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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목조주택의 한국화를 위하여

한옥 목구조 방식은 사개맞춤과 처마·지붕공사가 복잡하여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우며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흙집의 기능을 잘하면서도 건축비가 저렴했으면 좋겠다’는 수요자의 요구는 현대 흙건축의 중요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마평리 수녀원 공사 중 부속 채인 ‘손님의 집(피정의 집)’은 바로 그러한 고민의 산물이다. 구조(뼈대)와 지붕공사를 단순화하여 건축비를 줄이되 현대 흙집의 느낌을 살리고 그 기능을 잘하도록 완성하는 것이 중요했다. 구조는 기둥과 도리, 보로 연결하는 한옥 목구조 방식의 사개맞춤이 아니라, 서구식 경량 목구조 공법을 차용했다. 2″×4″나 2″×6″라는 건조목을 사용하여 집의 틀(구조)을 짜는 구조 방식을, 2″×8″(폭 약 18.5㎝)을 사용한 샛기둥 방식으로 변형했다. 창의 개구부를 미리 계산에 넣고 약 1미터 간격으로 샛기둥을 세우는 방식인데, 바닥 장선과 처마 받이 장선(도리 기능)으로 고정했다.

한옥 형태의 흙집 느낌을 살리고자 공간 구분이 되는 지점에 2″×8″의 넓은 면으로 샛기둥에 기둥처럼 고정하고, 하방과 상방(도리 느낌)은 2″×10″(폭은 약 23㎝)으로 띳장을 돌렸다. 중방은 하방과 상방의 폭보다 좁은 2″×6″(폭은 약 14㎝ 정도)로 변화를 주면서도 균형감을 유지하도록 했다.
처마는 원형 서까래 대신에 서구 목조주택에서처럼 2″×6″ 각재로 처리했다. 내부 공간은 평 트러스로 보강한 후, 한옥 지붕에 덧지붕을 내듯이 지붕을 만들었다. 처마는 한옥 목구조 방식의 흙집처럼 서까래를 노출하지 않고, 서구 목조주택에서처럼 루바만 보이도록 마감했다. 지붕 마감도 서구 목조주택에서 일반화된 아스팔트 슁글로 했다.

늘 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도한다는 것은 언제나 모험을 동반한다. 지난겨울 중저가형 현대식 흙집에 대한 구조 공법을 치열하게 토론했지만, 한옥 목구조 방식의 안정성과 그동안의 성과에 안주하면서 변화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마평리 수녀원의 전체 기획과 현장관리까지 책임지고 들어가면서, 서구 목조주택의 한국화와 현대 흙집의 새로운 모델을 실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물론 내 자신이 온전하게 져야 하는 책임도 뒤따랐다.

수녀원 본채의 한옥 목구조 뼈대공사를 완성하고 처마·지붕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손님의 집 구조공사를 시작했다. 서구 목조주택 공사에 대하여 잘 알고, 그동안 내장·목창공사를 전담했던 목수 팀장 한 사람만을 불러들였다. 몇날며칠 머리를 싸맸던 샛기둥 방식의 기둥과 하방·중방·상방의 띳장 처리 문제를 한낮의 토론 속에 말끔히 해결했다.
샛기둥을 세우는 일은 문제가 아니었는데, 집 외부의 전체 느낌을 좌우하는 기둥과 하방·중방·상방의 목재가 덧댄 듯 가짜 느낌이 드는 것을 최소화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가 창틀과 흙벽돌을 쌓은 후 황토 미장을 했을 때 나타날지도 모를 하자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후속 팀이 합류하고 본격적인 뼈대공사를 시작한 후 약 9일 만에 지붕공사까지 모두 끝을 냈다. 한옥 목구조 공사에 비하면 절반 정도 기간이 걸린 셈이다.

때맞추어 본채 수녀원 지붕공사를 끝냄과 동시에 지붕공사를 진행했다. 전체 공정의 안배가 자로 잰 듯 딱 떨어졌다. 조적팀은 이미 창고 조적공사를 필두로 본채 수녀원 흙벽돌 쌓기 작업을 시작했다. 각기 다른 구조 공법상의 3채 건물이 따로 또 같이 하나의 큰 그림으로 윤곽을 드러내자, 내 마음속에도 따듯한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겨울의 끝자락 황량했던 강원도의 4월은 어느덧 5월의 초여름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일은 하다 보면 느는 것이 당연지사다. 이제 각 공정별 협력 업체들은 공법과 자재 사양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역량을 갖추기 시작했다. 기초 노출 콘크리트 면을 고려하여 흙벽돌 쌓기를 진행했다. 인제 현장부터는 전돌(검정색 적벽돌)을 사용하여 토방 형태로 마감했다. 수녀원 본채 토방은 별도의 막돌 쌓기로 토속성과 안정감을 주되, 노출 콘크리트 면에 붙여서 전돌을 쌓기로 했다. 이는 간이 주추와 흙벽체의 방수턱 높이(전돌 2장 높이)를 정확히 계산하여 줄눈을 맞춰야 하는 감각적 판단이 필요하다. 미리 이렇게 쌓으라고 표시했는데 협의해 보니 더 좋은 방법들이 나왔다. 머릿속의 생각을 실전에 적용하려면 역시 전문가들이 한 수 위인 것이다. 반대로 기존 방식보다 더 쉬운 일인데도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면 어렵게 생각하는 것이 또한 전문가들이다. 자신들이 해본 영역에선 전문가지만, 새로운 상황에 처하면 겁을 먹는 것도 또한 전문가란 생각에 웃음이 나올 때도 있다.

손님의 집 유형을 우리는 경량 목구조 흙집이라고 불렀다. 한옥 목구조 흙집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손님의 집 뼈대공사를 보고는 조적팀은 난감해했다. 샛기둥 사이에 폭 20센티미터인 작은 흙벽돌을 쌓으라고 하자, 칸칸이 벽돌을 쌓아야 하므로 품이 더 든다고 난리가 났다. 내가 볼 때는 외벽의 샛기둥 사이에 판재를 대고 면을 맞추어 쌓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내벽과 외벽에 모두 황토 미장을 할 것이기에 틈만 없게 튼튼히 쌓으면 됐다. 한참 큰 소리가 오가고 나서야 막상 해보니 별일이 아니었다.

거실 천장만큼은 한옥 목구조 방식의 오량 천장은 아니더라도 경사 천장 형태로 마감했으면 좋으련만, 정해진 건축비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다. 창호 틀을 끼우고 내장공사를 마친 후 내·외벽의 황토 미장을 시작했다. 집 전체 느낌을 결정하는 순간이다. 언덕배기 위에 올라서서 순간순간을 지켜보았다. 해 놓고 보면 별거 아닌 일이겠지만, 새로운 시도의 결과를 기다리는 그 순간만큼 가슴 벅찬 순간이 있을까.

의도한 바대로 옛 살림집의 소박한 민가 모습을 한 흙집이 내 눈에 들어왔다. 비록 띳장 형태이긴 하지만 기둥과 하방·중방·상방을 갖춘 흙집이 경량 목구조 방식이라는 서구식 뼈대 방식을 원형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서구 목조주택의 한국화, 서구식 유형의 집을 짓더라도 건강주택인 흙집이면서 한국의 민가를 닮은 표정을 만들어 내는 일. 이제부터 시작이야…….’ 벅찬 발걸음으로 집 앞에 섰을 때 언제 오셨는지 책임자 수녀님이 환한 표정으로 다가오셨다.

“좋아요. 이 집은 이 집대로 아주 좋아요. 처음 뼈대만 세워 놓았을 때는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는데 황토 미장까지 하고 보니… 아, 이렇게 마감을 하려고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나는 흡족한데, 한옥 목구조 방식에 익숙한 협력업체 시공팀들은 한옥 목구조 방식의 팔작지붕인 한옥형 흙집이 났다고 한마디씩 한다. 한옥은 한옥다워야지 좀 이상하다고. 하지만 익숙한 것들의 고정 관념을 깨고 나갈 때 비로소 창조적 행위는 빛을 발할 것이다. 개인의 정서, 건축비를 포함하여 다양한 형태의 현대 흙집들이 각각의 색깔로 완성되어질 때 현대 흙집의 대중화는 앞당겨질 것이다.


눈물 콧물 섞어 불을 지피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이다. 집 한 채를 지을 때 우리는 주변의 수많은 사람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작게는 집을 짓는 공정 하나 하나에도 이런 자재를 쓰면 좋겠다. 저렇게 시공하면 좋겠다… 말이 많은 법이다. 같은 일을 함께 하는 일꾼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다. 문제는 그 많은 사공의 말들 중에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하고, 내린 결정은 현장 책임자가 지는 것이 마땅하다. 구들을 놓는 일이 특히 그랬다. 구들 놓는 원리는 이곳 저곳에서 학습할 수 있지만, 실전에서 불 잘 들이고 따듯한 구들방을 만드는 일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재래 방식으로 구들을 놓았다는 시공자들 여럿에게 구들을 맡겼지만 아궁이와 굴뚝의 위치에 따라, 고래를 놓는 방식에 따라 차이가 났다. 불 잘 들이고 따듯하면 다행인 것이고, 불을 들이고 효용이 없으면 애물단지로 변하는 일도 있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구들방은 작은 것이 관례다. 구조 방식에 따른 이유도 있겠지만, 열 효율을 감안하면 작으면 작을수록 효과가 높은 이치다. 옛 살림집에서 보면 방이 두 칸이나 그 이상일 경우 아궁이 수를 늘리는 방식을 채택하곤 했다.
수녀원의 구들방은 방의 규모가 큰 공동 방에 설치키로 했기에, 특히 신경이 쓰였다. 또한 아궁이와 굴뚝의 위치가 앞뒤로 나 있으면 연기가 쑥 빠져나가니 불이 잘 들이는데 ‘ㄱ’자 형태인데다 굴뚝도 처마 밖으로 빼야 한다. 여간 긴장되는 일이 아니었다.

작년에 구들을 전문으로 놓는 선생님을 모셔다 그 원리와 방식을 체득한 터라 재래 공법과 응용 공법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새롭게 마련했다. 다양한 형태의 구들 놓는 법을 보조로 참여하면서 익혀오기도 했거니와 현대 구들 방식의 정형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직접 구들을 놓기로 했다. 아궁이는 낮게, 아궁이 안쪽 장작 지피는 곳은 넓게, 굴뚝의 위치는 아궁이 보다 적어도 1자(30㎝) 이상의 위치에 좁고 길게… 원리를 되뇌며 고래둑을 만들었다. 고래는 재래 방식의 터진 고래(일자형)나 흩어진 고래(부채살 형) 방식이 아니라, 방 전체의 열효율을 높이도록 방 벽 테두리로 폭 20센티미터 정도 되는 연기 길목을 깊은 고래로 만들었다. 방 가운데는 치장 벽돌로 약 30센티미터 정도 높이로 흙 다짐 후 콩자갈을 깔았다.

보통 구들은 판돌을 놓아 만드는 법인데, 아궁이 쪽 불이 직접 닿는 면만 판돌을 이중으로 덮고 나머지 공간은 흙벽돌로 바닥을 만드는 방식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흙벽돌의 폭을 30센티미터 정도로 계산하여 치장 벽돌 두 장 높이로 고임을 했다. 습기로 인한 흙벽돌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치장벽돌 고래받침에 슬레이트를 깔았다. 슬레이트 골에 황토로 수평을 잡은 후 높이 14센티미터 정도 되는 흙벽돌을 바닥에 깔았다. 벽과 흙벽돌 사이는 황토와 시멘트를 섞은 모르타르로 채워 고정했다. ‘쿵쾅쿵쾅’ 뛰어도 이상이 없었다.

흙벽돌 구들 위에 일반 난방 배관을 한 후 황토 미장으로 방바닥을 마감했다. 보통 판돌을 놓는 구들방은 열전도가 빨라 스테인리스 배관으로 연결하지만 흙벽돌은 열전도가 급속하지 않다는 점과 두께마저 충분하여 엑셀 난방으로도 충분하다는 판단을 했다. 처음 구들을 놓고 피어 보는 불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하지만 한참 잘 들어가던 불길이 연기를 토해 낼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잘난 체 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건 아닌가 불안이 엄습했다. 방바닥 미장까지 마감한 후 시간만 있으면 불을 지폈다. 고래가 잘못되었나, 굴뚝이 조금 낮은가, 왜 연기가 계속 낼까 고민하면서 반나절을 눈물 콧물 썩어 불을 지피고 난 후에야 굴뚝의 연기가 하늘 높이 피어올랐다. 다행히 방은 골고루 따듯했다. 새로운 방식은 한 번 불을 지피면 적어도 이틀은 따듯하다는 말이 헛말은 아닌 듯싶었다.

주변에선 강제 환풍구를 달자고 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처음에 강제로 환풍기를 돌리면 연기가 잘 빠져 그 다음엔 자연스럽게 불이 드는 원리인 것이다. 하지만 화기로 인해 환풍기의 수명은 고작 2년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면피가 되겠지만 영구적이지 못하다는 아쉬움이 늘 있어 왔다. 하지만 바람의 방향이 일정치 않은데다 뒷산을 고려하여 삼면만 굴뚝 구멍을 뚫었던 터라 현대 벽난로 굴뚝에서 사용하는 역풍 방지기를 설치하면 보완이 될 듯싶었다. 굴뚝 위를 털어 내고 역풍 방지기를 설치한 후로도 구들방은 여전히 마음에 걸쩍지근하게 남는 숙제였다.
수녀님들이 입주하고 한참이 지난 후 연기 때문에 고생했다는 말을 뒤로 작정하고 반나절 불을 지폈더니 이제 아주 불이 잘 들인다고 한다. ‘아이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감자 꽃 필 무렵이면

아침 7시 30분부터 저녁 6시경까지 그 긴 하루가 너무 짧았다. 새로운 팀들이 들어오면 작업 과정을 지시하고, 수시로 점검하는 일은 필수이다. 하지만 진행되는 작업에 일일이 관여하지는 않는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무엇이 문제인지, 바로 눈에 띄게 마련이다. 그 나머지 시간은 잡부다. 공정별 팀들이 어질러 놓은 주변을 청소하고, 다음 공정을 위한 자재 준비에다, 딱히 누구에게 시키기도 어려운 일들을 주섬주섬 하고 나면 벌써 저녁이 된다. 일을 하면서 전체 공정을 장악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다. 늘 함께 일을 하기 때문에 공정별 팀과도 동질성을 얻는 이중 효과도 작용하기 마련이다.

책임자 수녀님이 그러했다. 4월이 가고 5월 초에 수녀원 터 앞의 밭에는 감자와 고추가 심겨졌고, 산자락 땅에는 오가피나무가 심겨졌다. 콩과 배추에 옥수수까지… 현장 일꾼들이 도착하기도 전 새벽녘에 현장을 한 바퀴 돌아보곤 밭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내가 도착하면 천천히 다가와서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게 가능한가 묻는데 전체 마감을 꿰뚫은 듯했다.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고, 또 필요한 것들에 대한 세부적인 요구들이 이어졌다. 주문에 걸린 듯 ‘예, 그렇게 하지요’ 하면, 밭으로 향하면서 말의 끝은 항상 ‘고맙습니다’였다. 직접 관여하지 않으면서도 훤히 꿰뚫고 있는, 주변의 밭에서 늘 노동으로 함께 하는 그 모습이 나의 현장 운영 방식과 너무도 닮았다. 언제부턴가 내 입에서도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베어 나왔다.

6월 말 수녀님들이 입주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하루하루는 시간과의 싸움일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도왔다. 장마가 시작됐음에도 현장의 하늘은 쾌청했다. 외부에서는 경사면 돌쌓기와 토방공사, 울타리공사, 주변 정리공사가 한창이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수녀원의 특성상 외부 덧창공사가 추가됐고, 수녀님들 각 실에 들어갈 책상이며, 책꽂이, 문갑공사가 뒤를 이었다.
그래도 끝은 나게 마련인가 보다. 건축 준공 후 하우스 창고공사와 미진한 부분들을 조금 남기고 일차 철수를 시작했다. 본격 장마가 시작된다는 일기 예보를 들으며 이사 예정일보다 3일을 앞당겨 드디어 2005년 6월 26일 이삿짐이 들어온 것이다. 만 3개월… 감회가 새로웠다. 잡 자재며, 쓰레기들을 한데 모아 트럭 가득 싣고 철수를 준비하는데 ‘투-둑 투-둑’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진다. 만감이 교차했다.
진부에 머물면서도 인제 현장을 무사히 마무리했고, 양평 현장이 또한 진행 중이었다. 한 순간 한 순간 얼마나 많은 날들이 가슴 조이는 순간이었던가. 눈을 들어 앞을 보니 그 새 감자 꽃이 절정이다.

“사장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고맙습니다. 쓰레기만 싣고 가게 해서 어떡하나…….”

수녀님 말씀에 백색으로 피어난 감자 꽃이 겹쳐진다. 아마도 감자 꽃이 피는 6월이면 수녀님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화려한 색깔로 치장하지 않은 감자 꽃은 실한 감자를 영글게 하는 ‘백색의 영혼’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리고 이야기 할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이루어 낸 진부 마평리 수녀원은 내 생에 최고의 집이었음을…….田


이동일 <(주)행인흙건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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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집 이야기] 내 생에 최고의 집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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