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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도 풀리고 땅도 조금씩 녹고 드디어 농사일을 준비하는 시기가 되었나 봅니다.
본격적인 농사 준비에 앞서 지난해 마무리 못한 밭 정리며 하우스 개보수 등 땅이 다 풀리기 전에 할 일들이 점점 밀려들고 있습니다.
한동안 쉬었다고 몸도 늘어져 조금만 일해도 쉽게 지치니 살금살금 쉬엄쉬엄 일을 하지요.
하지만 농사일이 천천히 한다고 쉽기만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단지 급하게 시간을 맞춰서 일을 해야 하는 긴박성과 절박감이 없으니 마음에 여유가 있는 것이지요.

며칠 전에는 집 앞에 쌓아두었던 하우스 파이프나 옮기고 하우스 고치는 일이나 슬슬 하자고 일을 시작했는데, 그놈에 '슬슬'이 사람을 잡습니다.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지만 일자로 된 긴 파이프도 아니고 굽혀서 휜 파이프는 혼자 들기도 어렵고 차에 싣기도 참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누가 파이프 묶은 밧줄이라도 반대편에서 잡아주면 쉬우련만 트럭 짐칸에 올라앉아 가만히 있지도 못하고 길이와 무게중심 때문에 계속 미끄러지고 떨어지기만 하는 파이프를 혼자서 묶어 나르는 일에 진땀 꽤나 흘렸습니다.

또 파이프를 옮기고 나서도 필요한 각도에 맞게 새로 파이프를 구부리는 것은 혼자서 하기엔 더 어렵습니다.
어찌어찌 샘플로 하나를 굽히고 나서는 갈등을 했지요.
'계속 혼자서 할 것인가 아니면 도움을 청할 것인가?'
핸드폰을 꺼내서 번호를 누르다가 끄고 누르다가 끄고.
큰 부담 없이 도움을 요청할만한 곳이 몇 곳은 됩니다.
하지만 선뜻 전화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주저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버릇이 될까봐서입니다.
도움을 청할 곳이 몇 곳은 된다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도움을 청할 곳은 줄어만 갈 것입니다.
결국 혼자서 일하는 요령을 터득하지 못하면 농사짓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될 것입니다.
또한 도움요청을 받은 사람도 부르면이야 오기는 하겠지만 그도 자기의 일정과 계획을 바꿔야 하는 것이라 내가 힘들다고 남을 힘들게 하는 것이 마음 내키지 않았습니다.
내가 힘든 정도인가 아니면 혼자 불가능한 것인가를 따져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습니다.
남을 잘 부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내가 볼 때는 혼자서 해도 되는 일인데도 꼭 다른 사람을 부르고 정작 다른 사람이 도와주면 자기는 뒷짐 지고 딴 짓하고.
자기 시간이 소중한 만큼 남에 시간도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되풀이 되는 그런 모습을 보니 거의 성격이었고 버릇이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나서는 그 사람이 필요해서 불러도 다른 핑계를 대고 안 가게 됩니다.
반면교사라 하나요. 나는 그러지 말자고 결심을 했지요.
농사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는 일이 많습니다.
초보라 요령부득이고 모르는 것이 태반이니 툭하면 남에게 손을 내밀게 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보니 내가 혼자서 할 일도 남에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도움 받을 때의 원칙을 정했습니다.

1. 혼자 하는 데까지 해본다.
혼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판단이 서야 남에 도움을 요청한다.
2.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판단이 되면 구체적으로 도움 받을 내용을 정리한다.
3. 남에 도움을 받을 때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최대한 사전에 준비해 놓는다.
4. 남에 도움을 받으면 품을 갚을 것도 생각해 두고 도움을 요청한다.

어떤 일이든 가능하면 스스로 해결한다는 원칙을 정해놓으니 시간과 효율성이란 면에서는 좀 떨어져도 막상 혼자서 못할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또한 농사일의 요령도 빨리 터득하고, 요령을 터득하는 것만큼 효율성도 좋아졌습니다.
성취감이라고 해야 하나요.
어려운 일을 스스로 해결해 가면서 혼자 일하기의 즐거움도 알게 되었지요.

하지만 혼자 일하기 방식이 몸에 배는 것도 문제는 있습니다.
준비되지 않았는데 누가 도와주면 일이 몹시 불편해 집니다.
혼자 일하며 일의 속도나 일의 양을 조절하는데 옆에 누가 있으면 조절을 못하고 혼란스러워지는 것이지요.
더 중요한 문제는 나도 남에게 도움을 주는데 주저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혹은 남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걸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홀로서기란 이래저래 어렵습니다.
홀로선다는 것이 세상과 관계를 단절시키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田


김태수

강원도 춘천 새낭골에 거주하는 김태수 님은 귀농 6년차 농부입니다. 춘천에서 감자 고추 토마토 등을 친환경으로 재배하고 있으며 얼마전 《연봉 5천이 부럽지 않은 귀농》이란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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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띄운 편지-네 번째 이야기] 홀로서기-혼자 일하는 어려움, 혼자 일하는 즐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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