을 짜는 가구 방식과 지붕 모양이라는 큰 틀이 눈에 들어왔고, 구들방과 마루의 적용, 창호 문제와 더불어 현대 한옥의 큰 그림을 완성했다. 2004년부터는 한옥 구조의 법식을 전수한 정통 한옥 목수와 현대 한옥의 실험을 시도할 젊은 목수들을 결합하면서 집의 구성과 모양을 다양화했다. 문제는 팀의 지속성이었다. 한결같은 작업의 결과를 낳으려면 한옥 목수 팀의 안정이 최우선 과제였으나, 이는 회사가 어쩌지 못하는 결정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회사는 목수 도편수(일명 목수 오야지)와 시공 계획 및 시공 단가를 협의하기 때문에 일의 증감에 따라 목수 도편수와의 긴장 관계는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정에 따라 일하는 사람들의 교체가 빈번할 수밖에 없었다. 일거리가 계속 이어지지 않으면 목수 팀의 안정적 수급은 불가능하다. 일거리를 찾아 이합집산(離合集散)할 수밖에 없는 건축 현장의 속성상 회사 직할의 목수 팀을 유지하지 않는 한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무엇보다 기술이 뛰어난 목수는 시공사 머리 위에서 가르치려 하거나 단가 협상에만 혈안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품성은 좋은데 기술이 못 미치면 원하는 집을 이룰 수 없었다. 품성도 좋고 기술력을 갖춘 인간 관계를 맺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전통 한옥의 계승물 오량 천장 4월 15일 밤, 목수 팀이 숙소에 짐을 풀었고, 그 다음날 합천 치목장(治木場)장에서 가공한 목재가 현장에 도착했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지난겨울 인제 현장에서 보고 올해 들어 처음 보는 것이니 얼마나 갈증나는 세월이었던가. 지난겨울 내가 어려웠던 만큼이나 목수들도 힘겨웠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번 만남은 더욱 특별했다. 더욱이 목수 공정 처음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함께 한다는 것은 나에게나 목수들에게 있어서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팀원 여섯 명 중 한 명은 사찰 신축 공사에 들어갔고, 또 한 명은 농사일로 이번에는 참여치 못했다. 일을 배우는 막내를 빼고는 같은 시대를 살아 온 서른 살 후반의 또래들이었다. 실력도 서로 견줄 만큼 비등비등했다. 그러니 누구 하나가 독단적으로 도편수(오야지) 행세를 하지 않았고, 일에 있어서나 돈의 분배에 있어서도 의논하고 협의하는 풍토가 자리잡았다. 품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쏟지 않아도 되는 일의 진행은 구성원 각자 실력을 발휘하게 만들고, 그것을 통해 다시 기술력을 배가하는 기회로 삼는 듯했다. 어떤 문제에 부딪치면 해결 방안을 내고 토론을 통해 합의에 이르렀다. 서로를 배려하면서 공동으로 만들어 가는 작업 과정은 바로 내가 그리던 현장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일반 건축 현장에서 이런 모습을 본다는 건 그야말로 꿈같은 일일 것이다. 콘크리트 기초 면에 기둥이 앉을 먹 선을 놓고 간이 주추가 자리잡았다. 기둥이 서고 크레인으로 도리와 보를 옮겼다. 빡빡하게 홈을 딴 사개에 나무망치인 떡메로 내리꽂아 맞춤을 했다. 못 하나 박지 않는데도 서로가 짱짱히 물려 있는 ‘이음’과 ‘맞춤’의 구성이 가히 경이로웠다. 이 과정 모두 이틀을 넘기지 않았다. 하루면 집을 짜고, 그 다음 날은 수직 수평을 맞추는 교정 작업에 들어갔다. 이렇듯 뼈대 방식의 짜임은 한옥의 민도리집과 다름없다. 장비를 이용하면서 일이 빨라졌다는 것뿐… 차이는 내부 천장 형태에서 나타난다. 집을 짜는 오량구조 방식을 거실(대청)이나 중심 공간(진부 현장에서는 성당)에 천장 형태로 독립시켜 적용한 것이 현대 한옥의 가장 큰 성과이다. 그래서 더욱 신경이 쓰이는 작업이기도하다. 외부 모습을 보고는 그냥 흙집이거니 했던 사람들도 집 안으로 들어와 거실의 오량천장을 보고서는 너나없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우리 살림집의 대청마루 정서를 자극하는 계승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량천장은 천장이 만들어질 공간의 길이와 폭, 건축물 내의 위치에 따라 그 모양이 천차만별로 나타난다. 때문에 정형화 된 틀에 꿰어 맞추기보다는 외부로 향하는 느낌, 다른 공간과의 조화에 더욱 중점을 두어야 하는 일이다. 처음 별도의 오량천장을 시도했을 때는 외부 서까래 처마와 연결되게 오량천장을 구성했으나 외풍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외부의 한기를 차단하는 다른 대안이 필요해진 것이다. 결국 내부에서 별도의 오량천장을 만든 것이 2004년부터이다. 때문에 오량천장이 완성되고서야 외부 서까래가 걸릴 중도리와 용마루 선인 종도리가 덧지붕으로 만들어졌다. 계산이 정확하지 않으면 내부 오량천장과 중도리가 부딪치는 경우(높낮이 문제로)가 발생하는데, 이 문제야말로 목수들의 실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오량천장의 구성을 완료하고 중도리에 서까래가 걸리기까지, 맞배지붕일 경우 출목한 도리에 박공판이 걸리는 순간까지 목수들도 마음의 긴장을 놓지 못한다. 그렇게 많은 집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량천장 형태가 정말 ‘그때 그때 다른 까닭’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오량천장도 팔작지붕 형태의 천장이 존재하고, 우물 반자 형태를 응용한 오량천장도 있었던 것이다. ‘목수들이 이번엔 이렇게 맛을 냈구나’ 속으로만 생각했지 그 이유를 잘 몰랐다. 대들보를 얹는 자리에는 기둥을 받쳐야 하는데, 공간 구성이 그렇게 되지 않아 그 자리에 기둥이 서지 않으면 별도의 보강이 필요해지기 마련이다. 기둥을 받치지 않는 길이만큼 대들보 위로 중도리와 종도리를 돌출시켜 반자 형태로 길이를 연장하고 오량천장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 그래… 기둥 구조물이 없으면 지금 당장은 문제가 아니지만 세월이 가면 처질 수 있지, 기둥을 세울 수 없으니 반자 형태로 만들었구만.’ 이렇듯 변화무쌍한 것이 집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수녀원 성당의 천장은 또 달라야 했다. 성당이라는 종교적 특성을 감안할 때, 주택의 거실에서 응용했던 팔작 형태의 오량천장은 맞지 않았다. 외형이 그렇듯, 천장이 높고 경사진 맞배 형태의 오량천장이어야 벽면에 종교적 상징물을 설치할 수 있으며 성당다운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맞배 오량천장이구만’ 목수들과의 합의에 이르자 전체 그림이 잡혔다. 목수, 생일상 없는 상량식 현장에서 집 짜기 공정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인 4월 22일 상량식이 진행됐다. 옛 살림집의 상량은 집의 뼈대가 갖추어져 집을 지켜주는 성주신을 모시는 날이며, 고생한 목수들의 생일잔치이기도 했다. 현대는 상량 후에 더욱 할 일이 많은 복잡한 건물이 됐음에도 이 의식만은 그대로 남아 있다. 목수들이 가장 기대하는 날이기도 하다. “수녀님. 상량식은 어떻게 할까요.” “서울에서 손님들이 내려오기는 어렵고 우리끼리 하지요. 뭐―, 간단히 예배만 드릴 게요. 점심은 수녀원에서 하면 어때요.” 그런 터라 상량식 일반 관례를 설명하지 못했다. 전날 밤 마룻대를 들어올릴 천을 준비하고, 한옥 목수들이 생전 처음 경험하는 경건한 상량이 치러졌다. “예배 후에 아멘…, 하면 들어 올려 주세요.” 수녀님의 주문에 따라 긴장한 목수들이 ‘아싸 -’하는 순간 번쩍 들어올려졌다. 여느 때 같으면 엮은 천 줄에 만 원짜리 지폐가 줄줄이 매달려야만 올라가던 마룻대가 ‘아멘’ 한 마디에 번쩍 올려진 것이다. 긴장하고 서 있는 목수들을 보면서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더 많은 상량비를 얻어내려 흥정(?)에 애쓰는 목수들의 모습을 많이 보아온 터였다. “좋습니다. 새로운 경험일 것 같네요. 식사도 고기나 술 같은 거 준비하시지 말고 수녀님들 드시는 것과 똑같은 반찬으로 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목수 팀이 의젓해 보였다. 예배를 지켜보던 나는 ‘어찌 저리 당당하고 의연할 수 있을까’,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수녀복을 입은 수녀님들은 더 이상 한 사람의 여성이 아니었다. 믿음으로 고행을 받아들이는 수행자, 선지자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마룻대를 고정하고 내려 온 목수들의 얼굴도 긴장한 낯빛이 역력했다. 나 또한 그러했으리라. 아마도 집은 사상과 종교, 문화적 차이를 뛰어 넘어 사람의 모습으로 부활하는 생명체가 분명했다. 살아가며 이 감동은 오래도록 계속될 것 같다. 문제는 처마 완성 후 덧지붕을 만들면서 박공판을 걸어야 하는 순간 발생했다. 서구 목조주택의 박공지붕과 달리 한식의 맞배지붕 박공은 사각 서까래 형태의 목기연이라는 부재가 박공판 위에 얹어져 맛을 낸다. 넓은 박공판은 건물 양 쪽 끝의 도리와 중도리 종도리에 고정돼야 한다. 지붕 경사도가 30도 정도 야트막한 지붕이거나 팔작지붕일 경우에는 문제가 없는데, 성당의 천장 또한 맞배 오량천장으로 구성 된 데다 경사도가 35도, 40도에 이르기에 폭 두 자 정도의 박공판이 중도리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난감한 상황이었다. 사찰이나 제실처럼 풍판을 달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내용은 한국 국적의 수녀원이지만, 그 외형의 느낌은 성당 본연의 느낌을 살리기로 했기에 창조성이 더욱 요구됐다. 긴급 소집한 토의에서 몇 가지 안이 나왔는데, 중도리에 걸리도록 반원형 모양의 박공판을 조각하여 원 박공판과 이음하자는 것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으로 조각한 폭 두 자 이상의 박공판을 완성했다. 경사 심한 지붕에 웅장한 모양을 갖춘 박공의 완성은 한국 국적의 수녀원으로서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완성된 박공처마를 지켜본 수녀님의 반응이 곧바로 전달됐다. “중도리와 중도리 사이 박공 가운데에 성상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마루를 놓아주실 수 있나요.” “아, 예. 가능합니다.” 그렇게 답을 하면서 수녀님의 빠른 감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창조적인 한국적 수녀원의 모습은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했던 것처럼 하나하나 완결성을 띄어갔다. 삶을 담을 ‘주인’과 전체 과정을 집행하는 ‘기획 관리자’, 집을 집답게 만드는 ‘일꾼’들이 하나가 될 때 집은 아름다운 선율로 답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집을 짓는 일은 아름다운 업을 짓는 일임을 가슴으로 깨닫게 된다.田 글 이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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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집 이야기] 내 생에 최고의 집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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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집 이야기-내 생에 최고의 집 I
- 겨울 지나 봄 혹독한 겨울이었다. 겨울 아닌 세월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한겨울을 벗어나서 봄을 기다리던 때인지라 갑작스레 찾아든 꽃샘추위로 어안이 벙벙했다. 1998년 IMF 체제 하의 경제 위기 상황에서 맞은 부도 이후 6년여… 가슴은 졸아들었고, 영혼은 메말랐으되, 그래도 가야 한다는 모진 꿈이 있어 버티어 온 세월이었다. 고통스러웠던 이 기간에 사람들은 밀물처럼 들어왔다가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아무런 조건 없이 함께 일하자며 시작한 관계는 짧으면 1년, 길어야 2년을 가지 않았다. 일도 힘들었지만 그에 따른 처우 개선과 안정된 직업으로써 전망을 갖기 힘들었던 때문이다. 외로운 사투를 벌이던 2003년 가을, 사람들이 하나 둘 다시 모여들었다. 이들 모두 나름대로 전문 분야가 있었기에, 인적 구성도 기획 관리와 현장 관리를 통일적으로 모색하는 기회였다. 때에 맞추어 일도 많아졌다. 새로운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그 희망의 불씨는 2005년 2월을 넘기지 못했다. 어려워만 가는 경제 여건 탓인지 상담은 계속 어그러졌고, 1월 지나 2월에 들어서는 직원들의 동요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뇌관은 밀린 급여 문제였지만, 본질은 회사의 전망과 관련한 문제이기도 했다. 나는 회사의 지향과 현실을 이야기했고, 어려움을 극복하며 함께 갈 것인지, 떠날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했다. 또 한 번 결단의 시기가 온 것이다. 나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공든 탑이 무너져 갔다. 구정을 전후하여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나는 홀로 서 있었다. 일부는 흙건축 자재 유통 등 자신들의 사업을 하겠다며 떠났고, 일부는 대기 상태로 남겨졌다. 계절의 봄은 가까워 오는데, 나는 겨울의 한복판을 홀로 지나야 했다. 지옥 같았던 지난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일진대, 사람들은 어쩌면 환상을 보고 내게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세월의 이력 때문이었던가. 있던 사람들의 빈자리가 커 보이지 않도록, 혼자서도 모든 일을 처리하는 구조를 회사는 갖추고 있었다. 기획 및 설계, 홍보와 마케팅, 사람(건축주)과의 관계, 공정별 협력 업체에 대한 장악력, 매년 보강되는 시공 기술력… 이 모두를 끌어안았기에 ‘언제든 보따리 싸 들고 현장으로 가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었고, 혼자됨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의 무기이기도 했다. 구성원 개개인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조직적으로 성장하는 규모의 경제학을 모르는 바 아니나, 통박으로 깨우치길 소기업의 생존 전략으로써는 모든 것이 오너 손에 달려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탓이다. 꼭 시간의 문제는 아니지만 1년, 2년, 3년을 넘어서야 긴 여정을 함께 갈 수 있는 사람과의 신뢰가 만들어진다고 믿어 왔다. 모두들 그 3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이전에 상담해 두었던 단지 계획이나 지주 회사 공동 사업 등 돌파구를 찾아내려 부산하게 움직이던 때, 큰아이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뜻하지 않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여기 명동성당인데요. 수도원이요.” “아, 예―.” “허가까지 끝났으니, 빠른 시간 안에 현장 답사를 해서 진행해 주세요.” “예―.” 이런 일도 있는 법이다. 지난해 5월경, 강원도 평창군 진부에 계신 수녀님 한 분이 본당에 계신 건축 책임자 수녀님을 모시고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수녀원이 자리할 터의 문제로 주변 토지를 추가로 매입하여야 하는 문제도 있었지만, 종교 시설로써 기존 건축 양식을 대신하여 한옥 목구조 형식의 흙집으로 수녀원 신축이 결정 나기는 어려워 보였다. 특히 중앙에서 집행되는 수많은 성당과 수녀원 건물의 신축은, 그에 따른 건축 회사와 통상적인 건축비가 정해져 있을 법하기에 더욱 그랬다. 미련은 남았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희미해져 가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 ‘수녀원’ 신축이 결정된다면, 규모로나 새롭게 시도해 볼 건축 유형으로나 상징성 모두에서 새로운 활로가 될 것이 분명했다. 전화를 끊고 나는 하늘에 기도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2월 22일, 눈발을 뚫고 강원도 진부로 향했다. 장평에서 모릿재를 넘어 가는 길을 포기하고, 진부 나들목에서 평지로 달렸지만 강원도의 겨울에 능한 수녀님 차로 옮겨 타고서야 현장에 도착했다. 20센티미터 이상 눈으로 덮인 현장은 흡사 백야의 초원 같았다. 부지의 터를 지나 계곡의 맨 꼭대기에 올라서니 웅장한 규모의 기존 수녀원이 자리했다. 천혜의 요새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지형이었다. 하지만 겨울만 되면 고립되는 생활이 마을 초입에 보급로처럼 새로운 수녀원의 신축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현장 답사 후, 진행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3월 초 도면 협의를 진행했으며, 최종적으로 수녀원과 손님의 집, 창고, 하우스로 구성하는 배치 및 설계를 확정했다. 전광석화처럼 한나절에 초안 설계가 끝났던 일이다. 수녀원은 한옥 목구조 뼈대 방식에 맞배지붕, 양식 기와로 마감 짓도록 기획했다. 집의 기본인 뼈대는 한옥이되 전체의 느낌은 수녀원이라는 이미지를 살려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손님의 집은 건축비를 절감하면서도 수녀원과 조화롭게 어울릴 토담집 느낌을 줄 수 있도록 구성했다. 처음으로 시도하는 경량 목구조 뼈대 방식에 현대식 박공지붕, 아스팔트 슁글로 마감되는 집이다. 샛기둥 사이 흙벽돌을 쌓고 안과 밖 모두를 황토 미장하는 방식인데 토담집 느낌을 주기 위하여 하방, 중방 및 문얼굴을 넣는 방식을 택했다. 창고는 일반 조적조에 목조 지붕으로 내부 공간의 쓰임에 주목했다. 도면 작업을 할 줄 아는 전기 팀장을 긴급 투입했고, 캐드로 작업한 평면과 입면, 배치도는 기존에 비해 못하지 않았다. ‘그래, 해 냈어―’ 자신감이 온몸에 붙었다. 3월 중순 견적을 제출하고, 3월 말 공사 계약이 이루어졌다. 6월 말까지 입주하도록 해주면 고맙겠다는 주문을 받으며, 겁 없이 도장을 찍었다. 남은 시간은 오로지 3개월.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두려웠지만 이미 던져진 주사위였다. 때맞추어 상담자들이 몰려들었지만 모두를 미루었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지난해 지붕공사까지 완료한 인제 현장의 마감과 함께 6월 말까지 진부 수녀님들을 입주시켜야 하는 책임만이 남은 것이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의 끝자락, 봄을 그리며 애타하던 3월이 그렇게 가고 있었다. 땅은 파 보아야 알아… 드디어 2005년 4월 1일, 진부로 향했다. 터에서 바라본 산등성이에는 아직도 희끗희끗 눈발이 남아 있었다. 수녀원이 자리할 터의 구옥 철거 작업은 의외로 간단했다. 작은 규모의 건물인데다 한옥 형태의 흙집이어서 목재는 땔감으로 재활용하기 위하여 한 곳으로 모으고 나머지는 덤프트럭 두 대분 정도의 건축 폐기물로 처리했다. 그곳에 터를 잡고 수십 년 동안 살았을 옛 주인의 자취는 사라졌다. 그리고 오랜 산통 끝에 또다시 수십, 수백 년을 이어갈 새 생명을 출산하게 될 것이다. 산자락 아래로 집을 감싸고 있던 얕은 돌담은 토방을 만들기 위해 한쪽으로 모았다. 문제는 산자락 아래에서 흐르던 샘물인데, 집 한편으로 자연 배수되던 물이 집의 규모가 커짐으로써 샘의 위치와 물길의 변경이 불가피해 보였다. 터의 윤곽이 드러나고 설계된 건축물이 앉아야 할 외곽선을 가늠하는데 구옥의 터에서 확장된 임야의 경계를 파 들어가자, 아뿔싸… 포크레인의 삽날이 텅텅 튀기 시작했다. 암반인 것이다. 정막 속에 찬바람이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구옥의 터 산자락에서 물이 흐르고, 그곳에 뿌리박고 있던 나무들이 고목처럼 느껴졌던 정황을 되새겨 보니 지표면 아래가 모두 암반이었던 까닭이다. 이런―, 젠장. 세심하지 못했던 자신을 탓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일정 정도의 택지를 확보하기 위한 암반 파쇄 작업을 시작했고, 기초팀은 손님의 집터 기초 공사를 먼저 하기로 했다. 하지만 손님의 집과 창고 터의 부지 조성 공사도 만만치 않았다. 경사면이 심하여 창고는 지하층을 두도록 처음 설계했으나, 손님의 집과 창고 부지의 단을 주어 단층으로 작게 하고 별도의 하우스 창고를 만들기로 했던 일이다. 하지만 부지 정리 작업을 시작하자 윤곽이 드러낸 절토와 성토면의 경사는 양쪽 모두 부담스러운 상태였다. 경사면 처리를 위해서는, 그에 따른 구조물 공사를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경사지 상단부를 절토하여 하단부 조성을 하던 때, ‘파아-악’하는 소리와 함께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이런―, 장비가 마을 지하수 관로를 건드린 것이다.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는데―, 어쩌겠는가. 우선 물길을 내고 연결 부속을 사왔다. 끊어졌던 두 관이 부속으로 결속되었는가 하면 ‘피-익’하면서 내뿜어 올리는데 정통으로 그 물에 몇 번 맞고 나니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수압으로 인하여 연결 부속은 계속 엇나갔고, ‘엎친 데 덮친다’고 끝내는 부속 하나가 물기둥을 타고 사라졌다. 한 사람은 다시 부속을 사러 나갔고, 입술이 파랗게 질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하필 이 순간, 수녀님이 현장을 지나가고 계셨다. 놀란 얼굴을 하며, ‘무슨 일이냐’고 물으시는데, 턱이 덜덜 떨려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다. 의연해 보이려는 내 모습이 내가 보아도 안쓰러워 보였다. 갈아입을 옷이 있느냐고 물으시기에 ‘괜찮다’고, ‘작업을 마저 해야 하기 때문에 소용없다’고 하였는데도, 수녀님은 길을 돌려 잠바 하나를 주고 가셨다. 처음부터 이렇게 고생을 해서 어떻게 하냐고 미안해 하셨다. 겨우 임시 처방으로 상수도 관을 소통시킨 후 함께 일하던 기초팀장과 마주보며 웃는데, 칼바람이 속곳을 파고든다. 강원도의 4월은 아직 한 겨울인 것이다. 물에 젖은 잠바를 벗어놓고 수녀님이 주신 잠바로 갈아입었다. 한기가 조금은 가셨다. 마음이 따뜻했다. 수녀원 자리는, 건물이 앉을 자리만 겨우 암반 파쇄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경계대로 부지를 확보하자면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릴지 장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기초 공사를 하고 나면, 암반 절토 면에 구조물을 설치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자연석 돌쌓기 작업을 기초공사보다 먼저 해야 했다. 보통은 집이 다 지어지고 난 후, 조경 공사에 포함되는 공정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토목 기초팀, 조경팀, 전기·설비팀을 모두 투입했다. 샘에서 흐르던 물길은 겉흙을 모두 걷어 내고 암반을 깬 돌로 채웠다. 손님의 집과 창고 부지에도 수녀원 터에서 나온 돌들로 기반을 다졌다. 포크레인 장비 두 대와 덤프트럭 두 대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한쪽에선 뿌레카(브레이커)로 암반을 깨고 있고, 또 한쪽에선 돌쌓기를 진행했다. 기초팀은 손님의 집과 창고부터 기초 작업에 들어갔고, 공사 착공 후 십여 일, 드디어 수녀원 본채의 기초 공사를 시작했다. 이제사 전체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대역사였다. 이전에도 전원주택 단지 조성을 해본 경험이 여러 번 있었지만 이렇게 혼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긴장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위기 속에서 보다 강해지는 것이 인간의 본 모습이지 않는가. 현장 판단이 익숙한지라 판단이 서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밀고 나갔다. 주어진 시간표는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기에 주저할 시간적 여력이 없었다. 한 달 여 전부터 계속되던 설사는 멈추지 않았다. 찬바람과 긴장의 연속은 몸의 조절 기능을 급속히 떨어뜨렸고, 신호가 오면 우선 산으로 달려야 했다. 아직 임시 화장실도 짓지 못한 상황이었다. 때맞추어 걸려 온 전화를 받다가 끊지 못해 타이밍을 놓쳐서는 바지에 낭패를 보았다.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알 수 없는 외로움과 설움이 북받쳤다. 그 상황에서 ‘수족을 잃어버린 장수의 눈물(?)’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피식 웃어 버렸다. ‘암반이 나올 줄 누가 알았어, 시간이 조금 걸려서 그렇지, 해 냈잖아. 땅은 파 보아야 알아. 그만한 모험도 없다면 세상 살 맛나겠어. 어려움은 극복하라고 있는 거야’ 속말을 하면서 허리띠를 묶었다. 사람도 그러한 것을, 그 속을 누가 알아. 서로의 암반을 깨고 들어앉아야 제대로 된 관계가 만들어지는 법이지. 뽀송뽀송한 흙인지 알았는데, 만나 보니 겹겹이 암반인지라 몇 번 깨 보고는 겉 상처만 남는 관계가 얼마나 많다고. 아마도 지금껏 내가 살아 온 과정이 그렇지 않았나 싶었다. 그래서 아직 내 인생은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음이랴. 하지만 내가 만들어 가는 이 수녀원은 암반을 깨고 들어앉은 반석 위의 집이 될 것이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을 이 자리에 터 잡고 뿌리내릴지 모른다. 그래서 내 인생의 절반은 뿌리 내려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田 글 이동일((주)행인흑건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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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집의 현대화 실험
- 흙집 이야기 흙집의 현대화 실험 -------------------------------------------------------------------------------- 흙집은 전통적인 우리의 건축 양식이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시골에선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흙집을 시공하려고 보니 너무 낯설었다. 단순히 과거의 건축물에 대한 재현이 아니라 현대 건축의 눈으로 재구성해 보자니 어렵게만 느껴졌다. 산업화 사회와 아파트 문화를 거쳐 온 현대인들의 눈으로 흙집을 보자면 집의 평면이 단조롭고, 집 모양이 초라하며, 물에 약해 흙벽이 주저 앉기도 하는 폐기된 건축양식쯤으로 보였다. 하지만 흙집의 건강성, 아스라한 고향의 향수는 흙집을 현대 건축물로 계승·발전시키고자 하는 원동력으로 되살아 났다. 이번호에선 솟대전원마을의 시공 과정을 중심으로 흙집의 현대화 실험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 터잡기 집터는 사람이 보기에 ‘편안한 터’가 좋은터이다. 북쪽으로 산이 있어 겨울을 막아주고, 동쪽과 남쪽이 트여 있다면 더 할 나위 없다. 시골 동네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기는 부담스럽고 동네와 너무 외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흙집은 모름지기 농지와 어우러져 자연속에 묻혀야 한다. 높은 산을 까뭉개고 앉은 고압스런 모습이 아니라 야트막한 산자락에 둘러싸인 아늑한 정경이길 바랬다. 이천시 호법면 안평리 도두람산 인근의 지목은 답(논)이고 현황은 전(밭)인 7백50평의 부지에 전용 1백85평씩 4개의 집터로 전용허가를 받았다. 밑그림, 건축 설계 건축 설계는 설계사무소에 맡기지 않았다. 옛 한옥이 갖는 ㅡ,ㄱ,ㄷ,ㅁ집 형태의 한계를 극복하고 현대인들이 익숙한 아파트형 평면배치를 기본으로 건물의 향과 창호배치에 주안점을 두었다. 또한 전원의 단독주택은 외부와의 연결이 중요하다. 출입구와 현관문, 툇마루와 텃밭, 별채(사랑방)와 정자 등 자연과의 어울림에 많은 관심이 두어졌다. 그 과정에서 4개의 모델을 확정했다. 동쪽문에 남향집·정자가 있는 들국화동, 본채와 별채가 툇마루로 연결되는 개나리동, 다락과 독립된 별채가 있는 진달래동, 정원 넓은 복층집 형태의 민들레동으로 특성화시켜 모델화 작업에 들어갔다. 건축 기초 부지의 경계 뒷편에 휴경지인 농지(자연 습지)가 있었고, 그 뒤 산자락 아래로 웅덩이가 있어 건수의 흐름을 차단해 주어야 했다. 경계 지점에 약 1m 50cm정도를 파내고 2m 높이의 옹벽을 세웠다. 옹벽 뒤를 잡석으로 채우고 유공관을 묻어서 건수를 4동의 연못으로 흐르게 했다. 진입도로 보다 부지가 낮아 약 50∼80cm 높이로 성토를 하였다. 생땅이었다면 건축물의 기초는 줄기초방식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건수가 많은 암반층에다 성토한 땅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확대기초(줄기초 옹벽 아래 위를 메트 콘크리트로 쳐서 하나의 덩어리로 기초를 만드는 방식)를 하였다. 비용 상승이 많아 많은 고민 끝에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또한 일상적인 비를 피하기 위한 조치로 지표면에서 약 80cm 정도(기초 콘크리트 60cm+시멘벽돌20cm)를 높이고 노출면은 인조석으로 마감짓도록 했다. 뼈대(골조) 세우기 뼈대(골조) 문제는 흙집 신축에 있어 핵심적인 문제이다. 옛 흙집들이 폭이 좁은 ㅡ, ㄱ,ㄷ,ㅁ형 집을 지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골조’가 약하기 때문이었다. 주변 소나무를 벌목하여 다듬은 목재가 구조재로 쓰였으며 이를 기둥 삼아 심벽방식의 흙벽을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흙벽돌을 찍어 벽체를 세운 집들은 그나마 목기둥 조차 없어 시간이 지나면 주저 앉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원천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8치(약 25cm) 사각 목재를 구조재로 선택했다. 재질은 휨과 트는 것이 비교적 적은 소나무를 사용하였으며, 자재의 규격화가 용이한 사각 목재를 기본으로 하였다. 설계상 코너, 칸막이 위치에 기둥을 세웠으며 그 높이는 9자(2m 70cm)로 하였다. 기둥과 기둥의 연결은 암·수 홈을 판 보로 짜 맞추고 대못으로 고정했다. 지붕·처마 만들기 단아한 한옥형 지붕을 만들것인가? 아니면 미려한 서구형 목조주택 지붕선을 만들것인가? 고민에 빠졌다. 그 답은 ‘흙건축의 현대화’란 명제에서 찾았다. 흙집하면 으레 떠 올리는 기와집 또는 초가집이라는 등식을 깨고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목조주택의 지붕선을 응용했다. 즉 트러스 방식의 서구형 공법을 응용했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몸체와 지붕의 부조화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주는 징검다리가 필요했다. 보 위의 지붕 마감선과 처마를 원형 서까래 노출로 시공함으로써 연결점을 찾았다. 일상적인 비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처마의 길이를 벽체 중앙에서 1m 길이로 뽑았으며, 서까래 위 처마 마감재는 대나무를 사용하였다. 대나무의 멋과 통풍효과를 고려한 배려였다. 단열재는 처마쪽에는 넣지 않고 본 건축물 지붕 OSB합판 아래쪽에 80mm 스치로폼을 상을 걸어 고정했다. 지붕 공사는 일반 아스팔트 싱글공사와 동일하게 방수쉬트를 깐 후 너와형 이중싱글로 마감했다. 하지만 공사를 완료한 후 가장 많은 문제제기를 받은 것이 지붕의 두께감이었다. 몸체는 육중한데 지붕은 날아갈 듯 하다는 것이다. 한복입고 기름바른 꼴이라는 지적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결국 방부판재로 띠장을 돌려 보완하는 것으로 두께감을 살렸다. 흙벽 만들기, 그리고 내장공사 기초 콘크리트 위에 외벽과 칸막이 벽 하단부에는 약 20cm의 시멘벽돌 쌓기를 하였다. 이는 바닥 단열재+난방배관+황토미장 높이로서 하단부의 흙벽을 보호하는 조치였다. 골조의 사각목재가 그러하듯 자재의 규격화와 시공의 용이함을 위하여 벽체는 흙벽돌 쌓기를 하였다. 흙집이 외관이 투박하여 외면 당하는 것을 극복하고자 문양이 들어간 미려한 흙벽돌을 주문자 생산방식으로 납품받았다. 기본 원칙은 흙벽돌의 순도를 지키는 것이다. 시멘트나 회를 섞지 않은 순수 황토만을 소재로 하여 기계압을 이용한 강도 높은 흙벽돌로 생산되었다. 외장은 방수줄눈만 시공하고 별도의 미장은 피하였다. 흙벽돌 쌓기와 동시에 창틀·문틀 공사가 병행되었다. 목창틀에 고정 철물로 흙벽돌과 맞물리게 하고 창문의 처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창틀을 철선으로 보에 매달았다. 천정공사와 전기 배선공사를 완료하고 내벽 흙미장 작업에 들어갔다. 황토미장의 자재 선택에서 많은 갈등이 있었다. 자재 시험 성적서와 시공 기술력을 갖춘 업체를 선정 하다 보니 흙미장 자재 40kg 1포가 시멘트 1포 가격의 6배에 이르렀다. 흙벽돌 벽면에 가는 철망(메쉬)을 잔못으로 고정하고 그 위에 1.5∼2cm정도의 황토로 미장 마감하였다. 황토방 공사는 일반 시공법과 동일했다. 80mm단열재를 바닥에 깐 후 난방호스를 고정하고, 콩자갈을 채운 뒤 황토몰탈로 40mm 미장하였다. 일반 순수 황토는 시공 후 논바닥처럼 갈라지는데 황토미분과 자연 섬유질이 혼합된 황토몰탈재는 이러한 우려를 불식했다. 화장실 등 물쓰는 공간의 마감 흙집의 성공여부는 물과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골조라 집이 무너지진 않겠지만 물과 흙벽은 상극인 것이다. 화장실과 다용도실이 집 안으로 통합된 설계는 방수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가 관건이 된다. 그 고민은 흙벽의 기능을 최대한 살리되 물쓰는 공간에 별도의 내벽체를 만들어 미장 방수를 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즉 칸막이 흙벽을 세우고 화장실 안쪽으로 시멘벽돌 세워쌓기를 하였다. 미장 방수 후 타일로 마감하는 일반 건축공사 마감을 도입 한 것이다. 창호(창문, 방문, 대문) 문을 어떤 소재로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집의 모양과 기능성이 바뀐다. 전통 가옥의 맛을 살리면서도 현대 건축의 기능성을 살릴 수 있는 창호,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실험적인 요소들을 도입했다. 옛날 흙집은 단열과 처짐 등의 문제로 창을 작게 내고 최근에는 고정창을 많이 사용하는 바, 과감히 창의 크기를 현대주택의 크기로 확대하고 이중창으로 단열을 보완했다. 외창은 흙벽돌과 어울리게 우드샷시에 5mm 그린유리로, 내창은 목창에 이중 유리(3mm 투명유리+조선살+3mm불투명유리)로 구성했다. 안방은 동쪽 창과 남쪽 창 을 내는 욕심을 부렸다. 아침 햇살과 한낮의 햇살 모두를 담고 싶어서였다. 그러다보니 단열에는 약간의 문제가 나타났다. 아무리 이중창이라고 해도 창틈으로 들어오는 냉기를 막을 순 없는가보다. 보완이 필요한 대목이다. 또한 외부 창틀과 흙벽돌 사이의 줄눈이 창의 울림으로 인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는 목기둥과 흙벽돌 사이에서도 발생되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보완 시공법과 보수 작업을 위한 연구작업이 진행중이다. 방문은 처음에는 미닫이 문의 느낌을 주기 위한 살 모양을 넣어 제작 시공하였으나 이후에는 방음 문제로 기성문을 사용하였다. 현관문은 약 10cm 폭의 판재를 홈을 파 짜 맞추고 옛날 장식을 이용하여 멋을 냈다. 이후 틀어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사선으로 판재를 짜맞추는 형태로 보완했다. 마감공사 집 전체의 느낌은 은은한 흙집의 향기를 뿜어야 하지만 실내는 실용적이며 세련된 마감이길 바랬다. 흙벽의 숨쉬는 기능을 살리기 위하여 한지벽지와 한지장판을 사용하되, 거실만은 현대인들의 선호도가 높은 온돌마루로 시공했다. 하지만 황토바닥의 자연습도 조절기능이 온돌마루 시공시 사용되는 접착제에 막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또한 보수공사시 흙 바닥 자체가 떨어져 나오는 점이 문제가 되어 이후에는 거실 바닥 시공시 시멘트 미장 후 온돌마루 시공으로 공법을 바꾸었다. 황토빛의 차분한 느낌을 실내에서는 바꿔주기 위하여 목창, 목문을 연녹색 페인트로 마감하였는데 전체적으로 촌스러운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결국 무난한 질감의 아이보리 색으로 바꾸는 큰 보수공사를 치뤄야 했다. 이후에는 나무질감을 그대로 살리는 투명락카 시공으로 마감지었다. 주방의 씽크대는 별도 제작을 고민하였으나 기능성 문제로 포기하였다. 일반 씽크대 공장의 제품 중 흙집과 잘어울리는 원목 체리톤으로 구성했다. 일반 주택과 다르게 흙벽에다가 장을 설치하여야 하기 때문에 뒷판을 보와 연결시켜 고정하는 것이 필요했다. 등은 원목등을 제작 판매하는 공장의 카다록을 보고 신중히 선택했다. 한지벽지와 창살, 원목등의 조화는 마감공사의 포인트다. 주의할 점은 한지장판의 시공 및 관리이다. 충분한 건조 과정이 없으면 곰팡이가 쉽게 피고, 재시공시 흙바닥이 들어날 수 있기 때문에 시공 관리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벽난로, 툇마루, 정자 전원주택 겨우살이의 꽃은 역시 벽난로다. 보조 난방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삶의 풍요로움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화재 예방과 내구성을 고려해 기성제품을 사용하였다. 열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노출형을 선택하였으며 공간의 효용성을 높이기 위하여 매립 형태의 공간(굴뚝모양)을 만들었다. 아무런 치장을 하지 않아서인지 전체적으로 조화롭지 못했다. 매립 공간을 넓게 확보해 장작 저장소의 기능을 갖추고 치장 벽돌 등으로 마감을 짓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파트의 발코니나 목조주택의 데크와 맛이 다른 툇마루는 욕심을 많이 부렸다. 집과 자연과의 징검다리 역할에 툇마루 만한 것이 있겠는가? 처음에는 툇마루 위에 처마를 하지 않았으나 비를 피하기 위하여 처마를 내 달았다. 이후에는 툇마루 일체형 시공으로 보다 깔끔한 마감을 볼 수 있었다. 부지의 특성상 비어 있는 듯한 자리에 정자 하나는 포인트다. 6치(약 18cm) 목재 기둥과 보로 뼈대를 세우고 본채보다 낮게 지붕선을 만들면 여백의 미를 넘어선다. 흙집의 현대화 많은 고민 끝에 첫 실험의 결과물이 모습을 드러냈고 세인의 평가를 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의미있는 일은 흙집의 현대화 실험을 통해 우리의 흙집을 건축 시장의 한 유형으로 진입시켰다는 점이다. 더 이상 개인의 취향으로 지어지는 집이 아닌 당당한 건축 상품으로 등장했다는 의미이다. 끊임없는 보완과 연구를 통해 하나의 바람이 아닌 현실적 실체로서 흙집의 현대화를 이루어 가야 한다.田 글 이동일(행인흙건축 대표 031-335-8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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