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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집 뒤 참깨밭에서 풀이랑 씨름을 했습니다.
말이 참깨밭이지 참깨씨를 두 번씩이나 넣었지만 미처 발아되어 올라오기도 전에 참깨를 덮어준 흙을 꼭꼭 다져주는 비 때문에 참깨는 거의 전멸이 된, 말 그대로 풀밭이었습니다.
비닐 피복은 되어 있고 작물은 없고 풀만 크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올해는 농사 선수들도 참깨 발아율이 낮아 고생들입니다.
아버지는 세 번째 씨를 넣은 곳도 있지요.
꼭대기 집 할머니의 참깨밭도 듬성듬성하고 허술하기만 합니다.
대신 송암리 하우스에 심은 참깨가 벌써 꽃을 피운다는 것이 그나마 제게 위안이라면 위안입니다.

토마토가 익기 시작하면, 감자를 캐기 시작하면 매일 따고 포장하고 선별하고 어쩌고 하다 보면 도통 다른 농사엔 손길이 갈 짬도 정신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 늦기 전 참깨밭을 어찌해 보려고 올라가서 열심히 풀을 뽑았습니다.

농사의 백미는 더운 여름날 풀이 우거진 고랑에 들어앉아 혼자서 풀 뽑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둘이 혹은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제초하는 것도 재미는 있지만 사각거리는 호미질 소리 이외에 어떤 잡음도 없이, 아무런 긴장감도 없이 오직 작물과 잡풀만 구분하면 되고 잡념도 내려놓고 몸을 움직이는 제초작업은 명상의 시간이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풀 뽑기에 집중해 있는데 갑자기 아롱이가 짖기 시작했습니다.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짖어대는 아롱이인지라 누가 왔는가 하고 집을 내려다봤지만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습니다.
'이상타' 하고는 다시 풀을 뽑았고 아롱이는 집을 향해 계속 짖었지요.

그런데 점심도 가까워가고 약속도 있어 집에 내려오니 우리 집 현관 옆 그늘에 있는 탁자에는 처음 보는 아주머니 두 분이 앉아 있었습니다.
탁자 위에는 점심상까지 차려져 있었고 두 분은 반주까지 곁들여 밥을 드시고 있었습니다.
주인 없는 빈집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상까지 차려놓은 아주머니들의 행동에 좀 당황했지요.
오디를 따러 오셨답니다.
지나다가 그늘도 있고 쉬기가 편할 듯해서 들어왔노라고… ….

숫기가 없다고 해야 하나요.
저 같으면 주인 없는 낯선 집에 들어가 자리 잡고 앉아 밥 먹을 생각은 하지 못했을 듯합니다.
처음에 잠시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거리낌 없이 들어올 용기를 가진 분들이 오히려 편해졌습니다.
어찌 보면 기분도 나쁘고 예의가 없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제겐 그런 아주머니들의 파격(?)이 정겹게 느껴졌습니다.
그래, 풋고추 몇 개 가져다 드리니 찍어 먹을 장도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져온 포도주 한 잔을 주셨지요.
시골인심이 좋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가슴이 덜컹했습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은데… ….
자칫 그리 생각하셨다가 낭패라도 당할 수 있는데… ….
아주머니들이 생각하시는 '시골인심'과 그래도 지켜야 할 '예의' 사이에서 잠시 혼란이 일었습니다.

사실 요즘 우리 마을은 낯선 이들에 대한 눈초리가 곱지는 않습니다.
마을회관 앞에 있는 대형 쇠 재떨이가 없어지고 모종 온상에 쓰던 강선활대가 다발로 사라지고 심지어 고추 지주대 박을 때 요긴하게 쓰던 연장도 사라져 다시 만들어야 했지요.
쇠붙이란 쇠붙이는 길옆 눈에 띄는 곳에 둘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잘 보관해 둔 연장들도 없어지기 일쑤입니다.
대부분 고물상의 짓이라 수군대지만 증거가 없고 증인이 없으니 어찌해 볼 방법도 없지요.
단지 훔쳐가는 것을 막기 위한 눈초리만 사나워졌습니다.
시골인심은 그렇게 사그라져 갑니다.

오늘.
허락받지 않은 낯선 이들이 내 영역으로 들어왔을 때 당황했던 마음이 좀 부끄러워지기도 했습니다.
시골인심 좋다는 말에 '다 그렇지요'란 대답을 못하는 것이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 * *

오늘 저녁은 막국수를 먹었습니다.
아침에 이장이 방송을 했지요.

'마을 앞 용화산 막국수 집에서 노인 분들을 모시고 저녁식사를 대접한다고 합니다. 많이 참석해 주십시오.'

노인은 아니지만 저도 갔습니다.
문을 닫았던 식당이었는데 새로 사람이 들어와 문을 열었습니다.
마을 노인 분들께 저녁 한 끼 대접한다는 게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이웃에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려는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시골인심, 어디나 다 좋지요!'

그런 말을 거침없이 할 날이 다시 왔으면 좋겠습니다.田


김태수

강원도 춘천 새낭골에 거주하는 김태수 님은 귀농 6년 차 농부입니다. 춘천에서 감자 고추 토마토 등을 친환경으로 재배하고 있으며 얼마전 《연봉 5천이 부럽지 않은 귀농》이란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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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띄운 편지-여덟 번째 이야기] 시골인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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