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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 비 오는 궂은 날씨에
풀을 베어야 할지 토마토를 따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우리 마을 이장인 민재아빠가 전화를 했습니다.

"형! 오늘 농활 학생들 안 받을래요?"
"웬 농활?"
"아 참! 어제 형은 이야기할 때 밖에 나가 있었구나.
강대 학생들 공부방에 교육봉사활동 나왔거든요.
그런데 학생이 많아 일부는 농활 나가기로 했는데 비가 와서 갈 데가 마땅찮네요."
"몇 명이나?"
"서른여덟 명 왔는데 몇 명이나 받을 수 있어요?"
"글쎄… 다섯 명 쯤."
"예, 고탄 마을회관으로 데리러 오세요."
"그려."

지역에 농활하려고 대학생들이 오면 으레 나이 드신 분들 도와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저는 생각도 안하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밖에 일을 못할 정도로 비가 내리니 들깨 심고 콩 심는 것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봉사활동 나와서 일 안하고 놀고 있는 것도 답답할 노릇이라 생각하고 하우스 일이나 조금 시켜 볼 생각으로 데려왔지요.
처음 예상과 달리 무려 아홉 명이나.
그만큼 비를 피해 일할 수 있는 곳이 없기도 합니다.

여학생 넷, 남학생 다섯.
예민한 일은 시키기 어려울 듯하고
풀이나 뽑고 혹시 고추는 딸 수 있으려나…….
데리러 가니 학생들은 대부분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 차림.
거기에 깨끗한 하얀 운동화를 신고,
운동화에 흙 묻는다고 비닐봉지로 신발을 감싼 학생까지.
머리가 아팠습니다.
일을 시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
속으로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라는 말이 맴돌았습니다.

우선 송암리 하우스에 네 명.
남학생 둘은 풀 뽑기 시키고
여학생 둘은 고추 따라고 하고.

새낭골엔 다섯 명
남학생 셋은 역시 풀 뽑기.
여학생 둘은 감자 고르기.

고추 따는 법부터 감자 고르는 방식, 풀 뽑는 위치까지 알려주고
상자며 바구니 챙겨주고 한 바퀴 다 돌고 나니 오전이 다 갔습니다.

하지만 오전 일을 마치고 점검을 해보니
의외로 꾀부리지 않고 성심껏 일을 했습니다.
요즘 농활 온 학생들은 쉽게 지치고
조금만 힘들어도 일하기 싫은 표정을 얼굴에 붙이고 다녔는데
참으로 의외였습니다.

감자 고르는 여학생은 평창에서 감자 농사를 짓는 집이라 그런지
손도 빠르고 감자 상자를 척척 옮겨서 쌓아가며
내가 밤마다 졸린 눈으로 겨우 열 상자 고르던 것을
둘이서 스무 상자를 골라서 쌓았습니다.
고추 하나 따려고 이리저리 꼼지락거려
오늘 한 줄이나 다 따려나 했던 여학생들은
오전 참에 고추 따는 것 감을 잡았다고 둘이서 한 동을 다 땄지요.
송암리고 새낭골이고 하우스 가장자리마다 길게 자란 풀들은
남학생 다섯이서 다 뽑아놓았습니다.
내 혼자 꼬박 이틀은 해야 할 일을 아홉 명이 오전 참에 끝냈습니다.
이제 막 고등학생티를 벗은 1학년 생들이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중심을 잡아주는 나이 많은 복학생이 있어서 그런지
참 예쁘게도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점심에 막국수와 소주 한 잔을 쐈습니다.
어차피 그 많은 인원 밥해 줄 상황도 안 되었으니까요.
오후에 고추 줄 매는 일과 토마토 따는 일까지
대충 계산만으로도 내 사흘치 일거리를 줄여주었지요.
제일 바쁠 때 떼로 몰려와 한숨을 돌릴 수 있게 해준 게 여간 고맙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학생들에게는 힘들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대부분 한 번도 안해 본 일들을 했던 것이라 서툴고 어려웠겠지요.

어제 학생들과 만나는 내내
저도 20년도 더 거슬러 올라간 날의 기분으로 살았습니다.
20여 년 전에 농촌활동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시절엔 언제나 긴장 속에서
낮에는 일로, 밤에는 그날에 대한 평가로
몸이 녹초가 될 때까지 농촌활동을 했습니다.
새참이나 점심은 절대 농가에서 먹지 않는다는 원칙부터
온갖 것을 규율과 원칙으로 날을 세우던 농활이었습니다.

20년도 더 지난 지금
대학시절에서 가장 또렷하게 남는 기억 중에 하나는 바로 그 농활입니다.
그만큼 힘들었고 강렬했나 봅니다.
어제 일한 그 학생들에게도 힘들었던 시간들이 그렇게 오래도록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장은 힘들지라도 힘든 만큼 오래오래 소중히 간직될 추억으로 남으리라 믿습니다.
어렵고 힘든 것들이 모여져 만들어지는 게 추억인가 봅니다.田


김태수

강원도 춘천 새낭골에 거주하는 김태수 님은 귀농 7년 차 농부입니다. 춘천에서 감자 고추 토마토 등을 친환경으로 재배하고 있으며 얼마전 《연봉 5천이 부럽지 않은 귀농》이란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016-242-6128 www.se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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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띄운 편지-아홉 번째 이야기] 힘들어야 추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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